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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뚜리아스 지방의 옹고집
내 훈계 들으려고 가나다에서 여기 이베리야 반도까지 왔을리 없는 알라인(Alain/현지 발음은
알랭)이지만 엄숙한 자세로 날자가 바뀌도록 나와 대화하기를 원한 밤이 갔다.
크리스천은 아니지만 앞으로는 필그림(pilgrim/peregrino)답게 걷겠다고 다짐두는 그의 밤과
달리 나의 밤은 밖으로 나가기를 몇번이나 거듭 한 끝에 물러가고 아침이 왔다.
술을 많이 마신 밤이라 평소 보다 더 심했으니까.
느지막이 버스 탈 그들이니 터오는 먼동에 맞춰 나홀로 숙소를 나섰다.
산따 마리아 데 라 올리바 교회와 교회 뒤쪽에 라 만사네라 상(Monumento 'La Manzanera'/
Mariano Benlliure/1862~1947/스페인 조각가의 작품)이 있는 태양의 거리(Calle del Sol).
어제 석양에 눈여겨 보았던 이 지점에서 까바니에스 길(C./Cabanilles)을 따라 남행을 시작함
으로서 어제와 달리 현재의 정석 노르떼 길을 재개했다.
막시미노 미야르 길(C./Maximino Miyar)로, 다시 알데아 산 후안(Aldea San Juan)으로 바뀐
길(AS-255a지방도)로 오늘의 첫 마을 아만디(Amandi)에 진입했고.
지자체 비야비씨오사의 외곽 마을.
41개의 교구 마을 중 하나로 주민 총수는 531명이지만 알데아(aldea/미니마을)들을 포함하여
25개나 되는 자연마을이 최고 높이 171m까지 분산되어 있는 마을이다.
대부분이 1자리 수(1~9명)의 주민이 거주한다는데 관리가 어렵겠거니와 폐촌이 경각에 있는
마을들이 아닌지.
을씨년스런 기분인 것은 새벽이기 때문?
그럼에도 잠들어 있는 듯 고요 속에 잠겨있는 교구교회 산 후안 데 아만디(Parroquia de San
Juan de Amandi)는 아스뚜리아스 지방에서 가장 대표적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란다.
노르떼 길은 교회를 지나서 AS-255도로로 바뀐 알데아 산 후안을 잠시 따르다가 산 후안 샘
(Fuente de San juan) 앞에서 까미노마커가 안내하는 포장 소로를 따른다.
곧 중세 돌다리를 통해서 발데디오스 강(rio Valdedios)을 건넌 후 AS-267지방도에 들어선다.
순방향으로 전진하다가 우측으로 까미노마커의 안내를 받으면 비야비씨오사의 교구마을들 중
다른 하나인 그라세스(Grases)의 자연마을 까스끼따(Casquita)를 지나게 된다.(VV-10도로)
주민 16명의 미니 마을이지만 까미노에서는 특별한 곳이다.
최초의 까미노인 쁘리미띠보 길(Camino Primitivo)이 '오비에도(아스뚜리아스 주 주도)~산띠
아고 데 꼼뽀스뗄라(갈리시아지방 꼬류나 주)'라 하나 이 쪽의 시점은 까스끼따 마을이니까.
이처럼 의미있는 마을인데도, 실망스럽게도 안내판은 땅 바닥에 쓴 노란 글씨가 전부다.
시드라 공장(Sidra el Traviesu)과 예배당(Ermita de San Blas)이 좌우에 자리한 'Y'자 길 모
서리, 2층 건물(주택)앞, 분기하는 길 바닥 양쪽에'히혼(Gijon/우측)','오비에도(Oviedo/좌측)'
라는 글씨와 노란 화살표 뿐이니.
하나 더 있기는 하다.
우측 길가에 서있는 4각 가리비(조개) 기둥이다.
상하 2개의 꼰차(concha/조개)가 Gijon(상)과 Oviedo(아래)를 안내하고 있다.
한데, 이 가리비의 방향표시에 문제가 있다.
아스뚜리아스 지방에서 가리비가 표현하는 방향은 갈리시아를 비롯해 타 지방들과 정 반대라
화살표가 없다면 혼란스러울 수 밖에.
다른 지방에서는 가리비의 부챗살 쪽이 진행 방향인데 반해 아스뚜리아스에서는 몸통 쪽으로
가야 하기 때문인데 이 지방은 왜 별나게 하고 있을까.
지방의 특징, 특색이 중요하고 필요도 하겠지만 자의적 행위가 순례자들에게 어이없는 혼란과
피해를 주고 있다면 지체없이 고쳐야 하겠건만 무슨 똥고집인지.
내가 너무 일찍 일과를 시작했나.
알또(alto/고도)에 겁 먹고 모두 파하려 하는가.
외딴 집들을 이어주는 초원의 이슬 먹은 아침 길을 홀로 걷고 있으니.
과수원도 있고, 우거진 숲과 계곡을 낀 소와 말들의 목장과 골프장을 방불케 하는 너른 초지도
있는, 완만하게 꿈틀거리는 전원 길을 걸으며 뜽금없는 자아비판을 했다.
내가 순례를 위해 길을 걷는 것이 아니고 순례길을 위해 걷고 있지는 않은가.
까미노마커가 잘 안내하는 노르떼 길은 오비에도로 가는 고가 A-64고속도로의 밑으로 지난다.
무슨 까닭인지 A-8, E-70 고속도로가 돌연 A-64번으로 바뀐 길이다.
얼마 후에는 A-8고속도로를 고공으로 건넌다.
정녕,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뽑아내는 꼴인가.
'A-8,E-70'이 'A-64'에게 밀려 파생된 새 길처럼 되었으니.
다시 만난 VV-10길을 역(逆)으로 가다가 VV-9길로 옮겨서 비탈길을 오르면 비야비씨오사의
41개 교구마을 중 또 다른 하나인 니에바레스(Nievares)다.
완만하던 오름이 격해지고 해발436m 꾸리에야 산(Monte Curiella/정상 535m)을 넘어가지만
몸이 싱싱한 아침에 오르면 큰 부담이 되지 않는 길이다.
알라인 팀이 버스 편을 택하도록 겁 준 고개(Alto de ra Cruz)다.
곳곳에 유칼립투스 숲이 울창한 길 지근에 자리하고 있는 산따 에울랄리아 데 니에바레스교회
(Iglesia de Santa Eulalia de Nievares)가 시각적 무료를 달래주는 듯.
알레만의 애국심, 전율을 느끼게 하는 독일 정신
VV-9가 VV-8로 바뀌어 오른 고개마루에서는 오비에도로 가는 산길도 있다.
뒤쪽에는 지나온 비야비씨오사의 미니 마을들과 곳곳에 유칼립투스 등 장신 숲이 점처럼 박혀
있는 광대한 초원이, 내려갈 앞쪽에는 뻬온과 멀리 히혼까지 시계가 참 좋은 위치다.
오른 만큼 내려가는 길이 뻬온(Peon/Pion) 한하고 완만하게 꾸불거린다.
얼마 가지 않아서 뒤 따라오는 중년남과 동행이 시작되었다.
첫 눈에 알아보게 된 알레만(독일) 청년이다.
그의 배낭을 비롯해 모자와 옷, 신발까지 모두의 브랜드(brand)가 도이터(deuter)니까.
독일인 외에도 더러는 도이터를 애용하지만 모자에서 신발까지 도이터 또는 다른 독일 브랜드
일색이라면 99.99% 독일인이라는 확신을 가져도 됨을 나는 까미노에서 터득했다.
전율을 느끼게 하는 독일 정신을.
까미노에서 이 늙은이에게 가장 진지하며 헌신적인 사람은 독일인들이다.
내가 가장 많이 대화하고 교분을 쌓고 있는 사람도 당연히 그들이다.
알고 싶은 것이 왜 그리도 많은지 필기도구를 들고 다가와서 인터뷰 하듯 묻고 되묻는 그들의
진지성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내게 편한 잠자리(bunk의 아래층)를 양보한다.
그럼에도 고백하건대 나는 그들에게서 두려움을 느낀다.
그들은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가 패망한 후 여러 면으로 참회를 실천했지만 모든 까미노에
하켄크로이츠(Hakenkreuz/갈고리십자가)가 날로 늘어가고 있는 것은 무슨 뜻인가.
나치(Nazi)의 망령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독일인들은 많이 생각하고 많이 알고 많이 저장하여 머리가 크고 무겁겠다.
독일인들이 이처럼 이성적인데 비하여 프랑스인들은 지나치게 감성적이다.
사려 깊지 못하고 다분히 기분에 좌우된다.
동물애호주의자인 듯 하나 입 뿐이다.
피레네 산맥의 프랑스 땅 목장들에는 죽은 가축들을 매장하지 않아 시체들이 널려 있다.
보신탕을 이유로 한국의 88올림픽 보이콧 투쟁을 벌였던 그들이지만 까미노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신음하는 개를 아무도 도와주려 하지 않는 그들을 어떻게 동물애호주의자라 하겠는가.
예술적이지도 못하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내로라 하는 예술가들은 대부분 스페인을 비롯해 외국 출신들이다.
단지 활동 무대로 접합하다는 이점이 있을 뿐.
까미노에서도 구실만 있으면 편법을 쓴다.
이베리아 반도(스페인과 뽀르뚜갈)와 함께 까미노 당사국이지만 몹시 이기적이다.
이 두 나라인들과 달리 스페인인들은 마시고 먹는데 올인하는 듯.
새벽부터 심야 까지 성황을 이루는 곳은 술집(Bar)들이다.
오늘의 독일인은 머리가 크고, 프랑스인은 가슴만 크고, 스페인 사람은 배가 너무 크다고 요약
한다면 내 시각이 극히 일부분 만을 상대로 한데다 표피적이고 편협되어 있기 때문일까.
(부디 그런 이유 때문이기를 바란다)
긴 이름을 적어주었지만 배낭과 함께 사라져버렸고 에드가(Edgar)라는 것만 기억나는 그.
50살인데, 자기의 평생 계획이 '까미노 데 산띠아고'를 모두 걷는 것이며 매년 1루트씩 걸으려
한다는 그가 이미 3분의1을 걸었으며 단 두번 방문으로 6.000km를 완주하겠다는 극동의 81세
늙은이를 가만 두겠는가.
더구나 73, 71살인데도 걷지 못하는 자기 부모에 비해 내가 두려울 정도로 부럽다며 찰거머리
처럼 달라붙어 차근차근 물어오는 그를 냉정하게 외면할 수 없지 않은가.
롤 모델(role model)이 없었는데 드디어 찾았다며 아첨까지(?) 하는 그를.
보속(步速)이 빠른데 반하여 잦은 휴식이 그들의 약점이라면 완만하나 휴식 없이 지속적으로
걷는 것이 강점인 내가 그를 선도하는 형국이 되어 우리는 함께 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자기의 페이스(pace)를 조절하며 마치 심문하듯 집요하게 물어왔다.
4.5km가 넘는 내리막 길의 끝이며 지자체 비야비씨오사의 마지막 교구 마을인 뻬온(Peon/Pi
on)을 지나 해발 271m인 꾸르비에유 고개(Alto Curviellu)를 힘들게 넘으면서도 계속된 질문.
내가 방문해야 하는 히혼 초입의 대학교(Universidad Laboral de Gijón)앞까지, 15km나 되는
거리를 함께 걸으며 묻고 또 묻고.....
문제는 그와 함께 한 이 구간에 대해 내 머리가 텅 비어 있다는 점이다.
예기하지 않은 누구와 함께 걷게 되는 경우에는 피차 가해자 없는 피해자가 되기 마련이지만
마치 연필로 쓴 글씨들이 지우개로 말끔히 지워진 것처럼 될 줄이야.
첫 고개인 라 끄루스 고개보다 165m나 낮은 꾸르비에유 고개를 더 힘겹게 넘었다는 기억뿐.
뻬온 이후 고개는 물론 데바(Deva)와 까부에녜스(Cabuenes) 등 큰 마을들을 경유해서 히혼
구역인 소미오(Somio)에 도착했는데도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열중한 대화였던가.
(기억을 살리는데 도움이 될 사진들을 몽땅 내버렸을 도둑이 더욱 원망스럽다)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이 청년의 의도와 무관하게 도이터로 완전
무장한(?) 그로 인하여 내가 깊은 자괴감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점이다.
내 등에 있는 백팩 오스프리(Osprey) 때문에.
대간과 정맥들을 비롯하여 8도의 산들을 누비는 동안 나와 한몸이 되었던 70L들이 무명(無名)
배낭의 퇴역에 맞춰 들어온 사위의 선물인데.
이 배낭 역시 혹사 당하기 10년이 다가오면서 해진 데 꿰매는 일이 일과처럼 되어 있기 때문에
이번 까미노의 종료와 함께 교체될 운명이라 별다른 생각 없이 메고 다녔다.
한데 독일인의 철저한 자국 브랜드 애용이 외국 브랜드를 사용하는 나를 자책하게 한 것이다.
내게는 독일인들 처럼 자국 제품만을 애용하는 국수적 애국심(chauvinism?)은 없다.
"아재비 떡도 싸거나 커야 사먹는다"는 속담처럼 경제적 실리를 강조하며 그것이 국산 제품의
질적 향상과 국제경쟁력을 높이는 길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나 또한 국산품 애용자지만.
이번 6개월의 여정에 동원된 물품들도 배낭 외에는 낡은 신발(sandal)이 외국 브랜드 께추아
(Quechua)일 뿐 낮은 질에도 오래된 국산품 일색이다.
신발도 아내가 외국여행에서 사온 것으로 국내의 2.500km 이상과 시코쿠헨로(일본)1.200km
등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고 날마다 갱신이 이뤄지고 있으나 수명이 금명간 끝날 처지다.
이에 대비한 여분의 신발도 국산(칸투칸)으로 1.000km 이상 걸은 중고품이다.
이런 내가 독일 청년 앞에서 당당하기는 커녕 왜 왜소해지고 수치를 씹는 기분이어야 했을까.
이미 기가 꺾인 쪽은 늙은 내가 아니고 이 알레만인데도.
한데,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사실 하나가 있다.
명품 브랜드가 아닌 께추아와의 묘한 인연이다.
께추아는 1997년에 설립된 프랑스 등산 장비 생산업체의 브랜드로 아직은 무명 상태다.
내 성격을 잘 아는 아들은 해외출장 때에 무명의 저가 등산복 상의를 사왔는데 께추아다.
브랜드에 무지한 아내가 해외여행 중 사온 신발 역시 께추아.
모두 유명 브랜드를 피했을 뿐이며 무심코 산 것인데 약속이라도 한 듯 동일 상표다.
나는 이 브랜드의 질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게 됨으로서 이미 께추아 애용자가 되었다.
배낭을 통째로 도둑맞은 내게 산띠아고의 오스딸 주인 펠리뻬와 끄리스띠나(Felipe, Cristina)
부부가 배낭과 침낭, 메트리스 기타를 선물했는데 배낭 외에는 모두 께추아다.
그들은 까미노를 산띠아고에서 마친 두번째 부터 숙박함으로서 제2의 가족(그들의 표현)으로
발전한 관계다.
나는 졸지에 께추아 마니아가 되었다.
께추아 일색이면서도 나는 아직 께추아를 구입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 장만할 천막이야 말로 내가 구입하는 유일한 외국 브랜드로 께추아가 될 것 같다.
께추아와 국내 브랜드 사이의 모순이 어떻게 정리될지 나도 모르지만.
씨에고(ciego/소경) 따라가다가 시궁창에 빠졌다?
꾸르비에유 고개에서 서쪽 멀리에 자리한 드높은 첨탑과 광대한 건물군(群)에 압도되었는데
그 건물들이 내가 방문해야 하는 대학일 줄이야.
나의 대학방문 일정을 이해한 알레만 에드가가 아쉬워하며 떠나고 나는 넓은 뜰을 가로지르고
많은 문 중 하나를 무작위로 골라 안으로 들어갔다.
5 ~6월은 축제의 달인데다 대학마다 근무시간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허탕치기 일쑤라 늘 조마
조마한 방문인데 이번에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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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한 궁궐을 방불케 하는 건물 안에서 운 좋게도 친절한 청년을 만났다.
스탬프 받는 일이 아주 수월했음을 의미한다.
고풍스럽게 보이지만 20c 중반(1949 ~1955)에 건축했으며 광부의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세운 노동대학교(Universidad Laboral)란다.
석탄과 철강 등 광산업이 주업이던 당시에는 이 지역 노동자의 자녀들이 혁명의 유혹에 빠져
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랬겠지만 지금은 일부가 오비에도 대학교의 히혼 캨퍼스 인 듯.
<Laboral Ciudad de la Cultura>와 <Facultad de Comercio,Turismo y Ciencias Sociales
"Jovellanos".Gijon> 등 2개의 스탬프가 서로 다른 사무실에 비치되어 있다.
자료에 의하면 '에레라 양식'으로 스페인의 20c 건축물 중 가장 거대한 건물이란다.
에레라 양식이란 스페인 건축가 후안 데 에레라(Juan de Herrera/1530년~1597)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는데 장식을 극도로 배제하고 단정하며 수수한 점을 특징으로 하는 건축양식이라고.
이 건물들이 바로 에레라 양식의 건물이라는데 웅대하나 기교가 배제된 건물을 뜻하는가.
지금부터 겨우 60년 전의 건축물인데 이 웅대한 건물들이 연구와 교수, 봉사를 사명으로 하는
대학의 건물이라면 에레라 양식이 현대의 대학에 적합한지는 고민해야 할 것 같다.
하긴, 지금은 예술과 산업 창출 센터를 비롯해 다양한 교육 공간 등 노동문화단지로 종합적인
쇄신이 이뤄졌단다.
높은 첨탑도 히혼시 최고의 전망대로 제공되고.
대학의 면면을 알아보려는 노력은 이 대학에서도 실패로 끝나고 강의동을 비롯해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가 미로에 빠진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한 조교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탈출한 쪽은 서쪽 광장.
동문으로 들어가서 서문으로 나온 것이다.
컴퍼스로 방향을 확인하고 있을 때 내가 나온 문으로 묘령으로 보이는 여인이 나왔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윤기가 흐르는 검은 장발이 허리춤까지 내려온 여인.
목에 빨간 스카프를 감고 있는 날씬하고 매력적인 여인이 광장 오른 쪽에 주차중인 빨간 소형
승용차에 달려가 차문을 열려다가 뒤늦게 나를 발견한 듯 말을 걸어왔다.
Necesitas alguna ayuda?(네쎄시따스 알구나 아유다/do you need any help)
그녀도 내가 하얀 수염의 늙은이라 도움을 주려 했을 것이다.
Donde es albergue de Gijon?(돈데 에스 알베르게 데 히혼/where is Gijon's albergue)
스페인 여인이며 이 대학의 직원이지만 나의 대학방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뿐 아니라 까미노
자체에 무지한 이 젊은 여인이 알베르게를 알 리 있는가.
그래도, 시내로 진입하는 입구까지 만이라도 태워주겠다는 마음씨가 고맙지 않은가.
대학의 서쪽 초입에 있는 우네드(UNED/국립통신교육대학교)앞에 내려놓고 손을 흔들며 떠난
그녀를 왜 멍청히 바라보고 있었을까.
노르떼 길에 충실하려면 북서쪽 해안으로 향해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무슨 배짱으로 N-632국도를 따라 시가 중심부로 향했을까.
또 하나의 오비에도 대학교 히혼 캠퍼스를 왼쪽에 두고 한참을 가다가 국도를 떠나 삘레스 강
(Rio Piles)을 건넌 후 갈증을 풀려고 한 바르(La Taberna irlandesa?)에 들렀다.
실내는 북적거리고 그늘진 실외 탁자에서 이베리아 반도의 바르에서는 드물게 양주를 마시던
초로남이 자리를 권했다.
거나한 상태인 그는 나를 위해 맥주를 주문했고 내 나이를 확인한 60세라는 다른 남은 기겁을
하며 오늘 밤의 숙박지를 물어왔다.
까미노에서 큰 도시일 수록 실비 알베르게가 없는데 아스뚜리아스 지방 최대의 도시, 인구가
276.000명이 넘는 히혼 역시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천막집 지을 곳을 물색중이라는 내 대답에 고개를 살래살래 저은 그.
잠시 스마트폰에서 무언가 찾던 그는 자기가 알베르게를 안내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자기의 SUV 차에 나를 태우고 어디론가 달렸다.
간혹 까미노마커(노란화살표)가 눈에 띄는 것으로 보아 내일 아침에 걸어야 할 노르떼길 어디
쯤을 지나고 있다고 짐작되었다.
잠시 후, 차가 멎은 곳은 한 공원(Parque del Lauredal?) 옆에 자리한 작은 2층 건물 앞.
간판으로 보아 어느 꼰벤또(Convento/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소규모 숙박시설인 듯 한데 왠지
썰렁한 느낌이 드는데도 60남은 확인도 하지 않고 나를 내려놓은 후 돌아갔다.
그러나, 어찌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
4년 전 마드리드에서 벌어진 일의 재판이니.
이 곳은 뻬레그리노의 알베르게가 아니라 '신 오가르'(sin hogar/homeless)의 집이다.
경찰(Social Police)의 확인을 받아야 입실이 가능한 잘 데 없는 빈민들의 숙박소다.
그나마도 이 집은 현재 쎄라도(cerrado/closed/휴업) 상태다.
씨에고(ciego)소경) 따라가다가 시궁창에 빠진 꼴 아닌가.
그 때(4년전)도 교구교회 신부의 소개로 먼 길을 가까스로 찾아갔으나 궁지에 빠진 꼴이었다.
그래도 112(우리의 범죄신고와 달리 help요청)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의 도움으로 저렴하고
안전하며 편한 오스딸에서 며칠을 보낼 수 있었건만.
히혼 해변의 1박은 그 분의 뜻?
때 이른 무더위를 피하기 위해 나온 남녀노소 시민들로 꽤 북적대는 공원.
한 귀의 벤치에 앉아 궁리를 했으나 묘수가 있는가.
60남이 80대 늙은이를 골탕먹이려고 그랬을 리 없고 뻬레그리노를 위한 실비 알베르게가 없는
줄 알면서도 어떤 기대를 했다면 자업자득이다.
정녕, 요행을 바라지 말고 히혼으로 돌아가서 정도를 걸으라는 어느분의 명령인가.
시내버스 편으로 히혼의 구 도심으로 돌아왔다.
애당초 걸어야 했을 해변의 노르떼 길을 역(逆)으로 걷기 위해 우선 해안으로 진출했다.
가장 반가운 곳은 역시 관광안내사무소.
대부분의 관광안내소와 달리 연중 무휴에 부활절을 비롯하여 축제 때는 근무시간을 저녁 8시
또는 9시까지 연장하는 등 대민 서비스가 획기적이다.
평소의 근무시간도 오전 10시~오후 7시 반이며 시에스타(siesta)도 오후 2시 30분부터 2시간
으로 제한하고.
유스 호스텔, 오스딸, 펜시온 등 다양하나 순례자에게는 벅찬 숙박시설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는데 홈리스 전용(Albergue Covadonga) 외에도 뻬레그리노를 위한 알베르게가 있단다.
내 집(천막) 터를 이미 점찍은 상태지만 안내직원이 알려준 알베르게를 찾아나섰다.
아무리 편해도 천막은 차선일 뿐 최선은 아니니까.
씨마비야(Cimavilla) 구역에서 어렵사리 찾아낸 알베르게(Residencia Universitaria)는 벙크
시설인데도 15€란다.
환경의 호 불호는 차치하고 내 기본 룰에 걸리기 때문에 미련 없이 버리고 해안 산책에 나섰다.
씨마비야 구역이란 해안의 작은 반도지역을 말하는데 알폰소 10세(1221~1284/Castilla와 Le
on의 왕)가 이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성벽을 쌓는 등 공을 들인 곳이란다.
19c에 아스뚜리아스의 중요 항구가 되어 산업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는데 특징있는 소규모의
광장들이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다.
반도의 북쪽, 산따 까딸리나 언덕(Cerro de Sta. Catalina)의 공원도 관광명소다.
스페인의 조각가 에두아르도 치이다(Eduardo Chillida/1924~2002)의 작품이라는 엘로히오
델 오리손떼(Elogio del Horizonte/수평선의 찬사)도 명품으로 꼽히고.
동쪽 해안의 산 뻬드로 교회(Iglesia de San Pedro), 서쪽의 선착장(Puerto Deportivo)과 돈
뻴라요 왕의 동상(Estatua de Don Pelayo)도 인상적이다.
뻴라요(685~737)는 아스뚜리아스 왕국을 세운 왕이다.
시청 소재 마요르 광장(Plaza Mayor)에서 곧장 산 로렌소 해변(Playa de San Lorenzo)으로
갔으나 지는 해를 붙들어 놓을 수 없다면 도중에 돌아서야 했다.
뽀니엔떼 해변(Playa de Poniente)으로 돌아와 집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었는데 아무리 걷고
걸어도 지치거나 지루하지 않을 것 같은 해안로 산책을 중지할 때 무척 아쉬웠다.
대학을 나와서 바로 이 코스를 택하지 않은 것이 몹시 후회될 만큼.
또 잠시 방황한 것 같다.
석양 노을에 물들어가는 해변 경관의 유혹에 순간적으로 흔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순례자라 해서 황홀한 자연을 감상해서는 안되거나 금단의 열매처럼 경계해야 하는가.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다가오는 긍정적 현실을 순례자라는 이유로 거부하는
짓이야 말로 왜곡이다.
히혼 시민이 다 몰려나온 듯 북적거리던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휑하게 비어가는 해변.
합심하여 어둠을 몰아내고 있는 해안 가로등 불빛끼리만 속삭이고 있을 뿐 몇 안되는 술집들
마저 문을 닫아가는 시간에 나는 내 보금자리 집을 지었다.
한반도에서는 정자가 최고의 집터지만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도시일 수록 건물이 너른 처마를
갖고 있어서 비(雨)에 안전한 집 짓기가 수월하다.
뽀니엔떼 해변의 마리아노 뽈라 길(C./Mariano Pola/이길이 해변을 벗어나는 노르떼길)가에
들어서 있는 대형 빌딩의 1층.
술집 '라 시드레리아 띠에라 아스뚜르 뽀니엔떼'(La sidreria Tierra Astur Poniente)가 일찍
문을 닫았으므로 그 라인 아무데나 집을 지어도 되었다.
밤에는 제법 싸늘한 해풍을 피하기 위해 바람막이가 되는 곳에 집이 완성되었을 때 건물 안에
불이 켜지고 중년남이 나왔다.
내부 리모델링 공사중이라 사람 출입이 있으므로 위치를 조금 옮겨 달란다.
바닥에 깔린 깔판만 조금 당기는 지극히 간단한 작업으로 해결되는 일이다.
늙은이가 자기 말을 들어서 흡족한가.
고약한 인상과 달리 고운 마음씨를 가졌는가.
내 집 천정(처마)의 외등을 켜주었다.
밤중에 불편하지 말라는 호의였을 것이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각에 잠시 해변으로 나갔다.
석양의 씨마비야에 아름답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 먹구름의 초저녁과 달리 별이 총총한
하늘의 황홀함에는 할 말이 궁해서 그냥 백사장을 걸었다.
지쳐서 감정이 무디어지도록 걷고 싶었다.
많이 걷기도 했으며 의외의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인가.
다른 어느 날 보다 더 많은 생각이 거쳐간 날의 밤은 이미 새 날로 바뀌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르려고 오카리나를 꺼냈으나 포기했다.
방음 장치가 잘 되어 있겠지만 건물 안 작업자들의 취침에 방해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
었는데 엉뚱한 노래가 입가에 맴돌았다.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 . . .영원토록 야훼의 전에 거하리로다>
기독교 구약성서 시편 23편의 노래다.
동란의 참화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태인 1956년 봄.
부활절칸타타(cantata)에서 첫 선을 보인 나운영 작곡의 우리 가락조의 성가로 애로가 풀렸을
때마다 절로 불려지는 노래 중 하나다.
시련을 막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겨낼 힘의 배양을 도와주시는 분, 나의 사는 날까지
나와 함께 하실 그 분의 선함과 인자하심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다. <계 속>
비야비씨오사의 산따 마리아 데 라 올리바 교회(위)와 가리비 까미노마커(아래/아스뚜리아스 지방은 다른 지방과 정 반대)
히혼의 노동대학교(상)와 스페인의 조각가 에두아르도 치이다(Eduardo Chillida/1924~2002)의 작품이라는 조형물
엘로히오 델 오리손떼(Elogio del Horizonte/수평선의 찬사)(하)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