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효현의
산천보세난
N선생이 책상 위에 놓고 기르다가 퇴임하면서 두고 간 난(蘭)이 하나 있다.
이 난은 겨우 한 촉만 살아서 가녀린 숨을 쉬는 데다 이파리마저 비틀리고 끝이 까맣게 타서 볼품이라고는 전혀 없는 초라한 난이다. 그래서 버림을 받았는지도 모를 외로운 난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누가 물이라도 주어야만 실오라기 같이 붙어있는 목숨이나마 연명이 될 것인데 물은커녕 눈길 한 번 던져 주는 이가 없다.
가엽기도 해서 내가 보시(布施)하는 마음으로 물 한 컵을 주면서 살펴보니 이파리가 크고 넓은 것으로 보아 산천보세(山川報歲)라고 하는 난이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이 난은 이 지경으로 사그라지기 전에는 고아한 자태와 그윽한 향기로 군자의 풍모를 과시했을 고품격의 난이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듯 초라한 몰골이 되어 푸대접을 받는지 모를 일이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라고는 하더라만 전날의 고고하고 화려했던 영화는 어디 가고 이제는 이렇듯 초라하고 궁색하게 되었는지 몰락한 운명(運命)이 눈물겹기도 하다.
마침 K선생이 기르는 난초 중에 이와 똑같은 종류가 있는데 그 게 매우 번성하기에 내 손으로 분갈이를 해주고는 두 촉을 얻었다. 이 한 촉의 난과 함께 심어 쓸쓸함을 덜어주고 초라함을 감싸줄까 해서였다.
그리하여 분을 쏟아놓고 보니 아야, 아야, 뿌리가 거의 다 썩어 있었다. 어쩐지 병색이 뚜렷하더니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던 거다.
안타까운 마음은 그지없다만 어찌할까. 나에게는 편작(扁鵲)과 같은 신술(神術)도 없고 화타(華陀)와 같은 비술(秘術)도 없으니 어이 살릴까.
자고로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고 했으니 이 난이 죽고 사는 것도 하늘에나 맡기고 썩은 뿌리나 그저 떨어내고 K선생에게서 얻은 싱싱한 두 촉과 함께 심어나 볼 수밖에.
그렇게 심어놓고 흥부가 박넝쿨을 돌보듯 정성으로 보살펴 줬더니 달포쯤 되었을 때는 신기하게도 새순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더니만 세 촉 다 제 각기 한 촉씩을 난석(蘭石) 위로 밀어 올리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안타까울 사. 똑같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해야할 새촉들의 성장에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더해지더니만 지금은 천양지차(天壤之差)가 되었다. ― 뿌리가 싱싱했던 두 촉에서 나온 새순들은 모체(母體)의 어깨 위로 발돋움을 하는데 뿌리가 썩었던 쪽에서 나온 새순은 아직도 모체의 무릎 아래쯤에서나 비슬거리고 있는 거다.
참으로 안쓰러운 모습이다. 자라고 싶은 욕망은 똑 같을 것인데 그렇게 되지 못하는 아픔이 오죽할까 싶다.
사람들은 잘되면 제가 잘나서 그렇다 하고 못되면 조상의 탓이라고 하던데, 혹여, 말 못하는 이 난도 조상의 탓이나 하지 않을런지 모를 일이다.
어떻든지, 잘 자란 저 놈은 머지않아 꽃을 피우며 난(蘭)다운 풍모를 뽐낼 것이지만 자라지 못하는 이 놈은 제 운명이나 한스러워 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애처롭기가 그지없다.
열자(列子)가 이르기를 “운수는 각자의 타고난 해와 달과 일과 시에 의해 정해져 있으니 따지고 보면 운명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다(運數 年月日時該載定 算來由命不由人)”고 하더니만 그게 참, 묘한 일이고 슬픈 일이다. 흥(興)했다가도 쇠(衰)하기도 하고 쇠했다가도 다시 흥하기도 하는 그 알 수 없는 운수의 유전(流轉)이 묘한 것이고 그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유전을 노력으로는 어찌 해볼 수 없는 무력함이 슬픈 것이다.
어허야, 이 뿌리 없는 난초가 나를 부질없는 감상에 젖게 하려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색(色)이 곧 공(空)이고 공(空)이 곧 색(色)일진대 슬픔이 곧 기쁨이고 기쁨이 곧 슬픔인데 무슨 감상에 젖을 건가.
(한국수필 1997년 3,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