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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걱정하는 까닭은, 국민이 향유하고 있는 모든 민주주의적인 자유를 크게 제한당하게 될 것이란 데 있다. …국민의 생활은 늘 공개될 위협 아래 놓이게 된다." 1969년 2월 7일자 조선일보 사설은 미래에 도래할 수도 있는 '통제 사회'의 위험성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 사설의 제목은 '주민등록증 제도를 악용하지 말라'였다.
1968년은 향후 대한민국 국민들의 일상 생활을 특징짓게 될 중요한 요소가 출현한 해였다. 이 해 11월 21일 처음으로 발급된 주민등록증은 오랜 세월 동안 '성인식의 전주곡'이었고, 문밖에서 상시 휴대해야 할 '외출 필수품'이었으며, 술값이 없거나 책을 빌릴 때 맡기는 '외상 담보물'이었다. 또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꺼내 보여야 하는 '불심검문의 상징'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호패(號牌)로까지 그 유래가 올라가는 신분증은 6·25전쟁 중 다급하게 만들어진 시·도민증으로 부활됐다. 1962년 5월 '주민등록법'이 공포된 뒤로 새 신분증 발급은 진전을 보지 못했으나, 1968년 1·21사태 직후 법 개정에 속도가 붙었다. 불온분자를 색출하고 주민의 동태를 파악한다는 것이 그 목표였다. 처음엔 번호가 12자리였으나 1975년 13자리가 됐고, 1999년에는 플라스틱 재질로 바뀌었다.
문제는 17세 이상 전 국민의 신상정보가 고스란히 담긴 13자리의 개인 식별번호였다. 범죄 예방과 수사에는 도움이 된 반면, 언제라도 대국민 감시시스템을 만드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었다. 서방 선진국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이 일련번호는 대통령 박정희가 장교로 근무했던 만주국에서 선보인 것이라는 설도 있다. 정보화가 진전될수록 주민등록번호를 통한 개인정보 유출의 위험성은 더 커져갔다.
주민등록증이 탄생할 무렵 '국민 통합'을 위한 박정희의 노력은 여러 곳에서 드러났다. 1968년 4월 27일 세종로에 이순신 동상을 세웠고, 10월 9일에는 공문서를 한글 전용으로 하도록 했으며, 12월 5일에는 그 뒤 수많은 학생들이 암송하게 될 '국민교육헌장'을 발표했다. 1969년 4월 28일에는 현충사 중건(重建)이 완료됐다. 그 속에는 애국심, 민족의식의 고취와 지나친 국가주의, 국민 통제라는 명암(明暗)이 모두 존재했다.
조선일보 200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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