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하고 성마른 성격, 평생 더위 먹는 병에 시달리다 38세에 장결핵으로 사망
주특기는 찬물에 밥 말아먹기, 술, 여자 … 아내 모질게 다루며 연산군 폭정의 서막 열어
조선의 아홉번 째 왕 성종의 평생 지병은 서증, 즉 더위 먹는 병이었다.
성종의 서증은 11세 때 시작됐다
. 성종 치세 20년에는 여름이 한창인 음력 6, 7월에는 아예 국정 업무를 중단시킬 정도였다.
성종 이혈(1457~1494)은 8대왕 예종(세조의 차남)이 보위에 오른 지 13개월 만에
족질로 세상을 뜬 당일에 갑자기 왕위에 올랐다.
예종에게는 아들이 있었지만 겨우 4세에 불과했다.
성종은 그때 나이가 13세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20세에 죽은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신분이었다. 첫째 아들 월산대군이 있었지만
본디부터 질병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보위에 오른 성종은 25년 1개월 (1468~1469)을 통치한 후 38세에 장결핵으로 사망했다.
성종은 다정다감하고 예민한 성격의 군주였다.
감정적 성정으로 인해 화를 잘 냈다고도 한다.
따라서 가슴이 답답하거나 열이 확 달아오르는 증상을
수시로 겪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다 보니 찬물에 밥을 말아먹는 식사를
자주 했던 것 같다. 몸 속에 불덩이를 항상 지니고 있었다고 할지.
찬물에 만 밥을 자주 먹다 보니 설사도 잦았고 지나친 음주와 방사로
체력 저하가 급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 15, 20, 25년에는
설사와 이질로 인해 측간을 들락거리느라 아침 정무를 포기해야 했는데,
말년에는 이렇게 이질과 설사를 반복하다 한 달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장결핵이 결정적 사인이었던 것이다. 사망하기 4일 전,
배꼽 밑에 작은 덩어리가 생겨 아프고 빛이 점점 붉어진다고 호소한 것도
장결핵으로 인해 복부 임파선까지 결핵균이 번진 것으로 추정된다.
동의보감에서는 서증을 가진 사람은 여름이 정신을 소모하는 시기이므로
심화가 더욱 왕성해지고 신장의 기운인 신수는 약해져 있다며,
성생활을 줄이고 정기를 굳건히 할 것을 권하고 있다
. 지나치게 술을 마시거나 성생활을 하면 신이 상하여 죽을 수도 있다.
그런데 성종은 이러한 양생에 반하는 생활을 했던 것이다.
자기 몸에 대해서 지나치게 어리석고 게으른 군주였다고 할지.
요즘 말로 하자면 ‘웰빙’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성종은 치통에 시달렸다. 그 좋아하던 술도 치통이 너무 심해
술잔 받기를 망설였다는 기록이 이따금 나온다.
치통의 뿌리 역시 성종의 약한 신장에 기인한다.
동의보감에서는 이를 뼈의 가장 말단부위로 보고 뼈를 주관하는 것도
신장이라고 풀이하기 때문이다. 서증과 치통은 약한 신장에 그 원인을 두고 있는 바,
20세 이후부터는 결핵 증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 밖에 두통, 치질, 임질, 수전증 증상까지 있었다.
성종은 키가 컸다고 하며 성마른 성품을 가진 조선 역사상 가장 많은 후궁을 거느린 왕이다.
후사의 열매도 풍성하여 12명의 여인으로부터 16남 12녀의 자녀를 뒀다.
여자와 술을 좋아했다고 하니 자연히 부부싸움이 잦았을 터.
성종 7년에 맞아들인 두 번째 부인 윤씨가 바로 희대의 폭군 연산군의 생모로,
투기에 기인한 독약 사건 등을 일으킨 후 성종 10년에 폐비 되었다가
3년 후 28세에 사사되면서 연산군 폭정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거슬러 올라가면 성군 이미지를 가졌던 성종이 투기를 하는 아내를
모질게 다룸으로써 빚어진 대참사의 서곡이었는데, 사람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신하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부드러웠던 임금이
집안에서는 여자에게 소리를 지르고 길길이 화를 내다 독이 오른 마누라에게서
얼굴에 손톱자국까지 얻는.
군주가 여자를 너무 밝히다 보니 사회까지 성적 에너지가 혼란스럽게 휘몰았는지
희대의 섹스 스캔들 어우동 사건도 바로 성종 때의 일이다.
성에 대한 성종의 두 얼굴은 사회 제도에서도 반영되어
조선시대 여성의 권리를 억압하는 대표적 가족법인 여성의 재가 금지 제도도
성종 때에 만들어 졌다. 성적으로 방종했던 스스로에 대한 무의식적 징벌이라고
이해해야 할까. 한계를 가진 인간이 그리는 개인의 삶과 사회의 무늬는 이처럼
위태롭고 편집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종은 그 묘호가 상징하듯이 재위 기간도 길었지만
여러 업적을 이룸(成)으로써 세종의 업적을 이어 조선왕조의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의 묘는 지하철 2호선의 역명으로도 익숙한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선릉이다.
첫댓글 그놈 고약스럽게 생겼네....혹시 그때는 저 모습이 꽃미남이었을지도 ㅎㅎㅎ
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