구하지 않으니 번뇌가 없어요
/ 철산 스님
구하지 않으니 번뇌가 없어요.
얻으려고 하니까 괴로움이 생겨요
비온 뒤 신록이 더욱 싱그럽다.
30대 초반의 나이라고나 할까. 맑고 투명하다 못해 가슴시리기까지한
이즈음 싱싱생생 만물이 생동하는 소리를 들으며 부안 내소사를 찾았다.
내소사는 일주문에 들어서면 천왕문까지 이어지는 긴 전나무숲,
국내 제일이라고 하는 후불벽화로 그려진 백의관세음보살상,
연꽃과 수련으로 장식된 대웅전의 꽃문살 등 가람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절이다.
그러나 전국 어느 절보다 수행가풍이 살아있고,
사형 사제지간의 우애가 돈독하기로 유명한 절이기도 하다.
내소사는 선교(禪敎)에 두루 조예가 깊은 걸출한 선지식이요,
호남의 대도인으로 추앙받아온 해안 스님(海眼,1901년~1974년)이 주석하시며
선풍을 드날리셨던 곳이다. 이후 스님의 맏상좌 혜산(慧山) 스님이
30년간 가람을 일신하며 청정 수행가풍을 이어왔고, 더욱이 선원장이신
철산(鐵山) 스님과 15년 이상 구참스님들 여섯분이 함께 입실해 계시니
선방에서 배어나온 청풍이 초여름의 신록을 더욱 싱그럽게 한다.
석달간의 여름안거가 시작되면 선방의 문은 굳게 닫히기 마련이지만
오늘은 지난 해 6월 입적하신 혜산 스님의 추모법회가 있는 날인지라
선원장 스님을 잠시나마 뵐 수 있었다.
"스님! 스님을 알고 계신 여러분들의 한결같은 말씀이
참 겸손하고 편안한 스님이라고들 말씀하십니다."
아, 어디서 헛소문을 듣고 오셨군요. 글쎄요.
무엇이든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심(下心)한다는 생각은 늘 하고 삽니다.
굳이 누구에게 이기려고 하는 마음을 내지 않아요.
마음을 그렇게 정하고 살다보니 그렇게들 비쳐지는가 봅니다."
오늘 혜산 스님의 열반 1주기 추모법회도 있었습니다만
내소사의 가풍은 출세간을 막론하고 부러움을 살 뿐만 아니라
칭송이 자자합니다.
은사이신 해안 스님께서 1932년 이곳 내소사에 오시면서
서래선림을 개원하시어 호남선풍을 진작시키셨다고 한다면,
사형이신 혜산 스님은 그 수행가풍을 이어가며 오늘의 대가람을 일구셨어요.
은사스님과 부모형제 못지 않게 따뜻하고 인자하신 분이 저희 사형님이셨지요.
생각할수록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오시는 분이셨어요. 스승을 능가해야
법을 전할 자격이 되는데 사형님이 안 계시니 그 책임이 더욱 무겁습니다.
내소사 하면 해안 큰스님이 떠오르고
전등회(1968년 봄 혜안 스님 창립)와 7일간의 용맹정진이 떠오릅니다.
그래요. 스님께서는
1년에 네 차례 7일간의 용맹정진을 특별히 강조하셨지요.
은사스님께서 사생결단하는 마음으로 7일간의 정진 끝에 득도하셨기에
그 가풍이 생긴 것이지요. 스무 살이 채 안 된 약관의 나이였어요.
문헌에 봐도 7일이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한번 의심이 일면 염념상속 7일간 그 의심이 끊어지지 않아야해요.
딴 생각이 일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단기간에 죽기를 무릅쓰고 이뤄내는 것이지
장기간계획을 짜서 얻는 것이 아니라며 납자들의 용맹정진을 재촉하셨습니다.
이러한 소신은 자신이 1주일동안 무섭게 정진한 끝에 이뤄낸
견성체험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7일간이나 의심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일텐데요.
그래서 선지식의 역할이 중요하지요.
딴 생각이 일지 못하도록 분심을 내게 하는 것이 조실의 역할입니다.
사람들의 근기가 다 다르기에 은사스님께서는
한 가지 수행법만 고집하지 않았어요. 모인 대중들을 살피시어 관음주력,
경전강의, 때로는 기도로, 법문으로 대중들을 일깨우시고 화두도
여러 가지를 내보이시며 근기가 다르니 각자 선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수십 명이나 되는 제자들을
아침마다 하나씩 불러 그간의 공부를 점검합니다.
각각의 제자들을 눈여겨보면서 어떤 종류의 망상에 빠져 있는지
일일이 파악하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배려죠.
은사 스님은 평소엔 자비로운 분이셨지만
제자들의 탁마 앞에선 호랑이로 둔갑하셨습니다. 어설픈 알음알이로
대답했다간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한 불호령이 떨어지기 일쑤였지요.
깨달음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깨달음이란 자기 본성을 본다는 것입니다.
일념으로 돌아가다보면 망심을 저절로 사라지고 청정본심만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견성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면 안 돼요.
깨달음(道)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예요. 이것이다 하는 답이 없는 것입니다.
최근 많은 큰스님들이 열반하셔서 그러한지
근래에는 선지식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저희가 한칭 공부하던 60, 70년대만 하더라도 책이 참 귀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책이 넘쳐나요. 공부하러 들어온 수좌들을 보면
많은 책을 보고 이미 나름대로의 집을 짓고 있어요.
그 집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어요.
아무리 공부길을 제대로 알려주어도 나름대로의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선지식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해요.
공부가 익어갈 때까지는 화두를 주신 분을 따라야 합니다.
선지식이 인정을 해줄 때까지 일사천리로 공부를 해가야지요.
자기 스스로 공부를 지어갈 수 있을 때 책을 보고
선지식들을 두루 탐방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리하면 스스로에게 속게 되어 있습니다. 멀리서 찾게 되어 있어요.
공부하는 수좌는 말이 없어야 하고 망상이 많지 않아야 해요.
공부 길에는 아무래도 선지식(스승)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한 것같습니다.
스승의 역할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하루에 두세 차례씩은 정로(正路)에
들어섰는지 딴 길로 들어서고 있는지 점검을 해주어야 해요.
의심이 일지 않으면 의심을 일도록 해주어야지요. 시시때때로
화두를 점검하고 채찍질과 담금질로 의심을 돈발시켜 하면 할수록
공부의 재미를 맛볼 수 있도록 도와야지요. 답을 일러주기를 바라지만
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은 답은 주는 사람이 아니에요.
요즈음 우리 불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도
불교수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수행법이 있지만
참선수행은 특히 어렵다고들 합니다.
둥둥 떠다니는 마음을 한 군데 꾹 눌러놓는 것,
묶어놓는 것이 참선수행의 시작입니다.
좌선수행만이 참선수행이 아니에요.
일상생활 어묵동정 중에도 가능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머슴이 밭에서 일하면서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에게 한번도 의심을 해보지 않은 채
대상만 보고 살아요.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안으로 돌려야 해요.
자신에 대한 의심을 간절히 하다보면 마음이 떠다니지 않게돼요.
이렇게 걸어다니면서도 마음만 잘 챙기면 되는 것입니다.
늘 깨어있어야지요. 진실한 것은 말이 아니라 몸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道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道다 하는 것이 달리 없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 맞게 잘 사는 사람이 道人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도인 줄 모르고 살고 있어요.
구하지 않으니 번뇌가 없어요. 얻으려니까 괴로움이 생겨요.
‘다른 무엇이 있겠지….’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자꾸
道를 멀리서 찾아요. 평범하게 있는 그대로가 진리입니다.
주어진 대로 열심히 살면 그대로 진리의 삶입니다.
▒ 철산 스님 ▒
어렸을 적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가 화두였던
철산 스님은 지혜로써 세상을 이롭게 하고 싶었다.
1968년 서울 개운사 옆 내원암에서 있었던 7일간의
전등회 용맹정진시 해안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관음주력 15만념 후 ‘이뭣고’ 화두를 받은 것이
인연이 되어 참선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970년 해스님 문하에 출가하여 공부길에 확실히 들어섰다.
이후 전국의 제방선원에서 수행정진하였으며,
병석 중이었던 사형 혜산 스님의 간곡한 부탁에 의해
내소사 주지 소임(1991년~1995년)을 맡았으며,
2000년 부터 내소사 선원(봉래선원)장으로 주석,
은사이신 해안 스님의 가풍을 이어 선풍을 진작시키고 계시다.
- 철산 스님 -
- 曲 / 힐링음악 - Heart of Dawn
『가장행복한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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