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중동(中洞), 수성들 가운데 있는 마을
개관
법정동이자 행정동인 중동은 조선시대에 신천을 따라 수성들에 형성된 마을이다. 1394년 수성현에서 대구현으로 편입,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구부에서 달성군 수성면으로 분리됐다. 1938년 다시 대구부에 편입되었으며, 1963년 대구시 동구 중동이었다가 1980년 대구시 수성구 중동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중동은 신천을 사이에 두고 남구 봉덕동·이천동과 접하고 있다.
중동은 약 5백 년 전, 수성들을 배경으로 형성된 마을로 경주 이씨, 추계 추씨, 경주 최씨, 초계 변씨가 주로 마을을 이뤄 거주했다. 1910년대 마을 규모는 경주 이씨 160호, 추계 추씨 140호, 경주 최씨 53호, 초계 변씨 50호 등 성씨별로 집성촌을 이뤘으며, 인구는 2,400명 정도로 전 가구가 농업에 종사했다.179) 중동과 하동 사이에 있었던 중부리는 신천에서 빨래를 많이 해서 ‘빨래터’라 부르기도 했다.
대구부읍지(1899) 방리조(坊里條)에 “수현내(守縣內)는 대구부 남쪽 10리에 있다. 소속된 동이 셋이니, 상동·중동·하동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구시사 ‘주거불량지역분포현황(1984년 기준)’에 중동 자연부락 주택 50동이 보인다.180) 1950년대 수성구 상동에서 북구 산격동에 이르는 신천 좌우 제방에는 ‘신천좌우안 제방도로’가 있었다. 지금의 신천대로는 1984년부터 구간별로 공사를 진행해 1994년 완공됐으며, 신천동로는 1998년 완공됐다. 1954년 항공사진을 보면 당시 수성구에 접한 신천 교량으로는 수성교와 중동교가 유일하다. 대봉교와 희망교는 정식 교량이 생기기 전에는 돌다리 형태의 다리가 있었다.
주요 공공시설로는 대구삼육초등학교, 수성구보건소, 무궁화어린이공원, 상록수어린이공원, 중동어린이공원 등이 있다. 유적·유물로는 중동 수창군 치소 유적과 청동기시대 고인돌이 2기 발굴되었으며, 문화유산으로는 중동 두꺼비 바위, 이득심 송덕비 등이 있다.
179) 대구시, 대구지명유래총람, 2009.
180) 대구시, 대구시사 4권, 1995, 86-87쪽.
지명 유래
중동이란 지명은 수성못에서 신천을 따라 대구 도심으로 이어지는 수성들을 기준으로 상동·중동·하동으로 이름을 정할 때 상동과 하동 사이에 있어 중동이 됐다. 1975년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수성로(대구은행네거리-중동네거리-상동네거리)를 중심으로 동쪽은 신주택지로 개발됐고, 신천변에 접한 서쪽은 기존 전통마을을 한동안 유지했다. 옛 지도를 참고하면 1970년대까지 현 들안로 주변은 민가 없이 오직 수성들만 있었고, 1980년대 들어 서서히 도시화가 시작됐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130-150호(중부리 포함) 규모 옛 중동마을이 보인다. 조선지지자료(1910년대초) 에는 수성동의 지명으로 중동진(中洞津·중동나루)이 등재되어 있다.
들안길
본래 들안길은 수성못둑에서 지금의 수성네거리 교보빌딩 너머까지 수성들을 가로지르는 약 4km 이르는 직선 길이다. 수성들 안쪽 한 가운데 나 있는 길이란 뜻에서 들안길이라 불렸으며 지금은 들안로로 불린다. 1970년대까지 들안로 주변은 민가 없이 오직 수성들만 있었고, 1980년대 들어 서서히 도시화가 시작됐다. 당시 수성못둑을 시작으로 들안길 인근까지 간이식당이나 선술집 등이 밀집해 포장마차촌을 형성하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 들안길 인근에 아파트 모델하우스가 속속 들어서면서 식당이 급속도로 늘어났고, 1990년대 ‘토지초과이득세’ 도입으로 들안길에 본격적으로 대형 식당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현재 대구시민이 말하는 들안길은 ‘들안길 먹거리 골목’을 말하는 것으로 전체 들안길 중 상동에 있는 들안길을 말한다.
수성들·한들
수성들은 수성구 상동·중동·하동(수성동)에 걸쳐 있는 넓은 들판 이름이다. 신천·범어천·수성못 등을 수원으로 하는 수성들은 물이 좋고 땅이 넓고 기름져 선사시대 때부터 사람이 살아온 곳이다. 과거 수성들에는 신천을 따라 청동기시대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청동기시대 대표 유적인 지석묘군(고인돌)을 들 수 있다. 수성들은 다른 말로 들이 크고 넓어 '한들'이라고도 불렀다. 1954년 항공사진을 보면 수성못둑에서 지금의 수성네거리 교보빌딩에 이르는 신천과 범어천 사이는 신천변에만 상동·중동·하동(수성동) 마을이 있고, 나머지는 오직 들만 펼쳐져 있다. 당시 수성들은 남북 약 4km, 동서 약 1.5km에 이르는 광대한 들판이었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수성들에 대해 “과거 수성면 시대에 수성면의 제일 큰 들이라 하여 수성들이라고 불러왔으며 수성못의 몽리 지구는 500여 정보에 달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득심(李得心) 송덕비(頌德碑)
과거 지금의 중동시장 인근 당산에 있었던 비로, 구한말 고종 때 상궁을 지낸 이득심의 선행을 기리는 송덕비다. 이득심은 인천 이씨로 헌종, 철종 시대인 1850년경 대구 중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현풍 현감을 지낸 이재연(李在淵)이다. 어린 나이에 궁궐로 들어가 궁녀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내명부 정5품 상궁까지 올랐다. 상궁은 왕의 후궁인 내관을 제외한 궁녀로서는 내명부에서 가장 높은 지위다.
조선 말 고종 때 국운이 쇠퇴하고 조정의 조직과 기능이 축소되자, 그녀는 상궁을 사직하고 고향인 대구 중동으로 돌아왔다. 당시 그녀의 눈에 비친 중동 주민들의 모습은 비참했다. 흉년과 조세 때문이었다. 그녀는 사재를 털어 주민의 조세를 덜어 주고,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던 주민들을 구휼했다. 중동 주민들이 이러한 그녀의 선행을 기리기 위해 1923년 마을 당산나무 아래에 그녀의 송덕비를 세웠다.(‘두꺼비 바위’ 사진 참조) 송덕비는 이후 중동 경로당(옛 중동동사무소) 앞으로 옮겨졌다가 2016년 현 중동행정복지센터 앞에 자리 잡았다. 중동경로당 앞에 있을 때 새로운 이득심 송덕비가 1기 더 세워졌다. 하나는 1923년 처음 세운 옛 비이며, 다른 하나는 옛 비 글자가 닳아 보이지 않아 1980년 다시 조성한 새 비다.
중동 두꺼비 바위
1980년대까지 지금의 중동시장 인근 당산에 있었던 돌두꺼비다. 형태는 계란형인데 길이 80cm, 높이 50cm쯤 된다. 언제 누가 무슨 목적으로 설치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수성구청에서 발간한 수성구 역사적 장소 발굴 용역(2020)자료집에 의하면, 두꺼비 바위는 오래전부터 중동시장 삼거리 당산나무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이 남아 있는데 1966년 당시 경북대 윤용진 교수가 촬영한 것이다. 사진에는 흙돌담을 배경으로 시멘트로 마감한 제단 위에 당산나무, 이득심 송덕비, 두꺼비 바위가 한자리에 모여 있다.
위 자료집에 소개된 주민 구술에 의하면 두꺼비 바위가 있던 곳은 정월대보름 마을 제사를 지내던 동제단이었다고 한다. 이곳에 두꺼비 바위를 모신 것은 두꺼비가 흉을 물리치고 길을 불러온다거나, 수해를 막는다는 민간신앙, 풍수신앙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중동은 신천변에 자리한 마을로 지금처럼 제방이 있기 전에는 여름철 수해가 제일 큰 걱정이었다. 그래서 마을에 당산나무, 두꺼비 바위, 송덕비를 모신 동제단을 만들어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했던 것이었다.
오랜 세월 중동 주민의 기도 대상이었던 두꺼비 바위와 이득심 송덕비는 1980년대 도로개설 때 각각 수성구청과 옛 중동동사무소(현 중동경로당) 앞으로 옮겨졌지만, 아쉽게도 당산나무는 사라지고 없다. 현재 두꺼비 바위는 수성구청 정문 옆에 작은 분수시설과 함께 설치되어 있다.
중동 수창군 관아 유적
2019년 대구시 수성구 중동 356-7번지 일원에서 복합주거시설 공사와 함께 문화재 발굴 조사가 실시됐다. 그런데 이때 출토된 몇몇 유물에 지역사회가 놀랐다. 출토된 유물 중 일부가 매우 특별한 유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수성구는 신라시대에는 위화군(喟火郡) 혹은 수창(壽昌)이라 불렀고, 고려시대에 와서 수성이 됐다. 통일신라 이전 대구에는 달구벌(대구도심), 수창(수성), 팔리(칠곡), 하빈, 화원이 있었다. 이 중 중심 세력은 달구벌이었다. 하지만 통일신라시대 신문왕 이후 대구 중심은 달구벌이 아닌 수창으로 바꿨다. 신문왕이 신라 수도를 경주에서 달구벌로 천도하려다 무산된 이후였다. 이 일로 경주 기득권 세력은 위상이 높아진 달구벌을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기존 달구벌 아래에 있던 수창을 ‘수창군’으로 승격시키고, 대구현을 비롯한 팔리현, 하빈현, 화원현을 수창군의 속현으로 만들어 수창군이 거느리게 했다.
이러한 사실은 문헌자료를 통해서는 확인이 됐지만,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고고학 유물은 그동안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2019년 수성구 중동시장 북쪽 아파트 신축공사 현장(수성골드클래스더센텀)에서 의미 있는 유물이 발견됐다. 공사와 함께 진행된 발굴 조사에서 삼국-조선시대에 이르는 여러 유물이 출토됐다. 그중에는 연화문 수막새, 당초문 암막새, 귀면와, 치미편 등이 있었다. 이는 아무 곳에서나 출토되는 유물이 아니라 신라 수도 경주의 궁궐, 관아, 큰 사찰 터 등에서만 출토되는 매우 특별한 유물이었다. 이를 토대로 전문가들은 지금의 수성구 중동 일원이 옛 수창군의 중심이었고, 이 유물이 출토된 지역에 수창군 관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토된 유물 연대가 8세기 중엽인 것도 문헌자료에 나타나는 수창군 승격과 거의 일치한다. 현재 수성구 중동 골드클래스 아파트 서편 출입구 옆에 이런 내용을 담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중부리
중부리는 중동의 자연부락이다. 중부리라는 동명은 중동과 하동의 경계에 있는 작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중부리는 지금의 중동교와 희망교 사이에 있었다. 1966년 이전에는 수성동이 없었고 상동, 중동, 하동만 있었다. 나중에 하동이 신천동과 합쳐지면서 수성동이 됐다. 수성1, 2, 3가동을 구동, 수성가4동을 신동이라 부르기도 했고, 동쪽을 신동, 서쪽을 구동이라고도 했다. 1954년 항공사진 아래쪽 중동교 주변으로 중동이 보이고 위쪽에 중부리가 보인다. 중부리는 현재 효성해링턴플레이스 아파트 인근이다.
찬물샘
찬물샘은 과거 중동에 있었던 샘 이름이자 지명이다. 찬물이 나는 샘이란 뜻에서 찬물샘이라 불렸는데 현 광명프레지던트 아파트 네거리 인근에 있었다. 찬물샘은 농사철이 되어 수성못 물이 불어나면 샘에서 물이 솟아났는데, 물이 너무 차가워 벼농사에는 좋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 지역은 땅을 파면 차가운 지하수가 많이 올라온다고 한다. 과거 이 지역에 마을 건설을 시작할 때 지하수가 너무 많이 솟아 구들을 놓아 기초공사를 했다고도 한다.181)
181) 김광순, 한국구비문학Ⅰ, 국학자료원, 2001, 172쪽
효수목
과거 중동교 인근에는 수령 400년 이상 된 고목이 있었는데 중동 주민들이 이 나무에 제사를 지내거나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옛날 이 나무에서 사형수들을 효수했다고 해 ‘효수목’이라고도 불렸다. 흉한 일에 사용되었던 나무였기 때문에 주민들이 오랜 세월 정성을 들여 동제를 지냈지만 중동 일대가 개발되면서 마을이 해체되고 동제 역시 중단됐다.182)
182) 수성구청,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무형문화유산, 2021, 1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