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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숲의 고백
김선재
종소리가 사라진 이 저녁에는 새들의 언어를 이해할 것 같아요 지평선 위에는 보라색 석양이 긴 꼬리를 펼치고요 잎들은 말벗이 어제보다 조금 더 부풀어 부풀린 티티새의 깃털처럼 따뜻한 숲에서 돌아오는 길
눈이 검은 짐승의 마음을 쓰다듬을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유리구슬 속의 내일을 예언할 텐데
이 저녁이 운지법은 복잡하고 어려워
누군가의 지문을 닮은 문제를 버린다면
사라지는 악보를 지도로 옮길 텐데
내가 아는 사람들이 참을 수 없는 잠 속으로 걸어가요
나를 외운 문장들이 잡을 수 없는 꿈속으로 사라져요
아는 것과 외운 것 사이에서 주어를 뺀다면
세상은 참, 잠깐 동안 빛나겠죠
무한한 마음이 무한한 바람에 얼굴을 묻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도
무한한 바람이 여기에 없는 마음으로 불어오고
의도 없는 거미줄이 가꾸는 숲
있다와 잊다가 손을 잡고 걸어가는 숲
지금은 오래된 얼룩에게 용서를 구할 시간
모든 얼룩이 평등해지는 시간
얼룩을 덮은 얼룩이 서로에게 기대는 시간
저녁의 새들이 물고 온 종이에 그려진 종이 혼자 우는 시간
하루를 지나온 숲은 서늘한 입김으로 어제보다 조금 더 늙어
늙어서 기쁜 시간으로
시간의 끝으로 달려간 어느 날.
슬프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으로
이 별의 모든 사잇길이 걸어갑니다
얼룩의 탄생
김선재
지평의 먼 선 위를 아슬아슬 걸을 땐 얼룩이 돼야지 눈을 가리고 어둠의 일부가 되어 부분에서 전체로, 그 전체의 한 모서리로
목 짧은 새들의 능선을 따라 소리가 번지고 얼어붙은 물들이 한 몸을 허물 때
나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출처가 된다
그건 내가 바라던 일이 아니야 바라는 건 오직 바람, 바람이 내 말들을 허공에 풀어놓았지 둘레 없는 우리 속에 방종한 양과 말 들이 뛰어놀던 날, 내 말들은 갈기를 휘날리며 사방으로 달아나요 양들은 마음대로 구름과 한 몸으로 떠나가요 나는 아직 어떤 말로도 너를 부를 수 없는데 날아간 말들이 멀리 사라져요 말도 없이 양들이 구름 울타리를 넘어가요
숲을 주세요
내 말은 발밑을 기어가
일요일을 돌려주세요
내 잠은 솜털처럼 사소해
내리는 눈이 눈 속에서 심연을 터뜨리며 물방울이 될 때
해변을 거슬러 온 구름이 네 얼굴에 슬픈 곡선을 그릴 때
너는 아름답게 태어나 나는 아름답게 죽는다
누군가 발등에 흘리고 간 눈물 같은 얼룩이 돼야지
눈에서 눈으로 전해진 풍경이 소식이 되는 날
두 번 다시 더해지지 않을
얼룩이 될 거야
기호의 모습과 기호의 마음
김선재
여기, 누군가 있었다
직사각형의 마음 위에 마음은 움직이는 것인데
움직이는 방향으로 기울 뿐인데
환부처럼 한사코 꼼짝하지 않는 자리
한곳을 오래 바라본 사람의 눈동자처럼 캄캄하고한곳을 오래 지킨 사람들의 표정처럼 창백한 누군가 있는 안보이는 자리
상처 얘기는 더 이상 하지 말아요
우리는 항생제처럼 상처를 남발했어요
어제보다 나는 조금 더 자랐고
내일보다 나는 조금 더 작을 뿐
이 거리는 해독되지 않은 도형의 모양을 닮았다 동그란 모서리와 날 없는 각을 가진 이 도형은 기록되지 않은 문자를 통해 구전되어온 것 나는 그 모양에 가까워지기 위해 날마다 모퉁이를 돌며 모서리를 지운다 어쩌면 빗방울 모양으로, 얼룩의 모양으로 변해가겠구나 지운 것을 처음으로 간직할 수 있겠구나
햇볕이 햇볕을 밀며 지나간다
구름이 구름을 끌고 흘라간다
고집을 버리는 고집을 연습하며
습관을 버리는 습관을 위해
여기 누군가 있다
진심 위에 얹은 진심으로 모양으로
취향을 버린 기호의 모습으로
마음은 말이 아닌데
말은 장난이 아닌데
누군가 떨어뜨린 물방울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우산의 기호처럼 젖어도 젖지 않은 모습으로
한사코 내가 아닌 얼굴로
숨겨지지 않는 내 안의 바깥
폭설 전진기지
ㅡ강진에서
김선재
파도가 숲으로 불어왔다
전나무 위를 날아가던 눈송이
셀 수 없는 허공이 드러났다
헤아릴 수 없는 주름들은 수상하다
산들이 해안선을 따라 내려선다
바다가 숲을 향해 넘실거려서
더 이상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
능선의 염소 eP 눈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불을 캐던 목장갑의 찬 손들이 연장을 풀고
이름도 묻었다
마지막 퇴로조차 사라지던 밤
이마를 맞댄 얼굴들이 말 없는 밤
그러나 그것조차
한 틈을 지나가는 시간이라네
구릉 같던 입들 주목 속으로 삼켜지고
폐광에 흐르던 검은 물 얼어 반짝거리네
한 입 베어 문 고드름처럼 눈이 내리네
바람에 뜯긴 말 위에 눈이 쌓이네
새로 태어난 별들이 그러하듯 얼어붙은 내 적고
하염없이 눈, 전진하네
기쁘게 눈 오는 그믐으로
김선재
눈이 무거워,라고 중얼거렸다
모로 누운 밤
때로는 고개를 숙이는 일에 집중했다
나는 종종 처마 끝에서 무너지곤 했다
반항의 속도는 반향의 속도보다 빠르다
눈 속의 나,
내 안의 눈, 가끔
우리는 언 눈에 침을 뱉으며 맹세했다
내인은 오늘보다 덜 착하게
내일은 오늘을 기억하지 않고
바람 속으로 날아간
눈은 눈물처럼 쉽게 녹지 않았다
기다리지 않을거야 우연처럼
울지 않을 거야 우는 자가 기대하는 위로처럼
눈시울까지 이불을 끌어 올렸지만
언 입술에서 끝내 나오지 않는 말
눈이 무거워,라고 중얼거렸다
모로 누운 밤
기쁜 그믐처럼 캄캄한
눈 위에 내리는 눈
얼굴을 숨기고 우는 눈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박준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 좋기도 하였다
언덕이 언덕을 모르고 있을 때
박준
저녁 찬거리는 있냐는 물음에 조금 머뭇거렸습니다 민박집 주인은 턱으로 언덕 채마밭을 가리킵니다
나는 주인에게 알부민 양철통을 재떨이로 쓰고 계시던데 혹시 간이 안 좋으시냐 물으려다 말고 언덕을 올랐습니다 근처에 분명 고추밭이 있을 것 같은데 언덕에서 헤매입니다
어덕이 튼 살 같은 안개를 부여잡고 있을 때 반팔을 입고 나가기로 한 조금 전을 후회했다고 언덕이 언덕을 모르고 있을 때 제 몸이 한기를 그 자리에 벗어두고 떠난 그녀를 생각했다고 말하기로 합니다
변심한 애인들의 향기는 좋고 나는 산아서 나를 다 속이지 못했다라고도 말하기로 합니다 덧셈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간밤에는 달게 잤습니다, 라고 연이어 말할 때 나는 저녁의 억양과 닮아갑니다
나는 혼잣말을 할 때면
꼭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오래 비어 있던 내 손을 보고 있었는지 주인이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가파른 경사에 닿기 전에 서둘러 상추 몇 잎을 따 언덕을 내려갑니다
방으로 돌아와서는 나도 같이 텅 비어서 비어 있는 상들이 누군가를 부를 때 짓던 표정들을 따라 지어보기도 했습니다
호우주의보
박준
이틀 내내 비가 왔다
비인은 김치를 자러던 가위를 싯어
귀를 뒤덮은 내 이야기들을 자르기 시작했다
발밑으로 떨어지는 머리카락이
꼭 오래전 누군가에게 받은 용서 같았다
이발소에 처음 취직했더니
머리카락을 날리지 않고
바닥을 쓸어내는 것만 배웠다는
친구의 말도 떠올랐다
미인은 내가 졸음을
그냥 지켜만 보는 것이 불만이었다
나는 미인이 새로 그리고 있는
유화 속에 어둡고 캄캄한 것들의
태가 자라는 것 같아 불만이었다
그날 우리는 책 속의 글자를
바꿔 읽는 놀이를 하다 잠이 들었다
미인도 나도
흔들리는 마음들에게
빌려온 것이 적지 않아 보였다
야간자율학습
박준
저녁이면 친구들은 화장실에서 교복을 갈아입고 주공아파트 단지를 돌며 배달을 했다 성동여실 여자애들은 치마통을 바짝 줄여 입었지만 안장을 높이 올린 오토바이에도 골잘 올라탔다
집을 떠나면서 연화는 가난한 엄마의 짙은 머리숱과 먼저 죽은 아버지의 하관을 훔쳐 나와 역에서 역으로 떠났다
황달을 핑계로 오랫동안 학교에 가지 않았다 책상 밑에 있는 내 침통이 굴러다닐 게 분명했다 졸업은 멀기만 하고 벌어진 잇새로 함부로 뱉어낸 말들이 후미진 골목마다 모여앉아 낄낄 웃고 있었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준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가벼운 뼈
박지웅
새 하나 눈독 들인 흙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알맞게 갠 흙덩이를 바르고 지푸라기 이어붙인다
날개로 그림을 말린 뒤 새는 벌판 어디론가 날고
쉼 없이 덧칠한 그림은 도톰하게 올라 마침내 둥지가 되었다
둥지를 올린 뒤 새는 바람과 상의해 알을 낳았다
새에게서 입구와 알을 넘겨받은 벽은 금세 마음을 사로잡혔다
벽은 이참에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 일을 그만두었다
소리에 시달리다가도 그림 속에 낳은 알을 떠올리면
마음은 먹먹해지고 또 그지없이 총총해지곤 하였다
어쩌면 벽은 흙이었던 날, 흙으로 나기 그 오래전
바람 곁에 알을 낳던 가벼운 새였는지 모른다
그 옛일을 짐작하면 경계 없는 안팎도 어느새 날개였다
새가 그림을 드나들 때마다 알도 그 날갯짓을 간직했다가
그림 위로 무럭무럭 자라나는 새가 있다
물어오는 것은 어미였으나 먹이란 하늘과 들판이 마련한 일
먹이를 받아먹으면 봄볕은 손바닥으로 잔잔히
배를 문질러주었다 그러면 벽도 덩달아 편안해졌다
노근한 봄날, 벽과 새는 같은 꿈을 꾸었다
벽은 새를 밀어올리고 새는 그림 밖으로 날았다
순간의 미학
박지웅
바람 가운데 잠자리와 향나무 끝이 만났다
흔들리는 새순 그 아주 끝에
앉나 싶더니 홀연 물러나 바람을 탄다
먼저 눈 맞추고 있다 바람을 읽고 있다
그만 앉아도 될 법한데 쉬운 일을 쉽게 하지 않는다
잠자리는 맨 처음을 떠올렸을까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다
저 초록의 끝은 입술이다, 저 잠자리는 입술이다
입술이 입술 앞에 멈추어 있는 것이다
잠자리와 잠자리가 아닌 것 사이로
새순과 새순이 아닌 것 사이로
구름이 들어왔다 슬그머니 나가자
하늘이 푸르고 가느다랗게 눈을 뜬다
저 가까운 거리에 술렁이는 것은 바람의 일이 아니라
태어나 처음 벌이는 야릇한 거래
닿을 듯 말 듯 눈 맞추다
어느 결에 두 입술 맞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향나무 한 그루 뒤로 끄득 넘어간다
매미가 울면 나무는 절판된다
박지웅
붙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
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우는 것이다
숨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들키려고 우는 것이다
배짱 한번 두둑하다
아예 울음으로 동네 하나 통째 걸어 잠근다
저 생명을 능가할 것은 이 여름에 없다
도무지 없다
붙어서 읽는 것이 아니다
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읽는 것이다
칠 년 만에 받은 목숨
매미는 그 목을 걸고 읽는 것이다
누가 이보다 더 뜨겁게 읽을 수 있으랴
매미가 울면 그 나무는 절판된다
말리지 마라
불씨 하나 나무에 떨어졌다
피리
박지웅
이 땅을 떠도는 소리들, 몸 안이 소란하다
버스 떠난 길, 저리 멀어져 사이마저 끊기면 소리란 없는 것을
나는 이 세계와 너무 마주쳤나
저들과 부딪치며 손바닥처럼 호응한 내 마음
콩처럼 튀는 불안들,
내 심장은 악랄한 것에 감염되었든지
무언가 뾰족한 것에 오랫동안 상심한 모양이다
내 아홉 구멍 다 막아본들
방패 들고 길길이 날뛰는 이 마음은 또 어쩌랴
방어를 위해 나 또한 날카로운 길을 택했음을 알겠다
어두운 오후를 보내며 깊이 숨을 내쉰다
길게 내쉬니 몸 어디선가 낯선 소리가 난다
어쩌면 세상이나 내 몸이나 이렇게 푸는 것인가
내 마음 속철 위에 날아올랐다 가볍게 몸 펴는 소리들
아홉 구멍 여닫으로 나를 불어보는 하루
쏜살같이 뛰어드는 뾰족한 소리
길가에는 슬쩍 비켜서며 얼마들지 자라는 풀잎들
그대는 가슴속에 있는 방들을 다 열어보았는가
박지웅
그대 떠는 것을 알고 미친 듯이 가슴속의 방들을 열어보았네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내 안의 복도를 뛰어다녔네 어떤 문을 열면 강물이 쏟아지고 어떤 문은 낭떠러지였네 메아리마저 떨어져 불타는 산협과 안개의 방들이 있었네 하루가 지나면 또 하나 생기는 방, 자고 일어나면 다시 적응해야하는 방. 이 방 속의 길들을 그대는 아는가, 두려운 그대는 아는가, 저고 쓰러지고 거역하며 가는 사슴은 이토록 낯설고 메마른 방들의 도시임을, 사람이 가슴을 떠나 살 수 없는 그 슬픈 까닭을, 이 모든 폐허를 홀로 가로질러간 그대는, 그대 가슴속에 있는 방들을 다 열어보았는가
나비도 무겁다 / 박지웅
가구들이 트럭에 올라앉아 몸을 맞춘다
여기저기 끼어드는 불편들이 불편하다
거울은 담에 비스듬히 기대어
처음으로 제 살던 집을 보고 있다
집도 거울을 보고 있다
난생처음 보는 몰골이 뒤숭숭하다
여자는 거울 속으로 들어가서
부지런히 무언가를 안고 나온다
아이가 거울에서 지구를 들고 나온다
방에 굴러다니던 지구는 불편했다
지구를 트럭에 실을 수는 없는 일
필요한 것은 지구가 아니라 방 두칸
플라스틱 수거통으로 지구를 버린다
지구가 지구로 낙하한다
텅, 아이는 울고, 지구는 플라스틱이었다
놀란 라일락이 꽃을 놓친다
낙하한 꽃잎 몇 장은 거울 속으로 날린다
버려진 지구 위로 거짓말처럼
나비, 난다 플라스틱 바다 가볍게 날아
적도 스치나 싶더니 순식간에 담벼락 넘어와
거울에 박힌다, 나비도 무겁다
거울과 집은 여전히 마주보고 있다
그 사이에 물끄러미 입구가 서 있다
짐이 되는 짐들은 모두 버려야 한다
아이는 여전히 거울 속에서 울고 있다
여자는 거울을
거울은 아이를 안고 트럭에 오른다
트럭이 지구에서 멀어지고 있다
해가 동쪽으로 지고 있다
그늘의 가구
박지웅
산동네 버섯처럼 붙어 있는 집들
가구를 내리는 사내의 등에 그늘이 묻어 있다
그늘은 그늘에서 말려야 한다
가파른 계단 내려와 차근차근 길바닥에 나앉는 가구들
트럭에 오른 사내가 그늘진 얼굴로 돌아본다
저 웃음은 얼굴을 들추어 겨우 찾아낸 눅눅한 카드
그늘에서 사는 것들은 볕에 나가면 죽는 법
대낮에 뛰쳐나간 응달의 아내는 벽돌처럼 굳어서 돌아왔다
시월 밤이던가, 그 빈집에 가을이 들어가서는
겨울이 되도록 나오지 않았다
낮은 옥상에 새들마저 끊기고 추운 밤들이 오고
너덜거리는 나무창문 위로 달이 넘어갔다
달은 밤마다 희미한 가구를 빈방에 밀어넣었다
그러면 가구는 천천히 길어져 천장에 닿고
얇은 물체처럼 꺾여서 올라붙는 것이었다
문고리도 문짝도 없는 그늘의 가구를
자꾸 그 빈집에 올리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벙어리가 살 때 저 집은 벙어리로 살았으니
이제 누가 저 집의 말문을 열고 살아갈 것인가
그늘이 밀물 썰물로 들고 나는 달동네
나는 옥상에 올라 푹푹 꺼지는 그늘을 밟아본다
달의 목공소에는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다
어느 날 환생을 계약하다
박지웅
감자들이 눈을 떴다
한동안 낌새만 살피더니 슬그머니 줄기를 올린다
저들은 원래 강한 씨족이었다
대대로 땅에서 굴러먹은 터
웬만해서는 생의 기초가 무너지지 않는다
숨어서 꾸려가는 집안일에도 이골이 났다
고운 어둠은 새살림을 시작하기에 좋다
집구석에 방치한 상자에 한 집안이 생기는 것이다
기울어진 일가를 일으키는
저들의 방식은 대단히 정교하다
우발적인 일이 아니라 겨울을 나면서 계약한 일
감자들은 머리 맞대고 치밀하게 꾸민 것이다
누구는 상처 묵혀 진물을 내고
밑바닥에 깔린 식구는 몸을 삭혀 스스로 흙이 된다
죽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제 목숨을 전달하는 것
그렇게 다시 인연을 맺는 것이다
물렁물렁한 얼굴 위로 올라오는 저 싹수들
나는 집을 뒤지던 손을 거두고 공손히 물러난다
단정히 앉아 옷만 남기고 꺼져가는 자들의 환생
살아서 죽음에 눈뜬 자들의 안색이 밝다
깊이에의 강요 /조말선
그렇다면 나에게 깊이를 보여주시겠습니까
여기 있는 빈 술병과 반쯤 남은 술병을 예로 들어
목이 좁은 원통의 높이를 구하는 공식은 어떤가요
내 손이 가장 커지는 순간 병의 바닥에 닿지 않을 때라면
저 꽃병에 꽂힌 짧은 손목들은 깊이를 맛보고 있는 중입니다
키가 큰 당신은 나보다 깊습니다 키가 큰 당신은 바닥보다 얕습니다
술을 가장 많이 마신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신 때문에 밤이 깊어졌습니다
목을 수그린 대화는 테이블에 엎질러졌습니다
관상용으로 꽂혀 있던 주먹이 튀어나와 불확실한 얼굴을 가격한다면
분출하는 밤이라도 막아주세요
나의 질문이 다시 자정에 가 있습니다
이중에서 가장 두꺼운 책을 낸 사람은 어떻습니까
한마디도 하지 않은 저 사람 때문에 깊이를 알 수 없습니다
아직 한마디도 하지 않은 저 사람이 쾅, 테이블만 내리쳐도
깊이는 형식적으로 불안합니다
꽃밭의 기원
조말선
여기저기서 불거지고 있는 잡담 혹은 잡음에서 시작됩니다
한없이 음식을 기다리는 음식점에서 잘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는 여기와 저기에 앉아 있었어요
십 분이 지났을 때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빈자리가 불쑥 솟아올랐습니다
누군가의 잡담 혹은 잡음입니다
길가의 꽃처럼 코를 들이대고 입술을 내밀어 뽀뽀하기도 하고 급기야 꺾어들고 가다가 바닥에 내던질 태세입니다
덕분에 이십오 분이 지났으므로 여기저기서 불거지고 있는 잠담 혹은 잡음은 자리를 뜬 사람이 수습할 수 없는 곳입니다
열렬히 휘두르는 팔이 길어진 것을 보니 모두 배가 고픕니다
여러 명을 한꺼번에 껴안을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식욕이 왕성합니다
삼십 분이 지났을 때 솟아오른 빈자리를 전채요리처럼 가운데로 끌어당겼습니다
활짝 핀 꽃잎의 방향이 백방으로 벌어진 것처럼 우리를 뺀 잡담 혹은 잡음은 백방으로 펼쳐졌습니다
여기와 저기는 백방으로 진화합니다
잡담 혹은 잡음은 전화해도 잡담 혹은 잡음입니다
한없이 기다리게 하는 음식점과 늦어지는 음식에 대한 무르익은 자세입니다
갑자기 전화기를 귀에 대고 들어선 빈자리를 따라 나팔꽃 넝물이 기어들어옵니다
여기저기서 꿀 먹은 봉오리가 불거집니다 어딜 갔던 거니?
무려 사십오 분을 채워준 보답으로 여기와 저기서 다정한 질문을 던집니다 너의 나팔꽃은 꽃바퀴가 오른쪽으로 돌아가니? 왼쪽으로 돌아가니?
우리는 빈자리의 귓바퀴가 사십오 분 동안 어디로 돌아갔는지 알고 싶은데
여기저기서 벙어리가 불거지는 모습은 화기애애합니다
가로수들
조말선
한 손이 다른 손에게 구름을 건네주고 있었다 이 발이 저발에게 바람을 건네주고 있었다 그것은 늘 움직이고 있는 한 손과 다른 손, 이 발과 저 발이어서 장소가 없었다 도착이 없었다 당신은 내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당신의 옆모습이 만족스럽지 않아 반쯤 표정을 숨긴 태도가 나를 외롭게 해 한 옆모습이 한 옆모습을 돌려세우려고 가고 있는 당신은 더 외로워 보여 그러니 당신은 이봐 이봐, 당신을 돌려세우려고 가고 있었다 외로움의 제복을 입고 당신에게 당신을 건네주고 있었다 제복의 아름다움은 길게 줄을 서는 것 그것은 늘 움직이고 있는 현상이라서 봄이 왔다 한 손이 다른 손에게 봄을 건네주고 있었다 이 발이 저 발에게 봄을 건네주고 있었다 저 소실점까지!
손
조말선
손은 허공을 잡기 가장 가까운 곳에 매달려 있다 그것은 쫙 폈을 때와 꼭 오므렸을 때 허공을 느끼는 양은 같다
내 손에 고인 허공의 감각을 네 손에서 측정하기 위해
악수를 한다 내 손의 온도가 전해져온다
허공이 끈적끈적하게 손바닥에 들러붙는다
손이 몹시 부드럽군요, 라고 말하는 당신의 감각이 내가 느끼는 말이다
꽉 잡힌 허공이 우리의 맞잡은 손바닥 사이에서 땀을 흘린다
내 손과 당신 손이 느끼는 허공의 양은 같다는 결론에 도달하기로 하죠
끈적끈적하고
부드러운
우리의 바닥 때문에
작별할 때 우리는 상대방의 손을 흔들고 있다
노을
조말선
길을 가다가 너와 내가 부딪칠 때 생긴
타박상 때문에 노을이 진다
우리는 부딪치자마자 반했다
각자의 이마에 황급히 손을 얹고
붉어진 노을을 감추었다
타박상이 이토록 아름답다니!
곧 어두워졌기 때문에
우리의 시력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단 2초 만에 노을이
핑크로 옐로로 바이올렛으로 사라졌을 때
과도한 트러블이 우리는 지속시킨다
서로의 얼굴이 지평선이 되었을 때 트러블이 일었다
트러블이 이토록 아름답다니!
손가락 사이에서 두 눈이
핑크로 옐로로 바이올렛으로 지속적으로 사라진다
지속적으로 사라지며 트러블을 만들었다
사라지는 목련들
조말선
일주일도 안 된 목련이 걸레처럼 더러워졌다
내 욕실의 변기를 닮아서인지
그 하얀 뚜껑이 열리자마자
나는 그것을 올라탔던 것이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오물을 토해낸 것이다
가장 솜씨 좋은 정화조는 보이지 않아도
나는 정화된 듯 눈물을 질금거릴 수 있었다
티브이는 고장 난 변기처럼 이미 오물이 넘치고
나는 제 뒤를 청결하게 씻지 못하는 항문기에 머문 채
배설의 재미에 깊이 매료되었다
희고 청결한 한 그루 변기나무를 끌어안고
고맙다, 고맙다 나의 독을 옮긴 것이다
누군가를 만날 때는 먼저
그의 변기를 고찰해야 한다고
꿀꺽 머리털까지 집어삼킬지도 모른다고
딸에게 선행학습을 시키는 이웃집 여자가
가장 먼저 나를 의심스러워한다
내 변기는 너무 빨리 더러워진 것이다
웩웩, 감사와 찬사의 오물을 받아내느라
너무 빨리 고장 나버린 것이다
숲
조말선
자꾸만 땀이 나지만 흔적이 없다 막걸리 집 평상에 앉아서 우리는 농부처럼 낮술을 마시며 말을 쏟아낸다 한 명, 두 명, 세 명, 네 명 말이 말을 따르고 말이 말을 자르고 말이 말을 뭉개고 하하 웃음꽃도 군데군데 심어놓는다 밀집한 나무처럼 외상도 없이 말이 말에게 넘어지고 말이 말을 휘감는다 건배! 잔을 부딪치자 제멋대로 자라나던 말들이 한쪽으로 급격하게 휩쓸리기도 한다 거봐, 우리는 통하는 데가 있어 평상 위에는 취한 말들이 수북하게 쌓이고 늦여름 산자락의 콩밭이 수북해지듯이 그 옆의 야콘밭이 수북하게 될거야 한 명, 두 명, 세 명, 네 명 저만 외롭다고 칭얼댄 지가 벌써 네 시간째야 더듬이를 세운 칡넝쿨이 평상으로 기어와서 여태 들어주다니 누가 이 응큼한 귀를 주문한 거야 숲으로 간 사람이 숲이 되듯이 푸른 숲으로 간 빨간 조끼와 검정 배낭이 푸른 숲이 되듯이 거봐, 지겹도록 들어주기도 하는 거야 쏟아놓은 외로움이 쌓여 우리는 거북하게 두터워진다 그러자 외로움이 외투가 되어선 안 된다고 애터지게 또 벗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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