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하던 일을 다시 시작했다. 이직한 직장은 청주에 있는 ‘현석건축사사무소’로 문화재와 일반건축 설계를 병행하는 곳이다. 청주시청 후문에 위치한 사무실에 2/3는 일반건축 팀이 사용하고 나머진 고건축 팀이 사용했다. 구도자의 길을 가겠다며 삼 년을 외도하다 돌아왔으니 아무리 이전에 하던 일이라도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이직 전 소장과의 면담에서 과장이란 직책을 부탁받았다. 말이 과장이지 일을 그만큼 감당하란 소리나 마찬가지다. 소규모 설계사무소에서의 직급은 관리 차원의 직분이 아니라 일의 소화역량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래저래 책임이 무겁게 다가왔다. 소장에겐 구도자의 길을 가다 돌아왔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남들이 퇴근할 때 난 밤늦도록 야근을 하며 그동안 잃어버린 감각을 되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는 사이에 머리카락이 갑자기 하얗게 변했다. 그만큼 힘들었고 그만큼 부담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청주시청 후문 쪽에 세 들어 있던 사무실에서 반대편 골목에 본사 사옥을 지어 이사를 했다. 철골구조로 지은 삼층 건물이다. 일층은 필로티로 주차장 용도로 사용하고 이층은 고건축 팀이 삼층은 일반건축 팀이 둥지를 틀었다. 산뜻한 새 건물로 이사오니 기분도 덩달아 업되고 일할 맛이 났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철계단을 디딜 때마다 쿵쿵하고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릴 들으며 난 이곳에서 아주 오래도록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97년 대한민국은 국가부도 위기를 맞았다. 바로 IMF 외환위기다. 난 복직 후 이 년째다. 아직 정식으로 국가부도를 선언하기 전이었지만 연일 외환보유고 부족과 관련한 긴급뉴스가 보도되고 있었다. 그것과 난 아무런 상관이 없었고 그저 주어진 일에 매일 분주하게 보내고 있었다. 문화재 관련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일 년에 한 번 있는 자격시험에 원서를 내는 게 무슨 연례행사처럼 벌어졌다. 그동안 계통에 머물던 선배들이 하나 둘 자격증을 취득하고 설계사무실을 떠났다. 난 한 번도 시험에 응시해 본 적이 없었다. 선배들이 원서를 갖다 주며 너도 시험에 응시해 보라 해도 난 처다 보지도 않았다. 복직 후 생활은 다시 안정을 되찾고 있었고 가장으로서 나도 뭔가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문화재수리기술자 시험에 도전하기로.. 사실 공부라곤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시험에 합격하긴 어려울 것이고 출제경향이 어떨지 알고 싶어서 시험 삼아 시험을 보기로 했다. 지금은 이 분야 시험응시 자격이 없어졌지만 당시엔 고등학교 졸업생은 해당분야에 5년 대학졸업생은 3년 근무경력이 있어야 시험 자격이 주어지던 때였다.
시험 장소는 경기도 성남시 모 고등학교로 지정되었다. 마침 성남에 처형이 살고 있다. 청주에서 당일 아침에 시험장까지 이동하기는 쉽지 않아서 전날 형님 댁에 하룻밤 묵기로 했다. 오랜만에 처재와 나를 본 형님 내외분은 무척 반가워하며 저녁을 쏘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셨다. 이름난 식당이라며 갈비 집으로 우릴 데려갔다. 고기 종류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형님이 맘먹고 사준다는 데 평상시보다 많이 먹었다. 그게 탈이 났다. 내일 아침 일찍 시험장으로 가야 할 텐데 배탈이 나서 화장실을 들락날락해야 했다. 배탈로 제대로 잠도 못 잤으니 눈은 충혈되고 컨디션은 그야말로 제로다. 그래서 집사람에게 “이번 시험은 안 볼래 내년에 보지 뭐”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아무리 죽을 지경이라도 일단 시험은 보고 오라며 강권적으로 내 등을 떠밀었다. 마지못해 시험장에 도착해 지정된 자릴 확인하였다. 시험 시작까지 약 한 시간 정도 남았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아는 체도 하고 오늘 무슨 시험이 출제될 것인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또 화장실이 급해졌다. 교문 앞에 교회가 보였다. 그날이 주일이어서 아침 일찍부터 주일학교 교사들이 예배당 청소를 하고 있었다. 나는 무작정 계단 참에 붙어 있는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올라가다가 청소를 하고 있는 선생님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냥 불쑥 화장실에 들어가기가 민망해졌다. 그래서 잠시 시험을 앞두고 기도하고 싶어서 왔노라 하고 일단 예배당 의자에 앉았다.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뜨니 때마침 의자 옆에 두루마리 화장지가 보였다. 그걸 대충 둘둘 말아서 주머니에 챙겨 넣고 나왔다.
시험이 시작되었다. 시험을 앞두고 공부한 것이라곤 문화재보호법 한 번 훑어 본 게 전부다. 그러니 답을 제대로 적을 것이라곤 상상도 못 하였다. 그런데 의외로 출제문항마다 내가 다 알고 있는 것이었다. 특히 가장 난이도가 높다는 구조도면에선 조선시대 후기 누정건물의 종단을 그리고 해석하라고 하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건축 중에 하나가 누정건물이다. 평상시에도 누정건물과 관련된 도면을 그리게 되면 사본을 따로 모아 둘 정도였다. 그런데 그게 과제로 나왔으니 이건 뭐 식은 죽 먹기였다. 한국건축사 문제 중엔 동원훈련장으로 가져가 읽었던 책에서 본 내용들이 많았다. 마치 내게 시험 잘 보라고 내 준 문제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1차 시험 합격자 발표 날이다. 아침부터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긴장되어 업무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직원 중에 시험에 응시한 사람은 나 밖에 없었으니 다른 사람들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오전 열한 시가 되자 더는 못 참겠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바깥으로 슬그머니 나가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유산청) 시험 담당자에게 문의하였다. “잠시만요, 선생님 수험번호가 어떻게 됩니까” “네 0000번입니다”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잠시 후 수화기 너머에서 흥분된 목소리로 “축하합니다. 일차에 합격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고등학교 때 기능사 2급 시험에 합격했을 때처럼 감개무량한 기쁨으로 주체하기 힘들었다. 직원들에게 이 사실을 얼른 알리고 싶었지만 아직 갈길이 멀다. 이차 시험까지 통과해야 진짜 합격이다.
2차 시험은 면접이다. 면접은 당시 문화재관리국이 위치해 있던 덕수궁 석조전에서 진행되었다. 총 666명 중 일차 합격자는 5명에 불과했다. 당일에 그런 사실을 알고 한편으론 놀라고 한편으론 합격하기가 정말 어렵겠다는 걱정이 앞섰다. 당시의 면접은 오픈면접이었다. 한 공간에 세 명의 면접관을 떨어져 배치하고 돌아가면서 면접을 보는 방식이었다. 문화재전문위원 윤홍로, 문화재관리국 보수과 사무관, 외부 초빙 교수 등 세 분의 질문에 아는 대로 답변을 하였다. 윤홍로 위원은 익히 안면이 있는 분으로 내 얼굴을 알아보시곤 면허 따면 시공 분야로 자릴 옮길 것이냐고 물으셨다. 예라고 답했더니 그럼 누가 사무실을 이끌어 가냐고 걱정을 하셨다. 문화재실측사무소 직원들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너나 할 것 없이 시험에 응시를 한다. 면허를 취득하면 대개 현장으로 이직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니 설계사무소엔 경험자가 줄고 그러면 업무에 그만큼 차질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월급 더 주며 사람 붙잡는 곳은 거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마지막 교수님 앞으로 가 앉았다. 교수 다운 질문을 던졌다. “다포 식 법당에 다른 곳은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는데 후면 기둥 중 하나가 뒤틀림 현상이 발생했고 기둥 상부에 갈라짐 현상이 크게 발생했네. 이걸 어떻게 보수하면 되겠는가.” 난감 한 질문이었다. 그렇지만 마음을 진정시키고 내가 아는 범위에서 솔직하게 답변을 하였다.
드디어 최종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이다. 사무실에서도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다. 고건축 팀에서 아직까지 한 사람도 문화재 자격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만약 합격을 한다면 사무실의 경사요 자랑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모두가 기대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합격자 명단엔 다섯 명의 합격자 명단이 모두 떴다. 한 사람도 낙방하지 않고 모두 합격한 것이다. 내 인생에 최고로 기쁜 날이다. 장원급제한 사람이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문화유산청 산하 전통문화대학이 문을 열면서 문화재 관련 시험에 대한 자격조건이 일시에 해제 되었다. 말하자면 누구나 건강한 사람이라면 남녀 할 것 없이 문화재자격시험에 응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문화유산청 단독으로 시험을 운영하던 것이 검정관리공단으로 인계되었다. 그러면서 출제 경향이 많이 달라졌다. 이전엔 복걸 복 형태의 시험출제 경향이었다면 지금은 종횡무진으로 그 폭이 상당히 광범위해졌다. 이전엔 독학으로도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시험 관련 학원을 나오지 않으면 시험 합격률이 대폭 낮아졌다. 그럼에도 상당수의 합격자들이 매년 배출되고 있다.
문화재 업계에 십 수 년을 근무해도 잘 모르는 것이 이쪽 분야다. 그런데 전공도 필요 없고 경력도 제로인 사람들이 학원에서 가르쳐준 대로 달달달 외워 시험에 합격하고 그들이 현업에 종사하는 일이 생기다 보니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다. 일단은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이 현장대리인이랍시고 현장에 배치됐지만 제 업무도 제대로 보지 못할뿐더러 그로 인한 잘못된 판단과 부실시공이 일어나도 알지를 못한다. 그저 기능공들이 하는 대로 맡기는 꼴이 되었다. 개중엔 나름대로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또한 초보 수준을 못 면한다. 시공사마다 쉬쉬 하고 있으니 겉으론 잘 드러나지 않지만 기술자의 실력부족으로 인한 속앓이를 저마다 겪고(다는 아니지만) 있다. 어찌 보면 문화유산청 스스로 자초한 결과다. 최고로 숙련된 경험자가 일을 처리해도 잘했다 소리 듣기 어려운 분야가 문화재 관련 분야다. 그러므로 하루 속이 과거처럼 건축과 졸업자로서 일정기간 동종업계에서 경력을 쌓은 사람에게만 시험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