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이 전능하다고 믿는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 는 시민이 아니라 소비자를 만들어내며, 공동체가 아니라 쇼핑센터를 만들어낼 뿐이다.”
-노암 촘스키-
영화는 테크놀로지의 산물이다. 이 단순한 명제는 영화를 예술로 설정하자마자 그 본질로 끌어들이게 되는 인간의 사유와 정신적 승화, 비현실성 혹은 유용성을 떠나 일상과 구분되는 아우라가 드리운 -예술이라고 하는- 신비한 영역을 배제하는 단순화의 덫에 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혹은 영화산업이 가능하게 된 것은 발레리의 예언에 영감을 받은 벤야민의 지적대로 기계복제 기술의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자본과 기술, 인간의 표현욕망이 결합된 영화의 물적 토대는 보다 강력하게 기술을 동원하고 갈수록 더욱 기술에 투자하도록 유인하는 자본의 욕망이다. 다소 악의적인 독설로 들리는 고다르의 혜언-“영화는 탄생부터 저주받은 예술이다”-은 정확하게 ‘영화기술-자본주의’의 핵심을 성찰한다. 즉 영화기술-자본주의 속에서 탄생직후부터 영화산업을 조직하면서 그 산업체제 속에서 생산되고 소비되고 계보를 쌓아나가야 하는 영화의 존재 조건은 자본주의를 넘어선 인간과 사회의 조건에 대한 모색과 욕망을 보여주는데 적합하지 않거나 태생적으로 딜레마에 놓여있다는 진단이 가능하다.
바로 이 지점, 그러니까 기술복제의 산물로서 자리매김하는 영화가 탄생이후 그 운명처럼 끊임없는 기술도입과 기술혁신으로 오늘날 디지털 복제 시대 영화로 위치하는 지점에서 기술-자본주의의 토대와 이데올로기를 성찰하는 것이 이 연구의 목적이다. 이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기술 그 자체에 가장 직접적으로 접속하는 할리우드 SF장르 (주:SF장르에 대한 정의는 연구자에 따라 여러 가지로 정의된다. 피터 니콜스(Peter Nichols)는 The Science Fiction Encyclopedia (1979)에서 SF장르를 20여가지 이상으로 소개하고 있고, G.K. 울프(G.K. Wolfe)는 Critical Terms for Science Fiction and Fantasy(1986)에서 니콜스의 정의에 8가지 유형을 첨가한다. 이렇게 수십 가지의 SF에 대한 정의가 있지만 공통적인 것은 미래사회 과학기술의 발달이 배경이 되며 그와 연결된 어떤 사건과 상황을 내러티브화 한다는 점이다) 즉 할리우드가 생산한 SF영화를 분석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그런 장르의 틀에서 가장 징후적인 텍스트이자 이후 제작되는 여타 SF영화들의 교과서적인 정전으로 작용하는 <블레이드 러너>의 표상체계 (주:여기서 말하는 표상체계는 다분히 알튀세르적인 이데올로기의 부분집합개념으로, 과학적 검토를 거치지 않은 신화사상, 이미지 표현물들을 의미한다.) 를 기술-자본주의 속에서 SF 영화 텍스트의 징후적 기호들로 읽어낼 것이다. 여기서 독해방식은 탈식민주의적인 해체적 독해, 그리고 후기산업사회의 포스트 모던 사회문화론을 원용할 것이다.
1. 영화 기술-자본주의 회로 속의 SF장르
사진술의 발명(1839, 다게르)이후 이미지는 복제기술장치를 통해 기술-예술의 장을 광범위하게 형성하며 자본주의 시장에서 영화산업으로 대표되는 이미지 산업을 이룩하게 된다. 뤼미에르는 씨네마토그라프의 최초 대중공개로 영화발명가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그 이후의 영화기술은 에디슨의 후예인 할리우드가 주도한다.
영화산업 시스템 속에 영화를 정착시킨 할리우드는 영화산업이 관객저하로 위기에 처할 때마다 기술 혁신을 돌파구로 삼으면서 그 생명력과 영역을 보존하고 확장해왔다. 그 확장은 2차 세계대전이후 파시스트 제국주의에 대항해 민주주의 해방군으로 세계경찰을 자처하며 유럽과 아시아를 비롯한 전지국적 시장경제를 만들어나가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일환으로 할리우드의 전지국적 시장화로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할리우드는 미국 서부의 한 지역이 아니라 전지국적 영화개념, 영화기술, 영화산업, 즉 영화 기술-자본주의의 원형이자 본산으로 자리잡게 된다.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기술혁신은 전지국적 영화기술 혁신의 방향타로 기능한다. 무성에서 유성으로, 흑백에서 칼라로, 평균화면에서 대형화면으로, 평면적 소리에서 입체음향으로의 변화는 모두 영화산업 밖에 이미 존재하는 기술 혁신을 영화제작과 영화보기에 걸맞게 받아들여 적용해낸 성과물들이다. 심지어 디지털 만능주의는 흑백영화조차 칼라로 변형해내는 변질 복제로 이어진다. 이 사태에 대한 감독들의 저항이 있었지만 영화의 소유주는 자본주인 제작회사라는 법률적 판단이 결국 내려진다.
이런 기술혁신이 메이저 자본가들의 주도권으로 이루어진 반면, 대자본에 예속된 영화를 그 구속에서 좀더 자유롭게 하기 위한 기술 도입-카메라를 비롯한 촬영기자재의 경량화와 단순조작화, 제작과 자본의 경량화를 꾀하는 디지털영화 등-도 간혹 이루어지긴 했다. 영화에 도입된 기술혁신이 표현 가능성의 영역을 넓혀온 것을 전적으로 부인하긴 힘들다. 그러나 어떤 기술이 초기에는 약간 실험적으로 소수의 영화에 적용되다가 결국 전체로 확대되고 수정, 변형, 보완 혹은 퇴출되는 과정에서 그것을 결정하는 선택은 자본의 수익성이라는 자본주의적 수익성 모델 결정론에 의존한다는 점이 더욱 강력한 사실이다.
70년대 말 극장 관객의 감소를 테크노-스펙터클 <스타워즈>(1977)로 극복해 낸 루카스는 이후 아예 ILM공작실을 차려 할리우드의 기술공급자로 자리잡는다. 그것은 <스타워즈>가 이전의 특수효과와는 다른 차원의 기술력- 컴퓨터천재들이 동원되어 우주유영의 움직임을 잡아내는 컴퓨터조정 카메라 이동술로 잡아낸 우주의 움직임 같은 것들-을 보여준 성공적 사례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할리우드의 대형 블럭버스터 장르로서의 SF영화와 기술로서의 SFX기법이 주도하는 영화는 누가 -어떤 공작실, 어떤 기술자, 어떤 영화가- 더 환상적 이미지를 창조해내는 기술을 보여주는가의 경연장이 된다. 심지어 프랑스 여배우는 한 인터뷰에서 ‘오늘 날 할리우드 감독은 여배우보다 기술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전통적으로 남자 감독의 사랑(차라리 욕망)의 대상이었던 여배우가 질투의 수사법을 통해 보여준 이 뼈있는 농담은 사실인데, 곧 이어 사이버 여배우와 감독의 관계를 그린 <시몬>이란 할리우드영화를 우리는 보고 있다.
그러면서 과거 어느 때보다도 이런 대형 SF영화들은 테크노크라시에 대한 포비아가 내재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 속에서 내러티브 욕망을 끌어내는 경향을 갖게 된다. 그것은 묘하게도 어느 때보다 첨단기술 제공 이미지로 승부하는 기술편향성이 가장 강력하게 개입된 SF영화가 자신의 근거에 대해 회의하는 자기 분열적 파라독스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SF장르는 웨스턴과 더불어 유독 할리우드가 독점해온 장르이다. 물론 마카로니(혹은 스파게티)웨스턴도 존재했고 최근 프랑스영화 <늑대의 후예>같은 웨스턴도 만들어지긴 했지만 그것은 할리우드 장르에 대한 패러디 내지 일회적인 모방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고다르의 <알파빌>이나 트뤼포의 <화씨451>같은 누벨바그 영화작가들의 SF,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같은 작품들도 큰 틀에서 SF영화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장르시스템보다는 작가주의적인 계보에서 제작된 영화들이며 영화산업 시스템 속에서의 지속성과 양적인 토대에서 할리우드 장르로서의 SF와는 구분된다.
미국 서부개척의 역사성과 지리적 조건이 할리우드의 웨스턴을 가능하게 했듯이, SF 장르는 기술결정주의와 기술숭배주의가 아메리칸 드림과 결합된 가장 미국적인 기술-자본주의론에 부응한다. 그런 점에서 웨스턴이 미국의 건국신화라면 SF는 미국의 미래신화인 셈이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이 과거에 대한 신화이든 미래에 대한 신화이든 그것은 늘 현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현재와의 관계에서 설정된다는 점이다.
1902년 뤼미에르에게 모욕을 받은 멜리에스가 에디슨의 키네토폰 시스템을 원용하여 초기영화의 환타지 역작 <달나라 여행>을 만들고, <블레이드 러너>가 오마쥬를 받친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가 1928년에 나온다. 19세기 제국주의의 꿈을 간직한 프랑스와 독일 두 나라에서 모험적인 SF가 나온 후 공포영화의 변종이나 하위장르로 할리우드 내에서 미친 과학자가 창조한 괴물을 안타고니스트로 내세운 ‘프랑켄슈타인’류의 영화들이 꾸준히 등장한다.
그러다가 1930년대 들어 할리우드는 <보이지 않는 남자The Invisible Man>(1933), <다가올 것들Things to Come>(1936)같은 영화들을 생산해내면서 조심스레 SF영화의 장르화를 탐색하다가 미국과 구소련과의 냉전대립체제가 우주개척프로젝트와 연결되는 1950년대 들어 본격적인 SF장르의 틀을 갖추게 된다. <지구가 멈춘 날 The Day the Earth Stood Still >(1951)과 <괴물 The Thing>로부터 <그것들Them!>(1953) 그리고 <시체강탈자들의 침입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1955), <금지된 행성Forbidden Planet>(1956)들로부터 <타임머신 The Time Machine>(1960)등 지속적인 SF영화들의 등장과 흥행 성공으로 SF영화는 붐을 이루며 확고한 장르로 자리잡는다. SF영화의 장르화는 로버트 와이즈(<지구가 멈춘 날>)나 하워드 혹스(<괴물>을 크리스찬 니비와 공동연출)처럼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당대 주요장르 전문 정상급 감독으로 인정받는 이들이 SF영화를 만든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영화들은 외계의 침입자와 공격자들을 끔찍한 괴물이나 위협적인 악한 존재로 설정하고 그것으로부터 지구/미국을 지켜내는 재앙담을 영웅신화로 해결한다. 그것은 2차대전의 파시즘에 대한 공포, 원자폭탄과 같은 과학기술이 가져온 살상력에 대한 공포가 정체 모를 외계존재가 가진 위협적인 과학기술력으로 치환되는 동시에 구소련의 과학적 성취를 외계의 괴물로 치환하는 효과를 발휘하면서 냉전 이데올로기에 대한 기술국가 미국의 애국주의적 담론으로 기능한다.
60년대 들어서 할리우드의 SF는 좀더 진지해지는 한편 당대의 세련된 유행을 표상하면서 우주 개척자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또한 이 시기부터 SF장르가 복합장르화되는 징후가 드러나는데 특히 코미디적인 경향이 추가되기도 한다. 드디어 1968년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우주여행>이 등장한다. 흔히 거대한 스케일과 광학적 기술로 연출한 최고의 환상 이미지 기술수준을 보여준 것으로 칭송되는 이 영화는 인간과 기계의 관계,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그 오래되고 여전히 탐구해야할 철학적 질문을 테크노크라시가 지배하는 미래의 우주론적 세계 속에서 제기하는 철학적 차원을 확보하게 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SF장르화와 웨스턴의 역학관계이다. 미국의 건국신화로 일컬어지는 웨스턴이 1930-40년대 황금기를 거쳐 1950년대 기존의 단순한 도식적 캐릭터 대결과 영웅 이데올로기에 회의를 보이다가 1960년대 수정주의적 웨스턴으로 변하면서 장르의 힘이 약화된다. 바로 이 시기 그 빈틈에서 나온 나온 SF들이 대형장르를 형성하면서 기존의 정통웨스턴이 담보했던 백인 우월적 개척자신화와 영웅담 내러티브를 계승한다. 바로 그런 문맥에서 SF가 미국의 미래신화로 현재를 정당화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게다가 미국 사회학자 다니엘 벨(Daniel Bell)의 지적대로 미국산업계가 이데올로기전쟁을 끝내고 거대기업 중심의 기술산업국가론이 강력하게 자리잡은 것도 바로 이 시기, 1950년대 말 60년대 초라는 점을 상기하면, SF장르의 점화 시기와 절묘하게도 일치한다.
1969년 루카스가 <THX1138>을 만든 이후 70년대는 할리우드 SF의 기술혁신과 전지구적 블록버스터화에 공헌한 스타감독들이 SF영화의 확장을 가져오게 된다. 1977년 같은 해, 스필버그는 <미지와의 조우>를, 루카스는 <스타워즈>를 세상에 내놓는다. 전자는 우주, 즉 외계로부터 온 생명체를 경이의 시선으로 지켜보는 동시에 외계인을 지구인보다 발달한 기술문명을 가진 존재로 재현해낸다. 그것은 이후 <블레이드 러너>와 같은 해에 개봉된 <E.T.>가 보여주는 외계인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으로 이어진다. 힌편 루카스는 <스타워즈>에서 동서양을 통과하는 신화적 모티브와 내러티브를 우주시대로 이동하면서 혼성모방의 시도를 SF속에서 시도해 역대 흥행기록을 깨고 최고의 세계흥행기록을 세운다. 이 영화는 액션과 웨스턴이 결합한 복합적인 장르로서 SF장르의 세계시장 블록버스터 전통을 확보하는 교두보로 작용한다(물론 한국에선 상대적으로 기대만큼의 흥행성과는 못 거두었지만).
2. SF장르 계보학 속의 <블레이드 러너>
1979년에는 전설적인 미국 TV시리즈로 인기를 끈 엔터프라이즈 우주탐험담 <스타 트랙>이 <스타워즈>시리즈로 확인한 성과에 기대 영화화 시리즈 작업에 들어간다. 은하계의 평화를 지키는 다행성 연합군쯤 되는 엔터프라이즈호를 이끄는 커크선장이 쓰는 은하력 항해일지로 시작되는 이 영화에서 엔터프라이즈호의 사명/목적이 이어진다. 그것은 '여지껏 간 적이 없는 곳을 탐험하는 것'이라는 익숙한 목표-웨스턴의 개척자 신화!-로 제시된다. 이 영화의 중심공간인 엔터프라이즈호라는 이름부터 의미심장하다. ‘엔터프라이즈 Enterprise'라는 말은 ‘모험적인 계획’과 ‘진취적인 정신’을 뜻하기도 하지만 실은 수익성을 목표로 한 ‘회사’란 뜻으로 많이 쓰인다. 그건 <블레이드 러너>에서 리플리컨트를 제작해 거대 이익을 거둔 타이렐사나 우주식민지개척을 유혹하는 거대기업들, 그리고 <에일리언>의 중심무대인 노스트로모호의 주인인 기업, 그러니까 우주광물자원채집으로 돈버는 데만 혈안이 되어 승무원의 안전이나 지구환경은 고려치 않는 악덕 거대기업들과 연결된다. 이들 모두는 인류나 우주평화같은 것보다는 사주의 이익을 위해, 기업의 성장과 이익창출을 위해 존재하는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핵심기계장치들이다.
엔터프라이즈호의 승무원들 중에서 눈길을 끄는 인물은 스포크박사이다. <스타트랙>광신도들인 트랙키들의 인기투표에서 최고 지지를 얻은 스포크박사는 지구인과 달리 감성이 없는 냉철한 이성적 존재로 그려지는데,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동양의 현자를 연상시키는 요다처럼 크고 뾰족한 당나귀 귀에 위로 찢어진 눈매, 그리고 백인보다 더 창백한 피부(백인보다 더 백인적인!)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차가운 이성은 이후 등장하는 후속 편들 속에서 감성과 정의감으로 연결되는 변형을 가져온다. 초인적 외계 존재의 냉철한 이성, 혹은 감성 없음은 <블레이드 러너>나 <터미네이터2>가 제시하는 인간보다 인간적인 기계인간 사이보그의 존재의 예시하는 셈이다.
<스타트랙>이 나온 같은 해 <에일리언>이 등장하면서 긍정적으로 재현되는 일련의 외계 존재에 대한 이미지가 공포의 대상으로 회귀한다. 이후 할리우드 SF는 지구인이 기대거나 공조할 수 있는 외계의 존재와 지구를 위협하는 외계의 존재라는 상반된 두 가지 입장을 극명하게 갖게 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전자는 지구인보다 기술문명이 발달한 이성적인 외계인으로 그려지는 반면, 후자는 기술이 지구와 다른 코드로 발달한 위협적인 외계괴물로 재현된다는 기술의 야누스적인 양가적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1982년 드디어 <블레이드 러너>와 <E.T.>가 등장한다. 우선 박스 오피스 기록으로 승부하고 보는 영화산업 속의 영화로서 <블레이드 러너>는 <E.T.>에 참패한다. 그러나 저주받은 걸작이란 칭호를 받았던 <블레이드 러너>는 열광적 소수 팬-그 속에는 감독들도 당연히 끼어있다-의 지지를 얻으며 4가지 버전의 LD판본에 이어 1991년 Sneak Preview 판본, 마침내 1992년에는 감독판 극장 상영까지 10여년 이상 지속적으로 보완되며 복제된 전설적인 이력을 갖게 된다.
또한 <블레이드 러너>이후 생산된 할리우드 SF의 상당수는 <블레이드 러너>를 정전으로 삼아 만들어진다. 마치 ‘우리는 모두 <블레이드 러너>의 후예들’이라는 것을 천명하는 SF영화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는데, 뤽 베쏭의 <제 5원소>는 세팅과 캐릭터에서 <블레이드 러너>에게 오마쥬를 돌리며, <터미네이터2>는 <블레이드 러너>가 제시한 인조인간 리플리컨트의 전쟁기계성을 계승하는 동시에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기계인간의 휴머니즘을 계승한다. <로보캅>은 재탄생한 기계인간의 기억의 문제와 자아존재성에 대한 고뇌를 계승한다. <여섯 번째 날>이나 <다크 씨티>, <12몽키스>, <매트릭스>에서도 ‘블레이드 러너’적인 분위기와 메타포의 변주를 발견할 수 있다. 할리우드 밖에서도 이런 흔적은 발견된다. 일본의 <아키라>와 <공각 기동대>에 등장하는 사이버그는 인간이 되려는 자아정체성에 대한 고뇌를 리플리컨트식으로 표출하며 작품전체에 흐르는 블루스리듬의 분위기도 유사하다.
3. 과학기술-자본주의영화 <블레이드 러너>
<블레이드 러너>는 여러 가지 판본이 존재한다. 후기 판본으로 갈수록 데커드가 리플리컨트라는 의혹이 강력하게 제시되는 점이 드러나고, 데커드와 레이철의 해피엔딩식 도주가 삭제되거나 불길한 전조로 변한다. 여기에서는 이런 차이들을 고려하면서 애초에 나왔던 1982년 극장판본의 비디오(영어판)와 1992년 감독판을 중심으로 삼아 다루기로 한다.
<블레이드 러너>는 위에서 보듯이 전설적인 텍스트, 아우라를 드리운 SF걸작이다. 1982년 개봉 당시보다도 이후 지속적으로 광적인 팬들의 지지와 연구에 힘입어 저주받은 걸작이란 칭호를 벗고 ‘사이버 펑크’의 대표작, 혹은 포스트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혼성모방과 압축시공간을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영화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바로 이런 찬사에 묻혀 <블레이드 러너>가 대단히 뛰어난 시각효과와 미래사회에 대한 디스토피아적인 모습을 음울하게 재현해낸 걸작으로, 복제인간을 통해 인간성에 대해 회의하고 질문하는 철학적 차원을 가진 명작이라는 평가 속에 굳어지기에는 간과하기 힘든 혐의가 있다. <블레이드 러너>가 보여주는 2019년 오염도시 LA 블루스는 2003년 WTO체제 하의 신자유주의 민주주의 시장경제논의가 전지국적 쇼핑센터화로 치닫는 자본주의의 현 단계 그리고 복제양 돌리의 탄생이후 복제인간과 장기복제에 대한 윤리적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유전자기술복제시대라는 콘텍스트에서 재검토할 흥미로운 텍스트이다.
3.1. 미국 속의 제3세계, 혹은 이루어진 것과 다가올 것들
<블레이드 러너>는 2019년 3차 세계대전 후 황폐한 미래도시 LA를 배경으로 한다. 부감으로 잡은 이 미래도시는 검은 오염 속에 거대한 연기, 불기둥을 뿜어내며 암울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데이비드 하비의 지적대로 후기산업사회의 황폐한 모습 그 자체이다. 결국 성장에 성장을 외치는 산업-기술-자본주의가 빈곤과 오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현재와 미래에 대한 진단이다.
우주개척을 선전하는 광고선이 공중에 떠 있고 키모노를 입은 일본 여자가 전형적인 동양여성의 판타지를 풍기며 전광광고판에 클로즈업으로 등장하고 코카콜라와 버드와이저 같은 다국적 전지구적 미국 기업권력을 보여주는 대형 네온사인 광고판이 도시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쓰레기와 오염이 뒤섞인 지상으로부터 치솟은 마천루-미국적 건축물의 상징-를 대표하는 타이렐사의 내부는 눈부신 태양 같은 인공광이 비치고 그리스,로마식 신전 기둥과 이집트식 피라미드가 장식을 하고 있다.
블레이드 러너인 데커드가 즐겨 찾는 차이나타운, 또 그가 리플리컨트를 찾아내는 차이나타운이 두 얼굴을 가진 LA의 한 구석으로 카메라가 이동한다. 그곳은 온갖 인종-실은 아시아계와 아랍계가 주류인 유색인종들이다-들이 번잡하게 생업과 일상을 영위하는 혼돈스러운 공간이다. 노상의 포장마차 국수집, 무질서하게 연결되고 숨겨진 좁은 시장판 길들의 구석구석에는 무질서한 간판들과 여자장사를 하는 스트립쇼판이 펼쳐진다.
이런 미래풍경은 2000년대 시점에서 전혀 낯설지 않다. 단지 우주식민지를 파는 기업과 복제인간인 리플리컨트가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서울의 곳곳에 자리한 대형 씨티비전판과 거기서 쉴새없이 흘려보내는 대기업 제품의 현란한 이미지들, 공중에 떠있는 거대한 광고 풍선비행선들...게다가 차이나 타운은 필름 누아르가 가장 모순된 범죄의 공간과 범죄자가 은닉하는 공간으로 상징화된 과거의 공간이다. 모든 것, 실은 모든 이상하고 꺼림칙한 일-이 늘 차이나타운에서 일어난다고 주인공이 읊조리는 <차이나타운>이란 제목을 단 영화도 있듯이.
이런 문맥에서 <블레이드 러너>가 제시하는 2019년 LA는 1982년의 차이나타운과 이전의 차이나타운, ‘멜팅 팟 melting pot’이라는 다인종국가 미국을 유색인종 전시장인 차이나타운으로 함축해낸다. 허나 정말 미국이 다인종국가 일까? 이후에 분석하겠지만 권력을 가진 과학자, 푸코의 지적대로 미국을 끌고가는 지식-권력은 백인의 것이고, 그런 점에서 차이나타운은 지리적으로 미국 LA에 속해있지만 지식-권력으로서의 미국은 아니다. 그것은 초강대국 미국의 변경에 위치한 엉거주춤한 제 3세계의 상징적 축소판처럼 보인다. 이런 이중성은 ‘미국-LA-차이나타운’이란 공간의 분배를 ‘미국 VS. 차이나타운’의 이항 대립적 성격으로 내포하고 있다. 기술/권력-지식의 미국과 그에 억압되거나 대항하는 제 3세계적인 차이나타운이 존재하는 것이다.
3.2. 캐릭터의 역학관계: 인종과 젠더
-창조주와 킬러, 그리고 시뮬라크르-리플리컨트 :인간은 무엇으로 인간인가?
<블레이드 러너>의 내러티브 구조는 쫓고 쫓기는 전형적인 액션 스릴러이다. 주도적인 내러티브는 블레이드 러너인 데커드가 누가 리플리컨트인가를 발견해내는 것, 그리고 그 자를 처형하는 것(영화에 따르면 처형이 아니라 ‘퇴직’이란다)으로 임무가 완성된다. 그러나 거꾸로 똑똑하고 힘센 리플리컨트가 뒤에서 블레이드 러너를 공격하고 죽일 수도 있다. 시드 필드의 말대로 ‘작용과 반작용’의 대립체제가 잡혀야 드라마의 갈등에 박진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내러티브의 양념이면서 문제의식을 추동하는 요소는 애정문제이다. 블레이드 러너인 데커드가 리플리컨트인 레이첼과 사랑에 빠져 임무를 망각하는 곤혹스러운 사태가 그것이다. 그러나 감독판에 따르면 데커트 역시 자기도 잘 모르고 레이첼도 모르지만 인간의 명령에 따라 험하고 위험한 일을 해야하는 리프리컨트라면 이 둘의 사랑은 곤혹스러운 일도 아니다. 오히려 이런 험악한 사나이들의 액션대결이 보여주는 거칠고 살벌한 정서와 이미지를 중화시키는 부드럽고 몽환적인 이완작용의 기능을 담당한다.
이런 내러티브 구조에서 문제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우선 왜 인간은 자신이 창조한 리플리컨트를 죽여야만 하는가, 라는 자기모순적인 문제이다. 그 문제는 인간처럼 감성을 가진 리플리컨트, 인간이 주입한 기억을 믿으며 자신이 인간이라고 믿는 자기기만적 리플리컨트 즉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리플리컨트를 죽이는 것이 합당한가, 라는 문제를 끌어들인다. 결국 꼬리에 꼬리를 모는 이 두 가지 문제는 인간은 복제인간을 창조하고 그때문에 문제를 당하는 유한한 존재이며, 과연 인간적인 것은 무엇인가, 라는 인간 본연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로 집결된다.
이런 문제 의식의 외피는 일단 창조주 인간과 복제물인 리플리컨트의 관계를 통해 드러난다. 외계 식민지에서 험한 일을 시키고 전쟁기계로 활용하기 위해 리플리컨트를 제작한 타이렐사, 그리고 그 기업주인 회장은 부와 권력을 지닌 과학기술자이다. 리플리컨트의 창조와 존재가 인간에게 편리함을, 창조주 과학자에겐 과학기술의 성취라는 자아 실현적 만족과 부를 가져다 주었지만 정작 리플리컨트의 정체성은 본질적으로 자기 기만적이다. 왜냐하면 리플리컨트 자신이 인간처럼 사랑과 섹스까지 가능한 감성과 신체 기능을 가진데다, 심지어 자신이 엄마와 과거 기억이 있기에 인간이라고 믿는 레이첼처럼 인간보다 인간적인 리플리컨트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보다 강력한 신체적 힘과 지성, 게다가 감성까지 부여받은 리플리컨트는 사실 그동안 SF영화에 등장하는 기계장치로서의 사이버그 혹은 정교한 로봇이라기보다 보드리야르적인 시뮬라크르이다. 데이비드 하비의 지적처럼 이 리플리컨트는 고도로 숙련된 노동력을 갖춘 단기고용 노동력이자 완전한 형태의 단기고용 노동자 그 자체이다.(주: 데이비드 하비, “포스트 모던 영화에서의 시간과 공간”,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에서, 359쪽.)
인간의 육안으로는 인간과 구분하기 불가능한 리플리컨트-인간 시뮬라크르를 창조한 타이렐사의 모토는 원천적으로 자기기만적이다. 그러나 정작 이런 창조물을 제작한 타이렐사는 그 리플리컨트가 4년이란 짧은 시한부 생명 속에서 인간에게 복종하는 노예같은 소모품적 존재로 제작해 돈을 벌었으면서도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이란 슬로건이란 기표 밑에는 인간보다 어떤 점은 우세하지만 어떤 점은 열세인 의미작용을 감추면서 가장 자본주의적인 기만술-자본을 위한 것 대신 인간을 내세우는 그 낡은 술수-을 쓴 것이다.
이런 과학기술-자본주의의 상투적인 속임수는 리플리컨트에 의해 응징을 당한다. 4년이란 시한부 생명은 혹시 인간에게 저항하거나 인간의 질서에 위협할 우려를 방지하기 위한 장치이다. 그런데 로이와 그 일행은 4년의 시한부 생명이 끝나기 전 우주선을 탈취해 지구로 잠입한다. 그들은 술수를 써 타이렐을 찾아가 생명연장을 요구하며 협박하기에 이른다. 타이렐은 창조주의 권력으로 로이에게 창조주의 섭리를 설교한다. 짧은 생명을 두 배로 즐기라고, 너희는 완벽한 창조물이라고. 그러나 그는 로이의 손에 살해된다. 이 부분에서 카메라는 오히려 잔인한 행동을 하는 로이보다는 점잖은척 하면서 강압적으로 로이를 대하는 타이렐을 기만적 캐릭터로 보여준다. 유난히 큰 안경에서 반사광을 내며 빛을 받고 서있는 타이렐의 클로즈업은 살인자 로이보다 창조주인 그가 더 잔인한 인물이란 점에 구두점을 찍는다.
한편 데커드와 그가 죽이거나 싸우는 리플리컨트의 관계, 특히 레이첼의 관계에서 도대체 누가 더 인간인가? 라는 질문은 무엇으로 인간이 되는가? 로 도치되면서 혼돈이 발생한다. 애초 설정에서 데커드는 인간이고 킬러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영웅이지만 갈수록 그의 정체성과 위상은 불안과 의문에 놓이게 된다. 그가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쇼걸 조라를 처형시킬 때, 조라가 죽어 넘어가는 모습은 관객의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도록 슬로우 모션으로 재현되고 비닐 가운에 튄 핏자국은 그녀가 복제인간이기보다 몸 안에 붉은 피가 흐르는 생명체라는 점에 주목하게 만든다. 데커드가 프리스를 죽일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를 잡아내는 화면은 퍼득이면서 꺼져가는 생명체의 가련함과 처참함을 자세하게 보여주도록 미장센화된다. 거대한 말미를 장식하는 데커드와 로이의 대결에서 로이는 데커드 앞에서는 독일 병정같은 냉혹함과 비인간적인 투쟁욕을 보여주지만 데커드가 보지 못하는 로이를 잡아내는 화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인간적인 애잔함을 표현하도록 구성된다. 그는 죽은 프리스의 몸에 자신의 몸을 포개며 사랑을 표현하고 죽어가는 자신을 깨우기 위해 손에 못을 박는 예수처형의 모티브를 그래도 수행하며 심지어 막판에 데커드를 구해주고 자신은 빗 속의 눈물처럼 소멸해간다.
완벽한 리플리컨트일수록 자신을 인간으로 착각하는 교묘한 속임수 기술의 실현체인 레이첼은 레옹을 총으로 쏘고 -그녀가 이미 자신이 리플리컨트일 것이라고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데커드를 구해준다. 그리고 둘은 사랑을 나눈다.
여기서 두 가지 혼돈이 정체성과 관련해 발생한다. 하나는 데커드가 인간이고 레이첼이 리플리컨트라면 그는 자기정체성 파라독스에 빠진 것이다. 적어도 그는 인간/리플리컨트를 구분하고 처치하는 직업을 버린 것이다. 가프에게 꿈을 들키는-데커드의 꿈 속에 나온 유니콘과 가프의 유니콘 오리가미- 힌트에서 짐작이 가듯이, 또 감독판에서 이보다 강하게 데커드가 리플리컨트라면 레이첼과의 사랑은 적절해 보이지만, 그가 리플리컨트 킬러용 블레이드 러너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제작되었음을 애초에는 몰랐던 자아 정체성의 분열에 빠진다.
결국 리플리컨트를 기만적으로 혹은 인간적으로 만든 타이렐을 정점으로 그 밑에서 같이 작업한 과학-기술자들, 그리고 리플리컨트 처형 임무를 맡은 브라이언 반장과 거프. 거기에 종속된 데커드는 리플리컨트의 고뇌와 고통스런 존재감을 따라잡지 못한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으로 인간인가? 라는 문제가 인간처럼 살고픈 리플리컨트의 고뇌와 시련을 통해 인간성 비판으로 제기된다. 보드리야르의 지적대로 실재와 허구, 참과 거짓의 차이를 위협하는 것이 시뮬라크를를 만들어내는 시뮬라시옹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결국 리플리컨트를 통해 인간의 정체성과 본질은 위협을 당하고 진짜 인간과 가짜 인간의 차이는 판명되기보다 순환되는 기호의 순환으로 넘어간다.
-대기업과 하청업자, 기술-권력의 지배
태평양을 끼고 있는 LA 는 아시아계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이다. 게다가 21세기는 태평양으로 문화가 이동하며 기술-자본을 갖춘 일본과 넓은 시장을 가진 중국이 아시아-태평양 시대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예측은 2019년 LA를 배경으로 한 <블레이드 러너>에 잔영을 드리운다.
차이나타운의 복잡함과 혼돈스러운 활기는 아시아의 대표적인 상업도시들-홍콩이나 도쿄, 서울의 유흥가 중심 뒷골목-의 시뮬라크르이다. 여기에는 아시아인뿐만 아니라 아랍인들도 있고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가 들려온다. 일본어, 독일어, 스페인어가 혼합된 지브리쉬어도 들린다. 데커드가 리플리컨트의 단서를 찾아내기 위해 물어 물어가는 곳은 차이나타운이다. 거기에서 데커드는 인조 뱀비늘을 제조해 암거래하는 이집트인 압둘 하산으로부터 정보를 얻는다. 타이렐과 계약해 리플리컨트 부속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자들 역시 아시아계 사람들이다. 리플리컨트의 눈을 납품하는 츄는 중국인이다. 데커드가 즐겨찾는 포장마차 주인 일본 노인은 그와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않지만 손짓몸짓하며 그런대로 주문을 받아준다. 이들은 옆 사람 이야기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시끌복잡한 시장판, 어수선하고 열악한 작업실에 거주한다.
한편 리플리컨트를 제조하는 핵심기술인 유전공학과 뇌제작은 백인이 담당하며 이들은 거대한 빌딩을 차지하고 있다. 조로증에 걸린 세바스찬은 유전공학자로, 비록 황폐하긴 했지만 거대한 건물에서 로봇 하인과 장난감을 상대로 혼자 살고 있다. 그와 체스게임을 하는, 유일한 접선가능자인 타이렐은 리플리컨트의 뇌와 생명을 관장하는 과학기술자이자 타이렐사의 기업주이다. 그는 LA에서 가장 높아 보이는 수 백층의 거대한 빌딩, 이집트문명, 마야문명, 그리스 로마 문명의 장식품들로 실내장식을 한 공간에서 로봇 부엉이와 손녀딸의 기억을 이식시킨 아름다운 레이첼을 거느리고 산다.
과학기술지식-권력-자본을 독점한 소수의 백인과 그에 종속된 다수의 하청업자 유색인, 이도저도 아닌 채 차이나타운을 메우고, 그들 사이에서 노동자로 위안부로 위장 잠입한 백인 시뮬라크르 리플리컨트가 이 공고한 위계질서 속에 위치하고 있다. 이것은 20/80의 사회, 남북갈등, 인종갈등의 상징적 축소판으로 보인다. 그것은 가장 발달된 기술-자본주의 미국이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에서 말하는 시장의 민주화가 기술-자본을 가진 소수가 독점하는 시장의 전지구화라는 점을 예시하는 얼룩으로 번져나간다. 결국 이런 게임의 규칙 속에서 유색인종/제 3세계는 지리적으로 미국 밖에서 미국 안으로 스며드는 공간이동을 통해 여전히 종속적인 하청업자의 위치를 누리게 된다. 타이렐이 세바스찬과 하던 서양장기 체스의 규칙은 동양 장기의 규칙과 다르기에 체스를 게임종목으로 채택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가는 불을 보듯이 뻔하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남성 판타지로의 도피
<블레이드 러너>이후이긴 하지만 리들리 스콧은 <에일리언2> 와 <델마와 루이스>, 그리고 <지 아이 제인>을 통해 가장 강력한 여전사, 혹은 자아정체성을 가진 여성 캐릭터를 그려낸 감독이다. 그런 그의 이력에서 보자면 <블레이드 러너>의 젠더 폴리틱은 믿을수 없을 정도로 남성 판타지, 그리고 그 속에서 자라는 팜므 파탈 징후에 빠져있다.
이 텍스트에 등장하는 세 명의 여성 캐릭터는 일단 모두 리플리컨트이고 남자위안용이다. 조라나 프리스 모두 강력한 신체적 힘을 가졌지만 이들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파는 역으로 일단 설정되고 데커드의 총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조라는 차이나타운에서 뱀쇼를 하는 위안용이며 그에 걸맞게 성적인 자극을 불러 일으키는 자태로 데커드를 유혹하면서 위기를 반전시키려 한다. 그러나 프로 킬러인 데커드는 결국 그녀를 처치한다. 프리스는 로이의 지시에 따라 세바스찬의 집에 파고든다. 그녀가 사용한 미끼는 동정심을 유발시키는 동시에 혼자 사는 세바스찬에 대한 성적인 유혹이다. 세바스찬의 집에서 프리스가 동료인 로이를 끌어들일 때 전면에 잡히는 클로즈 업된 세바스찬의 얼굴에 보여지는 질투의 표정은 그 점을 더욱 명확하게 만든다. 결국 프리스도 데커드에게 걸려 그의 손에 처치된다. 그리고 그녀의 시신은 로이의 애무와 애도 속에 보여진다. 그녀는 로이의 여자이면서 로이가 지휘하는 타이렐 접근 프로젝트의 미인계 도구이다.
가장 심각한 팜므 파탈은 레이첼이다. 그녀의 등장 이미지에서부터 그녀의 완벽한 여성적 외모는 남자의 욕망이 탄생시킨 판타지 여성의 기호를 보여준다. 정갈하고 늘씬한데다 완벽한 외모를 갖춘 레이첼은 타이렐의 자랑이자 데커드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인간보다 인간적인, 이란 타이렐의 모토는 이 경우 인간여성보다 더 여성적인 시뮬라크르로 구체화된다. 레이첼은 시험용으로 데커드에게 질문을 당한다. 리플리컨트임을 드러내는 감정적 동요의 눈동자 홍채 반응을 감식하는 기계 앞에서 데커드는 성적임 모욕을 주는 성희롱적인 질문을 한다. 잡지의 여자 누드사진, 그리고 그걸 벽에 붙이는 남편을 어떻게 하겠는가, 등... 레이첼은 감정적 동요를 숨기기 위해 담배를 피워 연기를 얼굴 앞에 뿜어낸다. <원초적 본능>에 나왔던 그 유명한 장면-속옷을 입지 않은 샤론 스톤이 담배를 피우며 거만하면서도 유혹적인 자태로 마이클 더글러스의 질문을 받던 그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 테스트를 통해 자신이 리플리컨트일지 모른다는 의혹으로 존재의 불안을 갖게 된 레이첼은 오히려 피해야 할 데커드를 찾아가서 자신은 인간이라고 주장하고 이후 지속적으로 도움을 청한다. 심지어 그를 위기에서 구해주기도 한다. 데커드와 사랑에 빠진 그녀는 사진 속 어머니처럼 곱슬머리를 풀고 초기보다 부드럽고 유약한 태도를 보인다. 그건 인간이 되고픈 리플리컨트의 변모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사랑에 빠진 여자의 종속적인 전형적인 모습이 남성판타지를 통해 재현된 얼룩이 번져 나온다.
남자의 여자, 어쩔 수밖에 없이 사랑과 헌신에 볼모잡힌 팜므 파탈의 존재, 그리고 그녀들이 남자들과 갖는 관계는 사실 내러티브의 중심흐름에 종속된 부차적인 내러티브 요소로 기능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남자 리플리컨트가 창조주를 만나는 것, 그리고 블레이드 러너와 대결하는 것이다. 특히 전자의 관계는 조물주 신과 인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함축한다. 보수로 회귀하는 레이건의 시대인 1980년대 할리우드 영화는 어느 때보다 상징적인 부자관계를 통한 남성성의 강화를 보여준다. 수잔 제퍼드가 간파했듯이 <스타워즈>시리즈의 부자관계에 대한 비밀과 대결, <플래툰>에서의 상사와 부하의 관계, <인디아나 존스>시리즈의 부자관게, <블레이드 러너>의 창조주 아버지와 창조물 아들의 관계가 모두 부자관계란 상징성 속에서 인물들 간의 역학관계를 설정한다. 여기에서 악인과 선인의 대결로 그 관계가 설정되지만 실제로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상호보완적이다.(주: 수잔 제퍼드, <하드 바디>, 99-100쪽.)
리플리컨트는 어머니 없는 아들이나 딸이며 오직 창조주 아버지만이 있다. 첫 번째 심문대상이었던 레옹은 어머니에 대한 질문을 하자 심사관을 총을 쏘아 죽인다. 어머니 없이 탄생한 그에게 어머니에 대한 질문은 치명적이다. 반면 레이첼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사진을 증거삼아 어머니가 있으므로 자신은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플라톤이 말했듯이 기억은 정체성의 근거이다. 그러나 레이첼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이식된 가짜이다. 결국 리플리컨트의 정체성은 어머니가 없다는 점과 기억이 없거나 정보를 통해 남들도 아는 가짜 기억을 가진 것을 확인할 때 확보된다. 그리고 이들을 만들어내고 폐기시키는 것은 인간-남자들이다. 그 살벌한 탄생과 죽음의 악순환적 게임에서 여자들이 희생되고 이들 남자들의 (성적)판타지를 충족시켜준다.
그런 점에서 <브레이드 러너>는 필름 누아르적인 분위기에 강력하게 젖어들고 또 가장 필름 누아르적인 소품과 세팅을 사용했듯이 필름 누아르가 선호하는 팜므 파탈을 그대로 차용한다.
4. 저주받은 걸작의 시장성
<블레이드 러너>는 거의 완벽하다는 칭송을 듣는 SF영화의 상징적 텍스트지만 여전히 그 안에 은닉된 기술-자본주의의 패권의식, 그리고 성차별적이고 식민주의적인 담론의 정당화를 인간성에 대한 문제를 전면화 하면서 은닉시킨다. 이런 텍스트의 이중성에서 유색인종과 여성은 다시 주변화, 소외화의 악순환을 반복한다. 호미 바바가 <차이, 차별, 그리고 식민주의담론>에서 지적했듯이 그것은 식민담론이 피지배자에게 부여하는 양가적 가치를 보여준다. 식민권력인 기술-자본주의 미래의 미국 타이렐사에 종속된 리플리컨트, 특히 여성 리플리컨트, 그리고 납품 하청업자는 지배자를 모방하면서 -그러나 지배자는 결코 되지 못하는 기술-자본주의의 강고한 시스템-식민권력의 수행에 보조한다. 바바는 그런 모방이 어느 순간부터 지배자/피지배자의 위계질서를 허무는 저항성으로 발전한다고 보았지만 <블레이드 러너>는 그런 저항의 가능성 대신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런 문제를 중화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할리우드 SF의 모범이라 할만한 <블레이드 러너>가 보여주는 디스토피아적인 테크노크라시는 미국과 백인 남성 주도의 기술-권력-자본주의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듯한 양심적인 외양과 모호한 휴머니즘을 내세운 세계시장용 SF영화에 그친다. 왜냐하면 할리우드의 근거인 과학기술-자본주의의 산물인 할리우드영화를 전세계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을 사명으로 수행하는 철저한 품목으로부터 <블레이드 러너>를 분리해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제작자의 파워에 미린 극장판 이후 이 영화의 아우라에 힘입어 감독판이 나온다 한들 그것 역시 시장성의 계산 속에서 이루어진 할리우드 기업의 프로젝트인걸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블레이드 러너>는 저주받은 걸작이 아니라 할리우드가 뒤늦게 상품성을 알아본 분열적인 텍스트이다.
* 참고문헌
노암 촘스키(강주현역),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 모색, 1999.
데이비드 하비(구동희외 역),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 한울, 1989.
로버트 C.알렌 외(유지나외역), <영화의 역사:이론과 실제>, 까치, 1998. pp.173-202.
이냐시오 라모네(주형일역), <소리 없는 프로파간다: 우리 정신의 미국화>, 상형문자, 2002.
이종승, “영화에 니티닌 소외의식 연구: SF영화를 중심으로“, 동국대 석사논문, 2000.
태혜숙,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여이연, 2000.
Altman, Rick, Film/Genre, BFI, London, 1999.
Baudrillard, Jean, Simulcres et Simulation, Eds. Galilee, Paris, 1981.
Foucault, Michel, Dits et ecrits II 1976-1988, Gallimard, Paris, 2001.
Gressard, Gilles, Le film de science fiction, Eds. J'ai lu, Paris, 1989.
Irigaray, Luce, Speculum: de L'autre femme, Eds, de Minuit, 1974.
Jeffords, Susan, Hard Bodies: Hollywood Masculinity in the Reagan Era, Rutgers University Press, 1994.
Kerman, Judith B., Retrofitting Blade Runner, Popular press, Ohio, 1991.
Sklar, Robert, Movie-Made America, Vintage Books Edition, New York, 1994, PP.249-382.
Tulloch, John and Jenkins Henry, Science Fiction Audiences, Routledge, London, 1995.
첫댓글 첨으로 논문글 올리죠. 잘 안읽히면 억지로 읽으려하지 마세요. 그냥 이런게 영화논문이란걸 쌤플로 보여주면 어떨까 싶어서...아마 탈식민지적 독해의 실천 -크게 자신없지만-그런 시도를 보여주고픈 욕망이 작동한거겠죠. 율리우슨 독학광이시니 끝까지 읽으실껄 ㅋㅋ...
아 참 ~ 쪽말미 주가 본문속으로 얽혀들어 가끔 말안되기도 하는데...하이퍼x텍스트로 간주해 읽으심 되죠.
역시 읽기 어렵군요. 누군가 직접 의견을 게시한 글은 읽기가 쉬운데 논문이나 기사를 퍼 옮겨놓은 것은 좀 눈에 잘 안들어 오는군요. 출력해서 틈날때 읽어야겠군요.
넘애쓰진 마요. 학위따는것도 아닌데...그냥논문쓰는 고통과 고뇌 그속에 끼어드는 쾌감 그런 것 공유하고픈 심정에서 올린 글이니....
지나레인선생님 저 이런 글 정말 좋거든요. 평소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던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요. 이 글도 정말 재밌었어요. 자주 올려주실거죠? ^^
주드 말에 용기얻어 논문다시 보니 비문들이 눈에 걸리죠.그래서 그부분만 말되게 고쳤죠. 좀더 잘 읽힐지도....
어렵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