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광주 양림동
양림동 - 요즘에는 상설투어 테마투어 그리고 야간투어까지 다양한 주제로 프로그램들이 많이 있더라구요.
양림동을 설명할 때 한때는 수식어가 광주 서양촌 - 양림동, 한국의 예루살렘 - 양림동이라고 불렸었습니다.
선교유적 뿐만 아니라 100년이 넘은 한옥 건물도 있고, 예술인들이 많이 정착해서 역사문화예술 마을로도 불립니다.
그렇지만 가장 큰 비중은 광주서 양촌이라고 일컬어 지듯 선교 유적입니다.
서양인들 - 선교사들이 광주에서 처음 정착한 곳이 양림동이었고,
그들의 활동과 함께 근대유적으로서 건물 이야기들이 양림동에는 전해지지요.
저는 양림동 안내를 하면 사직도서관 앞 선교기념비에서 시작합니다.
선교기념비에 대해 말하기 전에 여기는 왜 사직 도서관일까?
바로 앞에 사직공원이 있어서이지요.
그럼 거긴 왜 사직공원일까?
부산에서 야구를 하면 사직구장에서 하지요. ‘사직’이 들어가 있네요.
우리가 사직이라는 말은 역사드라마에서도 간혹 듣거든요.
국가가 위기에 닥쳤을 때 신하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상께 말을 올리지요.
‘전하~ 종묘사직을 지키셔야 하옵니다’ 할 때의 그 사직입니다.
종묘사직은 종묘와 사직이 합해져 있는 건데요.
종묘는 왕실의 조상 위패를 모시는 곳이니 한양 딱 한 곳에 있었고,
사직은 곡식의 신과 땅의 신을 모시는 곳으로 국가에서 파견된 지방관이 있는 곳에는 모두 있었습니다.
광주의 사또인 목사가 근무하는 관청은 지금의 아시아 문화전당과 충장로 일대였습니다.
그리고 사직은 광주 관아의 서쪽에 설치되었습니다.
우리가 사직공원이라고 불리는 곳에 사직단이 복원되어 있고,
그래서 그 옆은 사직도서관이며, 우리가 오늘 보게 되는 선교기념비는 사직도서관 입구에 세워져 있습니다.
선교기념비 - 선교를 기념한다는 말이지요.
선교는 가장 높은 가르침인 - 종교를 선전하는 것이지요.
기념비 자체는 특별히 가공하지 않는 돌을 사용해 세웠습니다. 선교 초기에 곤경과 소박함을 나타내려듯이요.
그리고 선교기념비라는 큰 글씨 아래 설명이 되어 있어요.
1904년 12월 25일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배유지 목사가 광주에서 처음 예배드린 기념으로
1982년 12월 대한예수교 장로회 전남노회가 세웠다고요.
1904년 광주에서 처음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1982년에 이 비가 세워지고요.
기념비 속에 소개되어진 1904년은 광주에 선교사들이 처음 정착한 해이고요.
기념비가 세워진 1982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데요.
1982년에서 백년을 빼면 1882년이 됩니다.
1882년이 바로 조선과 미국이 수교를 하던 해로, 이때에 기독교의 자유가 허락되는 해입니다.
아마도 그 일백년을 기념하며 이 비석을 세운 듯 합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우리나라에 온 기독교 최초 선교사는 중국에서 활동 중이던 미국 북장로계의 의사 알렌입니다. 운때가 잘 맞았다고 해야 할까요.
그가 들어온 후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갑신정변 당시 보수우익의 대표인 민영익이 목에 자상을 입습니다. 민영익은 왕비의 사촌으로,
미국과 조약을 맺고 미국을 첫방문한 외교사절이기도 했습니다.
목에서 피가 철철 넘쳐 흘렀고 목숨이 경각에 달렸지요.
조선의 의원(한의사)들은 가망없다며 손을 들었고, 이때 외과수술에 능한 서양의사가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선교의사 알렌입니다.
40일간의 치료로 살려냅니다. 임금 고종이 놀라지요. 병원설립을 알렌에게 허락합니다.
광혜원 얼마 안있어 제중원으로 이름은 바뀌고, 기록에 의하면 하루 260명까지 환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믿음이 바탕이 되어 외국인들이 딸 수 있는 여러 잇권은 알렌 몫이 됩니다.
광산채굴권이니 철도 부설권이니 하는 것들도 중개업자가 되어 수익을 가져가구요.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바람직한 형태는 아니었지요 사실...
알렌.
이후로 감리교에서 들어오고,
북장로교의 언더우드가 1891년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서 강연을 합니다.
그 강연에 감동을 받은 미국의 젊은이들 7명이 남장로계의 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옵니다.
1892년.
이들이 전주 서문교회에 터를 잡고 조선인 5명에게 첫세례를 줍니다.
그중 13살의 소년 한 명이 김창국인데 선교사들의 가르침과 평양 숭실학교 신학교를 나와 목사가 되었고,
선교활동후 광주에 정착합니다.
그 목사님 아들이 양림동에 계셨던 다형 김현승 선생입니다.
아까 말한 광혜원은 얼마 안있어 제중원으로 이름이 고쳐지고, 이후 어비슨이라는 분이 원장이 되지요.
그 어비슨의 아들이 광주에 내려와 실업 교육을 이끕니다. 양림동에 어비슨 기념관이 있고 2층은 커피숍도 있습니다.
그리고 제중원은 미국 세브란스라는 분의 기부금으로 이전 확장하여 세브란스 병원이되고, 나중에 연희전문과 결합하여 연세대가 되는 것이지요.
제중원. 현재 광주 기독병원도 초창기의 이름은 제중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광주 기독병원의 특이할 사항은 구라사업 - 나병 퇴치 활동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꺼렸던 나병환자들을 받아들이는 광주 나병원은 이후 여수 애양원으로 옮겨졌고,
애양원을 거쳐간 대표적인 분이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불리는 손양원 목사님입니다.
본명이 손준연이었는데 이름을 애양원에서 따와 손양원으로 불렸고, 이분은 사실 광주에 계시진 않았지만
애양원의 출발이 광주라 광주에도 이 분을 기리는 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선교사들은 선교를 바탕으로 의료 그리고 교육을 합니다.
광주 수피아 여중 그리고 여고가 있지요.
오늘날 수피아여자고등학교와 중학교의 전신인 수피아여학교는 1908년 유진 벨의 개인 집이 있던 사직도서관 일대에서
몇 명의 여학생들을 가르친 것에서 시작됐다고 합니다.
처음엔 특별한 이름 없이 그저 광주여학교 정도의 막연한 이름으로만 불렸었지요.
그러던 중 미국의 한 부인이 자신의 여동생 - 이름이 수피아였다고 해요 - 그 여동생이 갑자기 죽고,
그 여동생을 애도하는 뜻에서 기부한 자금으로 1911년 수피아홀을 준공했는데 이것이 수피아여학교라는 교명의 기원이 됐다고 합니다.
수피아홀이라는 하나의 건물이 이후 수피아여고와 수피아여중이 되는 것이지요.
수피아학교 대강당 앞에는 3․1만세 운동 기념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동상에는 1919년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수피아 교사와 학생들 23명의 이름과 추모시가 새겨져 있어요.
그 중 눈에 들어오는 이름이 있습니다.
윤혈녀라는 이름.
피 혈에 여자 여입니다.
평범한 사람이름은 아니지요.
대한독립만세 운동중 일본 헌병의 칼에 태극기를 들었던 왼손이 잘립니다.
그래서 오른손으로 태극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분은 후손이 없어서 잊혀진 존재였는데 2천년대 초반에 여수 시민단체에서 사료검증과 묘소를 찾아내어 훈장까지 수여하게 된 경우입니다.
이분이 선교사들이 세운 수피아여학교 출신입니다.
지금 제가 선교기념비에서 시작해서 선교사들의 선교는 선교만 있었던게 아니고
교육과 의료가 같이 함께 였다는 것을 언급했습니다.
양림동 호남신학대학 뒤편 언덕에는 선교사 묘지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전체 23기의 무덤들이 있습니다.
선교사로서 이름을 알렸던 분들과 갖 태어나 죽은 아이들의 무덤까지 있지요.
그들이 안락한 삶을 버리고 머나먼 조선까지 왔을 땐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야말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그대로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라는 구절을 실현하는게 아니었을까요?
신학을 전공하고, 더불어 의학을 전공한 이들에게 머나먼 코리아는 지도 속에서나 겨우 찾아 질 수 있는 나라였을 겁니다.
사실
양림동은 종교적인 부분도 있어 해설할 때 조심스럽기도 한 공간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은 나혼자만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그것은
현재 뿐만 아니라 역사와도 길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희생위에서 우리의 삶은 더 윤택해 질 수 있는 것이지요.
선교사 묘지에 그들을 위해 묵념을 할 필요가 있는 이유입니다.
요즘도 선교 목적으로 해외를 많이 가지요.
저는 선교가 우리 광주 땅에 왔던 선교사들의 삶을 공부하고 배우고 갔음 하는 바람입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7.04.10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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