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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종주기
3일간 연휴다. 50대 중반의 나태와 무기력을 극복하고 경제적이며 가장 열심히 연휴를 소일할 궁리 끝에 7월말로 예정된 지리산 등산을 요번에 한번 더하기로 작심하고 동행자를 물색했으나 반응(징검다리 연휴, 무리다, 겁난다 등)이 없다가 마지막으로 E대 양교수, 7년 후배인 S대 김교수 셋이 산행하기로 하였다. 김교수는 작년에도 수도-가야산 무박 산행을 한 적이 있으며 아직 젊은 혈기왕성한 후배이다. 등산의 목적과 방법은 개인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정상정복이니 하는 패기와 의협심보다는 건강을 관리하고 자연의 섭리를 배우고 순응하여 삶의 지혜를 터득하는 得道의 萬行길이다.
1.출발(6월 5일 밤)
지리산에는 20개의 등산로가 있으니 입산과 하산코스는 20C2인 190가지의 경로가 있을 수 있다. 시간으로는 반나절, 당일, 1박 2일, 2박 3일, 3박 4일 등이 가능하나, 10일 또는 한 달 동안이라도 산중에 머물고 싶어도 현실이 하락치 않는다. 작년 여름에는 성삼재→ 노고단→ 반야봉→ 벽소령→ 장터목→ 천왕봉→ 장터목→ 백무동계곡코스를 택했으니 요번에는 가장 긴 코스인 경남 산청에서 시작하는 대원사→ 치밭목→ 천왕봉을 거쳐 뱀사골로 하산하는 고행길(내 나이를 생각하면)을 선택했다. 남부터미날에서 5일밤 10시10분 진주행 버스에 몸을 싣고 진주↔대전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새벽 2시 30분경 산청에 도착하였다. 김교수는 천왕봉까지 12시간이나 소요되는 가장 긴 등산로로 가기로 하고(김교수의 체력으로는 8시간 정도소요?) 나와 양교수는 7시 20분 정도 소요될 코스를 밟으면 엇비슷한 시간에 장터목산장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김교수와는 다음날 저녁 장터목산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배낭의 짐을 일부 분산시켰다.
버스에서 내리니 제일 먼저 택시기사가 반가워한다. 대원사까지 3만원이란다. 다른 일행 2명과 함께 동승, 총4만원에 가자고 우겼다. 다른 택시를 타라고 기사 아저씨는 말하지만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국가에서 왜 두 대의 택시를 가동시켜야 하느냐고 나도 대들었다. 가는 도중 손님이 없어 놀고 있는 다른 기사한테 미안해서 그랬다고 한다. 입장료를 내지 않고 (밤8시-아침8사이는 대부분 입장료를 받지 않음) 유평리 매표소를 통과, 대원사를 거쳐 민박촌이 있는 조그마한 부락 유평리에 새벽 3시반에 도착하였다. 대원사는 비구니들이 참선하고 있는 도량으로 양산 석남사, 예산 건성암, 계룡산 동학사 등 지리산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적인 비구니 참선도장이다.
민박집들은 대부분 잠들어 있었으나 문을 두드리니 백발의 할머니가 문을 열어준다. 백발이나 20대 아가씨 얼굴보다 더 곱고 아직도 홍안이다. 다이어트만 더 하면 120살까지는 살 것 같다. 6시반경에 아침식사를 하겠노라 부탁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2. 첫째날(6월 6일)
요새는 오전 4시반만 되어도 밖이 훤하다. 눈을 떠보니 6시. 일단 산중에 들어가면 이틀간 세수를 할 수 없으니 얼굴을 열심히 닦아냈다. 산채비빔밥이 일미였으며 한 그릇 더 먹고 싶었으나 등산에 지장이 있을까 바 참아야 했다. 부엌에 있는 동동주도 입맛을 당겼으나 산행시엔 술은 금기사항이다.
오늘은 천왕봉을 거쳐 장터목산장까지 가야 한다. 성삼재(해발 1400m?)나 중산리에서 시작하는 코스보다는 몇 갑절 힘이 든다. 지도상 오늘 걸어야 할 거리는 10.9km, 소요시간은 7시간 20분이다. 1915m의 천왕봉을 향해 줄곧 올라가야 한다. 줄이고 줄였어도 장기 산행의 필수품만 챙겼는데 배낭의 무게는 10kg이 넘는다. 집사람은 반찬 한가지라도 더 싸서 보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놀러 가는 것이 아니며, 배불리 먹고서는 제대로 修行할 수 없다며 정성스레 준비해준 반찬과 과일들은 넣지 않았다. 배낭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3일 동안 국은 먹지 않기로 했다.
나의 등산은 집사람 때문에 시작하게 되었다. 88년도 신체검사결과 콜레스트롤 수치가 상당히 높았다. 혈관이나 간에 쌓인 지방을 분해하려면 운동으로 땀을 흘려야 한다며 이른 아침에 앞장서서 나를 끌고 아파트주위를 일주일 동안 뛴 후 자기가 할 일은 다했으니 이제부터는 혼자서 운동하라는 것이다. 그때부터 주말이나 휴일이면 도봉산, 북한산, 수락산등을 올라 다녔더니 3개월 후에는 콜레스트롤의 수치가 정상으로 되었으며 지금은 우리 회사내에서 신검의 각종 수치가 나이에 견주어 가장 우수하다며 몇 살까지 사실려고 그러냐고 농담을 던지는 사람도 있다.
출발시각은 7시10분. 두 홉짜리 팻트병에 물을 채운 후 step counter(만보기)를 reset시켰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선 하루 만보정도는 걸어야 한다고 한다. 상계동에서 우이동 6번종점, 고향산천을 거쳐 백운대까지 올라가도 8000보가 나오지 않는다. 백운대를 거쳐 위문, 용암문, 대동문, 보국문, 대성문, 대남문까지 갔다가 다시 back해서 대동문에서 진달래능선을 타고 고향산천으로 내려와 집에 당도하니 약 32000보가 나왔다.
원래 인간은 直立步行 동물인데 요즈음은 기계화와 자동차의 발달로 着席走行 동물화된 사람이 많아졌다. 하체가 약해지고 무릎 관절이 퇴화되고 성인병에 걸려 동네 뒷산도 오르지 못하는 체력 보유자가 늘어나고 있다.
대원사 계곡을 따라 걷기 시작하였다. 꽝꽝 쏴쏴 철철. 흐르는 물소리는 태풍이 몰려오는 소리와 흡사하다. 용수동에서 좌측으로 올라가니 돌 길이 나타나며 조금 더 올라가니 외딴 농가와 암소 한 마리가 보이며 일찍부터 할아버지가 밭에서 일을 하고 계신다. 문득 고향 산천의 모습이 떠오른다. 산길 좌우에는 이름 모를 꽃과 풀들이 무성하며 옆의 계곡으로는 물이 흐르고 있다. 이 코스는 등산객이 별로 찾지 않아 오붓한 산행이 예상된다. 맑은 공기를 3일동안 폐 깊이 들어 마시고 나면 가슴통이 맥주통보다 더 커진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작년 7월 이후부터는 서울이나 근교의 산 대신 지방의 명산과 사찰을 찾아 다녔다. 정상에 올라가서 보면 서울 상공은 오염된 매연으로 큰 막을 형성하고 있어, 지리산, 한라산, 설악산 등의 공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갈수록 경사는 급해지고 숨이 헐떡거리기 시작하며 배낭의 무게가 자꾸 압박해 온다. 계곡의 물에 수건을 적셔 손목에 묶었다. 점점 높이 올라가면 계곡의 물도 없어질 것이다. 한참 가다 보니 사람의 소리가 들려온다. 5명의 장정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창원에서 밤에 출발하였다 한다. 하나 둘 하산하는 사람이 보인다. 치밭목 산장에서 하룻밤을 자고 내려온단다. 가다 쉬다 하다 보니 어느새 치밭목산장(대피소)에 도착하였다. 12시다.
산장은 요새 보기 힘든 토담집이다. 지리산 내 다른 산장과 달리 흙벽과 내부도 그냥 흙이나 돌로 깔려 있었다. 문명의 이기와는 거리가 멀다. 수용 인원 40명에 전화도 없는 산장이다. 200명 정도가 여기저기에 앉아 점심을 들고 있다. 우리도 적당히 자리를 잡아 배낭을 풀고 점심준비를 하였다. 3일간 산행 중 4회만 직접 밥을 짓고 나머지는 햇반 등을 사 먹기로 하였다(배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코펠과 적당한 양의 쌀을 가지고 150m 정도 떨어진 샘으로 갔다. 어느 처녀가 먼저 와 그릇을 씻고 있었는데 여기까지 올라올 때 계속 내 시선을 끌었던 바로 그 아가씨가 아닌가. 소박한 복장에 화장기 없는 거무잡잡한 얼굴, 댕기머리에 손에는 조그마한 보따리를 든 청학동 가출 소녀를 연상케 하며 바위 위에 쉬고 있는 모습에서는 우수, 장난기, 그리움과 순박함이 교차하는 시골냄새가 물씬 풍기는 아가씨. 어느 때는 우리보다 앞서 가다 바위 위에 우두커니 앉아 있고, 어느 때는 쉬고 있는 우리 앞을 휙 지나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여우 귀신에 홀린게 아닌가 하여 이 무더운 날의 등골을 오싹하게 했던 바로 그 아가씨.
“아가씨, 올라올 때 보니 혼자 올라 오던데 무슨 그릇을 그렇게 많이 씻고 있어요?”
내 얼굴을 쳐다본 후 알아보는 듯.
“아 예, 여기 산장에서 근무하는 선배님을 도와 주고 있어요.”
그렇군. 선배님(산장관리인)이라는 사람이 애인이군.
밤새 그리워하다 전화도 없고 해서 이른 새벽부터 이렇게 직접 찾아왔구나.
“아이고, 손 시려워 죽겠네, 손이 시려워 쌀을 씻을 수 없군”
“아저씨, 제가 씻어 드릴까요?”
“고마워요. 내가 씻지요” 내손이 시려우면 그대 손도 시려울 텐데.
한아름 그릇을 들고 먼저 숲속의 지름길로 뛰어가다 ‘와장창 땡그렁’ 그릇과 함께 넘어지고 만다. 일어서서 하얀 이를 드러 내놓고 웃는 미소. 저렇게 해맑고 순박한 미소는 내 생애 처음 본다. 저게 바로 부처의 모습이 아닌가. 요번 만행길에서 얻을 것은 다 얻은 것 같다. 자연의 생성, 변화, 파괴, 인간의 생활상, 그들의 염원을 표현한 聖跡을 보며 자연에 몰입하여 유유히 만행하는 것도 득도의 방법이다. 탐욕을 버리면 주위의 삼라만상이 부처일 수 있다.
점심을 먹고 물통에 새로운 물을 가득 채운 후 정각 13시에 고지를 향해 출발하였다. 장터목까지는 물 구경을 할 수 없다. 여기서부터는 경사가 더욱 심해지며 장터목에서 자고 내려오는 사람 등 오가는 등산객을 많이 만날 수 있다. 40명의 직장단체도 보인다. 싸리봉(1642)을 거쳐 올라가니 저만치 중봉(1875)이 보이고 그 뒤로 천왕봉이 보인다. 천왕봉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젊고 아리따운 아가씨와도 사진을 찍었다. 구로동에서 근무한다며 사진을 받아 보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하산하는 60대 후반의 아저씨 무리가 우리 옆에 와 앉는다. 떠들어 대는 모습이 천진난만한 어린애들 같다. 요번 지리산 산행이 12번째 란다. 왜 할멈을 데리고 다니지 않으냐고 물으니 우리 할망구는 맛이 갔다고 한다.
앞에 천왕봉이 막고 있는 탓인지 시원한 바람이 없어 무척 무덥고, 귀신이 들어 있는지 득도의 무게가 늘었는지 배낭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 지고 양 옆구리가 쑤시기 시작한다. 상의를 가슴위로 걷어 올리고 걸으니 한결 시원하다. 세쌍의 40대 후반의 부부 등산객이 내려온다. 그 중 한 아줌마가 웃통을 걷어 올려 훤히 보이는 내 젖가슴과 배를 보고 색기 가득찬 웃음을 한 바탕 터뜨리더니 큰 소리로 외친다.
“저 아저씨 좀 봐.” 나도 질세라,
“아줌마도 브레지어 풀어 봐요. 얼마나 시원한데.” 뒤따라 오는 남편(?)이 한마디 한다.
“여름에 브레지어를 벗고 다니면 정말 시원하다메.” 색기 가득 찬 부인 왈
“그럼. 말이라고 해.”
양교수는 비가 올 것 같다며 지나가는 사람에게 라디오 일기예보를 들었느냐고 묻는다. 심호흡을 폐 속 깊이까지 하며 중봉을 거쳐 1시간쯤 가니 드디어 천왕봉에 도달했다. 오후 5시다. 만 10개월 만에 다시 찾은 천왕봉이다.
보라 나는 지금 天王峰에 올랐노라.
구름 안개를 모조리 헤치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 되어
하늘 위에 올랐노라.
하늘과 땅과 바다와
여기 가득 찬 온갖 것들
작은 모래 알과 나무 껍질까지라도
모두 다 나를 위하여
있는 것임을 알았노라.
잘 나고 높다는 자여
富貴를 자랑하는 자여
한 줌 티끌 보다
오히려 可笑롭기만 하다.
거기서 滿足을 느끼려느냐
저 돼지 같은 人生이여.
천하고 가난한 자여
불행을 탄식하는 자여
하늘이 따로 네게
슬픔을 준 일 없었거늘
人生을 근심 속에서 보내느냐
저 버러지 같은 人生이여.
지금 저 하늘 가에
빛을 놓는 저녁 해가
五色 영롱한 속에
거룩한 잔치를 열고
장엄한 영광의 찬송가를
우렁차게 울리되
너희 祖上들로부터
代代로 물려 받은
질투와 속임과 싸움의 테를
벗어나서
무궁한 大自然 속에
平和의 노래를 부를지어다.
人生은 잠깐이라
人生은 눈물이라
누가 너희들에게 그릇된 道를 전하더냐
人生은 天地로 더불어
영원히 여기 福된 자니라.
-천왕봉 찬가(이은상,1938년작)-
천왕봉의 돌에는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원래는 南冥 曺植의 '하늘이 울어도 천왕봉은 울리지 않는다'는 뜻의 '만고천왕봉천명유불명(萬古天王峰天鳴猶不鳴)' 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으나 80년대 초(?) 몰지각한 일부 사람들이 '경남인의 기상'이라고 고쳐 놓았던 것을 일부 영남의 志士들이 부당함을 지적하여 현재대로 다시 고쳐지게 되었다. 학창시절 소백산맥과 지리산은 전라도를 대표한다고 배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다른 산들(속리산 등)은 정상을 천황봉이라 하는데, 천왕봉과 천황봉은 어떻게 다른지?
50여명의 등산객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내가 앉을 자리가 마땅치 않다. 배낭을 내려 놓고 앉으니 그사이 만났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목례로 맞이한다. 아주머니한테서 오이 하나를 얻어 양교수와 나눠 먹으니 향긋한 냄새가 꿀 맛 같다. 집사람도 오이를 챙겨주었으나 배낭무게를 줄이기 위해 넣지 않았다. 나이 50중반의 남편 옆구리 터지는 생각은 아직 못하는 모양이다. 옆 사람으로부터 담배 한 까치 얻어 피우니 양교수가 핀잔을 준다. 건강을 위해 등산한다더니 가장 해로운 담배를 왜 피우냐고. 맞는 말씀.
나이가 드니 술도, 담배도 여자도 지탱하기 힘들구나. 사람들은 힘든 이곳까지 왜 오를까? 나무가 있고 숲이 있으니 그늘이 있고, 봉우리와 골짜기가 있어 시원한 바람과 물이 있으니 어찌 아니 오를 수 있겠는가. 명예나 탐욕, 세상잡념을 떨쳐버리고 산야에 몰입하여 하나가 되고 그로부터 자연의 섭리를 배워 삶의 원천을 얻을 수 있으니 이게 바로 산행자의 낙이 아닌가.
하늘로 통한다는 通天門을 거쳐 제석봉(1806)으로 내려오니 나무가 없는 고사목지대가 나타난다. 토벌꾼들이 구상나무와 주목나무를 벌목하고 그 흔적을 없애기 위해 불을 질렀다 한다. 불에 탄 나무들이 장승처럼 여기저기 서 있으며, 티다 남은 나무들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있다. 새로 식목한 주목들이 인간들의 탐욕을 비웃는 듯 푸르름을 더욱 자랑하고 있으며 생태계복원 실험현장, 습지가 여기저기 보인다.
고산지대는 한번 훼손되면 기후 등으로 인해 생태계를 복원하는데 평지보다 2-3배의 세월이 소요된다고 한다. 생태계 복원보호지역의 잘 정리된 등산길을 따라 내려오니 어느새 장터목 산장이 보인다. 마치 오아시스를 찾은 것처럼 반갑고 지난해 하루 밤 묵은 탓인지 내 집처럼 느껴진다. 이곳 대피소는 성삼재에서 출발한 등산객들이 마지막 하루 밤을 보내고 뒷날 새벽 천왕봉 일출을 구경하고 하산하는 관계로 언제나 초만원이다. 오늘도 170명수용에 450명이 모였다고 한다. 뒷날들은 얘기지만 세석대피소는 240명수용에 1500명이 몰려 밤새 아수라장이었다고 한다. 명칭 그대로 천재지변에 대비한 대피소이기 때문에 방문객은 모두 수용한다. 우리도 예약을 못하고 왔다.
장터목 대피소는 사방이 확 터진 곳이어서 한여름도 추위를 견디기 어려운 곳이다. 자리를 잡고 준비해 간 두꺼운 옷을 포개 입었다. 배낭을 열고 플라스틱병에 담아간 Ballantine 30년을 피곤한 몸에 두 잔씩을 마시고 나니 몸이 확 달아 오르기 시작한다. 여기서 만나기로 한 김교수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핸드폰의 밧테리가 모두 소진되어 연락도 할 수 없다. 3인분의 식사를 준비하고, 마냥 기다릴 수 없고 식욕의 충동을 이기지 못해 먼저 먹기로 했다. 국물은 없어도 볶은 고추장에 풋고추, 열무김치, 총각김치만으로도 사천요리가 부럽지 않다. 김교수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서울로 올라와서 전화를 받고 알게 되었지만, 김교수가 선택한 코스는 조우하는 등산객도 없고 등산로안내 표시도 부실하여 결국 길을 잃고 헤매다가 하산해 버렸다 한다.
가까스로 방 배정을 받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사람이 워낙 많아 주위가 소란해 잠들기가 어렵다. 양 옆구리는 쑤시고 세수도 발도 씻지 못해 냄새는 나고 완전 고역이다. 남녀 방이 다르다 보니 가족단위 등산객은 이산가족이 되어 아주머니들은 자기 새끼 챙기느라 누워있는 내 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넘어 다닌다.
설악산 대청봉대피소는 남녀혼숙이다. 작년 설악산 등산시 내 오른편에는 60대 후반의 부부, 바로 왼편에는 30대 여자 세 명이 함께 자게 되었는데, 추워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침에 눈을 떠보니 옆 여자와 서로 껴안고 자고 있었다. 그때는 여자 복이라도 있었으나 오늘 밤은 방정맞게도 누워 있는 내 위를 휙휙 넘어 다니니 나이가 들면 여자복도 점점 멀어지는 것인가. 여자에 대한 탐욕을 언제나 떨쳐 버릴 수 있을까?
엎치락뒤치락, 어느새 새벽 서너시각이 되었는지 시끌뻐끌하여 눈을 떠보니 천왕봉 해돋이를 보기 위해 떠날 준비를 하느라 야단법석이다. 내가 본 일출 중 천왕봉 일출장면이 가장 장엄했다. 그러나 행운이 따르지 않으면 볼 수 없다. 흔히 하는 말이 3대가 功을 싸야 볼 수 있다 하며, 일 년에 60일정도 일출구경이 가능할 정도로 천왕봉의 구름, 안개, 비, 운해 등은 변화무쌍하다.
3. 둘째날(6월 7일)
해돋이 구경간 등산객들의 빈자리에서 잠간 숙면을 취한 후 아침 7시에 세석산장을 향해 출발하였다. 연하봉(1667), 삼신봉, 촛대봉으로 이어지는 봉우리는 보기보다 어려운 코스였다. 양교수의 콧노래도 사리진지 오래다. 몇 번의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촛대봉(1703)에 오르니 제석봉, 천왕봉 그 너머 중봉으로 이어지는 기암절벽의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진다. 그 아름다움을 배경 삼아 사진을 촬영하고 계속 전진을 하다보니 10시경 세석산장에 도달하였다. 세석평전의 철쭉은 철이 지나 구경할 수가 없고 등산로 좌우로 생태계복원 시험장과 야영 등으로 인한 생태계가 훼손된 사진과 현재 복원된 상태를 비교해 논 사진설명이 눈길을 끌었으며 1995년부터 시작된 취사와 야영금지가 보다 일찍 시작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산장에서 구입한 라면과 엊저녁 먹다 남은 밥으로 아침을 때우고 새로운 물로 물통을 채운 후 줄을 타고 암벽을 오르기도 하고 철 계단, 나무계단을 오르내리기를 계속하니 어느 새 칠선봉(1576)에 도달하여 시원한 바람곁에 자리를 잡고 오가는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잡담이 시작되었다.
체구가 건장한 대여섯명의 청년이 지나가며 인사를 하기에 ‘조폭들 같다’고 했더니 한바탕 웃고 나서 ‘설렁탕 집에서 왔다’고 받아 넘긴다. 부귀영화를 바라고 이렇게 힘든 산을 오를 자 누가 있겠는가. 만나는 사람의 무사안전한 산행을 기원하고 지친 몸에 힘내라고 ‘안녕하세요’, ‘수고하십니다.’ 한마디씩 주고받는 미행이 온누리에 퍼진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되겠는가.
봉우리 옆의 천길 낭떨어지 밑의 저 숲속만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영원한 처녀지로 간직되었으면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가다보니 갑자기 넓은 황폐한 빈터가 나타난다. 이른바 선비샘이다. 대피소 말고는 주행길에 만날 수 있는 수량이 풍부한 유일한 샘이다. 여기저기 200여명의 등산객이 점심을 들고 있다. 빨간 글자로 대문짝하게 ‘취사 야영 흡연 집중단속지역’ 이라는 팻말이 무색하다. 지리산의 모든 샘에서는 세척, 칫솔질, 비누질 등이 금지되어 있다. 상수가 오염되어 흐르면 계곡은 절로 오염되게 된다. 작년 산행시에는 각자 질서를 잘 지키고, 위반시에는 서로 상대방을 나무랬던 기억이 난다.
우리나라에선 ‘자연은 후손에게 물려줄 재산’이라고 하지만 유럽에선 ‘자연은 후손에서 빌려온 재산’이라고 한다. 동서양의 인식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어느쪽이 자연보호개념이 더 강할까? 賃借人으로서 최소한의 법적인 事務管理의 의무를 강조한 서양인의 정신이 더 강한 것 같다.
시원한 선비샘물에 미수가루를 타서 요기를 때우고 출발하려고 하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우의를 입고 덕평봉(1522)오르니 무덥기 한이 없다. 조금씩 내리던 비는 이젠 완전히 그치고 하늘과 숲은 그 푸르름을 더한다. 양교수는 산행 중 비 맞는 것을 달가워 하는 기분은 아니지만 나는 흠뻑 젖고 싶었다. 일년 사시사철 산행하는 사람에게는 눈,비, 바람은 피할 수 없으며 준비만 잘하면 콘크리트와 시멘트 속에선 느낄 수 없는 운치를 즐길 수 있다. 한바탕 뿌린 비가 만들어 내는 흙 냄새와 수 천년 동안 간직한 숲속의 야리꾸리한 풀 냄새-나는 이 냄새를 마음껏 마시고 싶었다. 내 등산복은 3분이면 완전히 물기가 빠지는 영국제 특수 기능복이며 배낭 속 비늘봉지에는 갈아 입을 옷 한 벌이 준비되 있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음침한 숲속을 지나 심호흡을 거듭하며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다보니 어느덧 확 트인 대지 위에 벽소령 산장이 보인다. 벽소령 달밤이 지리산 10경중 하나라 하나 대낮에 달구경을 할 수 없으니 뒷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구나. 벽소령은 좌우로 시야가 넓게 퍼져 있고 앞뒤로는 봉우리가 높게 솟아 있으니 우리 민족의 비극 빨치산과 토벌대의 격전장이 될 만 하기도 하다. 이곳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한 곳이며, 저 아래 능선은 빨치산이 완전 소탕되었던 곳이다.
빨치산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은
지리산 풍운이 당홍동에 감싸는데
검을 품고 남주로 넘어오길 천 리로다
언제 내 마음속에서 조국이 떠난 적이 있었는가
가슴에는 굳센 의지가 있고 마음에는 끓는 피가 있다. 라고 진중시를 남겼다.
역사는 주관적이고 勝者의 기록이다. 북쪽에서 이현상의 평가는 어떤지? 만일 김일성이 6.25전쟁을 승리하고 남북을 통일하였다면 여기에는 이현상의 추모비나 공적비가 세워져 있을 것이다.
지리산은 그냥 산이 아니다. 지리산은 역사의 산이요, 신앙의 산이며, 생명의 산이고, 사람의 산이다. 지리산에 담겨 있는 사연, 사연들이 우리의 한 많은 역사라고 할 만큼 수난과 질곡을 그대로 보여준다. 일찍이 마한, 진한을 시작으로 가야와 백제, 신라에 이르기까지 지리산을 국경으로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났으며, 고려 때는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려야 했고,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참상을 겪어야 했다. 또한 민초들의 단내 나는 숨소리가 요동 쳤던 동학혁명과 진주농민운동이 지리산에 와서 마지막 거친 숨을 토해냈고, 해방 후에는 빨치산과 토벌대의 피가 계곡과 능선을 붉게 물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리산은 말이 없다.
몰락한 양반의 손자 석이와 소작인의 딸 순이의 비극적인 삶을 내용으로 하는 黃順元의 『잃어버린 사람들』을 비롯해 朴景利의 대하소설 『토지』와 金東里의 『역마』,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모두 산으로 갔어요…' 로 시작하는 申東曄시인의 『진달래 산천』, 뱀사골 마뜰 마을을 소재로 한 吳贊植의 『마뜰』, 文洵泰의 『피아골』과 『철쭉제』,金周榮의 『천둥소리』, 李炳住의 『지리산』,李泰의 『남부군』, 趙廷來의 『태백산맥』등의 작품들이 지리산을 무대로 신분차이로 인한 갈등에서부터 신·구세대들간의 갈등, 이념의 갈등들이 희망과 좌절, 기쁨과 고통, 사랑과 분노로 뒤엉켜 말없이 우리 가슴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오후 2시. 나는 선비샘에서 미수가루로 요기를 때었으나. 양교수는 찬 것을 들지 못한다며 여태 빈속으로 보냈으니 Input이 급했고 나는 이틀 동안 참았던 Output이 급했다. 비극적인 이념대립의 역사적 현장에서 또다시 두 사람이 상반된 신체적 갈등이 교차하니 이곳은 지세가 험악한 곳인가 본다.
양교수가 매점에서 햇반 하나를 사 먹는 동안 나는 볼 것을 보고 샘물을 떠와 물통에 가득 붓고 오늘의 숙박지인 연하천 산장을 향해 출발하였다. 돌과 작은 바위조각만 앙상한 너덜지대를 징검다리 건너 듯 돌을 밟고 지나가는데 어제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두 명의 아가씨가 갑자기 아저씨는 거짓말쟁이라고 투덜거린다. 앞으로는 길이 순탄하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오르 내리막이 많고 힘이 드냐고 한다. 오직 힘이 들면 그럴까. 젊은이여, 지친 그대들의 물음에 악의 없는 거짓말만이 지금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며 보약이니라. 그대들은 복받은 자다. 이 땅에 태어나서 지리산종주 한번 못하고 떠나는 사람이 태반이며, 연휴동안 이보다 더한 신선놀음이 어디 있겠는가? 興盡悲來요, 苦盡甘來라. 힘을 내 걷고 또 걷자 꾸나. 훗날 아름다운 추억으로 떠오르거나, 돼지나 버러지같은 인생이 역겹거늘 이 지리산을 오르고 또 올라 오너라.
내려오는 노부부에게 길을 비껴 주고 이분들의 나이가 얼마나 될까 생각하며 걷다 잘못하여 나무뿌리에 걸려 앞으로 낙법하듯 그대로 꼬꾸라졌다. 맨땅이어서 천만다행이지 돌이나 날카로운 나무뿌리에 박았더라면 생명도 위험할 뻔 하였다. 아해야! 정신 차려야지, 어디 네 목숨이 너만의 목숨이더냐.
1시간 가량 더 가니 어느덧 삼각봉(1462)에 다다르고 저 아래 연하천 산장도 보인다. 모처럼 순탄한 흙 길을 걷다보니 산중에서는 보기 드문 철망이 나타난다.. 연하천 구상나무 군락지 보호지역이다. 철망을 끼고 도니 반가운 산장이 보인다.
작년에도 칼잠으로 하루 밤을 보낸 곳이고 물 사정이 가장 좋은 산장이다. 오후 5시. 저녁밥 짓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다. 그러나 100명이 먼저와 밥을 짓거나 식사를 하고 있다. 이곳은 소주, 맥주도 판다. 내뿜는 물줄기가 힘이 있어 총각샘이라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총각샘 앞 대야에는 콜라와 맥주가 냉기를 가득 품고 등산객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도 총각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밥 해 먹기에는 명당이다. 밥이 익는 동안 먹다 남은 발렌타인, 불에 구운 오징어포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니 별미 중 별미로다. 저쪽에는 어제부터 등산길을 같이 했던 40명의 그룹이 앉아 담소를 즐기며 맥주 잔을 기울이고 있다. 남은 오징어포를 주니 아저씨 최고라며 고마워 한다. 밥 짓기는 요번이 마지막이다. 앞으로 두 끼는 사먹기로 되어 있다.
산중은 일찍 어두워진다. 7시에 방 배정이 시작되었으나 예약을 하지 못한 우리들은 처분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관리인은 연장자를 우선 모셔야 한다며 조그마한 방에 10명을 특별 배정한다. 엊저녁 장터목 대피소와 비교하면 호텔급이다. 내가 제일 연장자인 것 같아 자리배정 대장노릇을 했는데 앞 자리 아저씨가 모자를 벗으니 완전히 대머리 아닌가. 죄송합니다 했더니 자기가 한 두살 어릴거라고 겸손의 미덕을 보인다. 예약손님은 산장 본 칸의 2층 나무침대에 남자는 1층, 여자는 2층에 배정한다.
설악산은 날카로운 바위가 많아 숫산(남자산)이라 하고 지리산은 펑퍼짐하여 암산(여자산)이라 부른다. 엊저녁 장터목 산장도 그렇고 여기 연하천 산장도 여성 상위시대이다. 암산에 왔으니 암산의 질서에 순종하는 것도 자연의 순리요, 섭리인가?
8시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깨어나니 다시 잠이 들지 않는다.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반달이 떠있고 불붙은 밤송이만한 별들이 곧 떨어질 듯 하늘 가득 하다. 벽소령 달밤이 멋있다고 하는데 그곳은 어떨꼬? 밤 여우처럼 달려가 보고 싶다.
벽소령은 사람의 배꼽 위에 위치하여 넓은 시야를 배경으로 한 달밤의 야경이 멋있을 것 같고 연하천은 사타구니 밑에 위치하여 앞뒤 시야가 모조리 가리고 있어 물줄기가 새고 겨울 설경이 아름다울 것 같다. 방을 잡지 못한 사람들은 침낭을 덮고 돼지나 버러지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잠들어 있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속의 부귀영화나 영욕을 꿈 꾸나 세상을 걱정하는 졸부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산에 오른 者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4.셋째날(6월 8일)
눈을 떠보니 5시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잠자리를 걷어차고 밖으로 나왔다. 벌써 반이상의 등산객이 떠나고 없다. 손수건에 물을 적셔 대충 얼굴을 닦고 서둘러 출발하였다. 5시50분. 마당을 쓸던 털보 관리인이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를 한다. 7월에 다시 뵙자고 작별인사를 하고 배낭을 등에 메니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다. 수백개의 나무계단을 오르니 숨이 찬다. 인적이 드문 아침산길의 이슬을 헤치며 맑은 공기를 마음껏 호흡하니 오늘로써 산행이 끝나는 것이 몹시 아쉬워진다. 돌과 숲속 길을 오르내리기를 계속......
눈앞에 명성봉(1586)이 나타난다. 바위에 걸터 산하를 굽어보니 능선과 계곡이 아침햇살 속에 끝없이 펼쳐 있고 계곡에서는 용이 승천하듯 안개와 운해가 춤을 추고 있다. 저 아래 계곡으로는 화개천이 흐르고 그 건너는 구례 정도나 되겠지. 회사에 갓 입사한 솜털이 포송포송한 구례여고 3년 졸업반, 열심히 일해서 오빠의 학비를 도와 주어야 한다던 구례아가씨도 이젠 40대 후반의 중년부인이 되었겠지. 어화! 벗님네야, 서방님 공경하고 아들 딸 잘 키우며, 이웃과 화목하고 산천을 유람하며 만수무강 하소서.
반대편에서 오는 등산객이 하나 둘 나타난다. 성삼재에서 밤 12시에, 어떤 이는 노고단에서 새벽 3시에 출발하였다고 한다. 어둠을 헤치며 새벽을 깨워 여기까지 걸어왔으니 피곤한 기색은 보이나 한결같이 깡마른 건강한 체구이다. 밝은 햇살 속에 숲속을 헤치고 나가니 토끼봉(1534)과 헬기장이 보인다. 저건너 우뚝 솟은 반야봉(1733)도 시야에 들어온다. 화담은 반야봉에 올랐다가 다음과 같은 시를 읊고는 즐거워 했다 한다.
지리산이 동녘 땅을 다스리고 있어
올라가 보매 마음의 눈이 끝없이 넓어지네.
바위는 장난하는 듯 솟아 봉우리를 이루니
아득한 조물주의 공을 그 누가 알랴.
땅에 담긴 현묘한 정기는 비와 이슬을 일으키고
하늘에 머금은 순수한 기운은 영웅을 낳게 하네.
산은 나를 위해 구름과 안개를 걷어내니
천리길을 찾아온 정성이 통한 것인가.
토끼봉 정상에는 등산객 몇 명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그 일행들도 속속 도착한다. 산청에서 왔다며 우리와 등산코스가 같다고 반가움을 표시한다. 아침식사를 거르고 내 것 보다 몇 배 무거운 배낭을 짊어 지고 여기까지 오느라 몹시 힘들어 한다. ‘어떤 사람은 전 기면도기를 가져와 이 산중에서 면도를 하더라.’ 했더니, 체구가 건장한 40대 후반의 아저씨는 ‘장터목 산장까지 구두약을 가져와 등산화를 딱는 사람도 보았다’ 하니 좌중이 以心傳心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잠시 잡담을 나누고 나니 힘이 새로 솟는 기분이 들어 배낭을 다시 짊어졌다. 한 30분쯤 내려오니 화개재가 넓게 펼쳐진다. 바로 앞이 전라남북도, 경상남도의 경계인 삼도봉이고 그 뒤로 반야봉이 솟아 있다. 산중에 무슨 重機소리인가 했더니 나무계단 공사가 한창이다. 여기는 위험하거나 힘든 곳이 아니므로 그대로 놔두는 것이 자연훼손을 막는 방법일 듯하다.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에도 불필요한 곳에 계단을 만들거나 쇠말뚝을 박고 줄로 연결해 놓았는데 자연훼손, 국고낭비 및 비리의 증표로 상징되니 오가는 등산객의 마음을 슬프게 하겠도다.
오전 7시 40분. 지리산 최장거리 종주를 위해선 계속해서 노고단을 거쳐 화엄사로 내려가는데 5시간 정도 추가 소요될 것 같다. 시간적으로는 충분하며 체력도 여유가 있어 시도 해볼만 하다. 뱀사골로 내려가도 4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나 뱀사골 계곡을 가본 적이 없어 당초계획 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기념사진 몇장 찍은 후 나무계단 타고 10여분 내려오니 뱀사골 산장이다. 60명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 아침을 들고 있다. 3일 동안 오가며 낯익은 얼굴이 많이 보인다. 어제 밤 뱀사골 산장에서 잤다고 한다.
한쪽 귀퉁이에서 부모와 남자 초등학생 2명이 식사 중 우리를 보자 ‘식사했냐?’고 반갑게 인사를 한다. 여태 잊었던 가족생각이 떠오른다. 일요일이라 지금쯤 꿈나라에 가 있겠지. 고3 막내가 대학에 들어가는 내년부터는 나도 마누라, 큰애 ,작은애와 함께 산에 오르리. 마누라도 등산을 즐기지만 입시생 때문에 3년을 고생하며 상공에 매연 자욱한 북한산이나 수락산만 가끔 올라 다녔다. 여보! 그동안 고생 많이 했소. 금년 겨울산행부터는 당신의 손을 꼭 잡고 다니리라.
햇반 2개, 맥주 한 캔, 참치 통조림을 사고 남은 김치와 고추장로 마지막 산중식사를 하고 나니 9시가 되었다. 양교수는 뱀사골 계곡을 거쳐 피아골로 가본 적이 있다 한다. 뱀이 많아 뱀사골이라 했다던데 지금은 한여름에도 뱀 구경할 수 없다 한다. Satan의 저주 대신 巳彈을 받을 인간들이여. 등산객의 취사 등으로 인한 오수 때문에 뱀사골 계곡물이 옛날보다 더 더러워진 것 같다고 양교수는 말한다. 아래로 내려올 수록 계곡물은 더 많아지며 올라오는 등산객도 하나 둘 보인다. 70대 노인이 젊은 여인의 白手(장갑 낀 손)를 잡고 올라오는 것을 보고 ‘아저씨는 아직도 청춘이라’ 한마디 했더니 배꼽 잡고 웃는다. 아버지가 딸의 병 간호를 위해 산행을 도와주는 모양이다.
돌길을 꼬불꼬불 내려오니 소금장수가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소금이 계곡에 빠져 물이 간장처럼 짜졌다는 간장소가 나온다. ‘물놀이 수영 금지’ 팻말이 있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배낭과 웃통을 벗어던지고 明鏡止水에 머리통부터 갖다 댔다. 시원한 물에 머리를 감고 물 속에 비친 얼굴을 들여다 보니 뺨과 턱에 거칠거칠한 수염이 무성하다. 검은 수염, 흰 수염이 반반이니 이젠 많이 늙었구나. 슬픈 모가질 하고 먼데 靈山을 바라본다.
계속해서 시원한 물줄기를 따라 내려오니 병풍소, 병처럼 생겼다 하여 병소, 뱀소, 백용소, 용이 머리를 흔들며 승천하려고 몸부림쳤다는 오룡대, 승천하려던 용이 떨어진 곳이라는 탁룡소가 나타난다. 여기서 부터는 물놀이가 가능하다. 물가에 자리잡고 3일만에 발을 담그니 체중이 쭉 빠지는 것 같다. 아침부터 좀 이상하게 생각한 일이지만 설악산 백담계곡과 수렴동 계곡에는 물고기가 많은데 더 맑은 물이 흐르는 이 뱀사골계곡에서는 물고기가 보이지 않는다. 남획으로 뱀처럼 씨가 말라버린 것인가? 지역 사람에게 물으니 계곡의 급류가 심해 모두 떠내려 가고 없다 한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길섶의 뽕나무에서 오디 열매와 감 꽃을 따먹으며 어린 시절, 고향, 부모 생각하다 보니 어느덧 반선 버스 정류장에 도달하였다. 정각12시. Step counter를 보니 87,300步를 걸었다. 등산안내 표시판에 따르면 유평리에서 여기까지 36.8km이다. 산길이라 1보에 40-45cm 정도를 계산하면 엇비슷하다. 남원행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3일간 구경도 못한 시골 된장국, 산채나물, 풋고추에 쌀알이 동동 뜨는 시원한 동동주를 두잔 마시고 나니 천하에 이보다 더 행복한 순간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1억 3천만 평에 이르는 지리산의 넓이가 펼치는 넉넉함은 보지 못하고 눈에 들어오는 능선과 계곡만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20여 번 왔다 가면 지리산 박사가 되지만 100번 ,200번이 넘도록 다니는 사람들은 "지리산은 보아도 보아도 볼 수가 없는 산이다."라고 토로한다. 아무리 잘난 자식도 어미의 모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처럼.
2003년 6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