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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오를 수 있는 이 봉 정상에도 눈물 핑 도는 감동은 있다”
두어 시간만 걸으면 조망 좋은 4,000m 고봉 정상에 도달
(위) 활기찬 하루를 시작하는 산양과 갈까마귀.
(아래) 정상부 남릉에서 십자가가 세워진 정상으로 향하고 있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알프스의 산악도시 체르마트(Zermatt·1,616m)와 자스페(Saas Fee· 1,803m)가 위치해 있는
발레(Valais) 산군은 알프스 산맥의 등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4,000m 봉우리 82개 중 절반에 가까운 38개가 이 산군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산군은 크게 다섯 구역으로 나뉜다.
그 중 하나가 체르마트와 자스페를 가로막는 4,000m급 봉우리 4개가 남북으로 이어져 있는 알라린 그룹(Allalin Group)이다.
이 그룹에서 북쪽 두 번째에 위치한 봉우리가 알라린호른(Allalinhorn· 4,027m)이다.
알라린호른은 라틴어의 ‘Aquilina’에서 유래한 말로서 ‘작은 독수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스트랄호른(Strahlhorn·4,190m), 림프피쉬호른(Rimpfishhorn·4,199m)과
알푸벨(Alphubel·4,206m)로 이루어진 알라린그룹에서
알라린호른이 제일 낮고 등정이 가장 쉬운 봉우리일진 모르지만
어디서 보나 당당한 4,000m 단일 봉우리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있으며
정상에서 뻗어 내린 각 능선 아래에 4개의 빙하를 거느리고 있다.
발레 산군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 경치가 아름답고
현대 문명의 이기로 쉽게 오를 수 있는 메트로 알핀(Metro Alpin·3,500m)에서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기에
알파인 등반 초심자들이 즐겨 찾는 4,000m 봉우리다.
‘알프스의 진주’로 일컬어지는 아름다운 자스페 마을
지난 여름에 필자는 백승기 선배와 함께 알라린호른을 찾았다.
필자로서는 정확히 10년 만이었다.
산행기점인 자스페 마을은 그때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자스 계곡의 오지에 위치한 이 알프스의 관광마을은
알라린호른 너머에 위치한 체르마트보다 규모가 작지만
고급 휴양지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고 있다.
‘알프스의 진주’로 일컬어질 정도로 아담한 산골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오래된 통나무 가옥들이 잘 보존되어 관광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이곳까지 승용차를 함께 타고 온 이진기씨 가족과 풀밭에 앉아 즐거운 점심을 먹었다.
이제 한창 여름 성수기를 준비하느라 조용한 산골 분위기는 느낄 수 없지만
알파인 분지에 자리 잡은 자스페를 둘러싼 빙하와 침봉들을 보며 먹는 점심은 제법 맛있었다.
곧이어 관광정보센터에서 날씨를 확인했다.
구름이 많고 오후에는 눈비가 내릴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오늘 묵을 브리타니아 산장(Britannia Hut·3,030m)까지는
그리 험하지 않기에 어쨌든 출발하기로 하고 배낭을 짊어졌다.
등산장비점이나 기념품 가게, 식당들이 즐비한 중심가를 지나는데
성당 앞 광장에 실물 크기의 동상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바로 이 마을을 지금처럼 풍요로운 산간 휴양지로 성장시킨 요셉 임셍 신부다.
19세기 중엽에 부임한 그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지역 발전에 매진,
길을 닦고 호텔을 지어 관광객이나 등산객을 유치한 인물이다.
곧 이진기씨 가족과 헤어진 우리는 마을을 벗어나 펠스킨(Felskinn·2,991m)행 케이블카 역으로 향했다.
야생화가 만발한 야트막한 오르막을 올라 케이블카 역에 이르렀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한 날씨라 대형 케이블카에는 우리 외에 두세 명의 관광객뿐이었다.
잠시 후 해발 3,000m 가까운 케이블카 역을 나오니 하늘이 어둡다.
여기서 우리는 브리타니아 산장으로 향했다.
스키 슬로프처럼 완만하게 눈 덮인 넓은 길을 따라 남쪽 산비탈을 돌아갔다.
마침내 싸라기눈이 내렸다.
서너 명의 트레커들이 마지막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급히 지나가자 더 이상 인적이 없다.
제법 내리는 눈에 대비하기 위해 배낭을 내려놓고 복장을 고쳐 입었다.
한동안 질퍽이는 눈밭을 걸어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산장에 이르렀다.
알라린호른의 북동쪽,
힌터 알라린의 동쪽 지릉에 위치한 산장은 돌로 견고하게 지어진 모양새가
몽블랑 산군의 여느 산장과는 달리 특이하다.
산장에는 많은 산악인이 와 있었지만 우리 둘을 위한 자리는 충분히 있었다.
저녁이 되자 눈은 더 이상 내리지 않았지만
저녁 내내 짙은 구름이 주변의 4,000m 봉우리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혹시나 구름이 걷혀 멋진 일몰을 맞이할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허사였다.
마음을 접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자정 즈음 잠시 밖으로 나와 밤하늘을 보니 여전히 구름이 많았다.
침상으로 돌아가 얼마 있지 않아 알람시계가 울렸다.
새벽 3시였다.
원래의 등반 목표였던 동북릉(Hohlaubgrat)에 오르기 위해선 이 시간에 일어나 출발해야 했지만
우선 밖으로 나가 날씨부터 확인했다.
여전히 짙은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급기야 동남쪽 하늘에선 번개마저 번쩍였다.
할 수 없이 출발을 미루고 침상으로 돌아왔다.
또다시 한 시간 후에 바깥 날씨를 확인해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등반 계획을 변경했다.
동북릉으로 정상에 올라 노멀 루트인 서북서 리지로 하산하는 계획을 바꿔
노멀 루트로 오르기로 하고 느긋하게 움직이기로 했다.
1 마을 위 야생화밭을 지나면 펠스킨행 케이블카가 나온다.
2 돌로 견고하게 지어진 브리타니아 산장.
3 ‘알프스의 진주’라 일컫는 자스페를 지금처럼 풍요로운 산간휴양지로 발전시킨 요셉 임셍 신부의 동상.
새벽 마른 번개에 속아 노멀 루트 선택
새벽 5시, 날이 밝아왔다.
동쪽 하늘의 뭉게구름 뒤로 서광이 어렸다.
주변 산들의 윤곽이 드러나더니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나 가차 없이 어둠은 그 위력을 잃어갔고 하늘을 가로질러 갖가지 색들이 펼쳐졌다.
마침내 구름 위로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자 산장 주변에 두텁게 깔린 구름이 분주하게 걷히기 시작했다.
신선한 공기가 하루의 시작을 도왔지만
새벽 3시에 동북릉으로 출발하지 않은 데 대한 후회가 막심했다.
그래도 어디로 오르든 하루의 시작은 기대가 된다.
하루의 시작은 산장 주변 풀밭에 나타난 산양이나 그 위를 배회하는 갈까마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산양들은 미네랄 섭취를 위해선지 마른 바위를 열심히 핥고 있었다.
모두들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사는 모습이다.
우리 또한 배낭을 꾸렸다.
노멀 루트인 서북서 리지로 오르기 위해선 다시 펠스킨으로 가야 했다.
전날 지나온 진창의 눈밭 길은 간밤의 기온에도 얼지 않아 질퍽였다.
메트로 알핀행 첫차 시간을 알지 못해 무작정 왔더니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다.
복도에서 차 한 잔을 끓여 마시고도 시간이 남았다.
또다시 아쉬움이 밀려왔다.
새벽에 마른 번개만 보지 않았어도 차츰 날씨가 좋아지는 지금은
동북릉으로 정상 가까이 등반하고 있을 텐데 하는 후회다.
아침 8시가 가까워지자 메트로 알핀행 첫차를 타기 위해
자스페에서 올라온 산악인들과 브리타니아 산장에서 함께 묵은 이들이 도착했다.
모두 알라린호른에 오를 모양이었다.
펠스킨에서 메트로 알핀까지는 바위를 뚫고 건설된 케이블 산악열차를 이용한다.
약 70도 경사도의 바위 터널에 바퀴가 달린 열차가 케이블에 매달려 움직였다.
곧이어 3,500m 고지에 위치한 메트로 알핀 전망대에 이르렀다.
전망대로 나가자마자 눈밭이기에 실내에서 모두 장비를 착용했다.
많은 이들이 불필요한 장비를 보관함에 두기에
우리도 동전을 찾아 동북릉 등반을 위해 준비했던 일부 등반장비를 보관해두었다.
아이젠을 신고 출발이다.
한동안 스키 슬로프를 따라 걸었다.
이곳은 여름에도 스키를 탈 수 있는 곳이기에 몇몇 스노라인 차량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수십 명의 산악인이 우리 뒤를 따르고 있었다.
대부분 가이드를 동반해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전날 오후에 내린 눈이 제법 되었지만 길을 못 찾을 정도는 아니었다.
저 멀리 스키 슬로프에서 벗어나 페요흐(Feejoch·3,826m)로 향하는 발자국이 나 있어 그리로 향했다.
한데 우리 뒤로 떼를 지어 따라오던 그들이 좀 더 위쪽으로 슬로프를 따라 갔다.
아무래도 현지 가이드들이 인솔하는 길이 맞을 것 같아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신설의 눈밭을 가로질렀다.
잠시 후 그들 또한 슬로프에서 벗어났다.
길은 어렵지 않게 지그재그로 설사면을 올랐다.
이어 가파른 설사면을 조심해서 횡단해 모서리를 지나자 페요흐가 보였다.
계속 해서 눈밭을 오르자 마침내 정상 안부인 페요흐다.
한 시간 반 정도 걸렸다.
사방으로 트인 전망을 즐기며 모두 이곳에서 한숨을 돌렸다.
10년 전에 필자가 이곳에 왔을 때 텐트를 친 장소였다.
반대편 아래로 체르마트 계곡이 보이고 그 위로 마터호른이 보였다.
갑자기 구름 몰려와 온 사방 가려
땀이 식자 배낭을 짊어졌다.
이때 갑자기 구름이 몰려와 시야가 몇 미터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먼저 오른 이들의 발자국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그리고 꽤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아래 위에서 그룹을 지어 오르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동안 북서면을 따라 오르더니 남측으로 돌아서자 구름이 걷혔다.
시야가 트이자 알라린호른 남쪽에 위치한 스트랄호른과 림프피쉬호른 두 봉우리가 지척이다.
곧 저것들도 올라야 할 대상들이라 눈에 익히며 올랐다.
잠시 후 다시 구름에 휩싸였다.
그래도 정상 쪽에서 먼저 오른 이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정상이 한층 가까워져 있었다. 계속 해서 설사면에 난 길을 따라 올랐다.
도중에 짧은 바위지대를 지나자 정상으로 이어진 설릉에 올라섰다.
구름이 흩어지고 시야가 트였다.
정상에 서 있는 십자가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잠시 쉬었다.
정상 부위가 좁아 그들이 내려오길 기다렸다.
곧이어 좁은 설릉에서 정상에 다녀오는 이들과 어깨를 스치며 지나 정상에 다가갔다.
꽤나 큰 청동 십자가가 자스페 마을을 향해 세워져 있었다.
정상에 도착한 백승기 선배는 곧장 무릎을 꿇고 가슴에 성호를 그으며 고개를 숙였다.
알라린호른처럼 정상부에 바위가 있는 알프스의 봉우리들에는
이렇게 십자가나 성모마리아상이 세워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이제껏 백 선배와 서너 개의 봉우리에 올랐다.
결코 신실한 신자가 아니었던 백 선배였던지라
처음 한두 번은 필자의 눈에 띄지 않게 금방 기도를 드린 듯했는데,
이제는 제대로 하는 모습이다. 믿음이 깊은 형수에 대한 사랑의 약속 같았다.
그 대상이 누구였든 믿음을 행하는 숙연한 모습만은 보기가 좋았다.
우리도 기념사진을 찍었다.
십자가를 배경으로 몇 컷을 찍었다.
뒤따라 오른 서너 명의 자일파티 중 한 명이 카메라를 건네면서 사진을 부탁했다.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움켜쥐고 정성스럽게 그들의 등정 모습을 담았다.
현지 가이드를 동반한 50대 초중반의 아줌마들이었다.
그녀들 중 한 명은 눈시울을 붉혔다.
두 시간 조금 더 걸려 오른 결코 어렵지 않은 산행이었지만
그녀에게는 필자가 알지 못할 감동의 요인들이 충분할 터. 하여 더 정성스럽게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일반 등산객들이 좀처럼 찾지 않는 어려운 봉우리의 정상에서는 대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아래에서 계속 사람들이 올라와 우리도 정상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하산이다. 이제껏 백 선배와 연결했던 자일을 풀고 내려갔다.
이미 아는 길이기도 했으며
도중에 크레바스나 위험한 추락 지점이 없었기에 자일이 없는 편이 하산에 편했다.
정상부 능선에 내려서니 움푹한 안부에 많은 산악인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정상에 다녀온 이들 모두가 이곳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점심을 먹으며 쉬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정상 등정을 축하하기 위해 포도주를 건네기도 했다.
즐거운 모습들이다. 우리도 그들과 동참하고 싶었지만 다음 등반을 위해 하산을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그날 오후부터 나빠진 날씨 때문에 더 이상 자스페 계곡에서의 등반은 이뤄지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알라린호른 정상에서 좀 더 즐거운 시간을 가졌을 텐데.
다음날 자스페 계곡을 빠져 나왔다.
(좌) 구름이 오가는 정상부 능선을 내려가는 산악인들.
(우) 메트로 알핀에서 본 알라린호른. 등반은 오른편 사면을 돌아오른다.
산행 정보
1856년 7월 28일에 J 임셍(Imseng) 일행에 의해 남서 리지를 통해 초등된 알라린호른은
메트로 알핀 전망대가 건설됨으로 인해 가장 오르기 쉬운 4,000m 봉우리 중 하나가 되었다.
전망대에서 스키슬로프를 따라 오른 후
북동 리지 아래의 빙설사면을 따라 페요흐까지 약 한 시간 반 동안 오른 후,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정상에 이를 수 있을 정도로 등반 난이도가 F+급이기에
가이드를 동반한 일반인들도 많이 찾는다.
하지만 간혹 빙설사면에 얼음이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있어 조심할 필요가 있다.
등반시간이 짧아 자스페에서 첫차를 타고 등정할 수도 있으며,
3,030m 고도에 위치한 브리타니아 산장에서 하룻밤 머무는 것도 운치 있는 산행이 될 것이다.
허긍열 한국산악회 대구지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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