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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 투어 (풍경사진)
2012.06.14
파리 외곽 호텔에서 아침에 일어나 날씨 확인 - 양호
숙소에서 유럽 TV 시청 그러나 내 눈길이 간 곳은 "사랑해요 LG"
파리 도심으로 향할 때 자랑스런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 LG & 삼성
샹제리제 거리
샹제리제 거리에 개선문으로 향함
개선문
1806년 나폴레옹 1세가 휘하 군대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계획하였다. 설계는 주로 J.F.샬그랭이 맡았으나 그는 얼마 안 가서 죽고 나폴레옹 자신도 실각하였기 때문에 공사는 중단되었다가 1836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완성되었다. 높이 49 m, 너비 45 m로 대체로 고대 로마의 개선문의 양식을 따랐으나 프랑스 근세 고전주의의 걸작으로 꼽힌다. 각부(脚部)를 장식한 조각 가운데 F.뤼드의 《라 마르세예즈(進軍)》(1833~1836)은 특히 유명하다. 아치의 중앙 밑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무명용사 묘비가 세워져 있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12거리의 방사선 도로가 펼쳐진다.
개선문
프랑스 파리의 드골(에투알) 광장 중앙에 있는 석조 개선문.
* 원어명 Arc de Triomphe de l étoile
*구분 문 *소재지 프랑스 파리 드골 광장 *건립연도 1836년
* 건립자 나폴레옹 1세 * 설계자 샬그랭 * 건축양식 근세 고전주의
* 규모 높이 49 m, 너비 45 m
에데스크의 저항
1810년의 승리 - 코르토 작품
나폴레옹의 승리를 기리는 의미. 나폴레옹이 승리의 여신으로 부터 월계관을 받고 있다.
콩코드 광장을 향하는 차량들
샹제리제 거리
파랑스 현지 기사분께서 개선문 몇바퀴 순회 해 주는 센스
1792년 의용병들의 출정- 프랑수아 뤼드 작
에데스크의 평화
신 고전양식으로 조각품이 일품이다.
에데스크의 저항
에펠탑이 가장 잘보인다는 사이요 궁
사이요 궁 - 1937년 세계 만국박람회를 기념하여 건축됨
콩코드 광장의 가게들
콩코드 광장 - 콩코드광장은 1930년 까지 공개처형장으로 유명하다. 콩코드는 화합과 단결을 의미한다
콩코드 광장의 분수대 - 콩코드는 루이 15세광장, 프랑스 혁명후에는 혁명광장, 1793년 이후 콩코드 광장으로 명명하였다.
오벨리스크 - 프랑스 혁명때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 등 왕족 1300 여명이 이곳 콩코드 광장의 단두대에서 이슬로 사라졌던 곳이다.
분수대 - 화합을 상징하는 분수대라고 한다.
해군성 본부
콩코드 광장의 오벨리스크
1831년 5월 룩소르라 명명한 함선은 프랑스를 출발하여 그 해 8월15일 룩소르에 도착했다.
그리고 룩소르에 있던 오벨리스크를 이동하기 시작해서 12월9일 배의 갑판위에 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배는 정치적 상황에 의하여 즉시 떠날 수 없었다. 결국 1832년에야 배는 출항을 하였고 12월23일 4000km 이동하여 마침내 파리에 닿았다. 다신교 신앙을 믿던 이집트였지만, 오랫동안 태양신을 숭배하였는데 이 오벨리스크는 태양신을 상징하는 탑이었다. 하나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아름다운 첨탑은 기원전 1550년에 만들어졌으며 약 1600자의 상형문자가 세겨져있다.
길이는 22m, 무게는 225톤
마침내 파리의 콩코드 광장에 받침대가 만들어졌다. 그때가 1836년10월.. 무려 5년 5개월이 걸렸다.
예술적 건축물에 꽃으로 장식하였다
프랑스 파리의 건축물은 모두 예술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리 시내 점심먹은 곳 - 유명인들이 많이 다녀갔다.
달팽이 요리가 맛 있었던 곳이다
깜직한 스마트 자동차 - 2인용. 약 3000만원정도
루브르 박물관
세계 3대 박물관 중의 하나인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은 그 소장작품 숫자만 치더라도 약 40만점으로써 루브르의 역사는 16세기초 프랑스와 1세 때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비롯해 티치아노의 작품 12점 등의 이태리 거장들의 작품과 고대 조각 작품들을 보관하면서 시작되었다.
나폴레옹 시절에는 패전국으로부터 약탈해온 미술품들로 루브르를 메꾸어 그 당시 루브르는 세계 제1의 미술관이 되었다.
루브르 박물관(Le musée du Louvre)은 프랑스 파리의 중심가인 리볼리 가에 있는 국립 박물관이다.
소장품의 수와 질 면에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과 대영박물관와 함께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박물관이다.
지금의 건물은 루브르궁을 개조한 것으로, 파리의 세느강변에 포함하여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프랑스어로 뮈제 뒤 루브르, 그랑 루브르, 또는 단순히 루브르 라고도 불린다
루브르 박물관의 카루제 개선문
오늘도 세계 각국에서 모인 관광객은 루브르 박물관을 들린다
프랑스 파리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세느 강변에 위치한 루브르 박물관은 전 세계 미술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프랑스 문화의 중심지이자 세계 최대의 박물관 중 한 곳이다. 고대에서 19세기까지의 오리엔트 및 유럽의 모든 분야를 망라한 36만여 점이 넘는 소장품을 자랑한다.
초대형 유리 피라미드가 설치된 루브르 박물관 내부, 과거와 미래의 조화를 추구한다.
유리파라미드에서 바라 본 바깥풍경(하늘)
명품 조각품들
아테나 여신
그리스의 신화속에 나오는 전쟁과 지성(知性)의 여신이다.
마치 실제 옷을 입혀 놓은 듯 살아서 움직일 듯 한데...
처음에 민망한 조각품도 가꾸 보니 예술품으로 보이네 ㅋㅋ
아프로 디테 - 일명 밀로의 비너스
헬레니즘 예술의 극치, 비너스 상은 수학적인 질서의 황금비율로 만들어져 실제의 인간 몸매로는 절대 불가능한 팔등신의 이상적인 미를 자랑한다.
천정화는 화려함과 웅장함 그 자체이다. 경이롭기 까지 한데
니케의 날개 달린 여신상:기원이 알려진 드문 경우에 속하는 조각품으로 고대 그리스 조각들중 가장 유명한 작품중의 하나이다.
승리의 여신상이라고도 부르며 오늘날 유명한 나이키 상표도 이 조각품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바람에 날리는 옷자락, 살짝 비치는 몸매, 아름다운 날개)
에게해 북동쪽 까비르 신전에 수많이 쌓여있는 돌더미 속에서 발굴된 이작품은 전함의 뱃머리에 달려 있던 것으로 머리와 두 팔이 없으며 오른쪽 날개 일부을 석고로 다시 만듬.
1825년 촬스 10세의 대관식에서 몸에 착용되고 나폴레옹3세 시대까지 왕관에 붙어 있다가 국유국유재산 으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진열되었다. 1940년 독일군의 파리침략때 수난을 당하기도 했지만 어느 판자속에 감추어진 후 파리에 되돌아와 루브르 박물관 아프론 화랑에 진열되어오고 있으며 가끔 "백만불 짜리 다이어 몬드" 라는 이름으로 불리워 질 때도 있다.
천정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경이로움을 자아낸다
루브르 박물관 명화를 감상하는 관광객들
‘가나의 혼인 잔치(The Marriage at Cana)'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작품
가나의 혼인잔치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 중에서 가장 큰 작품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첫 번째 기적을 행한 장소 가나의 혼인 잔치를 표현한 작품으로 등장인물이 100명이 넘는다. 그는 종교적인 장면을 세속적이고 호사스러운 의식으로 바꿔 놓았다. 신약성서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사도들이 가나의 한 혼인 잔치에 초대됐다. 흥겨운 잔치가 절정에 이르자 포도주가 떨어졌다. 예수께서 하인들에게 ‘물 항아리에 모두 물을 가득 부어라’라고 말씀하셨고 물을 가득 채운 항아리는 어느새 포도주로 바뀌었다.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포도주 맛에 감탄했다. 이렇게 예수는 첫 번째 기적을 갈릴리 지방 가나에서 행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요한복음 2 : 7~12)
‘가나의 혼인 잔치(The Marriage at Cana)’ 작품을 보면 웅장한 고대 그리스 양식의 건축물에서 결혼식 하객들이 모여 먹고 마시고 있다. 사람들은 마치 거대한 극장에서 공연을 하는 듯한 모습이다. 이 작품은 평범한 결혼 잔치를 묘사한 것은 아니다. 성서적 주제를 담고 있어 작품의 중요 인물인 신랑 신부는 화면 왼쪽에 앉아 있고 진수성찬이 차려진 식탁 중앙에 후광에 싸인 예수 그리스도가 앉아 있다. 그 옆에는 마리아와 제자들이 앉아 있다. 예수님과 마리아가 이 잔치의 중심이다. 베네치아의 상류층 복장을 한 하객들과 예수그리스도와 마리아의 단순한 옷차림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화면에 터번을 쓴 사람, 동양인 등 다양한 사람과 동물, 자수가 놓인 식탁보, 도자기 등은 상업이 발달해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당시 베네치아를 나타낸다
<모나리자의 미소>
이 초상에는 처음부터 눈썹이 없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그것은 당시 넓은 이마가 미인의 전형(典型)으로 여겨져, 여성들 사이에 눈썹을 뽑아버리는 일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것을 그리기 위해 악사와 광대를 불러 부인의 심기(心氣)를 항상 즐겁고 싱그럽게 함으로써 정숙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 편안한 손 등 신기(神技)를 표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기(傳記)작가 바사리에 따르면, 이 그림은 4년이 걸리고도 미완성인 채로 끝났다고 하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원숙기인 제2피렌체시대에 해당하는 1503∼1506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보는 사람에게 신비성을 느끼게 하여 많은 풍설(風說)과 함께 ‘모나리자의 수수께끼’로서 오늘날도 적지 않은 문학적 관심거리이다. 요컨대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간에 대한 오묘한 감정과 관능의 표현인 것이다. 이 그림의 역사적 경로에는 불분명한 점이 많아 모나리자에 대한 신비성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일찍이 《모나리자》가 대낮에 루브르미술관에서 도난당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도 있었다. 그로부터 2년 후, 범인이 피렌체의 미술상 A.골리에게 팔러 나갔을 때, 골리의 기지로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다. 이 그림만큼 친근감을 주면서 많은 문제를 제시하는 작품도 드물다.
모든 수식어가 필요할까..모나리자..그 위대한 작품을 내 눈으로 마주하고 있다는게..
모작, 위작이 아닌 다빈치의 "모나리자" 그 진품을..감동스럽다. 이 오묘한 미소의 여인의 앞에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그 많은 사람들을 열심히 뚫고 가서 맨 앞에 자리를 잡고 몇 컷 했으나 거리가 멀어 근접촬영은 하지 못했다.(확대 그림은 빌려온 것) 루브르박물관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치있는 미술품은 모나리자라고 한다. 이탈리아의 화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이 프랑스의 박물관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전시되고 있다.
그랑드 오달리스크(Odalisque) - 앵글로 작
오달리스크(Odalisque)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궁정 하녀, ‘오달릭 odalik’을 프랑스식으로 읽은 말이다. 그녀들은 후궁의 시중을 들 뿐이었지만, 이슬람 세계에 대한 무한한 상상력을 펼쳤던 19세기 유럽인들의 환상 속에서 오달리스크는 오직 술탄만이 들어갈 수 있는 금단의 구역 하렘에서 제왕의 쾌락을 위해 봉사하는 아름다운 여자 노예로 변모했다.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는 파격적인 내용으로 당시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나먼 동방의 땅, 오리엔트에 대한 유럽인들의 복합적인 시선을 가장 잘 요약하고 있다.
푸른 커텐이 두리워진 방안에 부드러운 여인이 등을 보이고 누운 채, 얼굴을 반쯤 돌리고 우리를 바라본다. 짙푸른 비단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살갗에 닿으면 차갑게 사각거릴 것 같다. 그에 비하면 매끈한 크림처럼 빛나는 여인의 피부와 그녀의 다리를 간질으는 깃털부채, 침상을 덮은 벨벳과 모자 깔개는 손을 대면 따뜻한 온기를 느껴질 것 처럼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녀의 터빈을 장식한 진주와 은은한 연기가 스며나오는 향로는 오늘날 고화질 사진보다 더 선명하고 또렷하다.
<나폴레옹 1세의 황제 대관식>
쟉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1748- 1825) 길이 14m, 높이가 8m
1804년 12월 2일 파리의 노틀담 성당에서 거행된 나폴레옹의 대관식 장면을 그린 것이다. 나폴레옹의 위대한과 당시의 막강했던 그의 파워를 말해주는 듯 이 작품은 그 크기면에서, 화려함에서, 웅장함에서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교황마저 자신의 발아래 무릎 꿇게 한 나폴레옹은 황제의 관 대신 로마시대 황제를 상징하는 월계관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쓴다. 이 그림의 장면은 황후인 조세핀이 나폴레옹으로부터 황후관을 받아쓰는 장면이다. 왕관을 씌워주기 위해 로마에서 온 교황(나폴레옹의 뒤에 앉아 있는 사람)을 제치고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자기에게 왕관을 씌울 수 없다고 생각한 나폴레옹은 스스로 손으로 왕관을 쓰고 난 후 부인인 조세핀에게까지 직접 왕관을 씌우려하고 있다. 화면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로, 초상화처럼 정교히 그려져 있다. 특히 오른쪽 뒷모습의 인물들이 관객과 동일 시점으로 그려져 있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대관식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된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다비드는 그림이 완성되면 세계에서 가장 큰 그림이 될 거라 믿었다고 한다. 그림이 세상의 빛을 보기전.. 이 그림보다 더 큰 그림이 먼저 발표되고 말았다고 아무튼.. 그림의 어마어마한 크기와 규모에도 불구하고,사람 하나하나의 얼굴묘사와 질감표현.. 색감...
작가의 투철한 정신력이 없으면 불가능해 보이는 작품이었다.
나폴레옹
<매두사의 뗏목> 인육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극단의 상황에 몰린 인간의 모습 묘사했단다
명화들을 제대로 볼려면 며칠을 걸려야 할 듯
사랑의 신 키스로 소생한 프리케
키스하는 남여의 역동적인 모습으로 삼각구도의 구성을 통한 영혼의 고통을 잘 표현하였다.
베르사유궁전 정원
여의도만한 땅에 펼쳐놓은 태양왕의 절대권능
베르사유 궁전(프랑스어: Château de Versailles)
베르사유 궁의 기원은 1631년 루이 13세가 자그마한 수렵용 성을 지은데서부터 시작된다. 루이 13세의 뒤를 이은 루이 14세 태양왕은 대신이었던 포게의 보르비콩트 성 Chateau de Veux-le-Vicomte의 화려함을 질투, 그와 맞먹는 궁을 건립하기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궁전 건축은 르 보와 화가인 르 브랑에게 의뢰하고 정원은 르 노트르에게 명하여 1668년부터 착공했다.
그 후 1672년, 궁전은 현재의 자리로 이동하여 공사가 계속되었으며 1685년에 완공됐다. 그러다가 1871년 보불 전쟁에서 패한 뒤 궁전은 처참히 파괴됐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복구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정문을 지나 광대한 왕의 광장 Cour Royal 중앙에 루이 14세 기마상이 있다. 궁전은 2층으로 되어 있으며 볼거리는 주로 2층에 집중되어 있다.
바로크 건축의 대표작품으로, 호화로운 건물과 광대하고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하다
왕실 예배당 - 출입금지이다
부활승천 그림으로 천정화가 장식 되었다.
물의 정원 (녹색정원)
베르사이유 궁전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거울의 방(Palais du Versailles)'은 원래 2층 테라스가 있었던 곳으로 건축가 '프랑수아 망사르(Francois Mansart)'의 설계로 깊이 73m, 넓이 10.5m 높이 12.3m 의 아주 거대한 화랑이 1678년부터 1688년까지 건설되었고 대연회 무도회장으로 사용한 방이며 천정에 걸려있는 샹들리에와 함께 빛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해주며 왕정 시 있었던 '가면 무도회'와 중요한 회의의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마리 앙투와네트가 왕태자비때 썼던 침실
이곳 침대에서 잠을 자면 숙면할려나...
왕의 침실 - 화려함이 돋보인다.
왕실 식재류
루브르 박물관에 있던 나폴레옹1세 대관식 그림
바로크 양식의 걸작품이다
화려한 금장식이 돋보인다.
궁전을 관람하고 나서는 관광객들
베르사이유 궁전 앞 루이14세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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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런던 올림픽이 다가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길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