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8일 구제의 성모 대축일
삼위일체 수도회의 주보
읽기 전에_
우리가 삼위일체 수도회의 주보인 『구제의 성모』에 대해서 알아보기 전에, 성모님은 여러명이 아니라 단 한명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수 많은 성모 호칭이 세상에 널리 알려 져 있는데 이는 성모님의 호칭이 다양하게 있는 것이지 성모님이 여러명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아래의 내용에서 나오는 성모호칭인 『구제의 성모』와 『묵주기도의 성모』 전부 같은 성모님이지만 불려지는 호칭이 다름을 인지하여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삼위일체 수도회의 주보는 『구제의 성모』입니다. 이 ‘구제’라는 단어의 원어를 살펴보게 된다면 『레메디움 Remedium』이라는 라틴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레메디움’』의 어원적 정의는 회복, 치유로서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건강과 연관이 있습니다.
- 수도회의 주보, 구제의 성모의 역사
수도회 안에서의 『구제의 성모』 신심에 대한 초기 공동체의 기록은 전혀 찾을 수 없지만, 성모님께 향한 신심에 대한 것은 명확하였습니다. 유럽의 많은 신자들 사이에서 생긴 신심운동은 16세기에 들어서 그 형태가 드러났다. 역사적으로 남아 있는 기록은 전혀 없지만 신앙으로서 이어져 오는 수도회의 전승을 토대로 초기 삼위일체 공동체가 『구제의 성모』 신심 예배를 드렸다고 믿고 있다.
삼위일체 수도회가 창립되고 배를 타고 이슬람 세력들의 영토에 가서 그리스도인 노예를 구출해 내는 여정 속에서 그들 모두를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요한 드 마따 성인』은 성모님께 간절히 청하게 되었고, 성인의 간청에 성모님께서 발현하시어 노예 구제에 필요한 동전이 충분히 담긴 주머니를 건내 주셨다.
뿐만 아니라,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인 노예를 구제하는 일에 있어서 자유인으로 구제된 노예들에게 씌워주었던 삼위일체 수도회 『스카풀라』를 『요한 드 마따』와 『펠릭스 드 발루아』 두 창립자 성인에게 건내시기도 하였다.
이러한 성모님의 발현에 관한 전승에 따라서 『구제의 성모』상이나 성화를 제작할 때에 동전이 담긴 주머니와 삼위일체 수도회 『스카폴라』를 두 성인에게 건네 주는 모습이 핵심 상징이 되았다.
『구제의 성모』님에 성모 호칭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이 최초로 발견된 것은 15세기경에 기록된 문서에서 발견됩니다. 하지만, 『구제의 성모』라는 성모 호칭이 사용된 것은 그보다 1세기 앞선 14세기로 추정이 되어진다.
『구제의 성모』에 대한 신심은 『묵주기도의 성모』 신심과 어느정도 관련이 있는데, 1571년 유럽의 그리스도교 왕국을 위협하던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서 맞서 해전을 치뤘던 『레판토 해전』이 발발할 당시 유럽 전역에서 성모님께 승리를 간청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그 중 『로사리오 성모』 에 대한 심심이 각별하였다고 한다. 당시 기독교 연합 해군 이끌었던 『후안 Don Juan de Austria』는 전쟁에 나서기 앞서서 『구제의 성모』에게 전쟁의 승리를 위해 기도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유럽의 상황 속에서 삼위일체 수도자들은 특별히 『구제의 성모』께 중재를 청하였다고 한다. 해군 사령관 후안은 『레판토』의 대승을 거둔 다음 삼위일체 수도 공동체에 전쟁 전리품들과 대량의 금을 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 『구제의 성모』 신심과 전파
중세 시대 유럽의 『레판토 해전』을 언급을 하게 된다면 역사를 뒤바꾼 사건으로 통한다. 실제로 역사를 들여다보면 『레판토 해전』에 참전한 그리스도 연합팀은 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략을 저지하는 크나 큰 성과를 거두었고, 많은 시간 이어왔던 지중해의 무역의 무개 중심이 서서히 대서양으로 옮겨지게 되는 시초가 된 사건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레판토 해전』은 유럽 역사에서 빼먹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레판토 해전』의 대승은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단순한 승리가 아니었다. 성모님께 간청하고 기도를 올린 수 많은 유럽인들의 전구를 들어 주셨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하나같이 입을 모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레판토 해전』의 승리를 기점으로 유럽에는 기하급수적으로 성모 경당과 성모님의 호칭을 딴 많은 성당과 종교단체들이 등장하게 된다.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던 성모 신심은 삼위일체 수도회 안에서 『구제의 성모』 신심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여러 형식의 성모님에 대한 예절이 생겨났다. 그리고 우리가 앞에서 전해 들었던 『구제의 성모』에 대한 전승은 여기서부터 기인했다.
1688년 5월 18일에 열렸던 수도회 총회에서 새롭게 선출된 『안토니오 페게롤레스 Antonio Pegueroles』는 공식적으로 『구제의 성모』를 삼위일체 수도회의 주보로 지정하게 되었다. 이 후 삼위일체 수도자들은 많은 곳에 『구제의 성모』에 대한 신심을 널리 알리게 되었고 벨기에, 아라곤, 이탈리아, 스페인의 안달루시아와 카스티야 마지막으로 프랑스에도 이 성모 신심을 전파하게 되었다.
- 삼위일체 개혁 수도회와 『구제의 성모』
삼위일체 수도회는 1599년 영적 쇄신을 통하여 개혁을 이뤄냈다. 부폐하고 전통과 전승을 망각하고 살아왔던 기존의 삶의 방식에서 염증을 느낀 『요한 바우티스타 성인』[1]은 삼위일체 수도자들이 다시한번 규칙서에 따라서 살기를 청하며 새롭게 삼위일체 개혁 수도회를 이끌어 나가게 된다. 특이하게도 이 당시 삼위일체 수도회 내에서 일어났던 성모 신심은 『구제의 성모』에 대한 신심이 아니라 은총의 성모에 대한 신심이었고, 개혁 수도회는 『은총의 성모』 가 아니라 『구제의 성모』에 대한 신심을 유지해 나갔다.
개혁 이전의 수도회는 이후 점차 쇠퇴해 가며 소멸의 길을 걷게 되었고, 개혁 수도회는 새롭게 그 역사를 써 내려가면서 『구제의 성모』에 대한 신심을 키워 나갔다. 20세기 들어서서 유럽의 크고 작은 사건으로 많은 곳에서 수도자들에 대한 박해와 추방이 자행 되었고, 그 당시 많은 수도 공동체들이 문을 닫고 폐쇄되어 많은 수도자들이 살 곳을 잃게 되었다. 삼위일체 수도회도 피해갈 수 없었다. 이러한 방랑자 생활 속에서 새롭게 삼위일체 수도회의 이탈리아 관구가 재창설 되면서 『구제의 성모』에 대한 신심이 삼위일체 수도회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영성에 포함되었고 그 당시 스페인에서는 『은총의 성모』 와 『구제의 성모』 두개의 성모 호칭에 대한 신심이 공존하였다.
- 삼위일체 수도회의 주보
삼위일체 수도회는 긴 노력 끝에 1961년 요한 23세의 인가를 받아 『성녀 아녜스』와 함께 ‘『구제의 성모』’를 수도회의 주보모로 지정하게 되었다. 삼위일체 수도회 총회가 있었던 1959년 이후 2년만에 이룬 성과이다.
현대에 들어서서 수도회 회칙 52항에 근거하여서 10월 8일에 대축일 전례로 축일을 지내게 되었다.
“동정 마리아를 참된 신심으로 공경하고,
수도회에서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에 따라
『구제의 성모』 호칭을 통하여 거룩하게 축일을 거행한다.
삼위일체 수도회의 고유한 주보 성모로서 묵주기도를 드리고
토요일 시간전례와[2]신심미사를 거행한다.”
수도회 회칙 52항
마지막으로, 『구제의 성모』가 표현되는 모습은 삼위일체회 수도복을 착복하고 노예 구제에 필요한 동전이 담긴 주머니를 한 손에 들고, 다른 한손에는 아기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며, 아기 예수님의 손에는 수도회의 『스카풀라』를 들고 있다. 하지만, 아기 예수님을 표현하지 않을 경우에는 성모님의 다른 한 손으로 수도회의 『스카풀라』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1] 개혁자 원죄 없는 잉태의 성 요한 세례자
[2] 성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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