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스리랑카를 다녀오고 적은 글이라 잘못 된 내용이 많은리라 여겨 집니다.하지만 그 때의 글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스리랑카 여행기
1991년 1월에 12일간의 느낌을 적은 여행기
-콜롬보.네곰보,아누라다푸라,플론나루와,뎀블라.시기리아.히까두와.뉴와라엘리아,캔디.-
스리랑카여, 스리랑카여
백홍수
스리랑카!
스리랑카인!
한 번의 해외여행으로 제대로 뭘 느꼈는지 자신은 없지만 그들의 밝은 표정과 열대의 기후에서 온 탓인지 낙천적인 사고방식과 여유로움은 나의 부러움을 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우리보다 국민소득이 낮은 빈국이라는 선입견으로 인한 업신 여김은 없었는지?
부끄러움을 가지고 소감을 적어볼까 한다.
콜롬보의 33℃에서 서울 영하 7℃만큼(40도 차이)이나 스리랑카와 우리나라는 달랐다.
우리나라의 계절이 사철인 탓으로 추수 후 저장을 해야 겨울을 나는 것이 생명보존의 원칙이듯 그들은 다 아는 사실처럼 저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탓인지 삶에 있어서 무척 여유로워 보인다.
3모작의 벼농사로 풍성한 곡식과 아무곳에나 풍성하게,
한 철이 아니고 끊임없이 익는 열대 과일들,
피부색은 검으나 눈이 크고 영혼이 맑은 사람들이 사는 곳 스리랑카.
지상의 낙원이 따로 있을까?
혹 남의 과일을 따 먹는 사람은 없느냐?
물어보니 내것이 아닌데 어떻게 따 먹느냐며 이상하다는듯 쳐다 본다.
직업이 뭐냐고 물었을 때 교사라고 답했던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러워졌다.
늘( ? ) 푸르고 키 큰 대자연 속에 어쩌다 나타나는 집들은 규모의 차이는 있을진데 우리의 현대 건물처럼 사각형 일변도의 집은 정말 찾을 수가 없었다.
현지인들의 집들을 보고 공통적으로 느낀 놀라운 사실은
(사찰과 초대받은 중류가정, 불시 방문한 현지의 가난한 집 등 8곳의 집을 보고 느낀 점)
창문 위의 작은창(환기를 위한)들의 모양은 각양 각색으로 같은 모양이 없을 정도로 변화가 많았고 거의가 붉은색의 기와를 얹어 미려함과 단순함을 곁들였으며 실내의 정결하고 깨끗함에 놀라웠고 우리들의 가정은 불필요한 가구를 많이 소유한 것이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으며
문득 법정스님의 무소유가 떠올랐다.
어느 호텔의 입구는 큰 나무를 베어 내지 않고 집을 지어서 현관 지붕에 굵은 가지가 세개나 올라와 있었다.
정말 놀라와 사진을 찍고서 안내인에게 물어보니 드문 예가 아니고 그들은 나무를 거의 배지 않고 꼭 베어내야 할 시는 그 숫자만큼 다시 심는다고 하며 또한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고 하니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지?
길가에 장작을 15∼20개로 다발을 묶어서 쌓아놓은 것이 자주 눈에 띄어 물어보니 죽은 사람의 화장을 위한 땔감이라고 한다.
장글(밀림) 속에 있는 좁은 길 가에서 장작을 판다면 이해가 될지?
그들의 수도 콜롬보를 제외하고는 넓고 곧은 도로는 거의 보지 못했다.
산모퉁이를 무분별하게 절단하거나 언덕을 볼상 사납게 깍지 않고 휘어지는 길모퉁이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흉한 것을 무릎쓰고 자연을 훼손한 경우는 보지 못했다. 혹자는 바보같은 사람들이라 여길지 모르나 우리나라처럼 마구 절단하고 그곳에 땜질하듯 가리는 식의 도로사정과는 너무나 달라 우리나라의 건설담당 공무원들이 선진국 시찰(연수)보다 먼저 봐야 할 곳이 여기가 아닌가 여겨졌다.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자연의 훼손을 바라지 않았던 그들의 예지 탓인지 일본이나 미국의 학자들이 호수나 늪, 시골의 자연 생태계를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하면서 변화해 가는 스리랑카를 연구하러 많이 온다고 한다.
자연과 인간과 건축의 조화가 이렇게 잘 이루어질 수 있는지 신기했고 조화가 깨어진 곳을 한 곳도 보지 못했던 것은 짧은 여행기간 탓이거나 아니면 차라리 나의 복이라 여기고 싶다.
이러한 그들의 세계 최초의 수세식 화장실을 이용했다면 믿어질는지?
몰론 아직까지 화장실에서는 용변후 뒷처리는 수도에서 바가지로 물을 떠 왼손으로 처리를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식사시에는 절대로 식탁 위에 왼손을 올려 놓지 않는다. 불결한 손이라고!
식사는 뷔페식처럼 중앙의 큰 그릇에서 국자 같은 큰 숟가락으로 떠서 앞에 놓인 쟁반에 먹을 만큼 떠와서 오른손으로 조물락 조물락 비빈 후에 입에 넣는 식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키 크고 늘 푸른 대자연의 축복 탓인지 안경을 쓴 사람이 잘 보이지 않았고, TV를 거의 보지 못했다는 점도 시력을 도운 한 원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며 뛰어 다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날씨가 더운 탓일까? 아니면 여유로운 마음씨 탓일까?
그런데 우리일행을 태우고 다니는 25인승 차의 기사가 한국사람을 닮아서인지 자꾸만 클랙션을 울리고(현지인 답지 않게) 급하게 차를 몰고 차츰 여유를 잃어가는 모습에 안타까움과 스리랑카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그들의 차는 오른쪽에 핸들이 달려있고 좌측 통행을 하고 있어서 오너 경험이 있는 입장에서 한참이나 헷갈려 충돌 위험( ? )을 느끼며 말 못하고 웃었다.
콜롬보에서 둘쨋날 까마귀를 보고 일행중 한 사람이 "야! 저기 30만원 짜리다"라고 외쳐서 모두 웃음바다가 되었다.
한국처럼 정력에 좋다고 까마귀를 30만원으로 계산하면 까마귀 값이나 스리랑카 국토값이나 거의 같지 않을까?
그곳에는 서울 어느 공원의 비둘기때처럼 곳곳에 그득해서 흉조라는 이미조보다는 무척 많고 자주 보게되니 정겨움마저 들었다.
우리 한옥 가정에 쥐가 있으면 고양이를 키우듯 스리랑카에는 도마뱀을 키운다. 아주 고급식당을 제외하고는 벽에 기어다니는 도마뱀을 수시로 볼 수가 있다.
도마뱀은 모기를 잡아먹기 때문에 징그럽게 여기지 않고 화장실에 2∼3마리만 서식( ? )하고 있으면 모기가 없어서 오히려 고맙게 여긴다니 문화의 차이는 아닌지.
그곳의 관광입장료는 우리와 달라서 불국사, 천마총 등 경주지역 입장권을 한번에 끊는 종합입장권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경주지역입장권이라 해서 2∼3만원 받는 꽤 비싸게 여겨진 입장권이었다.
그런데 현지인들은 무료이고 스님들은 외국인이라고 무료였다. 이점은 배울만한 관광정책이었고 현지 여건에 맞는 퍽이나 인상 깊은 제도라고 여겨졌다.
왜냐면 관광지 자체가 성지라서 지역 사람들은 시간만 나면 그곳에 참배를 하기 때문에 출입시마다 매번 입장료를 낸다면 큰 부담이 되고 또한 불편함 조차 느끼는 일이 아니었을까?
오늘날의 스리랑카의 조화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뉠수 있다.
고대 유물이 거의 그대로 존재하면서 새로운 초현대적인 건물이 공존하다는 점과 금쟁반에 과일을 담아먹는 극도의 부자와 극빈자가 어울려 조화( ? )롭게 살아가는 모습, 길거리나 거의 모든 곳에 사람과 소와 개와 코끼리, 도마뱀이 공존하다는 점이다.
그곳의 수도인 콜롬보 중심지에도 소가 어슬렁거리며 나다니고 있고 차들은 잘도 피해 다닌다. 한 마디의 불평도 없이 로타리에는 예외없이 거의 몇마리의 소들이 지나가는 사람가 차들을 바라보며 되새김질 하며 파리를 쫓고 있다.
처음에는 임자 없는 소들로만 여겨졌으나 알고보니 소의 등에 주인의 이름이나 기호를 적어 소유권을 나타내고 있었다. 얌체( ? )같은 주인은 해질녘이 되면 약간의 먹이를 주며 소젖을 짜고(길거리에서 주워먹은 부산물로 만든 젓) 주인을 인식시키는 정도이다. 외양간도 없이 밤에는 주인집 앞에서 잠을 자고 낮에는 길거리에서 배회하고.
스리랑카의 차가 약 90%가 일본차로 '도요다'가 제일 많았다. 그러나 어느 관광지의 병원 원장은 스텔라를 소유하고 있어서 기쁜 마음으로 사진을 한 컷 눌렀다.
엑셀, 르망 및 대우의 굴삭기, 그리고 삼성이란 대형 간판을 처음 보았을 때는 가슴이 뜨거웠다. 마치 스리랑카에서 애국가를 들었다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반가웠던 사실은 한국의 갑을방직이 스리랑카에 일찍부터 진출해서 성공한 기업으로 현지 사람들이 갑을방직에 다니면 어깨에 힘을 줄 만큼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처음 스리랑카에 진출 했을 때는 그들의 시도 때도 없는 휴일( ? )에 곤욕을 치룬 모양이다. 달력에 보면 *표 하나는 싱할리어족 휴일 **은 타밀족 휴일 ***은 공통휴일 같은 식으로 종족이 다른 관계로 휴일이 많은 나라였고 한 예로 현지 은행원은 오전 10시쯤 문을 열어 12시까지 일을 하고 오후2시까지 점심 및 오침, 3시 반쯤 되면 문을 닫고 입금은 할 수 있으나 출금은 되지 않고 오후 네 시면 올 스톱이다.
그들의 복장은 흰색이 예복, 외출복의 색상이고 남자의 정장은 흰색 남방(드레스 셔츠)에 아래는 치마 여자는 사리(천을 몸에 둘둘 말아서 어깨에 걸쳐 놓은)와 위아래가 구분된 일종의 투피스(허리와 배꼽은 드러내는 옷)로 구분된다.
그들의 피부가 검고 기후로 인해서 다소 게으르고 후진국이라 해서 얕볼 민족은 결코 아니었다. 지식층의 학문은 넓고 깊어서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영문학과 주임교수는 스리랑카인이라는 점 하나만 보면 알 수가 있고 저명한 석학들의 층이 두터워 그들이 스리랑카를 이끌고 가는 한 앞날은 밝고 미래는 열려 있다고 본다.
또 한 예로 큰 가뭄 이후에 국왕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은 한 방울도 바다로 그냥 보내는 자는 목을 베겠다는 칙령처럼 그들이 물을 이용하는 관계수로는 꼬불꼬불 이어지고 연결이 되어 한번 이용되었던 물을 모았다가 다시 이용하는 것이 체질화 된 점을 보고 그 나라의 미래를 내다 볼 수 있었다. 세계 최초의 수세식 화장실을 보면서 지혜롭고 현명함을 느낄 수 있었다.
고적순례시나 사찰 입장시는 입장객 모두에게 모자와 신발을 벗고 또 짧은 치마나 반바지 상태로는 압장이 되지 않았다. 우리 일행 중에 반바지 차림의 한 사람은 준비 없이 순례길에 나섰다가 현지인으로부터 제지를 당해 두 무릎에 손수건을 감고 입장한 기상천외한 즉석 의복이 탄생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찰 입장이 한 번 두 번 신발을 벗어서 다니다 보니 흙에 닫는 감촉이 부드럽고 정겨움마저 들어서 현지에서는 양말은 착용하지 않았고 신발을 신는 그 자체가 여간 번거롭지 않았다.
남방불교의 한 나라인 스리랑카에서는 사찰에서 신도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또한 사찰에는 조리기구가 없이 마치 당번처럼 신도들이 음식을 돌아가며 스님들게 대접하는데 우리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식사제공과 잠자리를 대접 받고 보니 고마움이 앞섰고, 우리가 묵은 그 사찰은 창건 이후 여자신도들이 숙박을 한 경우는 처음이라며 주지스님께서 설명하실 때 초대받은 외국인 입장이지만 죄송스러웠다.
스님에 대한 공경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상상을 초월했다. 예를 들면 홍차를 만드는 차공장에서 일하던 여직공들이 스님을 본 순간 모두 앞에 와서 쓰고 있던 수건을 앞에 깔고 줄지어 절하는 모습은 가히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모습이 연상되고 성스러움 마져 감돌았다.
동서양에 관계없는 재미있는 사실은 그곳 남자들(스님 포함)이 우리 일행중에서 특히 여자들에게 친절함을 보이고 차를 같이 타고 다니는 청년에게 음식탓인지 당신들의 몸에서 냄새가 나는데 우리에게도 냄새가 나는지 맡아보라고 하니 남자들에게는 좋지 않은 냄새가 나는데 여자들에게는 향내가 난다고 하여 폭소를 자아내게 했다.
해외여행을 위한 하나의 상식은 지나치게 아껴도 문제가 있지만 경제적인 여유를 보여서도 안된다는 사실이다. 필요한 때에 쓸려고 볼펜 몇자루와 일회용 라이타를 몇 개 가져갔는데 우리를 위해 수고한 운전기사와 현지인 가정을 방문할 때 선물을 하니 반갑다고해서 아주 요긴해서 쓸수가 있었고 시골 길거리에서 사진을 찍고나니 꼬마들이 몰려와서 스쿨펜! 스쿨펜! (볼펜) 하길래 가져간 사탕을 나누어 주었더니 받은 아이는 쥐고서 또 달라고 하고 못받은 아이는 측은한 표정으로 소리를 지로고 또 한쪽에는 싸움이 벌어져 우는 녀석도 있고 수라장이 벌어졌을 때 곤혹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본의 아니게 벌어진 짧은 상황 속에 6. 25때 미군이 생각나고 뭐라고 소리지르던 아이의 큰 눈망울은 소말리아의 아이 눈과 너무나 흡사했다.
이후로 현지인과의 홍정을 할 때나 호객행위를 하는 현지인을 만나면 상황을 빨리 판단해서 예스! 와 노!를 분명히 할줄 아는 약삭( ? ) 빠른 외국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스리랑카에 대한 좋은 점을 나타내다가 보니 그들의 것은 지나치게 미화되고 우리 것은 다소 무시( ? )된 점으로 비춰지나 사실은 이번 여행으로 인하여 이곳 생활에 큰 활력소가 됨을 가장 보람으로 느끼며 한국이 살기 좋은 나라임을 새삼 느끼고 돌아왔다.
이번 기회로 한-스리랑카 불교 복지협회가 결성된 큰 성과를 기회로 많은 사람이 불우한 이웃과 소년소녀 가장돕기에 낳은 협조와 물심양면의 지원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서원을 담아 본다.
이 글을 적으면서 그 곳의 까만 친구들이 정말 보고 싶다..
그들은 영혼이 맑은 사람들이다.
지금이 다시 그곳이 그리워짐은 축복 받은 자연과 맑은 심성을 지닌 그들과 감격스런 환대와 몸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따뜻함이 바탕이 아닐까?
아유보안(건강과 축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