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여름 중국 흑룡강성의 목단강시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경박호를 구경했지요.
벌써 8년이 흘렀네요. 잘된 사진은 아니지만 그냥 한번 보아 주세요.
밀밭길나그네님 때문에 쪽팔려서 여기에서는 사진을 못 올리겠다니까니...
제가 찍은 사진도 있고, 같이 갔던 다른 분이 찍은 사진도 좀 섞여 있고...
연길시에서 목단강시로 가는 철길
기차 안에서 바라본 풍경(옥수수 밭)
다음 날 아침 목단강시에서 경박호로 가는 길
저 꽃이 무슨 약초라고 했는데 기억이 안나는군요.
경박호 부근의 용암대지
현무암 대지 위에 흙이 별로 두껍지 않습니다. 그래서 농사지을 수 있는 곳이 드물어요. 흙이 좀 있는 곳에서는 조선족들이 쌀농사도 짓습니다.
기후 때문에 생산량은 많지 않지만(위도가 꽤 높음), 여기 쌀이 품질이 좋아서 중국의 령도들이 가져다 자신다고...
鏡泊勝景
등소평이 1983년에 경박호에 남긴 글씨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멋 있어 보이는데 서예 전문가가 아니라서 얼마나 잘 쓴 글씨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경박폭포
경박호는 용암이 강을 막아서 형성된 호수입니다. 비가 좀 많이 온 후에 왔어야 폭포가 더 장관이었을텐데...
폭포 위쪽이 경박호. 경박호 물이 폭포로 떨어져 목단강으로 흘러갑니다.
폭포 위쪽에서 내려다 본 경치
폭포 원경
폭포 원경
여기서부터 유람선을 타고 찍은 호수 경치
아치형 다리 왼쪽은 육지, 오른쪽은 호수 안의 섬
여자 사람
경박호 주변의 호텔
이 호텔들은 대개 중국의 기관에서 운영하는 호텔들이라고 합니다.
우리로 치면 문화부에서 운영하는 호텔, 과천시에서 운영하는 호텔 등등이 되겠습니다.
기관에서 직접 수익사업을 하는 모양입니다. 운영이 잘 안되면 문 닫아야지요.
경박호 주변의 호텔
경박호 주변의 호텔
이 호텔이 굉장히 좋은 호텔인 모양입니다. 중국의 령도들이 묵는 곳이라고 합니다.
지나가는 다른 유람선
목단강시에서 우리와 경박호에 같이 간 착한 한족 처녀
호수 안의 섬에 있는 절
호수 안의 섬에 있는 절
조선족들이 많이 사는 폭포촌.
교회 이름이 한글로 '폭포교회'라고 되어 있네요.
폭포산장이라는 음식점
이 부근에 '개고기, 랭면'이라고 써 놓은 음식점들이 여럿 있습니다.
제가 이 폭포산장이라는 음식점에서 개고기를 먹었는지 아닌지는 기밀사항이라서 확인해 드릴 수 없습니다.
발해 왕성인 상경용천부 성벽
상경용천부 성벽 안. 저 꽃도 약초였을 겁니다.
다시 조금 이동하여 발해 고성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한 전시실에 갔습니다.
사진은 찍지 못하게 하여 없어요.
여러 유물들과 더불어 발해 왕들의 초상화와 정효공주 묘에 그려진 벽화를 모사해 놓은 그림이 걸려 있었습니다.
버스로 동경성 역으로 이동하여 기차로 연길시로 돌아왔죠.
그 전날 제가 이상으로 그리던 여인을 목단강시에서 만났어요. 2003년 당시 48세의 한족 여인.
그런데 경박호를 보던 이날 바빠서 같이 오지 못했어요.
동경성 역에서 연길로 가는 기차를 탄 뒤에서야 그 여인이 역으로 환송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목단강시에서 동경성역까지는 서울에서 천안 정도의 거리)
그 여인을 보자마자 기차는 무정하게 바로 출발하였습니다.
말 한마디 못나누었습니다. 손만 흔들었을 뿐...
/////////////////////////////////////
p.s.
그 여인과의 인연이란 것이 뭐 별 것 있겠습니까?
이미 말한 것이 거의 다입니다.
새벽 4시반에 연길에서 기차를 타고 목단강시에 오후 2시반에 도착.
기차가 유럽 철도의 쿠셰트 비스름합니다. 한쪽에 복도가 있고 칸막이가 되어 있고 칸막이 안에는 2층 간이 침대.
일행 여러명이 같은 칸에 타고 가자면 술판이나 고스톱판 벌이기 참 좋지요. 뜨거운 물은 공급되니 출출하면 컵라면 끓여 먹으면 되고.
하여간에 오후 2시반에 목단강시에 도착하여 그때 우리 일행을 맞은 사람들 중에서 그 여인을 발견했죠.
오후에 모종의 문화행사를 치뤘고, 저녁에 뒤풀이를 겸한 저녁식사가 있었습니다.
저녁식사 자리에는 흑룡강성 문화국장이 하얼빈으로부터 3시간 차타고 와서 참석하였습니다. 우리로 치면 도 문화국장쯤 되는 것인데, 흑룡강성 넓이가 한반도 몇배 될걸요? 인구도 3천만이 넘고...
그러니 끝발은 우리나라 도 문화국장보다는 더 쎌 겁니다. 흑룡강성 문화국장이 왔으니 목단강시의 간부들도 몇명 참가 했고. 우리 일행 열댓명. 흑룡강성에 거주하는 동포 칠팔명. 합계 삼십여명이 식사를 하면서 건배도 하고 높은 순서로 연설도 한마디씩 하고 그러면 동시통역 하고.
그러다가 제가 한마디할 차례가 왔어요.
여태까지 주절주절 길게 이야기한 이유는 그 자리가 술 먹고 스스럼없이 개길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음을 말하기 위함이었어요. 젊잖은 사람들 많이 모인 자리라 이겁니다. 더구나 우리 일행이 중국에 간 목적이 문화교류 하러 간 것이지 남녀교류하러 간 것이 아니었지 말입니다.
이런 판국에 제가 일어나서 저기 있는 저 여인은 내가 이상으로 그리던 여인상이라는 둥 하면서 술을 권하겠다고 한거라.
본지 몇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젊잖은 사람들 많이 모인 자리에서, 뜬금없이 외국인 하나가 여인을 지목하여 이상으로 그리던 여인상이라는 둥 하니 이게 웬 또라이뇨? 무례하다고 여길만한 해프닝이었지요.
안수해(雁隨海)
접수화(蝶隨花)
해수혈(蟹隨穴)
기러기가 바다를 찾고, 나비가 꽃을 찾고, 게가 구멍을 찾는다.
원래 제가 앉았던 자리는 그 여인과 상당히 떨어져 있던 곳이었습니다.
술을 한잔 권하러 그 여인 옆으로 자리를 옮겼죠. 그리고 자리를 파할 때까지 그 여인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앉은 상태에서 저와 그 여인만 일어선 상태에서 제가 청중들에게 말하는 장면입니다.
왼쪽에 서 있는 것이 저입니다. 허리에 여권과 지갑을 넣은 전대를 차고 있습니다.
오른쪽 여인이 바로 제가 꿈속에 그리던 여인. 먼저 말씀드린대로 2003년 당시 48세의 한족 여인.
그 여인을 바로보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들을 바로보고 이야기합니다.
- 비행기가 심양공항에 이르러 착륙하려고 선회할 때 요동의 벌판을 보았습니다. 대지가 마치 대패로 깎은 듯 빤빤하였습니다.
(중국말 통역 쏼라~ 쏼라~)
- 심양에서 연변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송화강을 보았습니다. 송화강은 마치 커다란 구렁이가 기어가듯 북으로 북으로 흘러갔습니다.
(중국말 통역 쏼라~ 쏼라~)
- 연길에서 목단강시로 오는 기차 안에서 드넓은 옥수수 밭을 보았습니다.
(중국말 통역 쏼라~ 쏼라~)
- 목단강시에서 이 여인을 보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전혀 낯설지 않았습니다. 내가 마음 속에 그리던 이상의 여인이었습니다.
(중국말 통역 쏼라~ 쏼라~)
- 이 여인을 위해 잔을 한잔 따르겠습니다.
(중국말 통역 쏼라~ 쏼라~)
자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략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을 겁니다.
앞뒤가 논리적으로 연결이 안되지요. 송화강을 봤으면 봤지 그게 이 여인에게 술 따르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냐 말입니다. 그저 딱히 할 말이 없으니까 되는대로 주워 섬기는 것이지요.
다시 사진을 보시지요.
연설하면서 취하는 저의 손 움직임. 별 것 아닌 것을 크게 과장하는 몸짓입니다.
여인은 반지를 끼었죠?
아주 중요한 여인의 바디 랭귀지. 팔짱을 끼고 있습니다.
두 다리를 나란히 하고 팔짱을 껴서 차지하는 공간을 최소화 하는 등 여성 특유의 거부의 보디랭귀지를 취하고 있다. 팔짱 끼기는 마치 자기 자신을 껴안는 것처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몸짓이지만 상대에게는 폐쇄적이고 차갑고 방어적인 자세이다. 팔을 모으고 있는 것은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 할 것이고 “당신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아” 라는 의미이다. 가슴 앞으로 팔짱 끼기는 자신을 드러낼 생각도 없고 상대방을 받아들일 생각도 없다는 뜻이다.
팔짱낀 자세는 명백히 거부하는 몸짓이지요.
그러나 서로의 술잔을 채워주기 위해 팔짱끼었던 것을 풀 수 밖에 없었지요.
- 몽땅 냅시다~(건배)
모두 잔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냥 앉기 섭섭하여 노래 한 곡조를 뽑았지요.
춘향가 중에서 갈까부다 대목
기술적 접근이라
쑥맥이 그런 경지를 알 리가 없지요.
첨한글을 다시 읽어봅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