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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기적의 현장을 가다. (요 6:1-15)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바로 생명의 주인이시며 메시야이신 것을 보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사역 중에 오병이어의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되어지고 있는 믿음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광야의 한 모퉁이에서 일어난 기적은 어린 아이의 작은 나눔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린 아이의 작은 나눔은 보잘것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린 아이에게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작은 나눔은 예수님의 큰 나눔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이 나눔을 통해서 평안과 기쁨과 감격과 확신이 있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린 아이가 광야에 나오기까지는 많은 결단이 요구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것을 나누기까지도 많은 고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향한 열정과 믿음이 있었기에 큰 기적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기적의 조각을 먹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잊혀지겠지요.
그러나 이 어린 아이는 자신의 작은 나눔으로 오병이어의 거대한 기적을 창출할 수 있게 된 사실 하나만으로도 큰 영광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광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크고 작은 광야를 경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나의 힘으로 되지 않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광야의 삶, 눈물과 아픔이 고스란히 드러나서 신음의 소리가 나지만 하나님을 향해서 얼굴을 들 수 있는 광야와 같은 그곳에 이미 우리들은 와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작은 나눔을 통해서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을 경험하는 현장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제 믿음의 현장으로 들어가셔서 귀한 기적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작성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성경의 역사, 믿음의 기적이 있는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은 유난히 떡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많이 나와 있습니다.
6장 7절에 ‘이 백 데나리온의 떡’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9절에는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고 증거합니다.
11절에는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고 증거합니다.
6장 13절에서는“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고 하였습니다.
26절에서는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이라고 하였습니다.
32절에서는 “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3절에서는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고 증거합니다.
34절에서는 예수님께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고 기도합니다.
35절에서는 예수님 스스로“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48절에서도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50절에서는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고 증거 합니다.
이렇게 요한복음 6장은‘보리떡 다섯 개의 이야기’,‘하늘의 떡’,‘영원한 떡’에 대한 말씀으로 일명‘떡 장’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마태복음 9장 35절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 9:35)
한마디로 예수님의 사역은 가르치시며, 전파하시며 고치시는 사역이었습니다.
갈릴리 해변의 벳새다 들판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병을 고쳐 주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요한복은 6장 5절에“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큰 무리를 먹일 수 있는 양식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에 우리가 살펴보았던 어린 아이의 작은 나눔이 기적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도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결단을 해야 할까요?
광야와 같은 인생 속에서 하늘의 은총이 내려오는 기적을 경험하며, 살아 계신 하나님께 헌신된 일생을 드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야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먼 데 있지 않습니다.
광야와 같은 삶 속에서 오병이어와 같은 믿음의 사건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야합니다.
사람은 많았지만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거합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5절)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양식이 없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현대의 문제도 참된 양식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말세의 기근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암 8:11-13)“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이 시대는 영적인 양식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날이 어두워 가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같은 오병이어의 사건인 마태복음 14장 15절 말씀에서는 다음과 같이 증거합니다.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날이 저물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의 들판에서 주님은 오병이어로 기적을 일으키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기적은 안드레의 신앙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성경에는 대조적인 두 인물이 있습니다.
빌립과 안드레입니다.
빌립은 계산에 빠르고 똑똑한 사람이었고, 안드레는 셈은 느리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빌립은 부정적인 사람이었고, 안드레는 긍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빌립을 생각해 봅시다.
빌립은‘이백 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하다고 계산하였습니다.
(요 6:5-7)“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이처럼 빌립은 돈부터 계산하는 사람입니다.
같은 사건을 다루는 성경인데 마태복음에는 돈이 있다고 할지라도 날이 이미 저물었기에 불가능하다고 대답합니다.
또 다른 이유는 그곳이‘빈들’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대 광야의 빈들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광야입니다. 돈이 있어도 떡을 살 떡집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 안에도 빌립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안 된다는 사람’입니다.
돈이 없으니 안 됩니다.
여건이 안 맞으니 안 됩니다.
시간이 없으니 안 됩니다.
이런 사람은 계산적이고 이해 타산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한 어린아이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 6:8-9)“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안드레는 긍정적인 사람입니다.
빌립은 안 된다는 부정적인 전제에서 출발한 반면 안드레는 무엇인지 방법을 찾아보는 긍정적인 전제에서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드레의 말을 직역하면“여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이것 가지고는 얼마의 도움이 되겠습니까?”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빌립처럼‘안 된다’는 부정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안드레 같이‘된다’는 긍정적인 사람이 됩시다.
안드레의 이러한 결정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나눔은 기적을 일으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자기도 먹기에 부족한 것을 가지고 나온 순수한 믿음과 마음을 안드레는 알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안드레도 이것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님께로 가져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역사를 변화시키고 빈들에 기적을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포수 두 사람이 산으로 토끼 사냥을 나갔습니다.
한 사람은 토끼를 많이 잡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사람은 한 마리도 못 잡고 돌아왔습니다.
못 잡은 사람에게 물었더니 이유를 이렇게 대답합니다.
첫째, 토끼는 뒷다리가 길어서 언덕을 올라 갈 때에 너무 잘 달려 못 잡았다는 것입니다.
둘째, 토끼는 귀가 커서 가만히 접근하려고 하니 멀리서도 벌써 발자국 소리를 듣고 도망하므로 못 잡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안 된다는 이유만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토끼를 잡은 포수에게 어떻게 잡았느냐고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도 두 가지로 대답을 했습니다.
첫째, 토끼는 뒷다리가 길어서 내리막길에 약하므로 내리 몰아 잡았습니다.
둘째, 토끼는 귀가 큽니다.
그래서 뒤쫓아가서 귀를 잡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꼭 같은 이유인데 한 사람은 그것 때문에 안 된다고 하였고, 또 다른 한 사람은 그 이유 때문에 된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부정적인 이유만을 찾아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람은 되는 방법을 찾아 연구합니다.
두 번째, 주님의 손에 잡혀야 됩니다.
주님의 손이 움직이지 않고는 기적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내 손이 아무리 분주히 움직여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손이 움직여야 됩니다. 오병이어를 아이가 가지고 있으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안드레가 받아서 가지고 있어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감자 한쪽을 심는 것과 그 오병이어를 예수님 손에 잡혀드리는 것은 똑같은 원리입니다. 주님 손에 잡힌 그것은 심겨진 곡식과 같습니다. 심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싹이 나는 역사가 일어나듯이 예수님의 손에 잡힌 오병이어는 이제 한 사람의 식사거리가 아니라 오천명을 먹이고도 남는 풍성한 하나님의 식탁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크게 오해하는 것은 주님 손에 잡혀드리지 않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잡혀드려야 됩니다. 오병이어는 오천명 무리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른 데 있었던 것을 가져온 게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을 주님 손에 잡혀드리는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기적은 시작됩니다.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 아이가 오병이어를 내어놓지 않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이 선입관을 가지고‘주여, 이것으로 뭘 하시겠습니까?’하고 얼마든지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손에 잡혀드림입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주님께 바쳐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시간을 바쳐드려야 기적이 일어납니다. 나의 재능과 건강과 나의 물질과 나의 지식과 내게 있는 것으로 주님이 쓰시도록 잡혀드려야 기적이 시작됩니다. 그것을 하지 않고 거두기를 바란다면 이것은 하나의 마술이요 도박입니다. 복음은 도박의 원리나 마술의 원리는 전혀 용납하지 않습니다. 주님 손에 잡히는 헌신입니다.
세 번째, 기도에 감사가 넘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그 떡과 고기를 가지고 축사하셨습니다. 주님의 감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축사하여 하나님의 손길을 움직이게 한 것입니다. 그 무리들을 먹이고도 남기는 기적의 역사를 베푸신 것입니다. 우리의 감사는 기적의 중요한 요건입니다. 감사하는 신앙생활 속에 하나님의 기적의 손길이 역사합니다. 우리가 원망하면서 사는 한 우리의 기도는 고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고발하는 기도는 하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하나님의 손을 움직이는 기도를 해야 되는데 그것은 감사의 삶을 살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감사가 섞인 기도를 해야 하나님이 움직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나신 인자 예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실 때 하나님 아버지 앞에 기도한 장면을 여러 곳에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릴 때도 예수님이 감사기도를 했습니다.“이 일을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감사는 하나님이 감동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감동합니다. 하나님이 감동하셔야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시고 거기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손양원 목사님의 삶을 생각할 때 많은 감동을 받습니다.
이 분은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사랑하는 두 아들을 폭도들에 의해 잃었습니다. 그 분은 일제 때 신사참배 반대하다가 6년 동안 옥고를 치루셨습니다. 1년 반 밖에 형기가 아니었는데 형기 마친 다음에도 전향하지 않는다고 그 분을 계속 붙잡고 있다가 1945년 8월 20일 지나서 죽이기로 작정했는데, 15일날 해방이 되어 감옥 문이 열려 살아났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나서 그 분은 서울의 큰 교회나 부산의 여러 교회의 초청을 뿌리치고 "내 형제들에게 가야 됩니다."하고 다시 나환자촌으로 들어갔습니다. 해방되어 얼마 안 있다가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사랑하는 두 아들이 죽었습니다. 장례식 때 아버지의 답사 차례가 되었습니다. 젊디 젊은 아들의 장례식입니다. 오열을 하며 억울해 할 법도 합니다. 그런데 흰 두루마기에 누런 두건을 쓰시고 손양원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리요.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낀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써 답사를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직 양아들 삼기 전입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 간의 눈물로 된 기도의 결실이요, 나의 사랑하는 나환자 형제 자매들이 23년 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깊은 영적인 대화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인도하시며 보다 더 깊은 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을 받고 주님을 향한 열정과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시작한다면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기적의 현장으로 우리를 안내할 것입니다.
그러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우리는 거룩한 낭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의 현장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곳에서 믿음의 기적을 경험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베푸시는 기적의 현장으로 초대되어 경험하기 위해서는 거룩한 낭비를 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우리가 거룩한 낭비 헌신을 못하는지 아십니까? 부족한 사람들이 헌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꾸 부족한 현실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미래가 불행해 질 것이라고 비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이 인생의 모든 것은 아닙니다. 지금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 있다고 영원히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로 끝나는 인생이 아닙니다.
지금 가난하다고 영원히 가난하게 사는 것 아니고 지금 행복하다고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불행하다고 영원히 불행한 것 압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 다 산 것처럼 사는 사람들 있습니다. 없는 현재만 보지 말고 풍성하게 다가올 미래를 보면서 소년처럼 오병 이어를 주님께 헌신으로 드려야 합니다.
부족한 현재만 보면 부정적이 됩니다. 부정적인 사람에게 헌신이 있을 수 없습니다.
소년의 순수한 신앙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 자기 음식입니다. 그것 주면 굶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을 그것 가지고 어떻게 합니까? 아직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5000명 먹을 것이 이미 있는 것처럼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미래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어 향유를 뿌리고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은 여인은 거룩한 낭비를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듣고 영원토록 이야기되도록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떤 것을 가지고 있던 간에 그것을 나눔으로 인해서 거룩한 기적의 현장으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풍족히 먹고 난 후에 남은 것을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이에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거합니다.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요 6:12-13)
우리나라에 음식을 먹고 남은 쓰레기가 8조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근검 절약해야 합니다.
절약은 생활화되어야합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절약해야 합니까?
풍족할 때에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길이 때로는 광야와 같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홀로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광야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 나라로 나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광야는 그러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옛 습관들을 벗어버리는 곳입니다.
광야는 애굽에서의 옛 자아의 모습들, 세속적인 모습들을 벗는 곳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가치관인 하나님 나라의 옷을 입어야 하는 곳입니다.
광야는 고통과 아픔을 통해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더러운 것들, 세속적인 것들을 벗기고 정화의 과정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광야에는 두 개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곳이 되었습니다.
하나는 고통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의 아픔과 슬픔과 좌절만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원망만 합니다.
그래서 고통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또 다른 하나의 얼굴은 섭리의 얼굴을 보는 곳입니다.
비록 나는 지금 힘들고 어렵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실 것을 믿으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곳입니다.
어느 얼굴을 바라보시겠습니까?
광야는 먹을 것이 없는 곳입니다.
목마름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적들로부터의 위험이 있는 곳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인생길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광야에 나왔다면 그분에게 나의 작은 문제를 드린다면 섭리하시는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나눔이 있다면 빈들의 향연이 있을 것입니다.
축복과 기적이 있는 곳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이곳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지금 내가 못하고 있는 일, 내가 앞으로 못 나아가고 있는 그 한계, 그것은 결코 고난이 아닙니다. 그것을 넘어서면 하나님이 인도하는 축복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망하고 좌절하고 의심하고 방황하는 것은 큰 불신앙입니다. 그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의심을 넘어서십시오. 방황을 넘어서십시오. 좌절을 넘어서십시오. 낙심을 넘어서십시오. 그것을 넘어서야만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바로 그 메시지를 오늘 우리 시대에 들려주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그것으로 일어났던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역사, 이것은 오늘 우리의 일상의 경험입니다. 큰 것을 원하는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병이어를 가져오라는 주님 앞에 우리도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또 드릴 것도 있습니다. 이 축복의 역사가 여러분의 생애에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