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장군과 이성계(사학자 함석헌 선생님의 평론)
1. 최영장군
(1) 최영장군은 고려국 명문귀족 출신 원직공의 장남으로 출생(1316년)
(2) 최영장군은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늠름하였으며, 기운이 많았고,
성품이 강작, 공정하고 청렴결백하였으며, 도량이 넓고, 충성심과 효심이
대단하고, 병법이 정통하고, 시에도 능통하였다.
(3) 최영장군은 이성계보다 연장자이며, 친원파이며, 민족주의자. 자주독립.
보스, 이상주의자. 기개와 의리가 강한 정치가. 숭불주의자. 왕실 귀족출신
(4) 장군은 조일신의 반란을 안우, 최원과 함께 토벌
(5) 장군은 원나라 말기 원나라 요구를 받아 출병하여 홍건적의 난 진압
(6) 공민왕의 명령을 받아 여진족 서쪽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탈환
(7) 장군은 홍건적의 침략저지
(8) 친원파 공민왕의 경호실장 김용 일당의 반란 소탕
(9) 최유가 덕흥군을 받들어 원나라 일만대군 침입을 격퇴
(10) 공민왕의 명을 받아 목호반란군 제압 탐라 총관부(제주도) 탈환
(11) 왜구의 참략 홍산에서 격퇴(홍산대첩)
(12) 요동정벌 주장하다 위화도 회군한 이성계에 의해 실각
(13) 장군은 이성계에 의하여 참수(1388년 우왕 14년 12월)
2. 태조 이성계
(1) 이성계는 원나라 천호장인 이자춘의 2남으로 함경도 영흥군 흑석마을
출생(1335년 고려 충혜왕 4년 10월 11일)
(2) 이성계는 콧마루가 높고 풍채가 좋았고, 어릴때부터 무예가 뛰어 났고,
형제간 또는 부하간에 우애가 두터웠고, 충성심이 강하고, 꾀가 많았음
(3) 이성계는 신진사대부와 교류로 친명파로 합리주의자. 진취자. 현실주의자.
이권과 모략에 밝은 전략가. 숭유주의자. 향리 하급관리와 학자출신과 결탁
(4) 이성계는 공민왕의 명을 받아 아버지 이자춘을 도와 동쪽 쌍성총관부 탈환
(5) 홍건족이 침략하자 의제 여진족과 연합하여 개경탈환
(6) 공민왕과 신돈의 명령을 받아 여진족과 연합하여 요동 일시 점령
(7) 고려를 침략한 왜구를 황산에서 격퇴(황산대첩)
(8) 요동정벌 명령을 거부하고 위화도에서 회군 후 최영을 숙청하고 정권장악
(9)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와 연대해 조선왕조 건국
(10) 아들 이방원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참살(1408년 5월24일)
3. 이성계의 요동정벌의 반대 이유의 하나는 4 불가론을 주장하였다.
(1) 작은 나라가 대국을 치는 것은 불가능이고
(2) 농사철에 군사를 일으키는 건 민심을 뒤숭숭하게 만드는 것이고
(3) 군사를 출정시키면 왜구들의 침입이 있을까 두려워
(4) 장마철이라 무기는 녹슬고 군사들은 병에 들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반론이 나온다. (최영장군의 뜻)
(1)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작은나라가 큰 나라를 친 예는 얼마든지 있다. 전쟁의
준비, 전략, 그리고 그때의 상황, 곧 여건의 여하에 달린 것이다. 이 때야 말로
원과 명이 싸우고 있는 중이라 가장 좋은 기회였다.
(2) 여름철이라 동병이 불가하다 하나, 요동은 겨울의 추위가 극심하여 오히려
여름철보다 더 곤란하고, 또 요동은 곡창지대라 군량의 걱정이 없었다.
(3) 다소 고려 할만 하나, 이때는 왜구의 세력이 약해졌고, 또 거국적으로 군민이
동원되어 계엄을 펴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왜구의 약간의 침입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4) 우리 군사나 적의 군사나 다 같은 조건 하에 있게 되는 것이므로 그것이 문제가
될수 없었다.
이성계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적인 개념이 있기 때문에 반대를 하였고
또한 우왕이 이성계 일파에 의하여 쫒겨난 후 어린 창왕이 최영장군의 요동정벌
출정을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성사 된것이다.
4. 만고충신 고려명장 최영장군이 명을 쳐서, 고려의 위상을 만천하에 알리고
옛 고구려의 영토를 찾고, 명의 오만함에 경종을 우릴고자 요동정벌을 결행하고자
계획한 것이 이성계에 의하여 수포로 돌아갑니다. 우리 민족의 기상을 드높이려고
노력했던 위대한 인물에 반하여
이성계는 우리민족의 날개와 진취적인 기상을 꺾어버렸고, 스스로 중국(명)의
속국임을 자처하고, 국호까지 주원장에게 의뢰한 민족의 반역자이자 역적이면서
민족의 추악한 인물이라 하겠다. 자신의 업보로 인하여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자신의 아들 즉 신덕왕후의 두 아들이 신의왕후의 아들 이방원에게 참살 당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왕권(조선왕조 초대왕 태조 1392-1398)을 빼앗기고 귀양살이를
하다 세상을 떳지요.
5. 조선왕조 500년은 당파싸움만 일 삼았고, 사대주의 사상으로 중국의 속국임을
자처하였을 뿐 아니라. 이조의 후손인 이완용에 의하여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어
일본에 36년간 지배를 받다 해방이 되었으나 대국에 의하여 남북이 갈라져 현재에
이른것입니다.
6. 요즘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 및 독도 침탈에 대응 하고 남.북 통일이
하루속히 성사 되려면 청렴결백하고 백전백승한 최영 장군의 호국정신을 문.무 공직자나
우리 전국민들에게 고취시켜 애국심과 자긍심을 발휘 할 때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