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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연산군을 폭군, 패륜아로 만들었는가
4월 16일은 셋째 수요일.
장거리 길 떠날 때 말고는 삼각산 자락(우이동)에 칩거하는 늙은이로 하여금 미아리
고개를 넘게 하기 위해 호경필이 제안해 갖는 월례 모임이 있는 날.
북한산 구간을 마친 후 함께 간 3수(水)모임에서 "내친 김에 도봉산구간도 하시지요"
이구동성으로 권했으나 나는 립서비스 쯤으로 받아들였다.
거리는 북한산둘레길의 2분의 1 남짓에 불과하나(26.1km) 사패산 등산에 버금가는
구간이 많기 때문이다.
인천 텔레토비님네와 안골까지, 안골 ~ 송추 ~ 교현(우이령입구)은 나홀로 걸으며
이미 확인했기 때문에 나도 맞장구는 쳤으나 농담 수준이었을 뿐이다.
한데, 아내의 자신감은 수직 상승중이었고 진지하게 받아들였는가.
하루를 쉬었을 뿐인 4월 18일 아침에 북한산 때와 달리 점심 도시락을 준비한 아내.
말이 씨가 된다?
북한산둘레길 완주로 만족할 뿐 계획이 전혀 없는 늙은 부부의 도봉산 구간 걷기가
이런 립서비스, 농담 등에 자극되어 시작된 셈이다.
집에서 부터 걷기로 한 우리는 우이동 종점으로 갔다.
역순(반시계방향)으로 하려면 우이령길 입구에서 연산군 묘역으로 가야 한다.
백두대간 추가령(북쪽 강원도 세포군)에서 분기해 장명산(경기도파주시)에 이르는
한북정맥이 막판에 이룬 도봉산의 한 줄기 시루봉의 끝자락이다.
지금은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지만 당시에는 경기도 양주군 해등촌면
(海等村) 원당리(元堂)였다.
폭군, 패륜아의 전형으로 지탄받고 반정으로 쫓겨난 폐주, 강봉을 거듭해 군(君)이
된 이조10대 연산(燕山/재위1494~1506).
유배지 강화도 교동에서 사망, 그 곳에 있던 묘를 부인 신씨의 간청으로 이장했단다.
부인과 딸, 사위의 묘가 역내에 있는 것은 이해되나 의정궁주 조씨(義貞宮主趙氏)는
누구기에 함께 있는가.
오래 전에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에 실린 어이없는 글이 생각났다.
의정궁주가 연산군의 제2부인이라고.
궁주는 이조 초기, 내.외명부에게 내리는 봉작을 말하며 조씨는 세종 때 상왕(태종)
의 후궁으로 간택되었으나 책봉 전에 태종이 승하함으로서 의정궁주로 봉되었다.
한데, 왜 연산군 묘역에 가족처럼 함께 있음으로서 그같은 오류를 낳게 할까.
이 곳 원당리 일대의 땅 주인(당시)은 임영대군(臨瀛大君)이었단다.
세종의 제4왕자로 왕명에 따라 무사(無嗣)인 이태조의 후궁 성빈 원씨(誠嬪元氏)와
의정궁주의 제사를 맡은 임영이 자기 땅에 분산하여 묘를 쓴 것이다.
연산의 폐비 거창신씨는 임영대군의 외손녀다.
임영의 딸 중모현주(中牟縣主)와 훗날 영의정에 오른 사위 신승선의 딸이니까.
(현주는 이조시대 외명부의 정삼품 품계)
신부인의 상소로 이곳으로 이장할 때는 이 땅에 연산의 딸과 사위 구문경(具文景)이
누워있는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선영이었다니까 소유권의 변동이 있었다 할까.
용안에 손톱자국을 낸 것이 폐비로 쫓겨날 만큼 큰 죄과라 해도 꼭 죽여야만 했나.
생모의 '금삼(錦衫)의 피'(박종화의 소설제목)를 보고도 속된 말로 꼭지가 돌지 않는
다면 그런 놈을 자식이라 할 수 있는가.
그는 즉위 초부터 다방면에 개혁적이고 괄목할 만한 일들을 했다.
성군의 자질이라는 찬사도 있었다.
그런 그가 폭군이 되고 패륜아가 되었다면 까닭이 있지 않은가.
누가 그를 폭군, 패륜아로 만들었는가
생모를 그리는 애절함을 달래주기는 커녕 건건사사 비토로 일관해야만 했던가.
'폭군연산'은 어쩌면 사림파와 훈구파 그들의 작품이었다.
근래에는 사계(斯界)에 연산군에 대한 재평가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듯 하며 1991
년에는 연산군묘가 사적 제362호로 지정되었다 .
군으로 강봉되었기 때문에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 라는 묘비는 수긍되나 뒷면의
'정덕팔년이월이십일장(正德八年二月二十日葬)'이 또 내 부아를 돋우었다.
폐주의 무덤까지도 명나라 연호(명의 10대 황제 정덕제의 연호/재위1505~1521)를
써야 하는 한심한 조상에 대한 울분일 것이다.
이토록 못나기 위해 위화도 회군을 하고 역성혁명을 일으켜 왕이 되었던가.
소위 조선이라는 새 왕조가 들어서자마자 2번의 왕자의 난을 비롯해 어린 조카의 왕
좌를 찬탈하기 위한 정난(癸酉靖難)이 있었고 사화에 이은 반정으로 왕이 쫓겨났다.
100년 남짓 기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처참하게 죽어갔던가.
500년 왕국이라 하나 무수한 사화(士禍)와 옥사(獄事), 환국(換局), 심지어 사옥(邪
獄)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무참한 죽임을 당했다.
연호도 없는 하찮은 왕국의 권력을 위해서.
현 방학동의 일부인 해등촌면 원당리는 600여년에 걸친 파평윤씨의 집성촌이란다.
아직도 '음용적합' 판정을 받는 샘이 그 오랜 세월 주민의 생명수가 되어왔단다.
876세(1968년지정될 때 830세였다니까)로 서울시에서 최장수 시지정보호수 제1호
은행나무를 포함해 자연 친화적 공원으로 조성된 원당공원이 아담하다.
왕실길 맞는가
도로(방학로) 건너편, 시루봉에 한발 더 가까이에 정의공주(貞懿公主)와 양효공 안
맹담(良孝公安孟聃/서울시유형문화재 제50호)의 묘역이 있다.(방학3동 산63-1)
이조4대 세종의 딸 정의공주 부부의 묘다.
북한산국립공원은 우이동쪽 우이령길 입구~정의공주 묘의 1.6km구간을 '왕실묘역
길(20구간)'이라 명명했다.
연산군은 성종의 계비인 폐비 윤씨가 폐위되기 전에 출생, 적자의 신분으로 세자에
책봉되었지만 폐위 후 후궁 소생 왕자의 신분인 군으로 강봉당했다.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이조 왕실의 족보)에도 묘호와 능호 없이 한낱 왕자의
신분으로 등재되어 있고 재위기간의 기록도 실록이 아니고 '연산군일기'로 칭한다.
정의공주 역시 훈만정음 창제에 크게 기여했다 하나 하가(下嫁)했다.
왕실(王室)이란 왕의 집안이라는 뜻인데 족보에도 제대로 등재되지 못하는 사람과
시중 말로 출가 외인, 두 사람을 두고 왕실묘역이라 하기에는 명분이 빈약하다.
구간 설명기에는 은행나무의 수령이 830년으로 되어 있는데 지정 때인 1968년 2월
26일로부터 반c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830년으로 정지되어 있다니?
830세 이후에는 나이를 먹지 않는 나무?
시루봉 자락 둘레길 인근에는 임영대군의 아들 오산군의 묘역과 한성부 좌.우윤(현
서울시 부시장)을 지낸 목서흠(忠貞公睦叙欽)의 묘도 있다.
도성의 내로라 하는 사람들이 지근의 도성 밖에 묘를 쓴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양주땅 북한산(도봉산포함)자락도 그래서 묘가 많은데 전통으로 굳어졌나 4.19국립
묘지를 비롯해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애국선열들의 묘역이 되었다.
둘레길은 정의공주 묘를 지나 사천목씨 재실 앞에서 방학동길(19구간)로 바뀐다.
양주군 해등촌면 암회리(岩回)에서 노해면 방학리(1914년), 성북구(1963년)와 도봉
구(1973년) 방학동으로 변천을 거듭한 지역을 지나는 길이다.
방아(곡식을 찧거나 빻는 기구)가 있는 곳이라는 뜻인 우리말 ‘방아골'(굴)이 한자화
과정에서 비슷한 음(音)인 방학리(放鶴里)가 되었다는 마을.
도봉산 줄기가 동남으로 뻗어 내려가다가 되돌아와 암회리라 했는데 일제강점기에
학이 날아가는 형국의 지세라 하여 방학(放鶴)이라 했다는 설도 있는 마을이다.
이즘에는 우스갯말로 학생들이 가장 선호한다는 마을이다(늘 방학이니까)
"방학능선을 천천히 걸을 때 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내는 도봉산 주봉도
풍치를 자아낸다"고 추임새를 넣고 있는 당국.
설마 코끼리 옆구리에 앉아있는 파리에 비할 주봉, 보통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작은
돌기둥을 두고 하는 말일까.
꼬투리를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표현을 분명하게 하라는 것이다.
도봉산에는 가장 높은 봉우리를 말하는 보통명사 주봉(主峰)이 아닌 고유명사 주봉
(柱峰)이 있기 때문이다.
방학동길이야 말로 걸을 맛이 나는 구간이다.
기존 산책로와 등산로를 헷갈리지 않도록 연결하고 다듬은 정도지만 금지된 도봉산
등산로와 만나고 헤어지기를 자주 해도 잘못 들 염려 없는 길이다.
같은 산자락길인데도 바위지대가 많은 뒷쪽(은평구)과 달리 부드럽고 친화적이라
지루하지도 않다.
많은 데크와 계단을 만들어 오히려 맛을 떨어뜨리는 과잉 배려가 없다면 더욱 좋을
텐데 거금을 들여 망친 꼴이 되어 유감이다.
길가에는 포도밭도 있다.
이베리아반도의 순례길에서는 루트마다 광대한 포도밭 가운데로 난 길을 많은 순례
자들이 거침도 부담도 없이 걸어도 되는데 여기 포도밭 주인은 어떤 생각일까.
우리나라 땅주인은 거개가 사유지라는 이유로 통행을 막고 우회하라 하기 때문이다.
북한산둘레길 전체 전망대 중에서 가장 이색적인 멋과 맛을 주는 스크루(screw/螺
旋) 계단 쌍둥이전망대는 전망의 명당이다.
나선 계단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층(層/floor)의 개념은 없으나 10m는 족히 될 것이
므로 4층쯤 될 높이의 데크에서 4방의 멋진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시야가 없는 날이라도 도봉산에서 시계방향으로 수락산, 불암산과 아차산, 북한산
일대와 그 안의 시가지를 관찰할 수 있으니까.
비교될 만한 전망대로는 영산강자전거길 나주 비룡산의 느러지관망대(메뉴'강따라
길따라' 12번글 참조)라 하겠는데 난형난제(難兄難弟)라 할까.
바위와 나무가 있는 그늘에서 도시락을 먹고 출발했다.
방학동길 끝 무수골에도 식당이 있지만 때를 거르면 걷지 못하는 아내에게는 너무
멀기 때문에 점심을 싸오지 않았더라면 낭패할 뻔 했다.
입산 취사가 금지된 후 아내와 등산한 적이 없기 때문에 산에서 둘이 도시락 먹기는
아마 최초라 생각된다.
밥맛도 분위기도 괜찮은데 입맛 나자 양식 떨어지는 형국인가.
남은 세월이 별로 없을 것 같으니 말이다.
황당한 이야기들
무수골 세일교 앞에서는 3.1km방학동길에서 3.1km 도봉옛길(18구간)로 바뀐다.
옛부터 무수골과 도봉산 주 탐방로를 잇는 길이다.
수유현(水踰峴) ~ 누원(樓院/다락원) ~의정부를 거쳐 경흥에 이르는 옛 경흥대로가
이 길이며 불귀객이 되고 만 함흥차사도 이 길로 올라갔단다.
'아무 근심 걱정이 없는 골짜기 마을'이라는 뜻의 무수골(無愁).
원래의 이름은 수철동이었으나 이조9대 성종8년(1477)에 세종의 17째 아들 영해군
(寧海君/후궁 신빈 김씨 소생)의 묘가 이곳에 조성되면서 바뀌었단다.
수철동(水鐵) 이름이 시사하는 유래도 그럴싸 하다.
대장간이 있다 해서 부르던 무쇠골이 무수골로 변음되었다는.
먼저 간 아들의 묘를 찾아왔다가 약수터의 물을 마신 세종이 “물 좋고 풍광 좋은 이
곳은 아무 근심 걱정이 없는 곳” 이라 했다 하여 유래되었다 하나(도봉구 문화관광)
황당하기 짝이 없다.
세종은 1450년에 승하했고 1435년에 태어난 영해군은 세종 승하 27년 후인 1477년
에 시밍헸는데 가능한 일인가.
아무튼 이 곳은 서울시 유형문화재제106호로 지정된 전주이씨 영해군파 묘역이다.
황당한 이야기는 또 있다.
영해군의 묘역 아래에 있는 작은 봉분 묘에 대한 설명이다.
세종 승하 후 연산군 첩의 아버지가 영해군이 사는 호화 저택을 뺏기 위해 영해군이
조광조와 내통했다는 구실로 처단하려고 할 때 노비 금동이 목숨을 바쳐 영해군을
무사하게 했다나.
영해군은 연산군이 왕 되기(1495) 18년 전에 사망했으며 조광조는 영해군 사망 5년
후(1482)에 태어났거늘 왜 이러시나.
무수골은 여전히 친환경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는 서울땅이다.
서울쪽 도봉산골짝에 이만큼 너른 농지가 있다니 신기하고 서울에서 전통적 이앙과
추수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며 인기있는 주말농장지역이다.
나는 도봉산 주능선에서 보문능선을 타다가, 또는 우이암에서 원통사로 내려가다가
무수골로 방향을 틀 때가 있다.
그 까닭은 무수골 농촌 풍경의 매력을 맛보고 싶어서다.
"세종이 재위 당시 찾았다가 물 좋고 풍광이 좋아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라 하여
그 이름이 유래된 무수골에는 세종의 아홉째 아들인 영해군의 묘..."
도봉옛길을 안내하는 '국립공원관리공단'의 글이다.
'도봉구 문화관광'과 달리 '재위당시'라 했으므로 아들 영해군의 묘와는 무관하지만
17째인 영해군의 서열이 9째로 껑쭝 올라가다니.
세종의 자녀는 소헌왕후 심씨가 낳은 8남 2녀와 영빈 강씨의 1남, 신빈 김씨 소생 6
남, 혜빈 양씨 소생 3남, 숙원 이씨의 1녀, 상침(尙寢) 송씨의 1녀 등 18남 4녀다.
영해군은 출생순으로는 22명중 20번째가 되며 아들로는 18명 중 서열 17번이다.
(司記 車氏 소생 옹주가 있으나 2살때 요절했으며 첫째인 공주와 18째 아들도 요절)
이토록 허술하고 부실하기 짝이 없는 국립공원관리공단을 어떻게 이해한다?.
성신여자대학교는 무수골을 집중공략하고 있나?
세일교(무수천) 주변에 체육시설부지, 난향원과 난향별원(사업용생활관?)이 있다.
나찌 독일의 패앙 이후 독일에서 일어난 아카데미(대화) 운동처럼 우리나라에서도
합숙하며 대화와 친교를 통해 이해와 일치를 이루려는 경향이 날로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을 간파한 대학(재단)들은 늘어나는 수요에 맞춰 장소 제공의 수익사업
으로 재미를 보고 있는데 성신여대의 무수골 땅과 시설들도 그러한 목적?
동란으로 폐허가 된 서울에서 일부 고등학생을 포함한 많은 대학생들이 각종 서클
(circle)활동을 하던 1950년대 말~1960년대에는 대관(貸館)이 어려워 애를 먹었다.
건물과 시설이 절대 부족했기 때문이다.
대학들도 동아리마다 방 하나씩 차지할 수 있게 되고 MT(membership training)를
비롯해 각종 모임의 장소가 전국에 지천인 오늘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유니버설 디자인한 에코엔리어링 구간이라고?
세일교 ~ 윗무수골에는 불교사찰 능혜사가 있고 옆에 기독교(개신교) 교회도 있다.
'마중물'이란 펌핑(pumping)할 때 펌프에 미리 붙는 물을 말하는데 교회 이름이다.
8도 곳곳에는 사찰에 밀착하여 세우는 교회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
불자들의 개종을 목표로 한 개신교의 적극적 공략을 의미하는가.
종교 간의 대화가 활발해 가고 있는 시대에 타 종교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거부하는
일부 기독교의 독선이다.
여기 마중물교회도 그 유형에 속하는가.
이 교회는 타 종교 신도의 영혼 걱정보다 우리 글 공부부터 더 해야 할 것 같다.
"주님께서 흘리신 보혈의 피가 마중물의 표범"이라니 무슨 뜻인가.
보혈은 예수의 피를 뜻하므로 피는 불필요한 겹말이다.
표범은 설마 고양잇과에 속한 맹수를 말하는 것은 아닐 테고 혹 표본(標本)의 잘못?
차가 다니는 시멘트 도로가 끝나고 탄력 있는 흙길이지만 방부목에 묻혀버렸다.
영의정을 추증받은 진주류공 양의 문집시비((晉州柳公諱壤文集詩碑)와 문중묘역을
지나면 고갯마루에 '국립공원 에코엔티어링 전망대 가는 길' 표지판이 서있다.
또, 90m + 130m구간을 "장애인, 노약자, 어린이 모두가 북한산 둘레길을 탐방할 수
있도록 조성한 유니버셜디자인 시범 적용구간"이라고도 했다.
에코엔티어링(ecoenteering)은 에콜로지(ecology/생태)와 오리엔티어링(oriente
ering/지도와 컴퍼스로 목적지를 찾는 게임)의 합성어로 숲, 공원 등 산야에서 일정
지점을 지나 목적지에 도착하는 기록경기를 말한다.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보편적 설계)이란 장애 유무나 나이 등에 관계
없이 모든 사람이 보다 편하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게 설계하는 것을 말한다.
일명 'Design for All'(모두를 위한 설계)'이다.
경사진 한쪽에 기둥을 박아 넓이와 높이 등 균형을 잡은 방부목 길과 전망이 별로인
데크 전망대가 소위 유니버설 디자인한 에코엔티어링 구간이란다.
"고령화 시대에 대비하여 교통약자(장애인, 노약자 등)도 둘레길을 편안하게 탐방할
수 있도록 배려한 시설"이라는데, 그럼 여기 까지는 헬리콥터 타고 와야 하는가.
이것을 어떻게 유니버설 디자인이라 하며 에코엔티어링 구간이라 할 수 있는가.
유니버설을 유니버셜이라 했는데 이 난해한 신어와 합성어의 속뜻을 제대로 알기나
하는지.
에코엔티어링 구간을 벗어나면 보문능선(도봉탐방지원센터~우이암) 길이다.
둘레길은 이 길 따라 탐방지원센터 앞 통일교를 건넌 후 잠시 다락능선 길을 따른다.
통일교(도봉계곡)로 내려가는 길가에는 대조되는 두 사찰, 조계사와 능원사가 있다.
조계종 도봉사(道峰寺)가 천년 넘는 역사에 소실을 거듭했으나 복원도 거듭한 고찰
이라면 한국불교 도봉산능원사(能園寺)는 단청 냄새도 가시지 않은 신설 사찰이다.
40여년 전, 경기도 여주시(북내면 당우리)에 종파를 초월해 창건한 능원사에서 시작
했으며 미륵불을 본존으로 하여 대중현대불교의 구현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절이다.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와 평화통일을 기원하고 있으며 신도 관리(신도회)
가 전혀 없고 본인이 정성 발원하는 생활불교 사찰로서의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나.
여러 해(6년?)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완성된 건물들은 미륵불과 용화세계에
대비한 가람이라기 보다 졸부가 된 천민의 한풀이 같다고 할까.
그나저나 이 절 주지(金法光)에게는 화수분(河水盆)이라도 있는가.
이웃의 천년고찰 도봉사도 경매시장에 내몰리는 불운을 겪었는데 신도들의 활동이
전혀 없는데도 이런 거대 사찰이 완성되어 유지되고 있으니.
도봉탐방지원센터 앞에서 나는 욕심을 눌러야만 했다.
다락원까지(18구간 끝) 더 가고 싶었으며, 그래야만 다음 일정이 수월할 것 같으나
아내가 동의해 줄 것 같지 않아서.
쌍둥이전망대 외에는 부드러운 오늘의 둘레길에서도 무수골에서 끝내려 한 아내가
여기까지 연장한 것도 고맙고 획기적인 일이거늘.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