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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기
제목: 공부가 제일 어려웠어요
브니엘 총동창회 소식지
합격기
브니엘 32회 부회장 조상규
제47회 사법시험 합격
1.들어가며
무능력자의 변명을 지금부터 늘어놓을까 합니다. 어떻게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할지
.....
이 짧은 글로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할 수있을지.....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많은 부분들이 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주변의
도움으로 이 시간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힘들어서 쓰러질 때면 나
의 손을 잡아주던 도움의 손길이 있었기에 부족하나마 지금의 제가 존재하는 것이 아
니겠습니까
95년도 부회장 선거한다고 강당에서 연설문 낭독하던 때가 생생한데 벌써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제가 졸업하고 학교가 연산동에서 구서동으로 이전하는 바람에
조금은 어색했지만 교무실에서 저를 반겨주시는 정겹고 익숙한 얼굴들이 있어서 좋았
습니다. 교문위에 걸린 플랜 카드에 어깨가 으쓱해졌고 자랑스럽게 선생님들께 인사
를 드릴수 있었습니다.
항상 이 계절은 나에게 참으로 잔인 했었는데 10년의 기다림 끝에 푸근하고 외롭지
않는 가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2.가난
초등학교 6학년때 다닌 속샘학원 원장님을 찾아 뵈었다. 학원이 번창하여 규모가 꽤
나 커져있었다. 나의 어린시절 어려웠던 가정형편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셔서인지 합
격소식에 정말로 기뻐하셨다. 그리고 17년 전 그 당시 이야기들이 줄줄 쏟아져 나왔
다
난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다락방에서 살았다. 동래 고등학교 정문에서 분식집을 했던
우리집은 점포에 딸린 자그마한 방 한 칸에 다락방이 전부였다. 앵글로 짠 사다리로
오르내리고 무릎으로 서면 머리가 닿았던 그작은 공간에서 나의 꿈이 영글어갔다.
남들은 핫도그를 좋아할지 모르지만 난 유독 핫도그가 싫다. 항상 엄마에게선 그라탕
유 냄새가 났고 그 냄새가 어린마음에 너무 싫었다. 콩국, 국밥, 오뎅 찜통을 들어 나
르고 핫도그 쏘세지에 나무젓가락을 꽂으며 어머니를 돕는게 나의 여가 생활이었고
항상 동래고등학교 축구부 형들이랑 라면을 먹으며 씩씩하게 자랐다.
한날은 학교를 다녀온 화창한 토요일 오후였다. 방에서 손님들이 앉아서 술도 마시고
화투놀이도 즐기고 마무리를 지을 때쯤이었나 보다. 거기는 우리가족들이 사는 방인
데...라는 생각에 화가 났다. 그래서 어머니께 내가 화가 났음을 보였다. 그리고 뛰쳐
나와 골목길로 접어드는 순간 눈물이 콸콸 쏟아졌다. 내 신세가 처량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화내고 나오는 뒤통수로 애타게 들리던 어머니의 부름 때문이었다. 너무너무 미
안해서, 그래서 눈물이 났다. 어머니가 마음 아파 하실까봐 그래서 너무 미안했다.
어버이날 어머니께 썼던 편지들의 주제는 항상 동일했다. 가난하지만 우리집은 행복
하다고 ..,,
내가 책상을 처음가진 것도 중3때였다. 그전에는 형의 다락방 앉은뱅이 책상을 빌려
쓰거나 밥상을 펴서 공부를 해야했다. 그래도 시험때면 과목별로 책들을 꺼내서 진열
해 놓고 참 재미있게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에서 매시험마다 90점을 넘긴 학
생에게 우등상을 주곤 했는데 그걸 받아오는게 나의 삶의 목적이었다. 당연히 그 당
시에 학원은 엄두도 못내고 그저 혼자서 공부하거나 근처 공공도서관을 이용해야했
다. 그 뒤로도 고등학교 졸업때 까지 과외는 커녕 단과학원도 마음껏 다닐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우등상은 어머니 삶의 활력소였고 나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등상만은 꼭 받아왔고 어머니께서는 차곡차곡 잘 모아두셨다.
3.어머니
어머니에게 있어서 나는 그분의 모든 것이었다. 사랑은 의리이고 의리는 믿음을 지키
는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사랑에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온 것 같
다.
어머니는 열심히 사셨다. 우유배달영업소에서 방 한 칸을 빌려 형과 내가 거처를 삼
았고 어머니께서는 새벽같이 우유차가 오면 우유를 나르고 배달을 하러 나가셨다.
동래고등학교 앞에서 자리를 잡으시고 분식점을 시작하면서 그곳에 터전을 마련하기
시작했고 나의 유년기, 청소년기도 거기서 보내게 되었다. 핫도그, 라면, 팥빙수 등을
팔았고 동래고등학교에서 주문이 있는 날이면 콩국, 국밥, 오뎅도 팔았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1학년까지였던것 같다. 그 뒤로는 호텔 주방일을 하시러 나가시고 저녁
에는 집에 계시지 않았다. 그래서 누가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느냐로 형이랑 싸우
는게 일이었다. 그 이후로도 어머니는 백화점일부터 별별 험한 일들까지 안해 보신
일이 없으실 정도 였고 내가 서울로 간다음 부터는 보험 설계사일도 하셨다. 내가 합
격한 지금도 어머니는 관절염으로 성치않은 다리로 유선방송 수금 일을 하러 다니신
다. 부모가 그런 고생을 하고 계시니 철이 일찍들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실망하실
만한 일은 일체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담배를 피지 않는 것도 순전히 어머니의 염려
덕분이다.
고등학교 2학년말 딱 지금처럼 가을 찬바람이 불때였다. 어머니께서 위암 선고를 받
으셨다.어리둥절했고 막연히 그냥 괜찮을거라는 생각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우등상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었다. 동아대학 병원
에서 수술을 마친 어머니를 뵈러 갔다. 외할머니께서 올라와 계셨는데 너무너무 많이
우셨다. 중환자실에 누워서 가픈 숨을 쉬고 있는 어머니를 보게 되었다. 항상 내게는
무쇠팔 무쇠다리였던 어머니고 어머니만 옆에 있으면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는데... 너
무너무 불쌍한 어머니 모습을 보고 말았다. 도저히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어 화장실로
달려가 서럽도록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나에게는 기댈 수 있
는 어머니는 사라졌고 내가 책임지고 보살펴야 할 어머니만 남게 되었다. 한 가지 굳
은 다짐을 했다. 내가 저 불쌍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겠다고....
그리고 고2말부터 극도의 노이로제에 씨달리면서 10년간의 나의 시험 인생이 시작되
었다.
4.나의 재수생활과 고시 입문
죽어라 해도 안되는 것들이 있었다. 나에겐 수능 입시가 그것이었다. 고3수능을 멍하
게 치고 나와서 문과로 바꾸고 재수를 시작하였다. 집근처에 새로 생긴 학원이었다.
서울대반이라고 모아보니 인원수가 작아서 문과,이과, 거기다가 예체능까지 합반이 되
었다. 내 인생은 여기서 두 사람을 만나면서 완전한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중학교때부터 난 남자가 세상에 나서 세가지만 가질 수 있으면 성공한 삶이라는 생각
을 하였다. 나의 일, 내가 목숨걸고 지켜야할 한 여자, 나와 사상을 같이하는 친구..그
런데 재수 생활을 하면서 그것들을 가지게 되었다. 경찰대학교를 2차까지 합격하고
있었고 첫사랑을 만났고 손종수라는 스승이자 붕우를 만났고 나는 행복했다.
하지만 첫사랑을 만난 대가로 수능성적이 저조했고 경찰대에 최종낙방하였다. 하지만
나에겐 두 사람이 있어 행복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을 마칠때
쯤 나에게 죽을 만큼 슬픈 가을이 찾아오고 있었다. 잠시 미국에 갔다 온 첫사랑은
나에게 집안의 가난함과 나의 무능함을 이유로 들고 나를 떠나 다른 남자를 만났고
어머니는 관절염으로 병원에 다시 들어가셨고 나는 고시 공부한다고 모든 것이 피폐
해져갔다. 완전히 설상가상이었다.
종합병원 원장 딸인 그녀는 처음부터 나와는 맞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중간에 항
상 종수형이 있엇고 형은 나에게 마음공부와 수련법을 가르쳐 주었고 그 상대가 첫사
랑이었다. 모두 보내고 이제는 종수형 혼자 내 곁에 있었지만 종수형마저 2001년 2월
만성신부전으로 1년 동안 투병생활을 하다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항상 나를 가장 슬
프게 하는 것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이 울어본 적
이 없었던 것 같다. 형을 밀양의 이름도 모르는 산에 뿌리고 난 서울대학교 교환학생
으로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첫 1차합격을 2002년도에
하게 되었다.
5.실패와 좌절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99년 1차시험을 시작으로 00년 01년 연속 세 번을 낙방하고
02년도 44회 시험에 네 번만에 겨우 합격을 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고 45회 2차
에서 과락으로 떨어지면서 46회는 토익 때문에 시험장에도 들어가 보지 못하는 수모
를 겪어야 했다. 2004년도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스터디도 조직하고 동차합격을 위해 매진하였고 그렇게 2년을 보내고 고시인생을 마
무리 지었다.
내 배에는 배꼽 근처에 여러개의 화상 자욱이 있다. 옷을 갈아 입을 때면 사람들이
의심스런 눈으로 나를 보면서 묻는다. 자학을 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흉터가 징그러운지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사실은 시험 전에 체력이 떨어
져서 나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에너지까지 짜내기 위해서 극약 처방으로 뜸을 뜬 것인
데 살에다 바로 태우는 직접구라는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흉터가 많이 남은 것이
다. 나의 실력이 시험을 당해내지 못할 정도에서 시험을 억지로 이기려고 하니 그렇
게 발버둥을 친 시험은 꼭 낙방을 하게 되었다. 안 될 시험 앞에서는 몸이 부서져 버
렸다. 되든 안 되든 내 모든 것을 쏟아 부었고 그래서 떨어지는 시험에 후회는 없었
다.
2003년 가을 이맘때부터 나의 인생은 또 한 번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토익이
제대로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2차 시험에 낙방한 것이었다. 부동산 영업을 마무리
짓고 10월부터 변호사님의 도움을 받으며 토익 준비를 했지만 발표를 기다리던 상황
에서 공부는 손에 잡히지 않았고 그렇게 12월이 와버렸다. 행정법 39.5라는 점수로 과
락사태에 나도 동참하게 되었다. 낙방의 슬픔을 즐기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경북대
졸업 준비를 마쳐야 했고 12월 토익도 준비해야했다. 이미 동아대 법대 대학원에 장
학생으로 합격해 있었던 터라 졸업을 하지 못하면 대학원도 취소되고 군대에도 가야
하는 머리 아픈 상황이었다. 부랴부랴 기말고사에도 참석하고 최선을 다했지만 학교
에서 충격적인 통보가 왔다. 영어 과목 이수가 되지 않아서 졸업을 할 수 없다는 것
이다. 아니면 12월 토익이 600만 넘으면 졸업이 가능하다고 했지만 첫 시험에서 425
를 받은 내가 600은 자신이 없었다. 사시 1차 선택과목으로 독일어만 6년 정도를 하
고 나니 영어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토익을 서울에서 보고 잠시 짐을 싸서
국립 경상대학교에 겨울 계절학기 3학점을 등록하고 진주로 유배 생활을 하러 갔다.
4주 동안 나의 정신이 피폐해져 갔다. 아무런 의미도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결국 4주
수업을 마치는 그날 토익점수가 620이 나오는 시트콤 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
시 서울로 올라가 정신을 차리고 영어 공부를 하면서 스터디팀 조직을 만들어갔다.
그해 1차시험 치는 날은 서글프게 비가 추적 추적 내렸고 남들은 1차 시험을 보러가
는데 나는 토익 시험장으로 가야만 했다. 다행히 그 시험에서 810점이 나와 토익은
일찍 마무리 짓고 출발할 수 있었다. 그것도 잠시 봄 꽃이 화사하게 피기 시작할 무
렵 우리집에는 빨간 압류 딱지꽃이 피고 말았다. 그길로 아버지는 중국으로 건너 가
셨고 가족들은 더욱 궁핍한 생활과 어머니의 병환으로 삶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
다.
6.은인들의 도움
난 참 인덕이 많은 놈이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나 혼자 서있는 것이 아
니고 많은 버팀목으로 서있는 것이다.
내가 제45회 2차시험을 치고 발표를 기다리던 때의 일이다. 낙향하지 않고 서울에서
계속 있으면서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로 연명을 하던 때였다. 이런 저런 일자리를 알
아봐도 집에 돈을 붙일 수 있는 정도는 벌지 못했다. 어머니께서 3년정도 보험 설계
사 일을 하셨지만 빚이 늘어나면서 일도 그만두시고 건강도 극도로 나빠지기 시작하
셨다. 한마디로 나는 이제 공부는 접어야 하는 상황 이었다.
그러면서 나의 대학 마지막 학기가 대구에서는 진행되고 있었고 나는 그 무렵 부동산
영업에 희망을 걸고 열심히 일했다. 그래서 형사특별법강의를 하시는 교수님께 사정
을 말하고 낙제만은 면하고자 한번 찾아 뵙기로 하였다. 교수님은 검사출신 변호사로
개업을 하고 얼마되지 않은 상황에서 학교 강의까지 하시던 중이셨다. 변호사 사무실
로 찾아가서 1차합격증과 재직증명서등을 보여드리고 사정을 말씀드린지 10분 정도가
흘렀다. 일면식도 없었던 나에게 메모지에 계좌 번호를 적어 달라 하셨다. 조건은 하
던 일을 그만 두고 다시 공부를 하라는 것이었다. 투자할 가치가 있어보여서 투자하
는 거라는 말씀만 하셨다. 그 뒤로 2년동안 한 달에 얼마씩 해서 1500만원 상당의 지
원을 받았다. 아마 교수님이 아니었으면 공부를 그만 두고 군대를 갔어야했는지도 모
른다. 그해에 2차는 행정법 과락 사태에 휘말려 실패를 했고 덩달아 토익도 패스하지
못하면서 내 인생에 최대의 위기를 맞을 때 교수님의 도움은 그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어떻게 내가 다시 공부를 다시 해야 될지 아시고 2차 발표
를 기다리는 나에게 지원을 해 주셨는지... 교수님의 지원으로 다시 일어섰고 토익,1
차,2차 단 한 번의 탈락도 없이 동차합격의 꿈을 이루었다. 또한 1차 시험에서 형법은
하나만 틀리며 90점을 넘기는 고득점도 이루었다.
3달에 한번정도씩 교수님께 편지를 썼다. 전화를 해서는 도저히 어떤 말도 염치가 없
어서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전화로 할 수 있는 말이 감사하다, 열심히 하고 있다,
그 정도 밖에 없는데 너무나 상투적이고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토익점수가 나
왔을 때에도 이제까지 친 시험의 발전과정을 보여드리기 위해 성적표 3개를 복사해서
첨부하였다. 내가 처한 형편에 관한 이야기, 공부를 해나가고 있는 모습들, 나의 꿈과
이상, 그리고 투지... 많은 것들을 적어서 보내 드렸고 교수님은 무척 반가워 하셨다.
내가 시험에 합격하고 바로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리니 당장은 기쁨을 만끽하고 천천히
들리라고 하셨다. 그래서 일주일이 지나고 찾아 뵈었더니 얼굴에 환한 미소로 나를
맞으시며 “내가 사람을 잘 보긴 잘 봤지?”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리고 저녁식사
를 사주시고 헤어질때는 나의 손을 잡으시며 “훌륭하다”는 한마디로 나의 모든 노
력들을 보상받을 수있게 해 주셨다.
대학교 1학년 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 내 인생에 제일 잔인한 가을이 왔을때 모든
걸 포기하고 군대를 가든지 돈을 벌러 갈 생각이었다. 휴학계를 다쓰고 마지막으로
사업을 하시던 외삼촌인 영우삼촌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공
부만 하라고 하시면서 그 때부터 삼촌이 중국에 들어가실 때가지 여러해 경제적인 지
원이 이어졌다. 휴학은 취소되었고 군대도 연기시키고 다시 공부에 매진하여 처음 사
시1차 시험을 서울 신림동에 가서 칠 수 있었다. 합격소식에 삼촌은 많이 기뻐하셨고
마을 잔치 비용으로 거액을 내놓으셨다. 삼촌께서 그 때 날 잡아주지 않았다면 지금
쯤 뭘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대구 곽병원에서 설립한 운경장학재단에서 장학혜택을 3년간 받았다. 운경학숙이라는
기숙사를 공짜로 제공받은 것이었다. 학숙에서 많은 의대 형들과 보냈던 시간들은 잊
을 수 없는 추억이다. 또한 내가 서울에서 고시공부로 몸이 고장이 나면 항상 무료로
치료해 주셨던 나의 주치의 백두한의원 이재철원장님도 여기 학숙에서 같은 방을 쓴
인연으로 지금까지 물심양면으로 나를 도와주신 은인이다. 학숙은 나의 유일한 대구
생활의 터전이었다. 운경학숙이 없어지면서 나도 대구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
를 갔다. 암흑같이 힘들었던 대구 생활을 아르바이트 한번 하지 않고 공부에만 매진
할 수 있도록 버티게 해준 것은 학교장학금과 운경학숙 그리고 삼촌의 도움이었다.
7.합격후기
동아대에서 사법시험 공부방법론으로 2시간 특강을 했다. 사람들 앞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전한다는 것은 짜릿한 일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나에게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보람이 있다. 메일로 상담하는 친구들도 생겼다. 내가 도움이 되어
야 할텐데 책임감이 무겁다. 그리고 지독료 학생들과 법우회 학생들과의 만남에 있어
정성을 다했고 그 덕분에 사람들도 나를 편하게 잘대해 주었다. 지금은 법우회 학생
들의 특강을 맡게 되었고 앞으로의 스터디 일정과 교재및 학습 방향을 잡는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담당교수님을 중심으로 중견 법조인으로 계시는 교수님들과 저녁을 먹으며 법조 선배
님들의 살아있는 법조 생활에 관해 많은 이야기와 조언들도 들을수 있는 기회도 가졌
다.
동해중학교에 가서는 학교 방송에 나와서 후배들에게 인사말을 전할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 후배들은 나를 연예인 대접을 해주었다. 악수하는 것도 무척이나 좋아했고 싸
인도 받아갔다. 학교 밖에서도 알아봐 주고 참 고마웠다. 선생님들께서도 거의 대부분
그대로 계셔서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고 너무나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초등학교때 다닌 대명학원에서는 지금 나의 특강 날짜를 잡고 있다고 했다. 원장 선
생님께서도 아이들에게 내 이야기를 해주신다고 신이 난다고 하셨다. 아이들이 나를
무척이나 보고싶어 한다고....
브니엘고등학교를 방문했을 때는 네 번 정도 반에 들어가서 학생들에게 인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남고와는 달리 여고 교실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고등학생들의
생기 넘치고 장난기 어린 눈빛은 잊을 수가 없다. 장래 법조인이 꿈이라고 말하는 학
생들이 많아서 이야기가 더욱 흥이 났다. 그리고 공부를 아주 제대로 안하는 사촌동
생이 1학년에 다니고 있어서 교무실에서 선생님들께 인사드릴때 더욱 재미난 상황도
벌어졌다. 그리고 총동창회에서 달아주신 파란색 플랜카드 덕분인지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남해 외가집에 가서 잔치를 했는데 마을이 생기고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어르
신들께 인사를 전하고 술을 권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김두관 전 장관의 축전과
박희태 국회 부의장의 축전을 받고 남해 신문에도 이름이 났다. 개천에서 용이 난 것
인지 영웅 대접을 받았다. 외할머니께서도 이런 경사가 없다고 하셨다.
내가 사는 수안동 화산맨션에 플랜카드가 두개나 붙어있는데 하나는 어머니 친구분
일동이고 하나는 화산맨션 다동 주민 일동이다. 두개나 붙어 있으면 좀 민망하니까
달지말라고 주민들께 말씀드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나의 합격을 축하하는 주
민들의 저녁만찬이 벌어졌고 좋은 음식들을 먹으면서 주민들간에 담소를 나누는 좋은
자리가 마련되었다.
저녁늦게 택시로 귀가할때는 플랜카드 밑에서 하차하며 그 주인공이 나라고 넌지시
말씀드리면 기사님들께서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9,10월에 걸쳐서 서면에서 헬스와 댄스로 체력달련을 하고 있었다. 합격하던 날도 거
기에 있었고 같이 운동하던 많은 사람들이 축하해주었다. 댄스학원 원장님과 부등켜
안고 울던 기억이 난다. 헬스 관장님도 공짜로 한 달을 연장해 주셨다.
어머니께서 다니시던 절에 떡이며 과일을 준비해서 가시면 수능철이라 수험생 어머니
들이 어머니 손한번 잡아 볼려고 줄을 섰고 떡도 수험생 자식들에게 꼭 먹여야한다고
너도 나도 떡을 받아갔다. 어머니의 병환은 벌써 이런 시간을 지내는 동안 다 나아
버리셨는지 요즘은 아프시다는 말씀도 없으시다.
8.마무리 인사
저의 인생에서 브니엘은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지금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도 모두
고등학교 친구들이고 대학을 가고 사회에 나와서도 브니엘 동문과의 만남은 지속되었
습니다.
브니엘 고등학교가 근간에 많은 어려움을 격기도 했지만 동문들과 선생님들의 애교심
으로 한층 더 발전하는 브니엘로 거듭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제야 세상에 첫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저를 지도해주시고 이끌어주신 많은 분
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훌륭한 법조인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겠습니다. 감사합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