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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인문화회관 원문보기 글쓴이: bok chan na
노동계약은 명목상 3년을 기한으로 하는 광산연수였으나 실제로는 간단한 교육을 받고 독일로 파견된 한국광부들은 광산에 배치 된 후 2-3개월간의 교육을 마치고 지하 현장에 배치되어 일반 광부들과 똑같은 작업을 하여야만 하였다.
파독광부들은 일은 열심히 했지만 자신의 계약조건 등을 잘 알지 못하였고, 서로 말이 통하지 않으니 자기들이 어떻게 대우를 받는지도 잘 알 수도 없었다(편집자주).
파독광부의 근무조건과 생활 환경(3)
‘서독 파견 한국광부 임시 고용계획’은 1963년 12월 16일에 발효되었고, 1970년 2월 18일에 제2차 프로그램으로 대체되었으며, 1977년에는 추가적인 노동계약으로 보완되었다. 서독은 다른 국가들과도 노동자 고용 협약을 체결했지만, 이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그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바로 이 차이 때문에, 다른 외국인 노동자 모집은 1973년 공식적으로 중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광부들은 계속해서 모집될 수 있었다. 그것은 파독광부 프로그램에 몇 가지 특별한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 째, 독일 정부는 한국 광부의 모집으로 인해 발생할 비용을 거의 떠맡지 않았다. 모집과 관련된 절차상의 비용은 한국해외개발공사가 부담했고, 왕복항공료는 노동자 본인이 독일에서 받게 될 연금으로 충당했던 것이다. 독일 회사가 지불했던 것이라고는 고작 3개월간의 언어교육비뿐이었다.
둘 째, 한국광부들은 일자리를 변경할 수도 없었고, 노동계약을 해지하거나 연장할 수도 없었다. 예컨대, 터키나 유고슬라비아 노동자들과는 달리 한국 광부의 체류허가는 노동허가에 종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노동계약이 완료되면 체류허가도 자동적으로 소멸되었다.
셋째, 한국인 고용과 관련해서 독일정부가 내건 공식적인 목표는 이들 광부들의 기술수준을 높여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목표가 현실화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늦어도 1969년 쯤에는 독일 정부 내에도 이 프로그램이 개발원조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견해가 이미 존재하였다.
1970년 제2차 프로그램에서는 기술원조라는 목적이 삭제되었는데, 이로 인해 독일 광산회사 및 한국 정부의 목표가 단기적인 경제적 수익이었음이 확인되었고, 이들이 겉으로 강조했던 '개발정책적 측면"은 단지 허울에 불과했음이 확연히 드러났다.
파독광부 중에서 광부출신인 사람은 별로 없었고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계속해서 광부로 일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육체노동에 익숙하지 않았던 이들 한국인들에게 3년간의 막장생활은 신체적으로 커다란 부담이었다. 체력의 중요성과 부상의 위험성으로 인해 이들의 기억 속에는 한국의 군사문화와 결부된 남성상이 자리 잡았다.
이들이 일자리를 전투장으로 표현하고, 동료를 전우로, 노동행위를 생사가 달린 전투행위로 표현하는 것은 단지 한국전쟁과 3년 간의 군대 경험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것은 그만큼 광부들이 육체적인 압박 속에 쫓기고 있었음을 반증해주고 있다. 이들은 막장에서 허용되지 않은 낮잠을 취하거나 치밀한 계산 끝에 병가를 사용하는 등, 착취적인 일상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지 않고 재생산을 위한 공간과 시간을 확보했다. 이처럼 광부들은 착취기제에 나름의 방식으로 은근히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행동이 때때로 적극적인 저항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1965년 4월 카스트롭 라욱셀 (Castrop-Rauxel)에 위치한 클뢰크너 베르케 주식회사 (Klockner-Werke AG)에서는 한국 노동자 150명 전원이 3일 동안 불법파업을 감행했다.
그 직접적인 이유는 한국인 한명이 독일 동료와 몸싸움에 연루되어 병원에 실려갈 정도로 맞았다는 데 있었다. 이 최초의 불법파업에서 한국 노동자들은 독일 동료들과 동등한 봉급으로 대우해 줄 것, 신체조건에 맞는 업무를 배당해 줄 것, 그리고 외국인을 적대시하고 무시하는 행동을 금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1970 년 9월경 서독 아헨(Aachen)에 위치한 에밀마이리쉬(Emil-Mayrisch)광산에서 일하던 한인 광부 73명은 독일 광부들도 꺼려하던 1천m 지하광산 막장에 투입됐다. 하지만 봉급은 독일 사람들보다 적었고, 작업 환경 등이 열악해 건강이 악화됐다. 그래서 이들은 다른 작업장에 배치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일하기 싫으면 한국으로 가라!" 이들에게 되돌아온 답변이다. 한인 광부들은 심지어 마이스터(Meister)나 항장으로부터 심한 욕설과 폭행까지 당했다.
당 시 14항의 오후반에 나가는 12명의 한인 광부들은 이같은 횡포에 대항해 "부당하게 책정된 임금을 추가 지불하고, 능력과 적성에 따라 일자리를 재배치하고, 모욕적인 언사와 폭행을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아무런 답변이 없었고, 이들은 입항하지 않은 채 기숙사로 돌아왔다.
이들의 요구사항은 5년 전의 그것과 동일했다. 무엇보다도 한국 노동자들은 높은 교육수준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독일인 동료들보다 지적으로 우수하다고 느꼈고, 독일인들의 거친 리더십 스타일에 불만이 많았다.
이 소식을 접한 광산소장은 만일 한인 광부 12명이 늦게라도 입항하지 않으면 즉각 해고할 것이며, 당장 한국으로 돌려보낼 것이라고 통고했다. 이에 반발해 한국인 광부 73명 전체가 집단 행동에 들어갔다.
사태가 확산되자 광산노동자평의회(Betriebsrat)와 한인광부 73명이 참석한 조정회의가 열렸고, 장시간 토론을 통해 한인 광부들의 요구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행동을 같이한다고 결정했다.
이 어 주독한국대사관과 광산, 그리고 한인광부 73명이 참석해 조정회의가 다시 열렸다. 이 때 한국 수석노무관은 한인 광부들의 집단행동(파업)은 불법적이고, 조국의 이익에도 배치된다고 나무랐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는 재독한국대사관에 대한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그래서 광부들은 더욱 단결했다. 결국 한인 광부들의 요구사항이 관철돼 해고된 사람이 전원 복직됐다. 그동안 부당하게 체불된 임금도 추가 지불 받았으며, 한국인을 모욕하는 언행과 폭행도 없어졌다.
1980년 초에 다시 불거진 한국인 광부들의 저항은 노동 프로그램의 총체적인 문제점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 역시 독일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무엇보다 일자리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노동계약기간이 만료된 이후 체류기간을 연장할 권리를 요구하였다.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한국의 정치적 상황이 고려되어 마지막으로 남았던 800여명 광부들의 위와 같은 요구는 수용되었다.(전도된 개발원조 -독일으로의 한국인 노동 이주- 이유재, 최선주 본보 492호 24면)
파독광부들의 일상생활
한 국인 광산 노동자에게 가장 보편적인 여가활동은 체육이었다. 모두 남성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친목 도모를 위해선 체육만한 것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특히 한국인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축구는 당시 한인사회를 묶어주는 매개역할을 톡톡히 했다. 1964년부터 시작된 '8.15광복체육대회'는 파독 광부의 대표적인 체육대회로 자리매김했고, 나중엔 종합문화축제로 발전했다.
1964 년에는 함본 광산, 1965년엔 클뢰크너 광산, 1966년엔 에슈바일러 광산을 순회하며 차례로 열렸다. 광산축구팀 선수로 뛰기도 했던 파독광부 이원근씨 등에 따르면, 체육대회에서 단연 인기를 모은 것은 리그전으로 열린 광산대항 축구대회였다.
이 대회를 위해 광산마다 축구팀을 꾸려 자체 훈련이나 지역의 축구팀과 경기를 하며 실력을 쌓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 태극기가 꽂혀져 있는 운동장 한켠에서는 한국 음식이 제공됐고, 경기가 끝나면 근처에서 노래자랑도 열리는 등 8, 15광복체육대회는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종합문화축제로 발전해 갔다.
기 숙사에선 3-5평 남짓한 방에서 2명, 많게는 4명이서 함께 지냈다. 가구는 침대와 함께 책상과 의자, 옷장이 각각 하나씩 배치돼 있었다. 취사장과 목욕탕 및 세면장은 공동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공동생활이었기에 다소 불편했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4 명이 써야 하는 기숙사에서는 대단히 비인간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 각자의 작업시간이 다를 겨우, 일을 나가는 사람과 쉬는 사람이 엄청나게 불편하다. 아침 6시에 일을 들어가는 경우, 적어도 4시30분에는 일어나 준비를 해야 한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막 3시에 와서 저녁을 먹는 사람과 4시 반이면 일어날 사람을 선잠을 자게 만들고, 낮 12시에 나갈 사람의 잠을 설치게 한다. 이러한 형편없는 기숙사 환경은 특히 한국 광부에게 심각한 상황이다. 다른 나라에서 오는 사람들은 대개가 거주 이전의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원병호, 『나는 독일의 파독광부였다』, 한솜미디어: 서울, 2004, 225쪽).
살 기 위해선 먹어야 했다. 아침은 간단한 국수와 독일 가게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국물이 보통. 물론 여유 있는 주말에는 밥과 국을 해서 먹었다. 갱내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기 위해 빵이나 김밥 등을 준비했다. 파독 광부들은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고 싶어도 이에 알맞은 재료가 마땅치 않아 고통을 받았다. 다소 물기가 없는 쌀은 그래도 구할 수 있었지만, 김치를 만들기 위한 채소류와 양념류는 쉽게 구할 수 없었던 탓이다.
다음은 백상우씨의 기억이다.
“김치라고 양배추를 대강 썰어서 소금에 절인 다음 고춧가루를 넣어 약간 붉은빛이 나면 최고였고, 이것이 며칠 후에 약간 신맛이 날 때 돼지 삼겹살 찌개를 해먹을 땐 '둘이 먹다가 한 사람이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이 좋았다.”
또 는 양배추를 가늘게 썰어서 식초에 담근 것을 물에 빨아 고춧가루를 쳐서 대용으로 먹었다. 김치에 굶주린 우리에겐 별미였다. 사실 그 당시 일반 독일시장에서는 배추, 무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었고 독일에서 제일 크다는 항구도시 함부르크에서는 가끔 배추가 발견되었다고 한다(백상우, 「한 광부의 여정」, 재독한인글뤽아우프친목회 엮음, 『파독광부 30년사』, 1997, 214-215쪽).
일 부 재치 있는 파독 광부는 멀리 함부르크나 네덜란드까지 가서 물고추, 숙주나물 등 한국 음식 엇비슷한 재료를 구해 음식을 만들어 먹곤 했다. 특히 한국인 광산 노동자가 계속 늘어나면서, 기숙사 인근의 시장에도 한국 음식 재료도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판매자도 주로 한국인이고, 구매자 또한 주로 한국인이다. 주로 네덜란드 등지에서 일본이나 대만 등지에서 생산 또는 제조된 멸치, 된장, 간장, 고추장, 두부, 잡채 등을 구해 다소 비싸게 팔았다. 하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입맛의 보수적 성격 때문에 날개 돋힌 듯 팔렸다고 한다.
시 간이 좀더 지나면서, 김치를 담그기 위해 배추를 키운 사람도 생겨났다. 독일의 기후와 토양 등에 맞지 않아 여러 차례 실패 끝에 재배에 성공, 김치를 해먹기 시작했다. 일부 노동자는 된장과 청국장까지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음식문화의 차이 등으로 인해 발생한 에피소드도 적지 않았다.
“어 제(1965년 4월12일) 윤은 원기를 돋을 양으로 닭을 사다가 마늘과 쌀을 집어넣고 푹 고아먹었다. 그는 평소 선임자의 신임이 두터울 만큼 착실하여 작업장에 도착하자 작업사항에 관하여 물으려고 입을 열기가 무섭게 독일인 3명이 뺑소니를 치더란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서 있는데 얼마 후 반장이 쫒아와 '오늘 하루만 휴가를 줄테니 출갱하라'고 사정했다. 윤은 기가 막혀 왜 그러느냐고 대들자, 반장 또한 코를 틀어막고 물러서며 마늘냄새 때문에 같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장재림, 「서독의 한국인광부」, 『신동아 1969년 5월호』, 338-339쪽).
강도 높은 노동과 열악한 작업 환경 때문에 한국인들은 위장병 등 소화기 계통의 질병과 감기와 몸살 등 기관지 계통의 질병을 가장 많이 앓았다고, 파독 광부들은 증언했다.
그렇다면 어려운 조건에서 청춘을 불사른 그들은 얼마를 벌었을까. 한국인 광산 노동자들은 기본적으로 실적과 성과(실적임금제,
도급제)에 따라 받되, 결혼하고 자녀가 많을수록 많이 받았다. 반대로 근로소득세 등 세금은 결혼하고 자녀수가 많을수록 상대적으로 더
적게 내는 시스템이었다. 일한 만큼 주고, 돈을 번만큼 세금으로 걷는 시장경제의 원칙에, '필요'라는 '사회성'을 가미하는
체제였다. '사회적 시장경제'가 임금과 세금징수 시스템에도 적용된 것으로 분석된다.
당시 광부로 일한 동포들의 증언에 다르면, 임금은 보통 '기본급여'와 '생활보조금', '광부상여금(프리미엄)' 명목의 '수당' 3가지로 이뤄졌다.
따 라서 미혼자는 급료와 생활보조금, 프리미엄이 총소득이 되지만, 기혼자는 여기에 가족수당(배우자수당과 자녀수당)이 추가됐다. 배우자수당이란 별거 명목이었다. 여기에 기혼자는 본인의 위험수당에 배우자, 가족의 위험수당까지도 더 받게 돼 미혼자와의 임금 격차는 더욱 커진다. 이와는 반대로, 자녀를 가진 기혼자는 총임금에서 무려 19%를 원천 징수하는 근로소득세를 상대적으로 적게 냈고, 미혼 노동자는 가장 많이 냈다. 다만 소액인 사회보험료만 기혼자가 미혼자보다 조금 더 낼뿐이다.
독일의 광산 노동은 보통 오전, 오후, 야간반에 따라 구분됐다. 오전반 노동자들은 오전 6시~오후 2시, 오후반은 오후 2시~오후 8시, 야간반은 오후 8시~오전 6시에 일했다. 한국인들도 똑같이 적용됐다.
파 독 광부들에 따르면, 한국인 광산 노동자들은 근로소득세, 사회보험료, 여기에 귀국여비 적립금 등을 빼고 적게는 월 300마르크, 많게는 월 1100마르크까지 받았다. 보통 600마르크 안팎에서, 미혼자보다 기혼자가 더 받았다는 얘기다.
이상에서 살펴본 파독광부의 특징은 다른 외국인노동자들과 비교해 한국 광부들의 교육수준이 높았다는 점이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이다. 광부로 일했던 한국인의 60% 이상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대학을 다녔고, 도시의 중산층 출신이었다.
파독광부 프로그램은 해외여행이 엄격히 제한되었던 시절에 외국으로 갈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좋은 기회였다. 따라서 이들 가운데는 이 프로그램을 이용해 미국으로 가거나 혹은 독일에 남아 공부하려는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3년 동안에 많은 돈을 벌어서 한국에서 새로운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실제로 파독 광부의 절반 정도가 계약만료 후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에도 독일에 남아 있기를 원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독일관청은 이를 엄격히 거부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체류연장이 가능했던 한국 간호사와 결혼하여 거주권을 획득하였다. 이들 독일에 잔류한 광부들은 대부분 광산을 떠났고, 공장에서 일하거나 자영업으로 전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