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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임존성 任存城 ]
대흥 임존성 = 봉수산성 鳳首山城 = 대흥산성 大興山城
위치 :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산8 예당지(예당저수지), 사적지 지정 : 국가지정문화재 사적90호
임존성은 대흥면 봉수산(鳳首山 484m)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성 주위가 약 2.4㎞의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산의 표고는 483m이다. 성벽의 높이는 약 350㎝이며 너비는 약 350㎝ 인데 남쪽의 성벽외면은 석축으로 되었으나 내면은 토석 혼축으로 내탁을 하였다. 남쪽 성벽에 수구를 설치하고 있으며 이곳 수구로 성내 물을 유도하기 위하여 깊이 90㎝, 폭 60㎝의 도랑이나 있다. 그 위에는 넓적한 판석을 덮고 있으며 수구의 크기는 폭 70㎝, 높이가 30㎝이다. 이 성의 특징은 네 모서리에 축조를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다른 곳보다 약 2m정도 더 두텁게 내탁하였으며 성의 높이도 약간 더 높게 축조되었다.
성의 주문은 남문지로 추정되는데 문지 근처는 두터우며 좌우에 성문의 일부로 추정되는 석축구조가 보이고 북문지로 추정되는 곳도 남아 있다. 성내는 평평하게 경사를 이루고 또한 남벽 내에서는 백제시대 토기편과 기와편이 간혹 눈에 띄고 있으며 계단식으로 된 건물지가 보인다.
이 성은 서천의 건지산성과 함께 백제 부흥군의 거점이었다는 사실이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본래 이 산성은 주로 북쪽에 대한 방어를 목적으로 하여 구축된 산성으로 보이며 원래는 백제시대에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축조한 것으로 또한 대흥산성이라고도 한다. 삼국시대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로 알려져있다.
봉수산 자락에 위치한 대련사 극락전(금당-656년,백제 의자왕16), 대련사 삼층석탑(고려시대)
백제부흥운동의 시작과 끝의 명암이 드리워진 임존성 산성터.
봉수산 임존성 대련사의 역사를 대변해주는 수령700년의 느티나무 - 사찰경내 풍치를 돋운다.
상록수 - 김민기
< 출처 : CAFE.NAVER.COM/sunwoojo1 >
660년7월(의자왕20) 백제 사비성(부여 부소산성) 함락후 포로로 잡힌 흑치상지가 탈출에 성공한다. 그리고, 고향 예산의 임존성에서 항전의 횃불을 올리자 열흘만에 백제 잔여세력군 3만명이 모여들었다. 백제는 왕권과 도성이 함락되었을 뿐,아직 멸망하지 않았던 것이다. 험준한 홑산인 임존성은 백제부흥운동의 시작이자 끝의 무대였다. 또한 흑치상지에 의해 660년에 시작된 부흥운동은 663년 말경, 나당(羅唐)연합군측의 당군장수 유인궤에게 투항하여 백제를 배신한 달솔(達率)겸 풍달군장(風達郡將)인 흑치상지(黑齒常之)가 역으로 협공하여 난공불락의 요새 임존성은 어이없게 무너져 백제부흥운동은 4년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때의 전공으로 당나라에 건너간 흑치상지는 토번(티벳)과 돌궐(몽고) 토벌전쟁에 참가, 대총관이 되었다가 주흥(周興)의 모함으로 응양장군 조회절(趙懷節) 역모사건에 휘말려 당(唐)나라에서 모진 고문후 60세로 옥사(자살추정)했다.
▲ 임존성 동쪽 망루 풍경. 임존성은 아산만 쪽에서 해로를 이용해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적을 살피는 데 아주 적합한 지점에 있다. 호수는 예당호(예당지) - 1929년4월 착공, 1963년 완공. 댐높이 12m , 댐길이 247m , 관개면적 3만7400평방Km (1천1백3십3만평) , 수리면적 9.9평방Km(약3백28만평)
예당지(예당호) ~ 국민관광단지 팔각정
예당호(예당지) 전경
예당호(예당지) 전경
사계 -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백제부흥운동의 주요거점지역 - 임존성(대흥=예산), 주류성(한산=서천)
8월 2일 사비성에서는 나당군의 전승축하연이 열렸다. 신라왕과 소정방 및 여러 장수들이 당상에 앉고 의자왕과 그의 아들 융은 당하에 앉아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여러 신하들이 목이 메어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한다.서부 세력을 거느리고 의자왕과 함께 당에 항복했던 흑치상지는 이 전승축하연 이후 사비성을 탈출하여 10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임존성으로 들어가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의 달솔로서 풍달군(위치 미상)의 장수를 겸하고 있었다. 현재 중국 남경대 박물관에 보관된 그의 묘비명에 "그 선조는 부여씨에서 나와 흑치에 봉해졌으므로 자손이 이를 따라 씨(氏)로 삼았다."라고 적혀 있다. 즉 그의 선조는 백제의 식민지였던 흑치국의 총독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남부 월(越)에서 치아를 검게 물들이는 습속이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흑치국의 위치를 중국의 남부로 추정하기도 하고 오늘의 필리핀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는 처음에 항복의 대열에 섰다가 왜 이탈하여 부흥운동의 기치를 들게 되었는가. 다음과 같은 추리가 가능하다.웅진성으로 도피해 있던 의자왕이 항복한 것은 7월 13일 사비성이 함락된 후 5일이 지난 7월 18일이었다. 그것도 웅진방의 영군을 데리고 웅진으로부터 와서 항복한 것이었다. 이에 흑치상지를 비롯한 여러 지방 성주들의 동참이 뒤따랐다. 이는 백제와 당나라 사이에 어떤 타협이 성사되었음을 추측하기에 충분하다.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피하기 전에 백제는 상좌평을 시켜 많은 음식을 보냈는데 소정방은 이를 거절하였으며, 왕의 서자가 6명의 좌평과 더불어 나와 죄를 빌었으나 정방이 이를 물리쳤다는 기록도 있다. 흑치상지가 부흥운동에 나서게 된 동기가 "소정방이 늙은 왕을 가두고 군사를 놓아 크게 노략질 하였다.<삼국사기 열전 흑치상지전>"는 데 있었음을 고려하면 당군이 의자왕을 포로 취급을 하고 약탈을 자행한 것은 애초의 약속과는 달랐음을 말해준다.
임존성(任存城)은 지금의 충남 예산군 대흥면과 광시면, 홍성군 금마면의 분기점인 해발 484m인 봉수산과 그 동쪽 봉우리들을 에워싼 석축산성으로 험절함이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성 바깥벽은 돌로 쌓고 안은 흙으로 채운 내탁법(內托法)으로 축조되었다. 성안에는 계단식의 단축을 만들어 최대한 많은 주민을 수용할 수 있게 하였으며 우물이 3곳이 있었다. 둘레는 2.8Km로 백제의 성으로 최대급 규모였다. 이곳에서 공주와 부여까지의 거리가 90리로 백제 도성의 안전과 직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흑치상지가 사람들을 불러모아 임존성에 들어가 의거하여 굳게 지키니 열흘이 못되어 들어오는 자가 3만명이 넘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한다. 이곳에서 그는 복신과 함께 나당군을 몰아내기 위한 항전의 횃불을 올렸다. 흑치상지가 임존성에 거점을 확보하자 백제의 의병들은 남잠성과 정현성을 근거지로 하여 나당군에 대항하였다. 한편 좌평 정무(正武)는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두시원악(청양군 정산면)에 진을 치고 나당군을 공격하였다.
이처럼 도처에서 의병들이 일어나자 당은 백제의 멸망을 기정사실화하려는 듯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1층 탑신부에 4면을 돌아가며 서둘러 글자를 새겼다.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란 제목의 이 글로 인해 부여에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당이 백제를 멸하고 나서 세운 전승기념탑으로 오해되어 해방 후 허물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였다.8월 26일 신라군은 임존성을 총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소책만 깨뜨리고 물러섰다. 이후 난공불락의 요새 임존성은 부흥운동의 중심지로 최후까지 남아 있었다. 출처 : 네이버 블로거 boolingoo@naver.com 님 집필
< 백제부흥운동과 임존성 >
<일본서기>에 의하면, "금년 7월 10일 대당(大唐)의 소정방이 수군을 거느리고, 미자진(尾資津)에 집결하였다. 신라왕 춘추지(春秋智)는 병마를 거느리고, 노수리산(怒受利山)에 모였다. 백제를 협격하여 서로 싸운지 3일만에 우리 왕성(王城)이 함락되었다. 같은 달 13일 비로소 왕성이 격파되었다. 노수리산은 백제의 동쪽 국경이었다" 라고 하여 긴박한 상황의 흐름을 요령있게 적어 놓았다. 여기서 노수리산은 두 말할 나위없이 황산(黃山)을 가리킨다.
의자왕은 태자 효(孝)와 함께 북방의 웅진성으로 몸을 빼었다. 의자왕은 과거의 왕도였던 웅진성에서 전세의 반전을 기약하고자 했던 것이다. 의자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사비성을 굳게 지켰으나, 결국 항복하였다. 사비성이 함락된 날은 7월 13일이었다. 7월18일에는 웅진성으로 피신하였던 의자왕과 태자 효를 비롯하여, 여러 성들도 모두 항복하고 말았다. 소정방은 2개월이 채 안된 9월 3일에 회군하면서 의자왕을 비롯하여 왕족과 여타 귀족 그리고 주민들을 당의 수도인 장안으로 압송하였다.
백제를 멸망시킨 당은 백제 옛 땅을 통치할 구상을 세웠다. 당시, 백제는 5방 37군 200성의 행정조직에 76만 호의 인구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 숫치는 고구려 말기의 5부 176성에 인구가 69만 7천 호였던 것보다 많았다. 당은 백제 지역을 나누어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蓮) 덕안(德安)등 5개의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고, 그 밑에 주 현(州縣)을 예속시킨 후, 당은 백제 귀족들 가운데서 도독 자사 현령을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의 격렬한 저항을 고려해 볼 때, 과연 5도독부제가 기능을 발휘했는지는 지극히 의문시된다.
의자왕이 항복함에 따라, 지방의 장관들도 일제히 손을 들었다. 의자왕의 항복은 곧바로 나라의 멸망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당나라 군대의 철수를 전제로 한 조건부 항복이었다. 그랬기에 신라와 당나라 군대에 힘차게 대적하던 백제 군대는 일제히 항쟁을 멈추었던 것이다. 그런데 약속과는 달리 당나라 군대는 늙은 의자왕을 가두고 군사를 놓아 닥치는대로 노략질을 자행하였다. 게다가 신라와 당의 전승 축하연에서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잔을 치게 했다. 이 장면을 보고는 백제의 옛 신하들은 목이 메어 울지 않은 이가 없었다. 결국 이러한 것들이 울분의 공감대를 형성하여 조국을 되찾는 부흥운동의 대열에 힘차게 나서게 한 요인이 되었다. 항복했을 때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은 마상의 김법민(후일의 문무왕)에게 침세례까지 받았다. 패전의 참혹한 현실은 백제 주민들에게 울분의 공감대를 조성시켜 주었다. 출처 : 네이버 블로거 giant2002@naver.com 님 집필
국내 최대규모 저수지로 알려진 예당호(예당지)의 낚시포인트(좌대) 약도 - 예당 유가공방 出
이 가운데 흑치상지는 당나라 군대의 노략질을 피해 흩어져 도망한 주민들을 불러 모아 임존성(충남 예산)에 들어갔다. 그런 지 불과 열흘이 못되어 임존성에 들어 온 주민 숫자가 3만명이나 되었다. 흑치상지의 부흥운동은 백제 주민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
임존성의 부흥운동의 시발지였다.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이 함락된 상황과 초기 부흥 운동의 전황을 왜 조정에 최초로 알린 승려 각종(覺從)의 다음과 같은 보고문에 잘 집약되어 있다.
금년 7월 신라가 힘을 믿고 세력을 만들어 이웃과 친하지 않고 당인(唐人)을 끌어들여 백제를 전복(顚覆)시켰습니다. 임금과 신하들은 모두 잡혔으며, 노략질로 인해 사람이고 짐승이고 간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혹본(或本)에는 금년 7월 10일, 대당(大唐) 소정방이 선사(船師)를 이끌고 미자진에서 진(陣)을 쳤다. 신라왕 춘추지(春秋智)는 병마(兵馬)를 이끌고 노수리산(怒受利山)에 진을 쳤다. 백제를 협격하여 서로 싸운지 3일만에 우리 왕성이 함락되었다. 같은 달 13일, 비로소 왕성이 격하되었다 노수리산은 백제의 동쪽 경계였다]. 이에, 서부 은솔 귀실복신(鬼室福信)은 연혁히 발분하여 임사기산(任射岐山)에 웅거하였습니다[혹본에 북 임서리산(任敍利山)이라고 한다]. 달솔 여자진(餘自進)은 중부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에 웅거하였습니다[혹본에서는 도도기류산(都都岐留山)이라고 한다]. 각각 1곳에 영(營)을 두고는 산졸(散卒)들을 당겨 모았습니다. 병기는 전번 싸움에서 모두 소모한 까닭에 몽둥이로 싸워 신라군을 격파하였습니다. 백제는 그 병기를 빼앗았습니다. 이제는 백제 병기가 번득이고 날카로와져 당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 복신 등이 드디어 같은 나라 사람들을 모아서 함께 왕성을 지켰습니다. 국인이 존경하여 '좌평 복신과 좌평 자진(自進)'이라 하였습니다. 오직, 복신이 신무(神武)한 계략을 내어 이미 망한 나라를 부흥시켰습니다(<일본서기>권 26, 제명 6년 9월 조).
위의 기사에는 부흥운동의 영웅 복신의 용맹무쌍한 모습이 유감없이 적혀 있다. 그가 부흥운동의 봉화를 처음 올린 곳이 임사기산으로 적혀 있는 임존성이었다. 또, 이곳은 흑치상지가 무려 3만명이나 되는 주민을 지휘했던 곳이다. 복신과 흑치상지가 부흥운동이라는 대장정의 기치를 하필 임존성에서 올린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예당호(예당지, 예당저수지) 호반에 찾아온 겨울철새 - 가창오리(청둥오리)떼
임존성은 서부 출신으로 군장(郡將)이었던 흑치상지의 근거지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일단 성의 규모가 백제성으로 최대급에 속한다. 임존성은 지형적으로 볼 때 사방으로의 조망이 매우 좋거니와 이곳에서 사비성과 웅진성까지의 거리가 90리로서 동일하다. 그러므로 임존성이 함락된다면 공주와 부여가 똑같이 위협을 받게 되므로 백제 도성의 안전과 직결되는 요충지였다. 이러한 임존성의 규모와 전략적 가치는 당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공주나 부여를 직접 겨냥하여 위협할 수 있었다. 때문에 임존성은 부흥운동의 시발지이자 중요 거점으로서 역할을 한 것으로 보겠다.
임존성에서는 조국을 되찾기 위해 3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몰려 왔었다. 그들은 정규군이 아니요, 의분(義憤)으로 일어난 민초들이었기 때문에, 의병 운동의 시발지로 규정할 수 있다. 백제 부흥운동은 8월부터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부흥군 최초의 조직적인 전투는 남잠(南岑) 정현성(貞峴城) 등을 근거지로 하여 신라와 당나라 군대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또 좌평 정무(正武)가 이끄는 병력이 두시원악(豆尸原嶽:錦山 혹은 靑陽)에 주둔하면서, 신라 군대와 당나라 군대를 깨뜨리고 부흥운동에 합세하였다.
<유인원기공비문>과 <일본서기>에 의하면, 복신은 임존성을 근거지로 하였으므로, 흑치상지와 함께 이곳에서 부흥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밖의 지역에서도 많은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부여자진은 중부 구마노리성 즉, 웅진성을 근거지로 하여 궐기하였다. 승려인 도침(道琛)은 주류성(周留城)에서 일어났다. 이같은 부흥운동은 초기에는 구심도 없이 산발적으로 일어 났으나, 가장 정비되고 많은 병력을 장악하고 있던 복신과 도침을 중심으로 점차 통합되어 갔다.
부흥군의 최우선 공격 목표는 당나라 군대의 축출에 두었다. 부흥군은 당군이 주둔하고 있는 사비성에 대한 공격을 집요하게 재차 준비하였다. 661년 2월 복신과 도침이 지휘하는 부흥군은 사비성을 공격했다. 함락의 기로에 선 사비성을 구원하기 위해 당나라 본국에서는 웅진도독으로 부임한 직후인 660년 9월에 충청북도 보은의 삼년산성(三年山城)에서 급사(急死)한 왕무도(王文度)를 대신하여 유인궤(劉仁軌)를 검교대방주자사(檢校帶方州刺史)에 임명해서 파견하였다. 유인궤는 선박을 이용하여 서해를 가로질러 금강으로 들어오려고 했지만, 복신은 웅진강으로 표기된 금강 하구에 2개의 목책을 세우고 막았다. (중략)
효제비 , 이씨형제 의좋은 형제상, 대흥면 면사무소, 대흥동헌 모두 여기 모여있다.
사진출처 : 네이버블로그 '안세용의 예산사랑' ysplan
첫댓글 대흥 임존성은 백제 부흥군의 본거지였습니다.
서산의 대야성과 함께^^^^^^.
잃어버린 왕국의 꿈이 묻힌 곳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