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는 입춘을 지났건만 봄기운을 느끼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우리 사회 안팎의 여러 가지 우울한 일들이 봄소식을 늦추는 듯했다. 그러나 남녘의 바람은 달랐다. 햇살은 한결 따사로웠고 바람결을 부드러웠다. 푸른 바다의 뱃고동 치는 소리, 금방이라도 꽃망울을 틔울 것만 같은 목련 봉오리가 새 생명의 봄을 노래하는 태종대 태종사엔 봄이 이미 와 있었다.
`구구 구구' 토종닭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 맨발에 이국적인 남방의 가사를 입으신 노스님, 포근한 느낌의 그 노스님은 예감대로 도성 큰 스님이셨다. 스님을 따라 우리 나라에서 단 두 그루밖에 없다는 태종사 보리수나무에 경배를 드리는데 알 수 없는 환희심이 일었다.
보리수나무를 보니 부처님을 뵙는 듯 무척 경외스럽습니다.
"이 보리수나무 두 그루와 법당 옆 석가세존진신사리탑에 봉안한 사리는 `83년도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남방 5개국을 순방할 때 스리랑카 정부측에서 우리 정부에 기증한 것인데 여러 분의 건의로 우리 절에 모셔지게 되었지요. 본래 남방에서 자라는 것인지라 돌보기가 까다롭긴 합니다만,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스님, 40년 전부터 근본불교를 펼치는 원로 스님으로, `73년도에 스님께서 창건하신 이곳 태종사는 근본불교전법도량으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법회의식을 팔리어로 집전하는 것을 비롯해서 오후 불식 등 근본불교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절이나 내가 그렇게 유명한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부처님의 제자로서 부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그대로 따를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가다 보면 번뇌의 숲을 건널 수 있고,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삼독심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 완벽한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몸과 마음을 다스릴 수 있으니 자족하면서 이렇게 살고 있을 뿐입니다."
스님, 지금 입고 계신 남방의 승복 때문에 곤혹스러웠던 적도 있으셨을텐데요?
"한때 그런 적도 있었습니다만 요새는 뜸해졌습니다. 37년 전 가사를 입고 오신 태국의 큰스님을 보고 `옳구나, 저렇게 입으면 언제 어느 때나 가사를 수하는 율을 지킬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 옷을 입고 지내게 되었지요.
옷에 얽힌 일화라면, 어느 큰스님이 오라고 해서 찾아갔더니 큰스님을 위시해서 젊은 스님들 20여명이 죽 둘러앉아 있었는데, `옷을 한 벌 해줄테니 바꿔 입으라'는 큰스님의 말씀에, `승려의 옷인 가사를 벗고 도포를 입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라고 하자 좌중의 어느 젊은 스님이 '남방 옷 입으려면 남방 가서 사십시오`라는 소리에 대중이 모두 박장대소를 하더군요. 그래 '오늘날 한국사람들이 대부분 서양 옷인 양복을 입었는데 양복 입은 사람이 서양 가서 살면 이 땅에 남아 있을 사람 몇 안 되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옷 벗기겠다는 소리가 쑥 들어갔습니다.
스님, 스님께서는 화두선을 해오시다가 오래 전부터 남방선이라고도 불리는 위빠싸나 수행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남방선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위빠싸나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수행법입니다. 요가니 명상과 같은 수행법으로는 깊은 명상 상태는 이루었을지언정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위빠싸나라는 새로운 수행법을 창시하셨고, 바로 그 위빠싸나 수행법으로 온 우주의 이치를 깨닫고 부처님이 되신 것입니다.
저도 위빠싸나를 접하기 전에 나름대로 화두선을 열심히 한다고 하기는 했지요. 6·25사변 때 인민군으로 전쟁에 침가하면서 못 볼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전쟁 중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으면서 진정으로 살길을 찾았고, 수용소에서 나오자마자 부산 선암사 지월 스님 문하에 출가를 했습니다.
엄하시면서도 자상한 은사 스님과 여러 큰스님 회상에서 절박한 심정으로 수행을 했는데 내놓을 게 없어요. 그러나 위빠싸나 수행을 하면서 비로소 부처님 법은 수행을 통해 당장 이 자리에서 현증(現證)되는 법이라는 부처님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누구든지 마음 집중하여 여러 대상을 관찰하는 위빠싸나 수행으로 몸에서 일어나는 장애,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낱낱히 포착해서 다스릴 수 있습니다. 사실 위빠싸나 수행을 하기 전에는 마음이 어디 가는지 몸이 어디 가는지 몰랐는데 수행한 뒤로는 몸과 마음의 당처를 알게 되니 중병에 걸렸던 환자가 나은 것 같고, 잃었던 자식을 찾은 것 같은 기쁨을 누리면서 늘 환희심으로 살아가고 있지요"
위빠싸나 수행법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십시요.
"흔히들 수행에 대해서는 표현할 길이 없다고 하는데 이 법은 말로, 행동으로, 이심전심으로도 가르쳐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안 되었으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이래로 이천오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려올 수 있었겠습니까?
위빠싸나 수행의 핵심은 사념처관(四念處觀)에 있습니다. 사념처(몸과 감각, 마음, 법)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호홉에 의식을 집중하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호홉법을 관찰하고 난 다음단계로는 몸의 움직임에 대해 관찰합니다.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몸의 모든 동작에 대해 명확하게 알아차리면서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몸을 꾸준히 관찰해서 몸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으면 이제는 감각을 있는 그대로 바라봅니다. 자신의 감각에 대해 깨어 있으면 이제는 감각을 있는 그대로 바라봅니다.
자신의 감각에 대해 깨어 있으면 감각에 휩쓸리지 않게 됩니다. 그 다음 단계는 마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천리만리 뛰어 다니는 마음에 집중하여 안팎으로 마음을 관찰하다 보면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법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고집멸도를 알아차릴 수 있고 삼법인(諸行無常, 諸法無我, 一切皆苦)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부처님의 말씀을 수행을 통해 확실하게 체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몸을 관찰하면서 이 몸뚱이가 항상 변한다는 것, 피도 변하고 살도 변하고 자꾸 변한다는 제행무상의 원리를 알게 됩니다. 또한 나라고 할 만한 것이 본래 없음(無我)을 깨우치게 되니 무엇에 애착할 개 있겠습니까. 수행하다 보면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번뇌를 다스릴 수 있으니 저절로 해탈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지요"
남방의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시면서 수행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없으신지요?
"남방불교를 소승불교라고 하여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인데 참으로 잘못된 편견입니다. 남방에서는 부처님을 모시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주 실답고 여법합니다. 스님네들이 계행을 철저히 지키고 조금도 법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한 번은 미얀마에서 4,000명이 정진하는데 방사가 부족해서 나무 밑, 처마 밑까지 자리를 틀고 앉았는데 수천 명이 모여 있는데도 고요한 적막만 흘렀습니다. 여법한 위의를 갖춘 스님네들 곁에 있으니 저절로 수행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남방의 여러 나라들이 경제적으로는 힘든 상황이지만 정신적으로는 매우 안정되어 있는 모습이 지금도 인상에 남습니다."
늘 맨발로 사시면서 영하 5도 정도는 내복 없이 지낸다고 들었는데 감기에 걸리지 않는 것도 위빠싸나 수행의 힘인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수행을 하면 몸도 조복받고 마음도 조복받을 수 있기 때문에 자연 건강해 집니다. 하지만 감기가 전혀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기침이 나오고 콧물이 흐르는 증세가 나타날 때 그것을 잘 관찰합니다.
감기를 바르게 관하면 감기증세 또한 영원한 게 아니고 스러진다는 것을 알게 되고 계속 그에 집중하여 관찰하다 보면 어느 새 감기가 사라지고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좌선을 할 때 처음에는 다리가 아파서 오래 할 수 없습니다.
다리가 아프면 다리 아픈 것에 대해 집중합니다. 고통을 집중적으로 관하여 멸하니 바로 거기에도 고집멸도 사성제가 다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수행하며 고통을 없애버리니 늘 하고있는 것은 내 몸과 마음이 집중해서 몸과 마음, 감각, 법을 관하고 있기에 언제 어느 때나 편안합니다"
스님께선 모든 고통을 수행의 힘으로 극복하시는 듯합니다. 이 나라 민주화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장기표 씨를 보통사람은 만나기조차 꺼려할 때 적극 보호해 주셨는가 하면 제자로 받아 들이셨고, 심지어 장기표 씨 덕분(?)에 남산 안기부에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남산에서 5시간 동안 갇혀 있긴 했는데 행패를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이들이 한 번 앉으면 얼마나 견딜 수 있겠느냐고 묻길래 `소변 때문에 한 번 앉으면 15시간은 앉아 있을 수 있는데 소변보고 나면 하염없이 앉아 있을 수는 있지요'라고 했더니 꼬박 5시간을 지켜봅디다.
그리고 나선 `장기표를 왜 봐주는냐'고 하면서 어디 있는지 대라는 겁니다. 그래 `그게 다 당신들 탓이요. 당신들이 해코지를 하려 하니 숨어 있지 지금이라도 민주화하고 적대시하지 않으면 나올 것 아니요'라고 했더니 그만 가라고 하더군요.
고집쟁이 두들겨 봤댔자 말도 안하고 탈만 생기겠다 싶었는지…"
장기표 씨가 운영하는 21세기 사회발전연구회의 감사로 활동하시는 등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으시다고 알고 있습니다.
"`73년도에 유신독재반대 학생시위로 구속된 바 있는 장기표는 학생 때부터 제 개인적인 욕심은 버리고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라 좋은 일이 있으면 잘 한다고 칭찬해주고 '지옥을 살더라도 옳은 생각 가지고 살라, 목이 마르다고 똥물을 먹을 수 있느냐, 사회운동을 하더라도 말을 부드럽고 지혜롭게 하고 오로지 사회를 바르게 하는데 중점을 두라`는 조언을 해주곤 했지요.
그리고 나도 이 땅에 살고 있으니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일을 한 것은 없어요. 승려로서 모두가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부처님 말씀을 전해주고 스스로 실천하려 애쓴 것밖에는 달리 한 일은 없습니다"
스님, 요즘 사회 전반에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환경문제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산적한 갖가지 문제들을 생각하면 결코 장미빛 미래라고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 불교를 호국불교라고 하는데 호국불교라고 부르는 데에는 다 그 까닭이 있습니다. 조선조의 임진왜란을 보면 사실 난리를 불러들인 것은 우리 자신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 당시 위정자들, 즉 유생들이 당파싸움만 하느라 정치는 어지러워지고 국민은 도탄에 빠졌던 정국의 틈새를 엿보고 왜놈들이 쳐들어 왔던 것입니다.
그 난국을 타개한 것이 바로 서산대사, 사명대사를 위시한 스님들이었습니다. 조선조 스님네들은 정부에서 갖은 탄압을 받았으나 오로지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 하에 목탁 대신 창을 든 역사가 면면이 이어졌기에 우리 불교를 호국불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힘있는 사람 손들어주는 게 호국불교가 아니고 진정으로 나라를 구하고 보호하는 종교라는 말입니다. 요즘 정국을 보니 참말로 불교인들이 호국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IMF사태 등이 나라를 어지럽게 한 것은 누가 뭐라 해도 힘있는 재벌들과 그에 결탁한 정치권입니다.
또한 그들의 천민자본주의에 함께 물들어 정신이 흐릿해진 국민들에게도 책임은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정신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의식의 개혁과 아울러 물질에 물든 삶을 반성하고 참말로 진리를 구현해 가는 삶으로 개혁시켜야 합니다"
불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한 말씀 더 부탁드립니다.
"부처님께서 일찍이 이 세상이 고통의 바다라고 갈파하셨듯이 물질적인 객관세계에 마음을 뺏기면서 살아가면 한날 한시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참말로 좋은 것은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정진하는 데에 있습니다.
수행을 하면 내 느낌으로 번뇌가 사라지는 게 보이고, 고통이 사라지는 게 보입니다. 사성제와 삼법인의 진리가 체득되고 저절로 고통을 다스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수행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일상생활 자체가 수행이요, 정진이 되어야 합니다. 항상 마음이 주인공이 되어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하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예를 들면 운전할 때 마음을 집중해서 언제나 안정된 마음으로 수행하듯이 운전을 하면 절대 교통사고를 내지 않습니다. 정치인은 정치를 잘 하는 데만 마음을 집중하고 경제인은 경제인대로 자기 업무에 마음을 집중해서 살면 모든 일을 잘 풀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내가 내 몸과 마음을 다스리면서 마음이 가는 곳을 알아차리며 살아가노라면 어지러운 데 물들지도 않고 잘못된 곳에 빠져들어 허우적대지도 않고 더 이상 허욕에 상처받지도 않습니다. 기쁜 일이거나 슬픈 일이거나 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항상 평온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으며 궁극에는 성불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금생에 이 마음을 못 닦으면 어느 생에 닦겠습니까? 이재부터라도 부처님 진리의 말씀대로 올곧게 수행하여 마음을 다스리고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여 이 나라에 희망의 빛을 선사하는 불자가 되시길 빕니다"
----- 도성 스님은 1926년 평안남도에서 출생하였으며, 1952년 부산 선암사에서 지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불국사, 동화사, 불영사, 상원사, 정암사, 김용사 등지에서 참선수행하였으며, 미얀마 등 남방의 여러 나라에서 위빠싸나 수행을 하였다. 해인사, 대둔사 주지를 역임하였으며, 현재 근본불교의 전법도량인 부산 태종대 공원 안의 태종사에 주석하시면서 불자들에게 부처님의 법음을 들려주고 재가자와 함께 수행하는 풍토를 일구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