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essay|백우인
"거기에(Da) 산이 있다"
니진스키의 몸짓만큼 단정한 그림이 있다.
정확하게, 꼭 그만큼만 움직이는 손짓과 눈짓, 발동작, 이집트 벽화에 그려진 인물 그림이 막 튀어나올 듯한 몽상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그림. 유영국의 산을 눈으로 만지고 냄새 맡는 동안 귀는 그의 그림에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듣는다. 유영국의 색채의 비율과 조합은 니진스키의 몸짓과 매우 흡사하게 정확하고 조화롭다. 단정한 것들은 감탄을 넘어 황홀함에 취해 추앙하고 겸손하게 하는 힘이 있다. 트리플 공중회전을 한 후에 흔들림 없이 정확하게 착지하는 김연아 선수의 몸짓에 우리는 얼마나 열광하며 환호했는지를 떠올려 보자. 분명하고 딱 맞는 그 몸짓의 단정함이 주는 완결성에 우리는 하염없이 그녀를 추앙했다. 저 대단한 몸짓은 일만 시간을 묵묵히 채우는 동안 반복적으로 기초를 다지고, 다져놓은 기초 위에 견고한 탑을 쌓아올리듯이 새롭고 다채로운 동작을 차곡차곡 몸에 익혀 몸틀을 형성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유영국의 붓질은 일만 시간을 통과하고서 나온 바로 그 단정함일 것이다.
유영국의 붓질은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멜랑콜리조차도 물의 장막으로 엉켜 있지 않고 정오의 강렬한 햇빛에 튕겨 오르는 물방울같이 명료하고 심지어 탱글거린다. 모호하지 않고 분명한 형체, 그러나 그 형체 안에서 대상이 살아 움직이면서 리듬을 탄다. 그의 산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기’와 ‘운’과 ‘동’이 함께 역동적인 꿈틀거림을 선사한다. 미풍같이, 때로는 그늘로, 때로는 무성한 잎사귀의 흔들림, 나무 잎사귀가 반사하는 햇살과 내뿜는 산소, 그리고 향기. 그의 산은 아득히 멀어져가면서 서서히 다가온다. 손을 내밀어 만져볼라치면 다시금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새 얼굴로 우리를 잡아 이끈다. 산의 아우라란 이러한 것임을 침묵의 무게로 느끼게 한다.
그의 산에서 선은 면을 위해 존재한다. 색은 면을 채우며 면 안에서 저마다의 오방색이 역사를 증언한다. 가벼운 것들의 솟아오름과 그 명랑한 자유, 그러면서도 불온한 것들에 대한 저항, 빼앗긴 몫을 찾고자 봉기하는 함성이 켜켜이 능선마다 봉우리마다 무겁게 내려앉았다.
유영국의 작품 세계를 아우르는 주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거기에 산이 있다"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간성과 장소성은 "거기에"에 있다. 산으로 규정되기 이전, 산을 형성하던 근본 원리인 마그마! 광물이었고, 꽃이었고, 나무였고, 나비였고, 물고기였고, 고양이였고, 집이었던 마그마의 관입과 분출 없이 산이 태어날 순 없다. 산의 기원은 그러므로 땅속에서 몸을 불사르고 있는 불꽃 같은, 홀로 생겨났다가 홀로 타오르고 홀로 스러지는 마그마다. 아니 더 근본으로 내려가면 2억 5천만 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시간 거슬러 기원으로 들어가 보자. 열로, 에너지로, 뜨거움으로 꿈틀거리던 힘 그 자체까지 말이다. ‘거기에’ 있는 산은 본질성을 만나야 한다.
거기에(Da)는 어디인가?
우선 거기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실존의 자리다. 유영국의 '거기에'는 그의 고향 산천이다. 그의 실존시 던져진 곳, 그곳에서 그의 영혼에 새겨진 산의 이미지는 어린 시절 그를 품고 키워준 고향의 산이다. 그런가 하면 그의 ‘거기’에는 유영국, 그의 마음 속이다. 그의 마음속은 산이 태어나는 자리다. 그가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날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날에, 흰 구름 너울 쓴 산봉우리를 본 날에, 아무것도 아니고 싶은 날에, 이념 너머 누군가가 되지 않고 그냥 자유롭게 세상으로 잠입하고 싶은 날에, 그의 열망은 산으로 그려졌을 것이다.
거기에는 수없이 많은 산을 차곡차곡 그리는 시간이 집적된 자리요 기억이 회집된 장소이며, 거기에는 우리들의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모인 자리이다. 그리하여 '거기에'는 보는 이들마다 '거기에'를 찾아 서성이게 하며 두리번거리게 한다. 나의 거기에는 어디인지, 어떤 정조인지, 누구와 그곳에서 어우러지며 춤을 추고 있는지, 당신이 되어가고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묻고 싶다.
'거기에'는 희망이 숨죽이고 있는 곳이다. 도무지 비상할 수 없는, 그러므로 은총의 빛이 쏟아지는 자리, 성스럽게 구별되는 자리. 잃어버린 우리들의 자아가, 잃어버린 기억 더미가 있는 곳, 생의 퇴비가 쌓여 있는 곳이다. 진보와 발전이라는 구호가 울리는 곳, 무엇이든 베어버리고 밀어버리고 맨들맨들하게 깎아놓으면 그곳에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열릴 것 같아 마음에서 욕망이 비집고 나오는 곳이다.
유영국의 거기에와 우리들의 거기에 있는 이 산의 존재는 나와 함께 시간을 경험한 나의 산, 너의 산, 우리로 맺어진 산이다. 그는 산을 마주한 이와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 너는 어땠느냐고 담담하게 물어온다. 또 어느 날에는 빈손인 날이었지만 마음은 세수하고 나온 맑은 얼굴빛이었고, 욕심 사납게 움켜쥔 것을 놓아버리고 나니 한결 가뿐하게 튕겨오르는 기분이었노라고 자신의 지나온 시간을 들려준다. 살아보니 인생의 어둡고 긴 터널도 바늘구멍만 한 빛 한 점이 점점 커지고 넓어지면서 희망의 손짓을 보게 되기도 하더라고 담담하게 들려준다. 그의 그림은 나지막하게 묻는다. 너의 산은 어떠냐고. 혹여 괴롭더라도 웃을 날이 있더라고. 늘 슬프고 어두운 것 같지만 해가 쨍하고 뜨면서 뭉개구름, 깃털구름, 양떼구름 뛰노는 파란 하늘이 곧 펼쳐진다고 들려주는 것 같다. 그의 단정한 그림 앞에 자꾸 서성이게 되는 것은 아마도 그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를 한데 모아 삶의 색을 칠하고 싶은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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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우인|2023년 《에세이 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쉼없이 네가 희망이면 좋겠습니다』, 『너랑 하려고』 에세이집 『비가 내리는 날에는 여우가 되고 싶습니다』, 『우리의 존재 방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