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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uke of the Abruzzi-탐험가 아브루찌의 인생
저자: 미렐라 텐데리니 & 마이클 샌드릭 공저
출판년도: 1997년
쪽수: 188쪽
출판사: 마운티니어스 북스
카라코람의 K2봉은 1954년 7월 31일, 히말라야 8000미터 자이언트 중에서 네 번째로 초등이 이루어졌다. 이탈리아 산악회의 꼼빠뇨니와 라체델리는 45년 전인 1909년, 지금은 K2봉에서 가장 고전적인 루트가 된 아브루찌 능선을 따라 정상을 향한 길을 열었었다.
이 아브루찌 능선을 개척한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탐험가 아브루찌 공(본명: 루이지 아메데오 디 사부와 아오스타)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경이로운 등반과 탐험으로 명성을 떨쳤다.
1873년 1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출생한 그는 이탈리아 사보이 왕가(1861년~1946년)의 손자로 당시 아버지는 스페인 왕이었다. 어머니가 일찍 사망하자 아버지는 자식들을 해군 군사학교에 일찍 보냈다. 아브루찌 공은 16살의 어린 나이에 소위로 임명되었고 1년 반이 걸리는 대서양과 태평양 항해를 떠났다. 이 항해 도중 아버지가 죽었고 정식으로 아브루찌 공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서부 알프스의 암벽들을 섭렵했던 그는, 1894년 체르마트에서 우연히 40세의 알프레드 머메리를 만났다. 머메리가 1879년에 초등한 마터호른 즈무트 루트는, 그때까지도 재등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난봉이었다. 아브루찌 공은 머메리에게 가이드를 부탁하고 8월 27일, 머메리가 선등하며 재등에 성공했다.
아브루찌 공은 이 등반이 끝난 후 머메리의 추천으로 영국의 ‘알파인 클럽’에 가입하게 된다. 머메리는 낙천적이고 자기의 주장을 거침없이 표현했지만 아브루찌 공은 조직적이고 꼼꼼하고 호기심이 강했다. 그는 머메리가 자신을 왕족의 사람이 아니라 동료 클라이머로 대해 주는 데 항상 존경했고 우정을 지속했다.
그러나 다음 해 8월 머메리는 낭가파르바트 등반중 사망하고, 아브루찌 공은 친구를 위해 낭가파르바트 등반 계획을 세웠지만 인도에 전염병이 돌아 포기하고 만다. 대신 그는 당시 해외에서 다섯 번의 도전에도 등정에 실패한, 알래스카의 세인트 엘리어스(5,489m) 봉 원정 등반을 준비한다.
1897년 7월, 24세의 아브루찌 공은 알프스 가이드를 포함한 10명의 대원과 미국인 선원, 학생, 노동자로 선발된 10명의 포터, 이들이 50일 동안 버틸 수 있는 3톤의 식량과 장비를 썰매에 싣고 빙하 지대를 횡단하는 캐라반을 시작했다.
대원중에는 이탈리아 산악회의 창립자 퀸티노 셀라의 조카인 비토리오 셀라가 사진 담당으로 참가하는데, 그는 38세로 당시 세계적인 사진가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이 등반부터 셀라는 아브루찌 공의 거의 모든 등반에 참여했고, 말년까지 아브루찌 공과 깊은 우정을 나누는 유일한 사람이 된다.
세인트 엘리어스 봉은 기술적으로 어려운 등반은 아니지만 짙은 안개와 폭풍우, 폭설, 추위, 고소, 크레바스와 눈사태의 위험으로 전진이 더디었다. 이러한 어려움과 악천후로 이 봉은 50년이 지나서야 재등이 되었다. 당시에는 등반 대상지가 많지 않아 세인트 엘리어스 봉이 인기가 있었지만, 세기가 바뀌고 네팔과 티베트 지역이 서방 세계에 개방되면서 점차 대상지가 다양해져서 잊혀진다. 7월 31일 등정 후, 이탈리아로 돌아 온 그는 이탈리아 최초의 성공한 원정등반대의 대장으로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아브루찌 공은 훈련실습선에서 근무하다가, 스웨덴 사람이 기구를 타고 북극을 횡단하는 소식을 듣고 북극 등반대를 조직했다. 이미 알래스카의 혹독한 추위를 경험한 그들은, 기술적인 능력과 체력, 항해술 모두가 검증된 상태였다. 북극의 기후와 지형 조건에 적응할 수 있는 훈련과 실험을 하기 위해, 대서양의 스피츠 베르겐 군도와 시베리아도 갔다. 장기간의 고립을 견딜 수 있는 긍정적이고 협동심이 강한 20명의 대원을 선발했고, 3개월간 1,931km를 전진하기 위해 121마리의 개를 이용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1899년 8월, 북위 80도 지점의 테프리츠 베이에 도착했다. 떠다니는 빙하에 배가 부딪쳐 침몰의 위기를 넘기는데 아브루찌 공은 이때 손가락 절단 수술을 받고, 부관인 카그니가 등반 루트를 개척했다.
대원들이 장기간의 단조로운 생활과 반복되는 작업으로 무기력해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동상에 걸리는 대원이 늘어났다. 동상과 설맹, 추위에 탈진된 대원들은 1900년 4월 25일, 북위 86도 지점까지 도달하는 기록을 세우고 철수한다. 그러나 짙은 안개와 설맹으로 길을 잃고 식량과 연료가 바닥이 나고 말았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을 충실히 이끌었던 개들을 잡아 먹었고, 104일 만에 1,025km를 돌아 귀환했지만 세 명의 대원이 실종되는 비운을 겪는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항해하며 외교 순방을 하던 그는, 나일강의 근원지로 많은 탐사가 시도 되고 있었던 아프리카 자이레의 루웬조리(4,829m) 봉 등반을 준비했다. 1906년 4월, 세인트 엘리어스 봉과 북극을 함께 등반했던 셀라와 알프스 가이드가 포함된 12명의 대원, 300명의 포터와 군인은 80일간의 식량을 싣고 출발했다. 적도의 열기와 살인적인 폭풍우, 코끼리와 사자의 위협을 뚫고 이들은 루웬조리 지역의 4,500미터 급 14개의 봉을 모두 초등한다.
한편 1906년 여름, 아브루찌 공은 이탈리아 코모에 여름 휴양차 온 캐서린 엘킨스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엘킨스는 당시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까지 거론되고 있는 부유한 상원 의원의 외동딸로 아브루찌 공과 사랑을 나누었지만, 아버지의 반대와 아브루찌 공 가족의 반대로 결혼을 하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아픈 사랑을 서로 간직하게 된다.
연일 신문 기자들의 표적이 되었고 그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아브루찌 공은 사랑을 위하여 미국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가진 것이 별로 없었다. 왕족이지만 평소 재물에 관심이 없었고 상대는 버거울 정도의 거부였다. 그리고 해군 장교로서의 경력을 포기하기가 무척 고통스러웠다.
또한 미국 주재 이탈리아 대사가 이탈리아왕실에, 엘킨스의 아버지가 사업적으로 대단한 스캔들에 연루되었다는 첩보를 전했고 왕가의 은밀한 방해 공작이 뒤따랐다. 아브루찌 공과 엘킨스의 사랑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지만, 엘킨스는 그가 선물한 귀걸이와 목걸이, 팔찌를 간직한 채 1936년, 아브루찌 공이 죽은 3년 후에 50의 나이로 사망했다.
영국령으로 있는 발토로 빙하의 K2 등반 허가를 받은 아브루찌 공은, 1909년 3월 26일 인도 봄베이를 향해 출발한다. 예전의 등반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치밀한 연구와 조사를 마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5월 18일, 알프스 가이드를 포함한 12명의 대원과 260명의 포타, 5톤 분량의 식량과 장비를 이동시키며 발토로 빙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이들은 폭설과 추위를 극복하고 정상을 향한 루트 개척에 힘쓰지만, 남동릉 6200~6700미터 지점까지 도달하고 철수한다. 이때 개척한 루트가 ‘아브루찌’ 릉으로 지금은 K2 등반의 가장 고전적인 루트가 되었고, 이로부터 45년이 지난 1954년 7월, 아브루찌 능선을 통해 오른 이탈리아 팀에 의해 초등되고 만다.
그동안 비토리오 셀라는 K2 동쪽의 안부로 무거운 사진 장비를 이동시키며 촬영 작업을 진행했다. 여기서 그는 가셔브룸 지역과 브로드피크의 파노라마 사진 촬영에 최초로 성공하기도 했다.
좀 더 높은 고도에 도전하고 싶었던 아브루찌 공은 근처의 초골리사(7,654m) 봉에 도착했다. 7월 1일, 5,071미터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그는 폭풍과 심설을 뚫고 고도를 계속 높였다. 그러나 크레바스와 눈사태, 악천후로 더 이상 전진을 못하고 7,498미터 지점에서 하산하는데, 당시 인간이 도달한 최고의 높이로 기록되었다.
이때까지 인간은 6000미터 이상의 고도에서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6400미터 이상의 고도에서 9일동안 밤을 보내는데 성공했다.
1914년 6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아브루찌 공은 연합국 함대사령관으로 맹활약을 하고 뛰어난 전술과 전략으로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왕가의 심한 견제를 받자 1917년 12월, 해군 제독직에서 물러나 아프리카의 소말리랜드에서 새로운 삶을 준비한다.
1918년, 그는 생산과 분배, 소유를 공평하게 하는 농촌 공동체 설립을 추진하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 다니며 자금을 모으고 투자를 유치했다. 이 계획은 원주민에게 희망과 믿음의 새로운 삶을 열어주는 사업으로 학교와 교회, 병원과 가옥을 짓고, 수로와 발전소, 공장, 도로 등을 건설하는 것이다.
첫 남편과 이혼한 엘킨스의 거액의 자금과 장비, 정보 등의 도움을 받았다. 그녀는 1913년에 결혼하여 1921년에 이혼했는데, 그동안에 두 사람은 편지를 교환하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있었다. 1926년 3천명의 소말리아와 2백명의 이탈리아 사람, 16개의 작은 마을로 구성된 ‘듀크 아브루찌 빌리지’가 출범했다.
비토리오 셀라와의 우정도 더욱 깊어졌다. 셀라가 60세의 고령이 되어 아프리카까지의 여행이 힘들어지자, 아브루찌 공은 이탈리아에 갈 때마다 그를 방문하고 농사기술과 새로운 정보를 상의했다.
아브루찌 공의 탐험 인생은 계속되었다. 1928년 10월, 55세의 아브루찌 공은 에티오피아에서 소말리랜드로 이어지는 강의 근원을 찾기 위해 100일간 1,400km를 종단하는 웨비-쉐벨 탐험을 계획했다. 이 탐험으로 웨비-쉐벨의 발원지를 발견했고 지도가 완성되고 우주천문학, 측지술, 기상학, 수로학, 열대 지방의 질병, 그리고 인류학에 관련된 수많은 자료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이 마지막 탐험은 그에게 탐험 외의 또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그가 제2의 고향으로 삼은 소말리랜드의 농촌사업을 발전시키고 원주민에게 무한한 희망을 심어주는 일이었다. 또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탐험에 대한 꿈을 이루는 일이었다.
웨비-쉐벨 탐험을 마친 1929년 가을, 그에게서 전립선암이 발견되었다. 수년간 당뇨와 풍토병에 시달려왔지만 이번에는 치명적이었다. 그는 1933년 3월 사망할 때까지,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오가며 강연과 연구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1976년 소말리아의 정치 불안으로 약탈과 무덤을 파헤치는 도굴이 성행하게 되었다. 그러자 종손(조카의 아들)인 아메데오가 아브루찌 공의 시신을 이탈리아로 이장하려고 찾아 왔다. 그때 원주민 대표가 만류했다.
“우리의 선조들이 죽으면 그의 옆에다 묻었고, 또한 우리가 죽으면 그의 곁에 묻힐 겁니다. 아브루찌 공은 항상 우리를 보호했고 앞으로도 우리를 보호할 것입니다. 이곳은 우리들의 성지입니다.”
아메데오는 결국 이들의 뜻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의 아저씨는 탐험가였고 아프리카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여기에 묻힐려고 결정했을 때, 그는 이 나라가 전쟁이 나고 무덤이 파헤쳐질 거라는 것도 예견했다. 이곳은 그가 선택한 그의 마지막 휴식처이다”라며 이탈리아로 되돌아갔다.
첫댓글 아브루찌 공(1873-1933)은 이탈리아를 통일국가로 세운 엠마누엘 2세(Emmanuel Ⅱ)의 손자이며 이탈리아의 순양함급 군함에 자신의 이름을 붙일 정도로 유명한 해군제독이었네요... 그의 탐험을 향한 상상력의 한계는 헤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