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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야고보와 코보대사, 까미노와 시코쿠헨로
까미노의 7개 메인 루트(main route)에도 특정 구간에 복수의 길이 있다.
해안길에서는 후발 산간길이 있거나 '관광로'라는 새 길이 소개되고 있다.
산간길에서도 당초의 길이 험하다고 판단되는 지역에는 완만한 대체길을 제공하고.
차량통행은 불가능하나 MTB(mountain bicycle산악자전거)는 다닐 수 있는 옛길도 있다.
심지어 지역 간의 이해에 걸려 한 구간을 통째로 바꿔버린 루트도 있다.
사도 야고보의 선교여행로 라고 철석같이 믿고 걷는 순진한 신도들에게 큰 상처를 주지만
야고보의 성가에 편승한 인위적 길임을 입증하는 소위 까미노(길/보통명사)다.
코보대사는 어떠했는까.
그의 연보를 보면 나라시대(奈良)인 774년(宝亀5년)에 태어나 헤이안시대(平安)인 835년
(承和2년)까지 61년을 살았다.
804년(延曆23년), 31세에 유학기간이 20년으로 규정된 정규 견당사(遣唐使)의 유학승(僧)
으로 당나라에 갔으나 806년(大同元년)에 20년의 룰(rule)을 깨고 귀국했다.
2년만에 돌아옴으로서 문제가 있었지만.
그는 귀국한 후 자기가 수입한 밀교 신곤슈(眞言宗)의 일본 개조가 되었다.
1.200km 88헨로미치를 남겼고 일본 불교를 위해 28년간 몸을 바쳤는데 만약 견당사 신분
이라는 이유로 당나라에 20년을 묶여 있었다면 일본 불교는 어떤 상태로 있을까.
불교신도가 95%(?)라는 일본인들이 그를 기리며 그에 연관된 무수한 기적과 전설이 난무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이해한다.
그러나, 야고보는 코보와 달리 수(壽)를 하지 못하고 참수로 생을 마감했다.
알려진 대로 그 때가 44년(AD)이라면 그의 순교(殉敎) 때 나이도 60대 후반이었을 것인데
그가 선교 여행을 한 기간은 짧고 거리도 길지 않다.
그래도 까미노는 스페인을 벗어나 전 이베리아 반도를 망라하고 이웃나라까지 밀고 간다.
여러 길을 많이 걸은 것과 무관함을 의미한다.
한데, 까미노처럼 UNESCO에 등재되기를 원한다는 헨로미치는 어떠한가.
불가피한 이유도 없이, 한 구간에 지리멸렬하게 널려있는 2개 이상 5, 6개의 길들 중에서
택일해야 한다.
아마도, 가장 긴 루트가 가장 오래된 길이며 가장 짧은 루트가 최근에 개설된 길일 것이다.
차량이 없던 때 코보가 88개 레이조 중 대부분을 개창 또는 개(改) 보수했으므로 1.200km
를 걸었을 것이지만 시코쿠헨로는 까미노와 달리 88레이조 참배가 목적이잖은가.
까미노와 시코쿠헨로의 본질적인 상이점은 과정과 결과의 문제다.
까미노에서는 산띠아고 데 꼼뽀스텔라는 종점일 뿐 그 루트의 전 과정이 중요하다.
차량을 이용하는 것은 부득이한 경우로 간주하며 걷는 걸음마다 신심이 함축되어 있다.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고 있는 것에 다름아닌 길이므로 개별적인 것이 바람직하다.
무엇보다도 길에서 길을 찾는 긴 순례 여행이다.
사람들이 걷는 물리적인 길에서 다른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나만의 길을 찾는 과정이다.
그러나 시코쿠헨로는 과정은 무의미하다.
오로지 88개레이조를 빠뜨리지 않고 참배하는 것 만이 유일한 과제다.
단순한 참배가 아니라 각종 명목의 금전을 바치는, 납경이라는 이름의 참배만이.
그래서 홀로보다 2인이 낫고 승용차보다 집단이 커지는 버스편을 더 권하는 것이리라.
뿌리치고 달아날 자신이 없는 원더풀 해안로
지금껏 22일 만에 최고로 기분 만점의 아침이었다.
우리 주변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사회복지법인들과 달리 이 울안에서 생활하는 노인들과
장애인들은 모두 행복할 것으로 느껴지는 이른 아침.
이런 기분이라면 아무리 먼 길이라도 엥코지까지 능히 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아시즈리우와카이(足摺宇和海)공원인 마츠자키(松崎)해안의 화석연흔(漣痕)이 장관이다.
동해안의 주상절리 보다는 못해도 시코쿠 해안에서는 드물게 보는 자연 현상이다.
마츠자키~시모마시노(下益野)~미사키(三崎)의 긴 해안은 일본의 토목기술도 손들었나.
해안로가 개설되면 고개(上福峠)를 넘지 않음은 물론 321번국도가 반으로 단축될 텐데도
방치하고 있으니.
고개를 넘으면 시코쿠헨로가 다시 둘로 나뉜다.
해발 400m를 오르내리는 산간길과 긴 해안로로.
내가 가는 길은 이미 하기모리의 권고를 거부한 길, 해안로다.
아직 고개를 넘는 중인데 카니(蟹/빨간 게)들이 고개 중턱까지 올라와 있다.
카니도 물의 생물인데 왜 등산을 좋아할까.
겁 많은 청년, 니시오를 생각나게 하는 2가지가 마무시(살모사)와 카니인데 겁 먹은 그의
모습이 이른 아침부터 떠오른 것은 내가 지나치게 무료하기 때문이었을까.
이른 아침이기 때문인지 쓸쓸하기가 냉랭할 정도지만 식당가인 토사식(주)(土佐食株式會
社)의 소공원(Pocket Park)에 헨로코야(小屋)가 있다.
이색적 디자인으로, 간밤에 안키나가(家)에서 쫓겨났다면 1시간 미만에 당도할 여기에서
밤을 보냈을 것이다.
헤이세이(平成)26년인 2014년 기준 5년 된 코야다(헤이세이 21년에 신축)
갈길이 바빠도 미사키우라(三崎浦)의 니코니코 해안공원은 들르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관심의 양극성(兩極性)을 보여주는 이름(아주 잘 꾸몄거나 그 반대거나)이다.
어떻게 꾸민 공원이기에 생긋생긋, 생글생글, 싱글벙글이라 했을까.
이름 하나로 과객을 불러들인다면 가히 명작이라 할 수 있는데 허허할 뿐인 이름이다.
그러나 존 만지로의 이름은 다르다.
그가 토사시미즈의 최고 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아시즈리 서니로드의 긴 해안
에 있어야 할만한 시설들은 모두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타츠쿠시(龍串) 다리(三崎川)를 건넌 후의 해안은 있어야 할 것이 다 있는 만물상이다.
붙들고 늘어지는 볼거리들을 뿌리치고 달아날 자신이 없는 지역이다.
코보대사가 심어놓은 무수한 관광상품이 인력(引力)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세출의 밀교 대사가 1.200년 후의 후손의 생업을 위해 그랬을 리 없지만 실낱 연기(緣起)
만 있어도 동아줄 인연으로 엮어 인기 관광상품화 하는 이 시대의 대세에 따른 것이리라.
해양관(水族館), 해저관, 타츠쿠시해안과 미노코시(見殘し/다 보지 못하고 남겨놓았다?)
해안 등에서 오랜만에 헨로상 아닌 관광객들을 만났다.
츠마지로(爪百) 캠프장을 끝으로 해안 관광지를 뒤로 했다.
아직도 이른아침이며 인적 없는 해안로 321번국도가 시모카와구치(下川口)터널을 통과해
소로 강(宗呂川 /下川口大橋)을 건넜다.
지도에만 있는 '상고채취발상기념상'(산호 소녀상) 지점을 지나고 카타카스대교(片柏)도
지나 2개의 터널(片柏,齒朶ノ浦)을 통과하면 얼마 후 다시 카이노카와(貝ノ川) 터널이다.
오츠(大津)마을의 정류장을 지나고 오츠대교를 건넜다.
카나에자키(叶崎) 터널을 통과한 후 카나에자키쿠로시오(叶崎黑潮) 전망대의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심호흡을 할 때는 태평양 바람이 찌들은 세상사 먼지까지도 몽땅 쓸어가는 듯 상쾌한 기분
으로 대체되는 신선한 느낌을 만끽할 때는 행복지수가 최고로 오르는 듯 했다.
하마터면 후회막급의 낭패를 할 뻔 했다.
하기모리 때문에 이 좋은, 행복이 뭉텅이로 깔려있는 길을 놓칠 뻔 했으니까.
짧은 것과 꽤 긴 2개의 터널(西叶崎, 脇ノ川)을 통과함으로서 토사시미즈시의 9.5km 안에
7개나 있는 터널 왕국을 벗어날 때까지도 그랬다.
원더풀(wonderful)!
기암괴암, 볼거리가 풍부한 해안길인데 많이 돌면 어떠냐.
장거리가 겁난다면 길과는 아예 담을 쌓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된 것인데 그건 절망이다.
본전을 뽑고도 엄청 남은 장사라 할 수 있지만 51km를 예상했다가 72km가 넘는 길이니
그만큼 투자도 한 것이다.
헨로미치에 재연된 까미노의 빗길 15시간
일본을 본받아야 할 일 중 하나가 우편국의 설치다.(간이우편국이라도)
통신은 물론 금융과 실생활의 애로를 풀어주는 다기능의 공기관을 상거가 멀지 않은 요소
마다 설치한 것은 민초들과 더 가까이 있다는 의미다.
스마트폰이라는 해결사 시대에는 퇴색이 불가피하지만 상징성은 여전하다.
특히 길손에게는 절실할 때가 많으나 오늘은 볼일 없는 코사이츠노(小才角)간이우편국을
지나 휴게소(다른 상고소녀상)에 당도했을 때다.
해안의 자연에 취함으로서 일체에 긍정적인 하루가 되나 싶어질 때, 행복은 이 때까지만?
행정구역이 토사시미즈시에서 하타(幡多)군 오츠키 타운(町)으로 바뀐 지점까지만?
믿지 못할 것 중 하나가 해안 날씨라 하나 어디에 숨어있던 먹구름인가.
동이로 붓듯 쏟아내는 비.
길 나그네에게는, 나그넷길에는 비일비재 일인데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가.
커버로 단속한 배낭을 다시 판초 속에 넣고 핸드폰도 깊숙히 넣고 빗속으로 들어섰다.
보이지 않으니 찍을 일도 없고 걸음은 오히려 빨라졌다.
오우라(大浦) 분기점에서 츠키야마진자(月山神社)로 이어지는 헨로미치를 버리고 321번
국도를 택하여 다른 간이우편국(月灘)을 지났다.
곳곳에 있는 우편국만 확인해도 길 잃을 염려는 없다.
터널 2개를 거듭 통과해 또 우편국(姬ノ井)을 지났다.
이 지점에서 츠키야마신사를 거쳐온 헨로미치와 합류하여 내륙이 끝나고 바다가 보이는
지역까지 쉬지 않고 걸었다.(비 대피가 가능한 일부 '버스스톱' 외에는 쉴 수도 없으니까)
마츠다강변(松田川)의 미치노에키(道ノ驛) 스쿠모(宿毛)에 당도했을 때 실컷 쏟아냈는지
빗줄기에 기운이 빠졌고 내 몸의 기운도 죄다 빠져 그로기 상태가 되었다.
39번 엥코지 까지는 아직도 10km 이상 남았을 텐데.
많이 또는 빨리 걷기 게임하는 것이 아니며 오늘 당도하지 않으면 페널티(penalty)를 물게
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럴까.
페널티라면 지불로 종결되지만 스스로 다짐한 약속은 사면해줄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지키는 의무 외에는 아무 대안이 없으므로.
조금은 스며든 빗물에 젖고 구겨진 지도를 펴고 길을 선택했다.
헨로의 경유로가 아니고 밤길에 대비한 대로를.
마츠다강을 건넌 321번국도에서 56번국도(스쿠모바이패스도로)로 바꿔 타고 마츠다 강을
다시 건넌 후 낮은 고개를 넘어 아루네야(屋) 스쿠모점(관광안내소)까지 내려가야 한다.
마츠다강대교를 건널 때 어둑발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 강을 다시 건널 때(新宿毛大橋)는
이미 와있는 밤이었으므로 서두를 것 없이 걷고 있었다.
까미노 프랑스길에서 한 번 있었을 뿐이며, 그같은 무모한 짓은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
건만 70대말의 일을 3년 뒤인 80대에 반복하다니.
이미 14시간을 걸었고 1시간 이상 더 걸어야 할 길을 남겨놓은, 비내리는 밤이지만 천하가
태평해졌는데 돌연 화급한 출두령(?/解憂室)이 떨어졌다.
황급히 노변의 자동차수리점(池田自動車)에 들어가 엥코지 가는 길을 물었다.
묻지 않아도 되는 뻔한 길을 굳이 물은 것은 무턱대고 화장실을 물을 만큼 면피가 두껍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근심걱정을 다 내려놓고 나오는 동안 주인은 오셋타이, 오모테나시를 결심했는가.
"4km가 넘고, 비가 오고, 밤길인데 오토상이 어떻게 걸어갑니까."(그런 뜻으로 들렸다)
벌써 자기 차의 시동을 걸어놓은 장년 주인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고백하건대, 무척 고맙기는 했지만, 이미 흠씬 젖은 몸이며 이미 와있는 밤인데 더 늦은들
무슨 걱정이냐는 뱃장이었으므로 절박한 사정은 아니었다.
이 사람에게도 내 또래의 아버지가 있나?
까미노에서도 내게 분에 넘치는 호의를 베푼 사람들은 모두 자기 부모가 내 연배라 했다.
사거했거나 투병중인 부모 이야기를 하며 나를 선망했으니까.
아무튼 1시간을 일찍 도착하면 레이조의 츠야도에 들어가기가 그만큼 덜 미안할 것이다.
구하는 자가 받고 찾는 자에게 나타나고 두드리는 자에 의해서 문은 열린다.
엥코지 앞에서 헤어질 때도 이같은 생각에 그가 더욱 고마웠는데 이 무슨 날벼락?
츠야도(通夜堂)가 없단다.
몹씨 야멸찬 소리로 느껴져서 츠야도 일람표를 믿고 왔다는 내게 하는 직원의 말.
3년 전에 폐쇄했는데도 아직껏 그대로라며 관계자의 무성의를 비난하는 그에게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초저녁이지만 밤시간에 당도하기는 처음인데 저녁시간이 되면 모두 퇴근해버리는 산사와
달리 밤에도 불을 켜고 있는 것만도 다행이지.
나라시대, 진키(神龜)원년에 교키보살(行基)이 세웠다는 사찰이다.
쇼무천황(聖武/724~749)의 칙령으로 자신이 조각한 약사여래상을 본존으로 안치했는데
순산과 액막이 기원의 뜻이 담겨 있다고.
또한 구리 범종을 등에 업고 나타난(용궁에 살던?) 붉은 거북을 승려들이 봉납하고 산호
(山号)와 사명(寺名)을 샤키잔 엥코지(赤龜山延光寺)로 개명했단다.
엔랴쿠(延曆)14년(795)에 코보대사가 간무천황(桓武/781~806)의 칙원소로 재건, 칠당
가람(眞言宗에서는 多寶塔, 金堂, 經堂, 鐘樓, 經藏, 大門, 中門)으로 거듭났다는 것.
건립자가 교키보살인데도 밀교 진언종인 이유다.
코보대사는 이 시기에 지팡이로 땅을 쳐서 물이 솟아나게 했다나.
이 물이 안질을 고치는 영수(靈水), 소위 '메아라이이도'(眼洗い井戶)란다.
경내를 둘러본 후 56번 도로로 나왔다.
사찰 안팎을 둘러보았으나 비를 피하며 자리 펼만한 공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민슈쿠(우리의민박) 긴판이 있으나 비를 이유로 민슈쿠로 향하는 것은 내 방식이 아니다.
일본 청년 니시오와 함께 할 때는 내 의지를 유보했기 때문이었지만.
국도변의 불밝은 매장에서 먹거리부터 샀다.
어제 토사시미즈 시에서 샀으나 밤에 안키나이에에서 오셋타이를 받음으로서 남은 것으로
오늘낮을 보냈으므로 저녁식사가 필요했다.
빵을 사고 유효기간이 임박한(내일 아침까지) 반값 도시락도 샀다.(내일 식사용으로)
지금(2014년 5월 24일 21시) 이후 이 밤에 내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비가 들이치지 않으며
내가 누울 만큼의 공간 뿐이다.
소원이 이처럼 축소되었는데 사람 사는 세상에 이 정도의 조건이 이뤄지지 않겠는가.
노변의 건물들을 살펴보는 걸음이 승용차로 넘었던 고개를 되넘었다.
공간이 너른 이케타자동차점까지 갔으나 내려진 셔터에 자물쇠가 잠겨 있으니.
결국, 차를 탄 거리를 다시 걸은 것이며 건너편 노변을 살피며 그 고개를 또 넘었다.
고개는 이케타 자동차에서 엥코지 입구 도로 사이 중간쯤의 위치다.
고개에서 100m쯤으로 심하지 않은 커브를 돌아 내려가는 노변.
칠흑 밤이지만 간단 없이 비취는 차량 전조등으로 확인되는 한 건물에 두 눈이 사로잡혔다.
지붕이 있고 도로변을 제외한 3면중 2면이 하부 반벽(半壁),1면은 90% 간이벽인 간이건물.
잘 다듬은 콩크리트 바닥까지 1박 비닐영(野營)에 손색 없는 건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니.
무슨 용도의 미완성인지 그것은 내게 의미 없고 이 밤에 나를 위해서 비어있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밤중에 차량 또는 어떤 화물이 들이닥치지 않을까 손전등을 꺼내어 자세히 보았으나 그런
흔적이 없고 그럴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는 공간이다.
그래도 배낭을 완전히 풀지 못한채 얼마쯤 더 있는데 명멸하는 내 손전등에 반응이 왔다.
뒷쪽에 있는 민가들 중에 소유권이 있는 주인녀인 듯,
한 차량이 귀가하는 듯 했는데 곧 이어 들려온 것이다.
상거가 꽤되기 때문에 잘 들리지는 않았으나 나를 부랑인(浮浪人)으로 간주했는지 당장에
나가달라는 것 같았다.
나도 크게 외쳤다.
헨로상인데 엥코지에 츠야도가 문닫았기 때문에 노영중이며 내일 새벽에 나가겠다고.
헨로상이라는 말에 기가 꺾였는지 잠잠해졌고 드디어 맘 놓고 자리를 폈다.
구하는 자가 받고 찾는 자에게 나타나고 두드리는 자에 의해서 문은 열린다.
기독교 성경에만 있는 말인가.
팔메로스(Plameros)가 그랬고 로메로스(Romeros)도 그랬다.
뻬레그리노스(Peregrinos)도 그리 하는데 헨로상은 그러면 안되는가.
나 또한 까미노에서 그랬듯이 여기 헨로미치에서도 그런 생활이다.
그래서 이 밤에도 나의 낙원이 만들어진 것이다.
헨로미치에서도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를 수 밖에 없는 이유
낮에는 776y의 식거리 중 일부로 15시간을 걸었고 저녁식사는 426y어치 중 일부로 했다.
헨로미치에서 나는 걷는데 지장 없을 만큼만 먹고 있다.
까미노에서도 그랬다.
거의 매일같이 보는 까미노의 십자가와 작은 비석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먹고 걸었다.
추위와 싸우고 기아를 이겨내며 오로지 보이는 길에서 보이지 않는 길을 찾으려는 구도의
길을 걷다가 끝내 구도자의 생을 마감한 선인들을 축자적으로 따르려는 것이 아니다.
시대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개설된 까미노와 시코쿠헨로는 각론에서는 상이할망정 똑같은
구도의 길이었다.
까미노는 일부 참여자들의 몰지각으로 인하여 퇴색, 변색하는 양상을 띄고 있으나 본질은
온존되고 있는데 반해 겉으로는 활성적인 듯 하나 심각하게 변질된 시코쿠헨로.
까미노는 여전히 고독한 2 발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길을 찾으려는 자들의 보이는 길이다.
이에 반해 이 시대의 시코쿠헨로에는 1.200km는 없고 오로지 88레이조만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헨로의 관계자들은 2인 이상, 4발 이상의 집단적 상호 충족을 지향하고 있다.
죽을 수도 있는 고난과 형극의 길이라해도 피하지 않고 걸어가는 길이 순례길이며 그 주인
공이 순례자라면 헨로와 헨로상은 순례길(pilgrimage)과 순례자(pilgrim)가 아니다.
(사생결단의 각오로 걷는 구도자들에게는 죄송한 표현이지만 전반적 분위기를 말한다)
까미노를 걷는 무수한 사람과 1.200km헨로미치는 쓸쓸해도 후다쇼에서 돈바치느라 열을
서야 하는 무수한 사람이라는 양극적인 현상이 이를 대변해 주고 있다.
앞에서 오셋타이의 여인이 그립다 했는데, 이 여인도 오셋타이를 받을 헨로상을 기다리다
나를 만난 것 아닌지.
큰 소리로 해서는 안되겠지만 다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르는 밤이다.
내 어머니는 당신의 아들이니까 나를 지키기 위해서 라면 당신의 목숨이라도 내놓으려고
하셨을 테지만 그 분은 왜 나를 버리지 않으시는 것일까.
오늘만 해도 든든한 뒷배만 믿고 무모하지 않았던가.
버린다 해도 이제는 그것도 은혜가 될 것이니까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놓을 수 없다.
<계 속>
내가 1박한 안키나이에의 방(위)과 공동식당과 실내외(아래)
위 사진(3매)은 안키나이에의 페이스북에서 전재한 안키나이에 가족의 한 때
이른 아침에 교통안전을 위해 건널목을 지키는 여인에게 경의를 표하지만 카메라가 발동할
만큼의 모델은 아닌데 아침부터 착각 중인가.
시코쿠도(島) 동서의 북쪽해안에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국립공원, 남동해안에는 무로토아난카이간
(室戶阿南海岸)국정공원, 남서해안에는 아시즈리우와카이(足摺宇和海)국립공원 등 해안공원이 있다.
세토나이카이는 아직 모르지만 남서해안을 걸으면서 거쳐온 남동해안을 돌이켜 보았다.
해협들이 있으며 태평양의 시코쿠내해 전체 해안을 말하는 세토나이카이는 곧 진입하게 될 것이므로
언급할 기회가 올 것이지만 비슷한 규모의 동서 해안은 확연히 다른 면을 보이고 있다.
'동고서저'(東高西低)가 지구촌 산의 일반적 현상이라는데 해안은 밋밋한 동쪽과 달리 서쪽은 굴곡이
심하고, 그래서 크고 작은 만(灣)들이 많은가.
한반도의 동서해안과 유사한 현상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무로토아난카이간에 비해 아시즈리우와카이에 진기한 볼거리들이 많다는 뜻이다.
아시즈리 관광해안을 벗어나 시모카와구치 터널부터 10km미만의 해안에 7개의 터널이 있는 해안지대.
바다 쓰레기의 집하장 같아서 기분이 별로인 지역에 괴상한(怪しい) 사람을 신고하라는 아야시이 안내판
(위)이 걸음을 멈추게 했다.
일본의 4대 섬 중에서 가장 작고 뭍으로부터 가장 멀리 격리된 섬이며 그 섬에서도 가장 먼 바다 쪽인데
밀입국자를 신고하라니.
허를 찌르는 작전도 가능하기 때문일까 실제로 있기 때문인가.
밀입국자 보다 간첩의 침투 때문에 긴장을 풀 날이 없었던 우리나라의 바닷가도 이즈음에는 단속 대상이
밀입국자들로 바뀌었다는데 밀입국의 이유가 비교 우위의 세계에 대한 동경인가 범인의 도피인가.
밀입국이란 시도(試圖) 자체가 범법인데 그럴 가치가 있는 추구(追求)인지.
하도 많은 부실공사에 절망 수준으로 추락하다가 비교 우위에 있는 나라들의 유사한 현장(부실공사/위)을 통해서
위로를 받는다면 건강한 심리상태라 할 수 없다.
소위 물귀신 또는 내 행복을 위해서는 남이 불행해야 하는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그 협의(狹義)는 이기(利己)의 극단(極端)이며 광의로는 치졸한 애국주의의 일단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에도 성수대교가 있고 돌집의 땅 이베리아 반도에도 삼풍상가가 있으며 지진의 나라 일본에도 부실
공사의 현장이 도처에 있다.
나는 이 현장들에서 우리의 현실이 절망 수준은 아님을 확인했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는 등식도 타기(唾棄) 이전에 존재해서는 안되며 실체를 인정할 수 없는 악이다.
그러므로, 생각을 바꾸면 된다.
타산지석의 교훈은 늘, 편재(遍在)하며 이 작은 현장(부실공사)이 이처럼 거대한 교훈으로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터널 직전이며 마을도 먼 도로(국도321번) 변의 간이우편국(土佐淸水貝川/위).
이용자가 하루에 몇명이나 될까.
인건비는 커녕 전기값이라도 나올까.
그럼에도 이런 우편국이 농어산촌 도처에 수두룩하다.
일본의 우편 당국자들은 정녕, 경영 마인드가 형편 없는가.
우리나라라면 진즉 철폐되고 말았을 간이우편국들.
핑크색 연서(戀書)를 비롯해 각종 사연이 담긴 종이편지 시대는 진즉 종쳤다.
급전(急傳)을 의미하는 전보를 비롯하여 우편국이 담당했던 대부분의 업무가 자기 손바닥
안에서 즉시적으로 처리되는 시대에 우편국의 편재는 터무니 없는 낭비다.
우리나라의 머리 좋은 당국자들의 이같은 분석을 벤치마킹이라도 할 것이지?
과연 일본인들은 머리가 없거나 작은가.
그러나 일본의 일등품 하나만 고르라면 내게는 단연코 일본의 우편국이다.
이용하지 않는다 해도(초기에 2번 이용) 일본땅에서 내 맘을 편하게 해준 유일한 존재니까.
존재의 확인이 반복됨에 따라 멀지 않은 간격으로 우편국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안전감을
갖게 되며 안도감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힘 자체였으니까.
일본의 당국자들에게는 장사꾼 마인드보다 행정마인드가 우위에 있는 것 아닌가.
천박한 상업 마인드가 아니라 민초들이 주인인 민주주의 철학이 지배하는 행정마인드가.
까미노 주변의 꼬레오스(Correos/우체국)는 이베리아 반도의 전 까미노에서 뻬레그리노스
(Peregrinos/순례자)를 위한 획기적인 일을 하고 있다.
싼 값에 뻬레그리노스의 짐을 행선지안의 원하는 꼬레오스로 보내주고 도착 꼬레오스는 그
짐을 2주간(15일) 무료로 보관한다.
2주 안에 불필요한 짐을 탁송하는 방식을 지속적으로 이용하면 짐 배달 택시보다 엄청 적은
비용으로 장기간과 장거리용 짐 때문의 고역을 덜고 순례를 이어갈 수 있다.
일본의 당국이 이 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하여 시코쿠헨로1200km 일대의 우편국들로 하여금
이 일을 수행하게 한다면?
1200km헨로와 40~50일이 소요되는 아루키 헨로상들에게 대단한 기여가 될 것이다.
UNESCO 욕심만 갖지 말고 저변 다지기를 우선하라고 권한다.
양의 동서를 망라해서 유명세를 받는 시인이 되려면 자기만의 시어(詩語)를 많이 갖고 있어야 하는가.
이 곳(叶崎) 출신 시인(野口雨情)의 시비(詩碑)에 새긴 시도 그렇다.
"카나에자키에서 파도소리 들었다"(叶崎で波の音聞いた)는 말이 지나치게 평범하다고 생각되었나.
"波が碆打つ音聞いた"(나미가 하에우츠 오토키이타)
자기만의 시어 '碆打つ'를 만들고 쾌재를 불렀을까.
소녀상(少女像) 때문에 첨예하게 대립 중인 일본의 해안에서 만난 소녀상은 '산호따는소녀'다.
양쪽이 모두 어린 나이에 세상 풍파를 겪었지만 생업을 위한 풍파와 야만적 압제에 의한 비인간적
학대를 온몸으로 겪은 소녀의 풍파가 같을 수 있는가.
이 시간 이후, 동이로 붓는 듯 쏟아지는 빗속을 걸으며 생각한 것은 아무리 관대하려 해도 용서를
할 수 없는 일본인들이라는 점이다.
보는 것이 없고 찍는 일(사진)이 없으니 걸음은 절로 빨라졌지만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DJ가 소개한(책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에) 옥스포드대학 연설 후 일본학생과의 질의 응답이다.
2차세계대전 전에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종주국이었던 영국, 프랑스와 사이 좋게
지내는데 한국은 왜 옛날을 잊지 못하고 아직껏 화해하지 못하느냐는 일본인 유학생에게 한 명답.
내가 온몸으로 겪었기 때문에 더욱 생생하고 공분하는 내용들이다.
창씨개명이라 해서 생명과 동격인 성(姓)을 바꾸도록 강압했으며 지명까지 일본식으로 바꿨다.
한국 말을 사용하거나 한국역사 배우는 일을 철저하게 금지했다.
매일 아침에 일본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큰절을 하고 신사에 참배하라고 강요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자기네 식민지에 이런 강요를 한 적이 있는가.
대전 후 독일과 일본, 두 패전국이 취한 처신의 비교 설명에서는 통쾌 무비(無比)의 달변으로 만장
한 청중의 우레같은 박수를 끌어내고 일본학생들의 항복을 받아냈다는 명 연설.
독일은 자기네의 죄상을 어린이부터 온 국민에게 철저히 교육한데 반해 일본은 대부분을 은폐와
왜곡에 급급했으며 지금도 진행중이다.
전비를 뉘우치고 참회하는 것은 재범하지 않겠다는 서약에 다름아닌데 이를 거부한다면?
상대할 만한 문화국인이라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나라와 이웃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불행이다.
우리도, 우리가 모를 뿐 유사(有史) 이전에 지은 큰 죄과가 있기 때문에 이같은 이웃을 두는 천벌을
수형(受刑) 중이 아닌지.
억수에 대한 대비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고(위) 3시간여가 지난 후 빗줄기가 가늘어졌으므로 마츠다 강
대교(아래)를 건널 때 카메라를 꺼냈으나 곧 어둠이 찾아왔다.
마츠다강(新宿毛大橋/위)을 간신히 담고 39번엥코지(아래)에 도착했다.
도사로(土佐路) 서남단, '수행의 도량'(修行の 道場/24~39) 최후의 영장이란다.
메아라이이도(위)와 동종을 등에 업은 거북(아래)
헤이안시대 중기, 엔기11년(延喜/911/다이코천황)에 용궁에서 붉은 거북이 업고 나왔다는
이 범종(높이33.6cm, 구경23cm)이 메이지(明治)의 첫 코치 현(高知県) 의회에서 개회와
폐회를 알리는 종소리로 사용되었으며 일본의 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