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과 한반도의 정치관계 20년
구해우(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 중앙대 북한개발협력학과 겸임교수)
1. 머리말
2010년 3월 26일은 한국과 몽골의 수교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반도와 몽골은 고대시대에 역사적, 문화적으로 깊은 연관을 가졌었고, 고려시대에는 세계제국 원나라와 혼인동맹, 형제동맹의 관계를 형성하여 한반도가 세계와 소통하고 협력하는 독특한 역사를 만들기도 했었다. 그 이후 조선시대에 한반도가 ‘소중화사상’이라는 울타리에 갇히면서 한국과 몽골의 교류와 협력은 대부분 단절되는 과정을 겪은바 있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서서 한반도와 몽골은 다시 새로운 교류와 협력을 모색하게 되는데, 그 출발점은 일제 식민지시기에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몽골의 울란바토르를 독립운동의 거점중의 하나로 삼으면서 시작되었다고 할수 있다. 이 같은 한반도와 몽골의 근대이후 교류와 협력의 모색은 2차대전 이후 현대 국제정치질서의 새로운 구축을 배경으로 새로운 차원에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2차대전이후 우리나라가 일제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을 자력으로 성취하지 못함에 따라 미국을 중심으로한 자본주의 체제와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체제간의 진영대결구도의 한복판의 희생양이 됨으로 인해 한반도는 분단의 길을 걷게 된다. 이에 따라 한반도와 몽골의 교류협력은 한반도의 남측인 대한민국과 한반도의 북측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분단된 조건에서 진행되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한반도와 몽골의 교류협력에 관한 연구역시 남과 북이 분단, 분리된 채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한반도의 남측인 대한민국에서 한국과 몽골의 수교가 된 지난 20년 동안 주로 연구되어온 대한민국과 몽골의 교류협력에 관한 연구를 평가하고 정리하면서 이와 함께 북한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국화국(이하 북한이라 칭함)과 몽골간의 교류협력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한국과 몽골은 지난 1990년 3월26일 동양평화론을 제창하던 안중근 의사의 기일날 수교를 맺은 이래 20년 동안 급속도로 정치, 경제, 문화등 다양한 방면에서 교류화 협력을 확대해왔다.
그리고 북한과 몽골은 몽골인민공화국정부가 한반도의 북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합법적으로 승인하고 쌍방공식회담을 통해 1948년 10월 15일에 공식외교관계를 설정하게 된다. 그러나 북한과 몽골의 깊은 인연은 일본제국주의가 아시아 전체를 침략하던 1930년대 민족해방투쟁의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소위 ‘할힌골전투’라고 칭해지는 몽골지역의 전투과정에서 북한의 김일성 항일부대와 몽골의 군대가 협력하면서 근대의 북한과 몽골의 동맹관계를 형성하는 그 뿌리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948년 북한의 김일성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운 이후에는 몽골조선친선협회 위원장 인 작가 스 쑤렌쟈브 가 표현한데로 두나라 친선은 말로써가 아니라 실천으로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 증거로 몽골에 ‘김일성유치원’ ‘김정일유치원’ ‘김정숙유치원’이 있으며 러브도 알탄블라그군에는 북한의 노력과 자금으로 건설된 10년제중학교에 ‘김일성학급’도 있다고 한다. 북한과 몽골의 관계는 이 처럼 대단히 친밀한 동맹관계를 형성하였었다고 할 수 있다.
2. 근현대시기의 북한과 몽골의 교류협력
1) 반제국주의 투쟁시기의 북한과 몽골의 교류협력
근대사에서 북한과 몽골의 협력이 이루어지는 사건은 조선의 김일성부대가 소련과 몽골의 연합군과 함께 일본제국주의를 대상으로 싸운 소위 ‘할힌골전투’ 때이다.
일본제국주의는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부를 점거한 뒤 1932년 3월 1일 ‘만주국’ 성립을 선언하고, 청나라의 폐제 부의를 집정에 앉혔으며, 수도는 지금의 장춘으로 하였다.
일본은 같은 해 9월 일만의정서에 조인하고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하였으며, 이어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등의 일부 국가가 승인하였으며, '만주국'은 현재의 랴오닝(遼寧), 지린(吉林), 헤이룽장(黑龍江)성(省)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인구가 3000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실권은 일본제국주의의 관동군사령관이 장악하였고, 경제면에서도 일본인의 만철(滿鐵)이 철도를 경영하고 일본회사들이 개발사업을 독점하였다.
일본제국주의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서북방면으로 영토적 야욕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발생한 대표적인 전투가 ‘할힌골전투’인 것이다.
일본제국주의는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한편으로는 중국본토 침략을 노골화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서북방면에서 크게는 소련과의 전투를 준비하면서 우선적으로는 몽골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야욕을 추진하게 된다.
이에 몽골은 자신의 강력한 동맹국가인 소련과 연합군을 형성하고 중국의 공산주의자와 조선의 김일성 부대 등에도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이 같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김일성부대는 ‘할힌골전투’에 참여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몽골침략을 저지하는데 공을 세움으로써 향후 북한과 몽골의 강력한 동맹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할힌골’은 소련과 몽골과 만주의 접경지역에 있는 강 이름이자 지역명이다.
할힌골 일대는 모래언덕과 초원으로 된 넓은 지역인데, 할힌골 사건은 몽골국경수비대원들이 국경을 침범했다는 트집을 잡아 일본제국주의가 계획적으로 도발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제국주의가 할힌골 사건을 도발한 목적은 첫째 할힌골 동쪽의 몽골영토를 점령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시베리아철도를 절단하여 소련으로부터 연해주지역을 분리하는데 있었으며, 셋째는 소련의 대일전략과 군사력에 대해 탐색해보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당시 일본제국주의 진영 내에서는 북진론과 남진론이 대두하여 소련을 먼저 공격할것인지 중국본토의 식민지화를 먼저 추진할것인지에 대한 전략문제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할힌골전투‘는 북진의 가능성여부를 타진하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쏘련에 대한 침략야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일본에 대한 쏘련의 강경정책을 다시 한번 검토해볼 심산으로 만몽국경일대에서 새로운 군사적 도발을 준비하였습니다. 세칭 노몬한 사건이라고도 부르는 할힌골 사건은 이렇게 되어 발생하였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1935년에 벌써 위조지도를 찍어내어 만주국의 국경을 저들에게 유리하게 몽골쪽으로 20여킬로미터나 더 들여 그어놓았습니다.
일본이 할힌골사건과 같은 대규모의 군사적 도발을 미리부터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 사건에서 주공을 담당한 일본의 고위지휘관들 중 한사람이 한때 일본대사관 무관으로 모스크바에 가있던 고마쯔바라 장령이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고마쯔바라는 반쏘 모략에서 수완을 보인 덕으로 대쏘작전에서 1선이라 할수있는 하이라르주둔사단의 사단장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쏘련측에서는 백로씨야군관구 부사령관인 쥬꼬브를 할힌골전선에 파견하였는데 쥬꼬브는 수적으로 우세한 일본군부대를 땅크와 비행대에 의한 타격을 기본으로 하여 높은 기동력과 불의성으로 파멸시켰습니다.
할힌골에서의 국지전은 그해 9월중순 쏘몽군의 승리로 결속되었습니다. 쏘몽연합군이 할힌골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을때 우리는 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하기 위해 조선인민혁명군 각 부대들에 적 배후 교란작전을 벌릴데 대한 새로운 명령서를 작성하여 내려보냈습니다.“
김일성의 이 같은 증언에서도 확인되듯이 1930년대 후반 일본제국주의가 아시아 전체를 식민지로 만들려는 침략을 노골화 해나가는 시기에 벌어진 ‘할힌골 전투’는 일본제국주의의 기세가 계속해서 상승하느냐 아니면 그 기세가 한풀 꺽일 수 있느냐 라는 중대한 기로에서 발생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전투였던 것이다.
특히 북한의 김일성에게는 역사적으로 볼 때 이후 북한의 건국과정에서 결정적인 도움을 얻게 되는 소련군부대와 접촉하게 되는 중요한 기회를 가지게 된다. 소련군은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이후 강력한 중앙집권적 계획하에 사회주의경제건설을 빠른 속도로 진행시켜 경제적인 성장, 과학기술의 발전, 군사부문의 현대화 등의 성과를 이루어 냄으로써 1930년대 후반에는 당시로서는 세계선진국수준의 군사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 같은 소련의 입장에서 일본제국주의가 소련침략의 야망까지 타진하는 성격을 가졌던 ‘할힌골 전투’는 당시 세계정세차원에서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전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몽골은 청나라의 강희제가 몽골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몽골을 내몽골과 외몽골로 분리시킨 이후 내몽골은 중국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외몽골은 중국에서 신해 혁명이 일어난 1911년에 신정 군주제로 독립을 선언한바 있었다. 그 이후 1917년 소련의 사회주의혁명시기를 거치면서 몽골은 중국의 몽골흡수전략에 대한 경계심이 중요하게 작용하면서 1921년 수흐바토르 초이발산이 전란을 수습하였고 1924년 국호를 ‘몽골 인민 공화국’으로 칭하면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이 같은 역사적 배경속에서 몽골은 소련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는데, 일본제국주의의 몽골침략의 도화선이 된 ‘할힌골전투’는 몽골이 다시 한번 소련과의 강력한 동맹을 구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일본제국주의에 맞선 몽골과 소련의 연합군에 지원, 협력을 하게된 북한의 김일성부대는 향후 소련과의 동맹을 형성해나가는 단초를 마련하게 되었을뿐만 아니라 몽골과의 관계에서도 혈맹적인 동맹으로 발전해 나갈수있은 그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해 여름 조선인민혁명군 각 부대들은 수 많은 전투를 벌려 일제의 쏘련 침공을 저지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싸움으로는 1939년 8월의 대사하, 대장강 전투를 들수 있습니다. 대사하, 대장강전투는 적들이 할힌골 전투에 투입할 제6군을 새로 편성하느라 병력이동과 군수물자 수송에 한창 혈안이 되어 날뛰던 시기에 벌린 교란작전이었습니다. 그 싸움을 이틀 동안이나 했습니다. 적 500명을 소멸한 큰 전투였습니다.
또한 화룡현3도구 금광에서 주둔하고 있는 경찰대습격전투, 안도현 푸르허습격전투, 왕청현 백초구 습격전투를 비롯하여 할힌골 사건 당시 인민혁명군이 쏘련을 돕기 위해 진행한 적배후교란작전의 실체를 들자면 많습니다.
인민혁명군부대들의 배후교란작전에 적들이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가 하는것은 그들이 쏘만국경지대로 통하는 모든 도로들과 철도주변의 100~200m 구간에 있는 초목들을 모조리 베여버린 사실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놀음으로는 인민혁명군의 매복습격을 막아낼수 없었습니다. 인민혁명군부대들의 대담무쌍한 활동에 의해 쏘만국경지대로 통하는 철도들에서는 군용열차폭파사건과 탈선사고들이 연달아 있어났습니다.
그 결과 일제의 쏘련을 반대하는 군사적 도발에 인적역량을 원만히 동원할수 없게 하였습니다.“
이 같은 몽골과 소련의 연합군에 북한 김일성부대의 가세는 결국 ‘할힌골전투’를 일본제국주의 구체적으로는 관동군의 패배로 결말을 맺게 된다.
일본제국주의는 ‘할힌골전투’에서 5만에 달하는 사상자와 포로, 행방불명이라는 손실을 입게 된다.
‘할힌골 전투’는 결국 일본제국주의의 중앙아시아 및 소련을 향한 서북방면의 침략을 좌절시키면서 일본제국주의가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 전투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반제국주의 투쟁시기의 북한과 몽골의 협력은 이후 북한의 1948년 건국이후 과정에서 북한과 몽골의 강력한 동맹관계를 만들어 가는 중요한 밑거름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2)북한의 건국과 사회주의 건설시기 북한과 몽골의 교류협력
북한은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국하게 되는데, 그 북한의 초대 몽골대사가 즈 쌈부 였다. 즈 쌈부는 1941~1945년도에 있은 제2차세계대전시기에 주소련몽골 대사를 역임했던 사람이다. 몽골의 입장에서 소련은 가장 강력한 우방일뿐만아니라 가장 중요한 외교를 해왔던 국가인데, 그 국가의 대사를 지낸 사람을 크지 않은 신생국가인 북한에 대사로 보냈다는 것은 그 만큼 북한과의 관계를 중시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북한이 당시 세계정세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진영간의 최 전선에서 대치하고 있고, 일본, 중국등과 인접해 있는 지정학적인 중요성을 가진 요소도 작용하였겠지만, 이와 더불어 몽골과 한국의 역사문화적 연대성과 1930년대 일본제국주의에 맞선 반제국주의투쟁시기에 ‘할힌골전투’와 같은 구체적인 협력의 경험도 크게 작용했으리라고 평가된다.
“그의 외교 사업이 조선전쟁의 어려운 시기에도 계속된 것은 우연한 일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 대사로 사업하면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김일성동지와 친분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분들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가 오늘까지도 인민들속에서 전해지고 있다.
김일성주석께서는 몽골 대표단들을 접견해주실때마다 즈 쌈부 선생에 대하여 자주 회상하시었으며 1988년도에 두 번째로 몽골을 방문하시면서 그의 자녀들에 대하여 알아보시고 매해 조선에 초청하여 휴식도 시키고 손자들을 대학에서 공부시키는 등 친 아버지처럼 보살펴주신것을 보더라도...
몽골조선협회 서기장으로 사업한 즈 쌈부 선생의 맏아들 쓰 쑤렌쟈브 는 어느 회상기에서 자기가 조선의 김정일동지와 어렸을때 함께 유희를 하였다고 지적한바 있다.“
이 같은 즈 쌈부 대사의 기록에서도 나타나듯이 북한과 몽골의 관계는 역사문화적 연대성, 반제국주의 공동투쟁의 경험에 기초해서 양국의 수뇌급 인물들간의 깊은 유대관계로 발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북한과 몽골의 깊은 형제적 동맹관계는 한반도에 엄청난 재앙과 피해를 안겨준 한국전쟁과정에서 몽골의 북한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사업으로 구체화되고 발전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몽골인민들은 이미 1951년 봄에 다량의 물자와 7천필의 말을 우리나라에 보내줌으로써 원쑤들의 략탈적 만행으로 말미암아 곤난을 당하고 있던 조선인민의 축력부족을 타개하는데 다대한 도움을 주었다.
금년 1월에는 또다시 많은 물자와 500여톤의 육류, 그리고 5천여개의 모피, 의류, 그리고 5천여벌의 아동의류를 원호물자로 보내주었으며 금년 5.1절 기념선물과 24차량에 달하는 막대한 선물을 보내주었다.
조선인민은 몽골인민들의 이와같은 물심량면의 끊임없는 원조에 대하여 무한한 감사를 표시하고 있다.“
“몽골은 1952년 9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부터 3~6살 나는 111명의 남자와 89명의 여자를 포함하여 모두 200명의 아이들을 교양원들과 함께 받았다. 조선 고아들을 자이싼봉우리의 좌측에 있은 건물을 내고 들도록 하였다. 몽골측에서 여기에 27명의 인원을 임명하여 사업하도록 하였으며, 1955년에는 샤르가 모리트에 아이들을 위한 야영지를 건설하였다.”
한국전쟁과정에서 이 같은 몽골의 북한에 대한 지원은 당시 몽골의 경제수준 등이 여유가 있다고 볼 수 없는 조건에서 진행되었음을 고려할 때 그 지원수준이 대단히 높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이유는
첫째 1930년대 후반 일본제국주의의 몽골에 대한 침략과정에서 몽골은 소련과 연합군을 결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항일유격대를 이끌던 북한의 김일성부대와도 제휴하게 되었고, 일부 지원을 받았던 역사적 경험이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의 몽골 침략과정에서 발생한 ‘할힌골전투’는 몽골 입장에서는 국가존망의 위기로 까지 치닫는 상황이었었는데, 그 상황에서 북한 김일성부대의 지원은 그 부대의 크고 작음을 떠나 그 역할이 상당히 중요했다고 평가 될 수 있다. 이에 따라 몽골의 북한에 대한 동맹관계에 대한 감정은 대단히 깊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같은 감정이 한국전쟁과정에서 북한에 대한 적극적 지원으로 표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몽골과 북한은 과거 고대사로 올라갔을 때 고구려와 몽골족의 형제적인 역사문화적 공감대가 존재했었고, 그 이후에도 칭기스칸의 몽골세계제국 과 쿠빌라이칸의 원나라시기에 형제의 국가, 사돈의 나라라고 하는 인식을 가졌었던 경험들이 몽골과 북한의 상호협력과 지원을 활성화 시키는데 일정한 작용을 하였다고 보여 진다.
몽골학 전문가인 박원길 박사에 의하면, 한국과 몽골은 오랜 옛날부터 역사적으로 깊은 관계가 있다. 두 민족은 흑룡강 및 만주벌판 일대에서 일어난 형제민족이다. 같은 문화전통을 공유한 두 민족은 고구려나 몽골제국에 이를 때까지 변함없이 서로를 어루만져 주었던 역사ㆍ문화적 동반자였다. 인류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던 칭기스칸의 대몽골제국은 같은 문화적 배경을 지닌 고려를 형제의 국가로 간주했다. 그리고 대원제국 때에는 사돈의 나라가 되어 두 민족의 역사상 가장 활발한 문화교류를 행했었다. 그 흔적의 하나가 고려의 몽골풍(蒙古風), 몽골의 고려양(高麗樣)이다.
셋째 소련에 이어 두 번째의 사회주의 국가를 세웠었고, 2차 대전 이후 소련과 함께 사회주의동맹체제의 한축을 담당하였던 몽골 입장에서는 아시아에서 몽골 다음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세웠던 북한에 대해 강력한 지원의지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2차세계대전이후 사회주의진영의 입장에서 한반도는 자본주의체제와 사회주의체제간의 대립과 경쟁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선발 사회주의국가였던 몽골입장에서는 북한에 대한 지원에 적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노동신문에 의하면, 조선인민과 몽골인민은 공동의 목적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오랜기간 함께 투쟁하여온 혁명전우이며 계급적 형제입니다. 우리 두나라 공산주의자들과 인민들은 맑스레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기초하여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공동투쟁에서 언제나 긴밀히 지지협조하여왔습니다. 몽골인민은 미제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우리 인민의 조국해방전쟁시기와 전후복구건설시기에 적극적인 지지성원을 보내주었으며 오늘도 사회주의건설과 나라의 평화통일을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에 굳은 연대성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한국전쟁시기의 북한에 대한 몽골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력은 이후 사회주의건설시기에는 상당기간 소강상태를 지속하게 된다. 그 이유는 북한과 몽골 양자 공히 사회주의 초기 단계에서 경제적으로도 빈곤하였고, 사회적으로도 각자 해결해나가야 할 과제들이 산적한 상태였기 때문에 양국 간의 교류와 협력은 상당기간 소강국면을 거치게 된다. 이 같은 소강국면은 1960년대, 70년대, 80년대에 걸쳐 약30여년 동안 지속되게 되며, 그 이후에는 1980년대 말부터 진행된 소련, 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라는 세계사적인 격변이후 새로운 환경에서 양자간의 새로운 교류와 협력을 모색하게 된다.
3) 소련동구사회주의권붕괴와 한몽수교 이후의 교류협력
2차대전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진영간에 진행된 냉전의 역사는 1980년대 말 중요한 역사적 변동을 가져오게 된다. 소련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정책으로부터 사회주의체제의 모순이 분출되면서 소련과 동구사회주의는 심각한 위기상황을 겪게 되며, 결국 소련과 동구사회주의권의 급격한 붕괴를 가져오게 된다. 이 같은 소련, 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 특히 소련사회주의체제의 붕괴는 소련이 최고동맹국가였던 북한과 몽골에는 심각한 혼란과 위기를 조성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몽골은 결국 공산당독재체제가 붕괴되고 소련에 뒤이어 개혁개방의 흐름을 수용하면서 중요한 정치경제적 변동을 가져오게 된다. 핵심적으로는 시장경제제도를 수용하고 미국등 서방국가와의 수교를 통해 국제사회질서에 새로이 편입되게 된다. 그리고 북한은 소련, 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심각한 체제위협을 거치면서 핵무기 개발에 나서는 등 체제유지를 위한 정책에 골몰하게 된다.
이 같은 1990년대 이후 변화된 세계질서속와 북한과 몽골이 처하게 된 새로운 환경을 거치면서 북한과 몽골의 외교적 관계 역시 새로운 정립을 요구받게 된다.
구체적으로 북한과 몽골의 교류협력의 역사를 몽골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사이에 체결된 조약 및 협정목록을 통해 검토해보면,
1. 몽골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간의 우편물및 소포교환에 관한 협정 (1955. 9. 17 울란바따르)
2. 몽골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간의 전화, 전신 련락설정에 관한 협정 (1955. 9. 17 울란바따르)
3. 몽골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간의 경제적 및 문화적협조에 관한 협정 (1956. 11. 2)
4. 몽골인민공화국 정부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사이의 보건분야에서 협조할데 대한 협정 (1981. 9. 25 울란바따르)
5. 몽골인민공화국 정부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사이의 공민들의 호상려행조건에 대한 협정 (1986. 11. 14)
6. 몽골인민공화국 정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사이의 문화및 과학협조에 관한 협정 (1986. 11. 21 평양)
7. 몽골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의 민사, 가족 및 형사사건들에서 법률상방조를 서로 제공할데 대한 조약 (1988. 10.29)
8. 몽골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의 령사협약 (1989. 4. 7)
9. 몽골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의 항공운수에 관한 협정 (1989. 8 3)
10. 몽골정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사이의 수의방역및 수의검역분야에서 협조할데 대한 협정(1995. 6. 8 울란바따르)
11. 몽골정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사이의 수송분야에서 협조할데 대한 협정 (1996. 5. 10 평양)
12. 몽골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의 친선관계및 협조에 관한 조약 (2002. 8. 8 울란바따르)
13. 몽골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의 관계에서 쌍무적 협정들의 효력에 관한 몽골정부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정부사이의 의정서 (2002. 8. 8 울란바따르)
14. 몽골정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사이의 투자장려및 보호에 관한 협정 (2003. 11. 19 평양)
15. 몽골정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사이의 소득과 재산에 관한 2중과세및 탈세방지협정 (2003. 11. 19 평양)
16. 울란바따르시와 평양시사이의 친선도시설정에 관한 협정 (2003. 11. 19 평양)
17. 몽골정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사이의 몽골정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제공할 무상원조에 관한 협정 (2003. 11. 20 평양)
18. 몽골정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사이의 외교대표부 부지와 건물리용에서 호상적용에 관한 협정)
19. 몽골정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사이의 무역협정 (2004. 12. 21 평양)
20. 몽골정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사이의 경제, 무역 및 과학기술협의위원회 창설에 관한 협정 (2004. 12. 21 평양)
21. 몽골정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원조를 제공할데 대한 의정서 (2004. 12. 21 평양)
22. 몽골정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사이의 경제, 무역, 과학기술협의위원회 제6차회의 의정서(2005. 2. 3 울란바따르)
이처럼 두 나라 북한과 몽골사이에 맺어진 조약및 협정목록을 검토해보면, 우선 1950년대 즉 두 나라가 사회주의체제 초기 형성시기에 서로의 동맹적 필요성에 따라 활발한 조약들을 맺다가 그 이후 상당기간 즉 1980년대까지는 소강국면을 거친 것이 확인되며, 그 이후 1980년대에 교류와 협력을 시도하다 1980년대 말 소련, 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라는 세계사적인 격변을 거치면서 다시한번 침체기를 거치고 난 이후 21세기에 들어서서 새로운 세계사적 환경을 배경으로 이전시기와는 다른 새로운 차원에서 외교적 관계를 모색하고 형성해온 발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위에서 살펴 본대로 몽골은 1990년대 초반 자신의 최고동맹국가였던 소련의 개혁개방정책흐름을 따라 개혁개방정책과 시장경제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국제질서에 편입되게 된다. 이에 따라 새 몽골헌법이 1992년에 채택됨으로써 몽골과 북한사이에 맺었던 기존의 외교적 관계를 반영하는 조약의 일부 조항들을 갱신해야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에 따라 북한과 몽골은 새로운 초안을 작성하고 회담을 진행하게 되는데, 결국 북한의 백남순외무상이 몽골을 2002년 방문하여 북한과 몽골의 새로운 외교적 관계를 규정하고 총괄하는 내용의 새로운 조약을 맺게 된다. 이것이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두 나라관계의 새로운 시대를 반영하고 향후 양국간의 발전의 방향을 담아 새 세기 두 나라 관계의 법률적 기초를 공고히 하였다는 2002년에 맺은『친선관계 및 협조에 관한 조약』이다.
‘몽골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사이의 친선관계 및 협조에 관한 조약’에 따르면 두 나라사이의 친선 및 협조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두 나라 인민들의 근본이익에 부합되며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전, 진보와 번영의 기여로 된다고 인정하면서,
제3조 체약쌍방은 두 나라 의회, 정부 및 비정부조직들 사이의 연계를 도모하기 위하여 협력한다.
제4조 체약쌍방은 필요한 경우 동북아시아지역 문제들과 호상 관심사로 되는 국제문제들에 대한 쌍무적인 협의를 진행하며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에서 호상협력한다.
그리고 이에 기초하여 경제, 교육, 문화, 보건, 체육, 출판등 제반 분야들에 대한 협력을 활성화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같은 내용속에서 중요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먼저 제 3조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정부뿐만 아니라 의회 및 비정부조직들 사이의 연계를 도모한다는 것에서 확인되듯이 과거 북한과 몽골의 집권당인 사회주의당간의 교류에 한정하지 않고 새로운 국제사회간의 협력원리를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몽골은 1992년 새로 채택한 헌법에 따라 서구의 절차적 민주의의를 수용하여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가 가능하도록 하였고, 이에 따라 인민혁명당과 민주당이라는 경쟁적 정당체제를 도입하였으며, 21세기에 들어서서는 각종 비정부조직들까지도 형성되게 된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변화는 1990년에 몽골이 남한과 수교함으로써 몽골과 북한의 혈맹적, 독점적 동맹관계는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특히 남한과 몽골간의 수교이후 양국간의 경제, 문화적 교류가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되었을 뿐만아니라 몽골국민들의 한국에서의 취업 등으로 인한 인적교류도 대폭 확대되면서 몽골의 북한과의 교류협력환경은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3. 탈냉전시대와 한국과 몽골의 교류협력
1980년대후반 2차세계대전이래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권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권간의 체제대결로 빚어진 냉전체제는 소련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로 냉전시대의 종언을 고하고 탈냉전시대라는 새로운 국제정치질서를 낳게 된다.
이 같은 변동된 세계정세를 반영하여 자유민주주의국가인 한국과 사회주의 국가였던 몽골과의 관계도 새로운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된다.
1990년 한국과 몽골이 수교한 이래로 양국간의 교류와 협력의 역사를 개관해보면,
첫째 정치외교분야에서 한ㆍ몽은 1990년 3월 26일 수교 이후 몽골은 1991년 10월 오치르바트(P.Ochirbat) 몽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에서는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몽골을 방문하였으며 이후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이 국빈자격으로 몽골을 두 번째로 방문하였다. 김대중 ‘국민의 정부’에서는 한ㆍ몽골의 협력관계를 ‘21세기 상호보완적 협력관계’로 구축하였으며 노무현 ‘참여정부’에서는 양국관계를 ‘선린우호 협력을 위한 동반자 관계’로 한 단계 격상시켰다. 또한 이명박대통령은 2005년 서울시장시절 몽골을 방문하여 한몽국가연합론을 제기한바 있으며, 박근혜 전한나라당 대표도 지난 2009년 몽골을 방문하여 한국과 몽골의 협력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둘째 경제, 자원분야에서는 1990년 공식수교 이후 20여 년 동안 특히 경제 분야에서 교역의 확대 등 괄목할만한 관계 발전을 가져 온 것으로 평가된다. 양국의 교역은 꾸준히 증가하여 2008년에는 국교정상화를 이룬 1990년 대비 약 100배의 증가를 기록하였으며, 몽골에 대한 직접투자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양국은 인종 및 문화적 유대관계와 경제적 상호보완성을 바탕으로 경제통상과 투자 협력을 확대시켜 왔다. 한국은 같은 동북아 국가로서 몽골의 상징적 중요성 및 향후 몽골과의 협력 잠재력이 크다는 점을 중시, 몽골의 개혁․개방 정책을 적극 지지하고 유․무상 경제 원조를 매년 제공하는 등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많은 한국기업이 몽골에서 등록, 활동하고 있으며 KOICA 등 한국의 대외협력기구가 몽골에 상주하고 있다. 특히 한국은 세계 10대 에너지 소비 국가이며 석유 소비에 있어서는 세계7위를 기록하고 있으므로, 자원이 풍부한 몽골과의 경제협력은 상생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몽골의 입장에서 한국은 주요 교역대상국이면서 원조 국가로 향후 대양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평가된다. 더욱이 3만 명이 넘는 몽골 인이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며 이들의 달러 송금이 몽골의 대외준비자산 증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이들의 한국 내 경제활동이 직․간접적으로 양국 경제통상협력 현안에서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인의 몽골 방문도 해마다 증가하여 2008년 말 현재 중국과 러시아에 이어 제3위의 방문객 수를 기록하고 있으나, 순수한 관광객은 한국이 가장 많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셋째 사회문화분야에서는 교류가 매우 활발하였다고 평가된다. 1990년 수교 당시에는 정부 간 교류와 개별 차원에서 사회·문화 교류가 이루어졌고 본격적인 교류는 활발하지 못하였다. 몽골과 한국의 사회·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은 2000년대에 들어와서이다. 한국은 1997년 IMF 경제대란 이후 한국의 경제인들이 대거 몽골로 갔으며 이들에 의하여 몽골에 한인사회가 구축되었다. 몽골에 건너온 한인들은 초기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자리를 잡고 몽골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한편 2000년대에 시작된 몽골 산업연수생 제도는 몽골에 한국 문화를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한국에 산업연수생으로 가기 위해서는 한국어를 배워야 하기 때문에 급속도로 한국어 교육이 늘어났다. 또 이 시기 한류가 전 세계로 전파되면서 몽골에도 한류가 급속도롤 전파되었다. 한편 한국에 산업연수생으로 갔다가 몽골로 돌아온 사람들에 의하여 몽골에서 본격적으로 한국에 대한 연구와 문화가 싹트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첫째 정치외교분야에서는 몽골과 한국은 일부 학자들의 시각처럼 미래의 어느 시기에 역사ㆍ문화공동체의 성립이 가능할 정도로 민족기원이나 역사적ㆍ문화적으로 매우 가까운 나라이기 때문에 몽골에 대한 접근법은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전략이 필요하다. 즉 대승적 견지에서 한국과 몽골의 특수성을 감안한 미래 지향적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은 1990년 3월 한ㆍ몽 수교 이후 한국과 몽골의 역사ㆍ문화적 특수을 감안하지 않고 우리의 주변국 중의 하나로만 접근한 경향이 높았다. 그 문제점을 가장 잘 나타낸 지적이 우루쥔루훈데브 초대 주한몽골대사의 ‘한국과 몽골은 1990년 3월 26일 수교 이후 정치ㆍ경제적인 방면의 교류에 주력했다. 그리고 이 교류에 따라 문화적인 교류와 상호 이해가 뒤따라올 줄 알았다. 그러나 그 기대는 꿈에 불과했다. 결과는 그 반대였다. 문화적 상호이해가 없는 정치ㆍ경제교류는 서로간의 갈등만을 낳았다(2009년 2월 23일)’ 라는 지적에서 날 나타나 있다.
둘째 경제 분야에서는 한국은 몽골의 제5대 교역국의 위치를 점하고 있으나 실질적인 비중 면에서 중국, 러시아, EU 등에 비해 매우 낮은 상태이므로, 향후 양국 교역의 확대를 통해 더욱 긴밀한 교역협력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그 구체적 대안으로 FTA 체결을 통해 양국간의 무역을 획기적으로 활성화 시키고 나아가 공동자원개발등을 확대하고 전반적인 경제적 교류와 협력의 수준을 한단계 더 높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셋째 사회문화분야에서는 정치나 경제 분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그 교류와 협력이 소극적으로 다루어졌고 궁극적으로 양국의 문화를 이해하는 차원까지 가지 못하였다. 한국 문화가 일방적으로 몽골에 전파만 되었을 뿐 몽골문화를 한국에 받아들이는 노력이 소홀하였다. 일부 몽골 촌을 중심으로 몽골 문화의 전파가 이루어졌으나 관광이나 상업용에 그쳤고 본격적인 몽골 문화의 이해 수준까지 가지 못하였다. 학문적 교류는 한국 학자들의 몽골 연구 수준이 일천하여 한국이 몽골에서 몽골 학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시기였으며 한국의 몽골 학이 몽골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몽골 한국학의 경우는 한국학이란 학문보다 한국어 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이고 아직 한국학 연구의 단계까지 가지 못하였다. 또 한국과 몽골의 공동 발굴조사나 연구는 시작 단계일 뿐 성과를 내기까지에는 다소 시일이 걸릴 것으로 생각된다. 교육 분야에 있어서는 매우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으나 한국인의 몽골에 대한 교육은 비교적 소홀한 편이다. 의료 분야에서는 한국이 일방적으로 몽골을 돕는 형식이었으며 상호 교류가 초보적 단계에 머물고 있다. 사회단체나 비정부기구의 몽골에 대한 봉사도 관광 차원에 머물렀고 본격적인 협조는 최근 시작하는 단계이다. 전반적으로 양국이 상대국의 문화와 사회를 이해하기 보다는 경제적 필요에 따라 필요한 부분만 골라 쓰는 단계에 머물고 있다.
이와같은 1990년 수교이후 지난 20년동안 이루어진 한국과 몽골의 교류협력과정에서 나타난 성과와 한계 또는 문제점을 정확히 검토해서 향후 좀더 발전적인 교류협력정책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또한 21세기 급변해가는 세계정세와 동북아정세를 정확히 분석해서 같은 동북아 국가인 한국과 몽골이 어떤 국가전략을 세워야 공동의 생존과 번영을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4. 한반도와 몽골의 교류협력과 국제정치적 의미
1) 북한과 몽골의 교류협력에서 나타난 국제정치적 함의
북한과 몽골의 근현대사 과정 속에서 중요하게 확인되는 공통점은 두 나라 공히 주변에 세계최강수준의 강대국사이에 끼어 있어서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주변 강대국에 복속될 수밖에 없는 절박한 환경에서 국가체제를 유지해왔다고 할 수 있다.
국내정치와 국제정치는 그 기저에 흐르는 공동체의식에서도 차이가 있다. 질서가 잘 잡힌 국내사회에서는 보편적인 공동체의식이 존재하며, 그것은 공동의 충성, 정의관, 정당한 권위에 대한 가치관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국제정치에서 분산된 민족들은 공동의 충성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세계공동체라는 모종의 의식조차 미약하다. 사람들은 종종 무엇이 옳고 정당한가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 결과는 질서와 정의라는 두 가지 정치적 기본가치에 대한 관점들이 너무나도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 세계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국제정의보다는 국가정의를 앞세우기 마련이다. 법과 윤리는 국제정치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진정한 공동체의식이 없는 한 그것은 국내정치에서처럼 구속력을 가지지 못한다. 무력은 국내정치와 국제정치에서 다른 역할을 한다. 질서가 잘 잡힌 국내정치체제에서는 정부가 무력을 정당하게 사용할수 있는 독점권을 가지고 있다. 반면 국제정치에서는 무력을 사용하는데 있어 어느 누구도 독점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국제정치는 자구체제이며 어떤 국가는 다른 국가보다 상대적으로 무력이 강하기 때문에 전자가 힘에 의존할 위험은 항상 존재한다. 무력의 행사가 불가능하지 않는 한 그 결과는 불신과 의심이다.
조지프 나이의 이 같은 지적은 몽골과 북한의 근현대사과정에서도 확인된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몽골의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성립의 과정을 살펴보면 몽골이 세계사의 보편적 가치나 국제정의로서 사회주의이념을 수용하여 사회주의혁명을 하고 사회주의체제를 유지해 왔다기 보다는 당시 중국에 복속될 가능성이 높아 국가존망의 위기에 놓인 상태에서 국가정의 즉 국가공동체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회주의체제를 선택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몽골은 1920년대 상황에서 중국에 복속될 위기를 탈출하기 위한 전략으로 신흥사회주의 강국인 소련과 동맹을 맺는 선택을 하면서 결과적으로 사회주의체제를 수용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북한의 경우를 보면 세계최고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 있어서 언제든지 국가생존이 위협될 수 있는 환경에서는 조지프 나이의 지적처럼 국제사회의 힘의 불균형이 존재하는 조건에서 힘이 강한자가 힘에 의존할 가능성은 상존해 있는 상태에서는 불신과 의심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북한의 체제불안감과 의심은 결국 핵무기개발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북한과 몽골은 세계최고 수준의 강대국 사이에 끼어 항상적으로 국가생존의 문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지내온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두 나라의 비슷한 처지와 역사적 경험은 냉전시대라는 역사적 조건에서 소련과 깊은 동맹관계를 경험해왔다는 공통의 역사적 경험으로 까지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소련, 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와 21세기 세계화, 정보화라는 세계사적인 격변기 속에서 북한과 몽골은 서로 다른 새로운 역사적 실험을 진행중이라고 할 수 있다.
몽골은 1990년대 이후 개혁개방과 시장경제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국제정치질서속에 편입되었고, 나아가 최근에는 냉전시대에 대표적인 적대국가였던 미국과도 우호적 관계를 형성하면서 새로운 국가생존과 발전을 위한 전략을 모색하고 있는 상태이다.
반면에 북한은 소련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와 탈냉전시대 이후에도 백만명이상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심각한 경제난을 거치면서도 세계최고수준의 강대국사이에서 독자적 체제생존전략으로 핵무기개발이라는 강수를 선택하고 있다.
근현대사과정에서 비슷한 처지와 역사적 경험을 공유해왔던 북한과 몽골의 서로 다른 전략적 선택이 향후 어떤 변화와 결과를 가져올지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이지만, 세계사의 많은 경험을 통해서 볼 때 어떤 이유에서든 세계사의 흐름과 소통하지 않고, 국제사회와의 정치, 경제적 협력을 하지 않는 폐쇄적 체제가 성공한 역사적 경험은 부재하다 시피 하기 때문에 북한체제의 변화는 불가피 하다고 생각된다. 다만 그 시기와 방법이 어떻게 되는가가 문제일 것이다.
2) 한국과 몽골의 교류협력과 국제정치적 의미
한국 일부에서는 그동안 한반도와 몽골의 교류협력의 역사에 대한 평가를 기초로 하면서 상호간의 역사적, 문화적 친연성에 더하여 향후 경제적, 정치적인 상호보완성에 착목하여 남북몽골3자연방국가에 대한 아이디어가 제기된바 있다.
그 핵심내용은
우선 한국(고구려)과 몽골은 공동문명권차원에서 고대역사로부터 교류해왔고 근대이후에는 1990년 수교했으며 역사적, 문화적으로 연관성이 대단히 높다. 인류학차원에서는 한국인, 몽골인의 90%에서 발견되는 몽골반점에서 확인되듯이 핏줄연관성도 높고, 고려-원나라 시기에는 형제국 관점에서 상호관계를 높이기 위한 정략결혼정책을 펴 2만명 넘는 여성들이 결혼을 통해 이주함으로서 서로 ‘신부신랑 나라’ 또는 ‘어머니 나라’로 부르기도 했었다.
이를 기반으로는 두 나라 국민은 외모, 언어, 생활방식과 문화적 유산 면에서 많은 유사점을 갖게 된 것이다. 특히 언어적 차원에서도 한글과 몽골의 언어가 역사적 친연성을 가지고 있을뿐만 아니라 그 언어구조에서도 유사성이 많기 때문에 언어적인 교류와 협력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일수 있는 방안에 대한 고민도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경제적 차원에서 보면 몽골은 한반도의 7배가 넘는 크기에 1000억t의 석탄과 5.4억t의 구리, 50억배럴의 석유등과 철광석, 주석 및 형석, 준보석 등 세계8위의 자원부국이나 인구는 300만명도 안되고 자본과 기술이 부족하여 개발을 못하고 있다. 또한 현재 3만여명의 몽골인이 한국에서 일하여 보내는 송금액이 몽골의 대외준비자산 증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고 하며, 2000년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 ‘서울거리’가 조성되기도 했다. 따라서 한국과 몽골의 이 같은 역사문화적, 경제적 연관성은 연방국가를 모색하는 근거와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동북아시아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독특한 지역으로 동북아에 위치한 한국과 몽골의 안보는 공동으로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상호협력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당면해서는 북경올림픽이후 본격화되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서도 칭기즈칸의 고향이자 한국 고대 역사유적의 보고인 동몽골에 대한 공동의 조사, 연구사업은 강력한 대응무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향후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할 북한문제를 대한민국이 주도적으로 해결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를 기반으로 통일을 이루어 내려면 북핵문제 해결은 6자회담 프로세스와 함께 진행해나가면서도 긴밀한 한미동맹에 기반하여 동북아질서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같은 차원에서 남-북-몽골 3자연방통일국가라는 아젠다는 한반도의 새로운 미래를 모색하는 유의미한 카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남-북-몽골 3자연방통일국가’에 대한 모색 차원에서 검토될수 있는것은,
우선 1단계로 ‘코리아, 몽골 경제문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한국, 몽골간의 FTA를 이른 시일내에 실현시키고, 더불어 상호비자면제협정을 맺어야 한다. 이 두 가지 과제만 실현되도 한국과 몽골의 경제협력은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다. 또한 역사적, 문화적 차원에서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공동대응을 추진하고, 한반도와 몽골의 공통의 역사현장인 동몽골에 대한 공동탐사와 문화공동체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협력을 발전 시켜 코리아몽골 역사문화 공동체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2단계에는 남-북-몽골간의 국가연합을 추진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는 각 국가의 독립성, 즉 독자적 정부와 군대 그리고 독자적 외교권과 국제법상의 독립주체로 활동하면서 현재 유럽연합과 같은 통합된 중심기관 즉 ‘코리아, 몽골 연합’을 우리나라와 몽골간의 역사적 인연이 깊은 제주도에 세워 통합헌장및 상징깃발을 만들고 경제적, 문화적 분야에서 통합력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3단계에 남-북-몽골간의 연방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 모델은 대영연방국 즉 ´그레이트 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정식명칭)이라 할수 있다. 영국은 연방국가인 셈인데, 그레이트 브리튼으로 줄여서 말하고 있고 구체적 구성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지역과 북아일랜드지역으로 되어 있다. 남-북-몽골 연방통일국가 역시 정식명칙은 ´United State of Great Corea and Mongol´이 되고 약칭 Great Corea 연방국가 구성 할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작업은 한미간의 긴밀한 협의와 협력이 필수조건임을 이해해야 한다. 역사적 경험으로도 독일통일 과정에서 콜 총리가 가장 역점을 기울였던 것이 미국과의 협의, 협력이었었다. 그리고 위의 남-북-몽골간의 3자연방통일국가 방안에 대해서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좀 더 구체적인 연구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이 같은 남북몽골3자연방통일국가의 모색은 동북아의 새로운 국제정치질서를 창출하는 것으로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한국과 몽골의 수교일은 동양평화론을 제창하였던 안중근 의사의 기일인데, 이는 당시 한국과 몽골의 수교를 뒷받침하였던 최서면선생의 깊은 역사적 사색의 표현이었다고 평가된다. 안중근 의사는 ‘서세동점의 국제정세 속에서 동양 3국이 뭉쳐서 대적하여야 할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같은 황인종인 이웃나라의 가죽과 살을 벗기고 베어서 차지하려고 하니 이는 어부지리를 서양세력에게 그대로 주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일본이 한국과 청나라의 영토를 침범, 지배하여 동양평화를 깨뜨리고 있기에 이등박문을 사살하여 동양평화의 가치를 세우고자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과거 근대시기에 동북아질서에서 평화를 깨뜨리는 역할을 일본이 했다면, 최근 21세기 이후에 G2 즉 미국과 함께 세계 2대 강국으로 부상한 중국이 동북공정등으로 동북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가 확대되어 가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에 우리는 동북아의 평화를 세우기 위한 차원에서도 중국과 일본과 함께 코리아몽골연합이 동북아에 있어서 3자간의 힘의 균형을 이룸으로써 21세기 동북아의 평화를 정립시키는데 유효한 카드가 될수 있음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5. 맺음말
2009년 12월 서울대 규장각에서 ‘근대성에 대한 회의: 고려말의 세계화 과정(Questioning the Modern: Globalization in the late Koryo)’으로 특강을 한 존 던컨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UCLA) 한국학연구소장은 ‘한국은 고려 말에 원나라와 대규모 인구 이동과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교류로 세계화를 경험했습니다. 한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지구화(세계화)라는 용어는 어제 오늘 생긴 신조어가 아닌 이미 7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인적 교류나 다방면의 교류 등 당시 어느 모로 보나 현재 목격하고 있는 지구화 현상들과 아주 흡사하다’ 고 평가하였다.
이 같은 평가는 그동안 한국의 국사교과서에서 나타났던 몽골과 관련된 역사인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동안 우리의 역사인식이 ‘삼별초의 항쟁’으로 대표되는 몽골의 고려침략과 식민지상황적인 인식에 기초하여 이에 대항한 민족저항운동으로서 삼별초가 부각된 것과 연관된다. 그런데 이 같은 역사인식과 역사서술이 이루어졌던 배경을 살펴보면 첫째 조선시대이후에 형성된 ‘소중화사상’과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의 역사는 고조선, 고구려, 발해, 고려시대를 거치는 과정에서는 지속적으로 아시아의 북방문명을 선도, 주도하면서 세계와 소통하고 교류해왔던 것인데, 조선시대 이후에 북방의 역사를 오랑캐의 역사로 폄하하고 소중화사상을 국가경영이념으로 채택하면서 몽골과 고려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것과 연관된다. 둘째 일제 식민지시기에 형성된 식민사관의 학자들과 연관된다. 식민사관학자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근대화론을 미화했던 문제에 대한 콤플렉스를 희석화 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고려시대 ‘삼별초의 항쟁’을 국사교과서에서 부각시키다 보니 국민다수의 인식으로 몽골의 침략과 식민지라는 인식이 많이 형성된 것이다. 셋째 1980년대 이후 다수 등장한 진보주의 역사학자들과 연관된다. 이들 진보주의역사학자들은 한국근현대사를 민족해방운동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것과 연관 지어 한반도의 역사를 저항주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과정에서 ‘삼별초의 항쟁’이 부각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은 존 던컨 교수의 견해 등에서 확인되듯이 몽골과 고려의 관계사는 본질적으로 혼인 동맹적 성격이 강하였고, 고려가 세계제국이었던 몽골과의 관계를 통해 최초의 세계화를 경험하였던 것이다.
그 이후 근현대사 과정에서 한반도와 몽골의 역사는 새롭게 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1990년 개혁개방으로 전환한 몽골과 수교를 맺으면서 새로운 관계들이 빠른 속도로 확대 발전하고 있고, 북한에서는 일본제국주의시대때 일본제국주의에 몽골과 함께 대항하였던 ‘할힌골 전투’를 통해 동맹적 관계를 발전시켜오다가 1990년 개혁개방이후에는 새롭게 재정립되는 과정에 있다. 이에 대해 몽골사람들은 ‘조선사람들은 몽골에 대하여 조금 알고 있었지만 몽골사람들과 오래전부터 연계를 가지고 있던 역사에 대하여 돌이켜 보면서 우리나라와 인민에 대하여 매우 친근한 감정을 품고 있다.’
그리고 북한의 주 몽골대사중 한명인 스 공가도르쥐는 몽골의 도르노드지역(동몽골지역)과 조선의 두만강지역은 미래의 고기덩어리요 개척지라고 하였다. ‘그는 대사로 사업할 때 인접나라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여 왔다. 또한 대사는 1989년부터 논의되고 있던 ‘두만강’계획에 우리가 일찍부터 적극 참가하여야 한다는 것, 이것은 21세기의 방대한 계획이며 조선의 라진, 선봉, 청진항들은 앞으로 우리나라가 대양에로 진출하기 위한 3번째의 출구로 만들 수 있다는 것, ‘두만강’계획은 풍부한 자연부원을 가지고 있는 대륙과 세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도로요충지이며 전략적으로 전망이 큰 지대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는 우리가 조선측에서 여러차례 제기해온 몽골의 도르노드지역(동몽골지역)에서 농사를 할 데 대한 제안을 지지해주어야 한다고 제기하였다.‘
이와 같은 몽골사람들의 견해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은 한반도와 몽골이 역사문화적으로 오래전부터 깊이 공유해온 부분이 많았다고 평가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현재적인 조건속에서 몽골과 한반도가 함께 발전시켜나가야 할 지역으로 동몽골지역을 구체적으로 검토해온 것 등에서 상호 깊은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한반도가 현재 남북으로 분단된 조건에서는 한반도전체의 통합적인 시각에서 몽골과의 상호관계를 발전시켜나갈 전략을 수립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남과 북이 현재적 조건에서 몽골과의 교류와 협력을 발전시켜나가는 정책을 수립하는 것과 더불어 향후 한반도 통일이후에 동북아와 아시아의 새로운 질서 속에서 한반도와 몽골의 상호 협력의 발전전략을 세워나가는 비전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한국의 입장에서는 본 논문에서 검토한 바에 기초해서 평가해볼 때 몽골과 북한이 근현대사과정에서 대단히 깊은 동맹적 관계를 맺고 발전시켜왔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정책수립을 고민해야할 것이다. 상대적으로 비교해볼 때 한국과 몽골은 지난 1990년 몽골이 기존사회주의체제를 포기하고 개혁개방으로 전환하면서 수교관계를 맺은 이후 양국관계를 발전시켜 왔다면, 북한은 1930년대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한 연대투쟁으로부터 출발해서 양국 지도층 인사들의 깊은 인연과 연관되어 양국관계가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한국은 1990년 몽골과 수교한 이후 북한보다 훨씬 많은 경제적, 문화적 교류를 급속도로 성장시켜온 측면도 존재한다. 이 같은 역사적, 사회적 과정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정확히 하고 이를 기초로 해서 양국관계의 장점과 단점을 진단하여 향후의 발전전망을 올바르게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첫댓글 논문작성시에 좋은 참고자료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한몽관계 20주년이란 주제인데, 한몽관계에 대한 얘기는 고작 13세기 얘기뿐이고 한심하기 이를 짝이 없습니다.
조몽관계 60주년 책의 내용을 많이 따온 것같습니다. 코리아몽골재단 회의 교수이니 몽골 왔다갔다 하면서 책을 구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