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4 전북의대생 시위사건]
-휴교 후 첫 개강일 시위 나서
-그날, 우린 벙어리가 되었다
"아침밥도 먹지 않고 집을 나서려는데 어머니께서 어떻게 수상쩍은 기미를 알았는지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어제 밤에 어머니와 함께 있고 싶었으나 여의치 못했다. 지난밤에 죽음을 각오하고 나니 떠오르는 어머니 생각에 나 자신도 눈물을 흘렸다. 집을 막 나가려는 순간 어머니께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바라보셨다. (이상보의 회고)" 80년 6월 24일, 5.18이후 휴교 중이던 전국의 대학 중 전북대 의대가 가장 먼저 개강했다. 의과 대학 본과 4학년에 대해 학교 자율에 의해 휴교조치를 해제 할 수 있도록 함에 따라 이뤄진 개강이었다. 전북대 의과대(현 전주시 경원동 전북도2청사) 200여 평 남짓한 운동장에는 계엄군이 몇 개의 막사를 치고 주둔 중이었고, 정문에는 총을 든 계엄군 2명이 좌우로 지키고 있었다.
이미 며칠 전부터 시위를 계획했던 4학년생 이상보는 제 3 강의실에 들어가서 칠판에 글을 썼다. "4학년생은 9시까지 제3 강의실에 모일 것" 대부분의 학생들이 모였고, 이상보가 회의를 진행했다. 창 밖으로 총 든 계엄군의 모습이 보이는데도, 학생들은 모두 적극적이었다. 제 1안은 가두시위였고, 제 2안 은 동맹휴학이었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실습생이 오지 않자 교수들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몇 분이 강의실로 왔다. 단순한 학급회의라고 얼버무렸지만, 교수들의 눈치를 무마하느라 시간이 촉박해졌다. 일단 나가기로 했다. 정문은 계엄군이 지키고 있어 포기하고 대학병원 옥상으로 모였으나, 우왕좌왕하는 중에 교수들이 와서 말리는 것이었다.
결국 학생들은 계엄군이 지키고 있는 정문을 개별적으로 통과해 병원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모여 팔달로 쪽으로 나갔다. 그러나 곳곳에 무장한 계엄군이 지키고 선 가운데 학생들은 그저 침묵하며 걸을 뿐이었다. 이상보는 훗날 '우린 벙어리가 되었다'고 회상했다. 학생들은 차도 오른쪽으로 줄을 서서 1km 쯤을 걷다가 우체국 부근에서 멈추고 대책을 얘기한다. 전 의대생을 모두 연락해 하오 8시 미원탑 앞에서 기습시위를 하기로 했다. 이상보는 30분쯤 전에 미원탑 앞으로 갔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로 혼잡했다.
알고 보니, 학교 측의 연락을 받아 학생들을 찾으러 나온 가족들, 학교 직원들, 사복 형사들이 몰려 있는 것이었다. 시위는 실패했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몇몇이 구호를 외쳤으나 이내 연행되고 만다. 현장에서는 시위에 참여하려던 20여명이 연행되고 이 중에는 3학년생 도병룡, 정영원도 포함됐다. 시위를 주동했던 이상보(현 완주 이서의원 원장)는 며칠 뒤인 7월 초 검거돼 보안대, 35사단 헌병대를 거치며 고초를 겪게 되고, 10월 초 광주 전투교육사령부 군법재판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복역 중에 형집행 면제조치로 석방된다. 전국의 의과대학 가운데 가장 먼저 개강했던 전북의대생들의 시위 사건 덕분에, 다른 의과 대학의 개강도 미뤄지고 말았다.
[평범한 사람 이흥복의 '5월병'] (편집자 붙임: 연재를 하던 중, 80년 5월 19일의 시위(본지 5월 20일자)와 관련한 증언을 더 들을 수 있었다. 그 동안 짧은 기록에 그쳤던 5월 19일 시위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접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아주 평범한 학생이었고, 지금도 평범하기만 한 보통 시민이 겪어야 했던 그 날의 참담한 비극을, 지면에 옮긴다.)
- 너무도 끔찍했던 20일 동안의 기억
-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고통
본인의 말을 빌면, "민주"가 뭔지 "의식"이 뭔지도 도통 모르는 이흥복(43,현 광고사 운영)은 80년 당시 전북대 농학계열 1학년이었다. 그저 젊은 혈기에 선배들이 이끄는 시위에 참여하고 농성장에 다니고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80년 5월 19일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된다. 5월 19일 새벽, 그와 다른 전북대생 3명은 함께 인후동 동중 옆 누군가의 자취방에서 대자보를 작성해 주택가를 돌며 담벼락에 붙인다. "농성 중이던 학우들이 계엄군에게 모두 붙들려 갔다. 오거리에 모이자."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함께 대자보를 썼던 이들이 같은 전북대 1학년이었다는 점과 이 중 '전종원'이라는 이름만 기억하고 있다.
"하오 4시 오거리로 나갔다. 삼엄한 경계 속에서, 사람들은 그 동안 시위현장, 농성장에서 익힌 얼굴들만 확인하며 주위를 살필 뿐 누구도 쉽게 나서지 못했다. 누군가가 스치듯 지나가며 '시청 5시'하고 속삭인다. 그러나 시청 앞에 가서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이번에는 '역전 5시 반'이라는 속삭임이 들린다. 다시 역전으로 갔다. 역전 오거리에서 누군가가 소리치며 차도로 뛰어든다. 낯익은 얼굴들이 순식간에 모여든다. 나도 모르게 뛰어 들어갔다. "비상계엄 철폐하라" 구호가 몇 마디 나오다 말고 사납게 들려 오는 군화발 소리, 다시 대열이 흩어지고 모두들 뛰기 시작한다.
나도 무조건 인도로 뛰어들어 아닌 척 하고 걷는다."
그러나 이흥복은 대위 계급장을 단 공수부대 장교와 맞닥뜨리고 만다. "신분증 내놔 봐" 하는 소리에 수첩을 꺼냈는데 그 안에 숨겨뒀던 '민주회복'이란 검은 리본이 툭 떨어진다. 순간 몸을 돌려 죽어라 달려봤지만 권총을 빼들고 쫓아 온 장교에게 몇 걸음 못 가 사로잡힌다. 붙잡힌 그는 그 자리에서 늘씬 두들겨 맞고, 군인들이 대기 중이던 트럭에 실려 다시 20여명으로부터 집단 구타를 당한다. "얼마나 맞았는지, 기절했다가 겨우 깨어나는데 그때까지 군화발로 지근지근 밟고 있더군요." 그는 다시 근처에 있던 장갑차에 태워졌다.
군인 7명이 타고 있던 장갑차는 초죽음이 된 그를 태운 채 한참을 달렸다. 좁은 창 틈으로 밖을 보니, 시내를 한 바퀴 도는 것 같았다. "남부시장 풍경이 보이고, 전주천이 보이더니, 남도주유소 근처인 것 같더군요." "병아리 어디 있나"하는 무전기 음이 들리더니, 대령 계급장을 단 장교가 들어온다. 장교는 대뜸 권총을 빼고 겨눈 채 묻는다. "네가 누군지 아나?" 갓 스물의 이흥복이 알 리가 없다. "나 전북지역 작전참모야 임마" 권총 개머리판이 사정없이 날아든다. 한참 뒤 닭장차로 옮겨지자, 지옥에서 빠져 나온 것만 같다.
그러나 전주경찰서에서도 형사들의 주먹과 발길질이 이어진다. 5월 23일쯤이었을까? 어찌나 맞았는지 만신창이가 돼 버린 그는 다른 이들과 함께 35사단 헌병대 유치장으로 이송되지만 여기서는 구타보다 더 비참한 기억이 있다. 그는 여학생 7명, 남학생 32명이 갇혀 있었다고 기억한다. 식사는 4명당 식판 하나였다. 연일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는 고통과 배고픔에 시달리는 청춘들에게 1인분의 식사를 4명이 같이 먹어야 한다는 건, 너무도 가혹하고 비인간적인 일이었다.
당사자가 더 이상 표현을 하지 못했으니, 나머지는 상상에 맡기자. 이런 행위가 민주화의 열정 하나로 뭉쳐진 이들의 심리상태를 어떻게 만들어 놓았을까? 화장실은 항상 단체로 가야 했고, 한 사람이 일을 보는 동안 다음 사람이 지켜 서서 열을 세야 했다. 다 셀 때까지 나오지 않으면 동료가 일을 보는 화장실에 돌멩이를 던져야만 했다. 물론 강제로 말이다. 이흥복은 경찰서와 헌병대를 합쳐 한 20일쯤 갇혀 있다가 풀려 나왔다. "보증인이 있어야 풀어준다는데, 보증할 사람이 없다고 전화 한 통 하게 해 달랬지요.
석방 심사를 하는 보안대 옆이 모교인 전라고였어요. 학교에 전화를 했더니 일요일이었는데 마침 1학년 때 담임이던 임창원 선생님(현 군산대 사회과학대 교수)이 계시기에 사정을 말씀드렸죠." 선생님은 한달음에 달려와 "피보증인이 시위에 가담할 경우 옷을 벗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써 준다. 이렇게 풀려난 그는, 그러나 극도로 몸이 쇠약해져 있었다. 전북대 병원에서 진찰을 받아 보니 간, 폐, 허리 등이 몹쓸 상태였고, 결국 다음해인 81년에는 시내 강준석 내과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에게 80년 5월의 이 끔찍한 경험은, 인생을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었다. 짧은 기간에 그에게 닥친 시련과 고통은 그의 청춘을 병마에 시달리게 했고, 대학을 겨우 졸업한 뒤 취업도 어렵게 만들었다. 이렇듯 80년 5월의 비극은 평범한 대학생들에게도 닥쳐 왔다. 이는 비단 이흥복 한 사람만의 비극이 아니다. 일일이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80년 당시 신군부에 저항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렇게 참혹한 시련을 겪었고, 이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가 되고 말았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다음 호에 이어짐) 김수돈 기자 Pen119@
첫댓글 정말 죽음의 고비를 넘기신 통일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