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04/30 (03:47) from 211.48.252.3' of 211.48.252.3' Article Number : 17
^.^ Access : 50 , Lines : 434
체퀘바라(yes24에서 퍼왔어염)
체 게바라 평전
장 코르미에 저/김미선 역 | 실천문학사
2000년 03월
정가 - \ 12,000 -> 할인율 (20 %)
할인판매가 - \ 9,600
667 면
ISBN 8939203828
책추천 메일 / 독자리뷰 쓰기
◆ 분류 : 문학 > 전기/자서전 > 사회과학분야 >
◆ 판매지수 : 9477 (2002)
◆ 독자리뷰 4개 책내용 책상태
■ 소개
아르헨티나 의사 출신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독재에 대항하기 위해 전세계 전장을 뛰어다닌 체 게바라는 1960년대 저항운동의 상징이다. 검은 베레모에 아무렇게나 기른 긴 머리칼, 덥수룩한 턱수염, 그리고 열정적인 눈빛, 굳게 다문 입술... 체 게바라에 관한 전문가로 알려진 장 코르미에는 체의 아버지를 비롯해 체가 살아 생전 관계했던 모든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생생한 그의 모습을 전하고 있으며, 그가 남겨놓은 편지글이나 잡문들 거의 대부분을 실어 체 게바라 전기의 최종본을 완성했다.
■ 저자 및 역자 소개
저자 : 장 코르미에
장 코르미에는 일간 <파리지앵>의 전문기자로서 체 게바라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한 전문가로인정을 받아왔다. 1981년부터 그는 게바라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집대성한 이 책은 프랑스에서 출간되자마자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켰고, 세계 각국에서 번역 출간되어 큰반향을 얻었다.
■ 책 속으로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엔 불가능한 꿈을 하나씩 갖자.'
머리말 중에서
■ 기타
Chapter 1 Service
서문
1년여 전부터 뒤쫓던 볼리비아군에게 생포된 체 게바라는 1967년 10월 9일, 볼리비아의 차코라는 마을에 있는 라이게라(La Higuera)라는 조그만 학교에서 서른아홉의 나이로 사살되었다.
덥수룩한 수염에 비쩍 마른 그의 모습은 그 옛날 십자가에서 생을 마감한 또 다른 '체(ch)' 즉 예수 그리스도와 끔찍하리만치 닮은 모습이었다. 그 둘 다 평등을 위해 투쟁한 박애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체 게바라가 선택했던 길은 팔레스티나의 유태인 예수가 걸었던 평화로운 노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낸 뒤 1956년 말, 멕시코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저는 예수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 저는 힘이 닿는 한 모든 무기를 동원하여 싸울 겁니다. 저들이 나를 십자가에 매달아두게도 하지 않을 것이며 어머니가 바라시는 방식대로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때 체의 나이는 스물여덟이었다. 신을 믿지 않았던 그는 오직 인간만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였다. 그것이 비록 이루어질 수 없는 유토피아를 좇는 것이라 해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노력하는 강인한 정신과 용기를 갖고 있었다.
체가 죽은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 동시대인들의 마음속에 신화로 떠돌고 있던 그는 아직도 여전히 신선하게 다가오고 있다. 가치가 전복되고 기계가 중심이 되어버린 파편화된 세계속에 사는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그는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체는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뜨거운 ……. 그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 뜨거운 심장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의 두 강대국, 미국과 소련의 비밀경찰들은 이 영원한 돈키호테의 분신이자 우리 시대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피를 안데스의 산맥에 뿌리도록 만들었다.
사실 최근 수년 간 체 게바라를 다룬 이 책에 큰 관심을 보인 편집자는 거의 없었다.
'세상에, 제정신인가? 공산주의가 몰락한 이 마당에 누가 체 게바라에게 관심을 둔단 말인가……!'
내가 이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다. 그런데 로쉐 출판사의 편집진은 체 게바라라는 나무를 새롭게 재인식시키려는 이 시도에 용감하게 도전하였다. 그것은 그의 생애의 본질을 다루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하기 어려운 폭넓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 담긴 이 책에서 내가 특히 강조하려고 했던 것은 그의 온화한 인간성이었다. 사실 이 책을 탈고하기까지는 거의 8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지난 시절의 좌파들은―'체 게바라'에 대한 생각을 보존하고 싶은 아르헨티나의 전사들과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제외하곤―그 주제가 자기들로부터 이탈되는 걸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딱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Emesto Guevara de La Serna)' 대장이 여전히 그들의 열정에 불을 당기고 있다는 걸 역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기독교도들이 '전사 그리스도'로까지 부르는 그의 재조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지금 프랑스를 비롯한 세계 각지의 예술가와 화가, 조각가, 사진작가들은 루브르 광장에서 출발하는 자유의 행진을 계획중이다. 그것은 전세계 사람들이 함께 체가 던졌던 질문을 생각해 보고 답해 보려는 시도이다. 그의 질문은 분화가 가속화되는 지금 이 사회에서 그 무엇보다도 절실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보름이 가까워지던 어느 겨울 밤, 파리에 머물고 있던 나는 일 년 내내 문 닫는 법이 없던 앙시엔 코메디가에 있는 한 빵가게로 빵을 사러 가고 있었다. 무엇에 홀린 듯 '갈증의 계곡'에 인접한, 생 제르맹의 밤거리 사람들이 미시시피 강이라고 이름 붙인 개천 건너편으로 정처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재즈가락만이 사회의 낙오자들을 깨우는 버드랜드 뒷골목. 이 시간은 그들도 빵을 찾아나설 때였다.
그때 카네트가와 프린세스가가 만나는 모퉁이, 생 제르맹과 성 쉴피스 성당 사이에 있는 한 건물 벽에서 열렬한 지지자들이 '전사 그리스도'라고 이름 붙여놓은 십자가를 안고 있는 그림을 보았다. 그림 속의 인물은 바로 체 게바라였다.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그곳에 웅크리고 있던 한 남자가 어둠속에서 은둔하고 있는 설교자처럼 말했다.
'그는 다시 돌아올 겁니다.'
감격에 겨운 눈빛을 하고 있다.
'제아무리 어두컴컴한 밤일지라도 그는 저 하늘의 별로 늘 떠 있어요. 진정한 목자, '체'라는 이름의 별로.'
잠자리로 돌아온 나는 빵을 몇 조각 먹다가 그 꿈을 계속 꾸기 위해 잠이 들었다.
그 아득한 꿈 같은 경험이 있고나서 몇 년이 지난 1981년 9월, 나는 아바나로 갔다. 함께 갔던 유럽 기자 친구들과 떨어져 나는 발라데로로 향했다. 뒤퐁 골프장이 펼쳐져 있는 해안가에는 열대의 태양에 까맣게 그을린 소련 우주비행사들이 스윙연습을 하고 있었다. 체 게바라의 사진을 많이 찍었던 알베르토 코르다와 동행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었다. 그는 크리스찬 디오르의 모델로서 1960년대 말, 파리에서 벌어졌던 학생운동 때 나와 함께 동참했던 위대한 '여전사' 노르카의 전남편이기도 했다. 전광석화처럼 예리한 시선을 가졌던 코르다는 결코 금전과 타협하지 않았다. 어떠한 상업적 유혹에도 굴복한 적이 없었던 이 통 큰 사내는 자기만이 인정하는 대장을 기록으로 남겨두기 위해 늘 준비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심한 갈증과 싸우고 있을 때도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쿠바의 대장처럼 술을 마시지 않고도 포도주에 기분좋게 취한 것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나는 그가 1959년부터 1968년까지 피델 카스트로의 공식 사진사로 세계 각지를 동행하며 겪었던 각종 고생담을 들었다. 그는 헤밍웨이가 한창 바다낚시로 이름을 날릴 때 피델과 체가 함께 고기를 낚던 당시의 정황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동안 같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들 사이에는 모종의 암묵적인 공모감이 싹트고 있었다.
만조가 되어 한꺼번에 들어온 배들로 어수선한 낡은 선창에서 코르다는 나에게 에르네스토 게바라의 아버지를 만나보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였다. 그는 말레콘 해변을 따라가다가 혁명의 주역들과 그 인척들이 모여 살고 있다는 미라마르가로 들어섰다. 우리는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에서 모델로 삼았다던 그레고리오 푸엔테스 노인과 함께 그 집을 찾았다. 아들이 친근하게 '비에호'(노인네 : 역자)라고 불렀던 모습대로 아버지 에르네스토는 테라스에 있는 흔들의자에 평온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약간의 럼과, 탄산수와 약초가 담긴 컵을 쉼 없이 흔들면서 그는 마치 아들이 여전히 살아 있는 듯 생생하고 현란한 말투로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한 집안의 가족사를 손에 잡힐 듯이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거의 네 시간이 넘는 긴 이야기 속에서 게바라 노인은 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혁명의 불길을 다시 지피기 위해 또 다른 체들이 머지않아 나타나리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인식시키려고 하는 듯했다.
사람을 끄는 이 낭만적 기질의 노인과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헤어졌는데, 1987년 9월, 유명한 코미디언 피에르 리샤르와 체의 흔적을 찾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그를 찾았을 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 두 사람의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우리의 작품 〈위대한 저편(Grand Ailleurs)〉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데 나는 그 작은 프로그램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체의 딸인 일다와 체와 형제 같은 우정을 나눴던 알베르토 그라나도를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사랑과 우정으로 빚은 소중한 생명을 잉태시키듯 우리의 이 책은 '엘 체'라고 불렸던, 따뜻한 마음이 깃든 강철 같은 영혼을 가진 한 거인을 기리는 우리 세 사람의 마음이 탄생시킨 결과물이다.
1928년 6월 14일, 이폴리토 이리고옌 대통령이 통치하던 시절에 아르헨티나에서는 후일 '체'라고 불리게 될 에르네스토 게바라가 태어났다. 애초부터 정착된 삶과는 거리가 먼 운명을 타고난 것일까. 만삭인 셀리아 데 라 세르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아이를 낳기 위해 남편과 서둘러 파라나 강을 내려가는 배편에 올라탔다. 그런데 로사리오데라페쯤에서 예정보다 빨리 첫 진통이 찾아왔다. 기겁을 한 세르나 부부는 허둥지둥 배에서 내려 가까운 곳에 사는 친척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하여 에르네스토는 아버지와 같은 이름으로 이 세상과 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에르네스토의 집안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내력을 갖고 있었다. 골드 러시 무렵 금광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떠났던 할아버지는 아일랜드와 바스크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이었다. 1871년, 그의 할머니 알베르티나 우갈데는 황열병에 걸려 스무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이렇듯 바스크―아일랜드라는 유난히 고집 세고 개성 강한 두 핏줄이 그 유서 깊은 집안 출신의 아이에게 흐르고 있었다.
게바라 가족은 로사리오에 터전을 잡지 않았다. 아이가 어느정도 여행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자 그들은 다시 대서양으로 향하는 강을 따라 여행을 시작했다. 게바라 부부는 학생 시절의 추억이 숨쉬고 있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잠시 들렀다가 카라과타이 강 어귀에 있는 한 항구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어린 에르네스토가 말을 배운 곳은 여기였다. 토목기사 자격증을 갖고 있던 아버지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는 태고적의 신비를 간직한 원시림 지역으로 파라과이와 인접한 알토파라냐 개발현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 마테(파라과이의 차 : 역자)를 심기도 하고 간단한 항해를 위해 조선소 건설에도 참여했다. 에르네스토는 드넓은 정원 한 귀퉁이 아버지가 손수 지은 집에 드리워진 커다란 소나무 그늘 아래서 첫 걸음마를 뗐다. 1929년 12월 31일, 어머니의 이름을 이어받게 되는 여동생 셀리아가 태어나면서 에르네스토 가족은 네 명으로 늘어났다.
1930년 5월 어느 날 오전, '테테'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에르네스토의 두 번째 생일을 얼마 남지 않았던 그날, 셀리아는 아들을 데리고 근처 강으로 수영을 하러 갔다. 그런데 물에서 나온 아이가 심하게 몸을 떨었다. 남아메리카 지역의 심한 기온차가 아이에게는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그날 밤 내내 아이는 기침을 멈추지 않았고 의사는 갓난아기 때 로사리오에서 앓았던 폐혈종과 관련시키며 폐렴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아이의 천식 때문에 게바라 가족은 좀더 나은 기후를 찾아 짐을 꾸릴 수밖에 없었다. 알토파라냐의 습한 기후는 아이의 천식을 더욱 악화시켰고 게바라 부부는 결국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그들은 부스타만테가에 있는 아파트 6층을 세냈다. 그러나 여기서도 아이의 건강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또다시 짐을 꾸린 가족은 이번에는 아주 건조한 기후를 찾아 안데스 산맥의 전방지역을 찾았다. 코르도바에 도착하자 비로소 아이가 제대로 숨을 쉬는 것 같아서 게바라 가족은 코르도바 인근의 아르게요에 짐을 풀었다. 그러나 얼마안 가 그 온화한 공기도 천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바라 가족이 짐 꾸리기와 짐 풀기를 거듭하고 있던 1930년 9월 26일 아르헨티나에서는 우리부루(Uriburu)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라그루타 호텔에서 떠나온 게바라 가족이 치카스 산악지방의 알타가르시아에 도착하자 어린 천식환자는 약간이나마 기력을 찾는 것 같았다. 그러자 그의 부모들은 여기에 자리를 잡아야겠다고 결정하고 산자락에 세워진 카를로스펠레그리니라는 마을에 집 한 채를 얻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세웠던 유서 깊은 도시 알타가르시아에는 인디오 밀집구역인 레둑시오네스(reducciones)가 많았다. 어느 날, 에르네스토는 길거리에서 사귄 한 친구의 집에 놀러갔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친구는 부모와 다섯 형제자매들과 함께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한 칸짜리 오두막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겨울에는 신문지나 넝마조각을 덮고 잔다고 했다. 어린 에르네스토는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따지듯이 그 사실을 말했다.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오간 최초의 '정치적' 대화였다.
아버지 에르네스토는 아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그렇단다. 가난은 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에 대항하여 싸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권위적인 정권은 인디오들이 스스로 개혁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가능성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설령 그들이 파업을 일으킨다 해도 즉각 혹독한 탄압과 투옥으로 이어졌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호화로운 시에라스 호텔의 골프장을 지저분하게 만들어서 몇 푼이나마 더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건 큰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게라도 행동에 옮기는 이들에게는 대단한 일이었다.
에르네스토의 생일케이크에 여덟 개의 초가 꽂히던 1936년, 그 해 들어 사람들은 부쩍 스페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했다. 또래들과 다름없이 개구쟁이 소년이었던 에르네스토는 다른 아이들이 도둑과 경찰로 편을 갈라놀 때 공화파와 프랑코파로 편을 갈라 전쟁놀이를 했다. 그때 마누엘베를라노 학교에 입학을 앞두고 있던 에르네스토는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들을 암송하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1937년, 에르네스토의 아버지는 스페인 공화군을 지지하는 후원회를 조직했다. 소년 에르네스토 또한 자기네 집을 '민중의 집'으로 바꿔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집은 동네에서 '비베 코모 키에라스(vive como quieras: 원하는 대로 지내는 곳)'로 불리게 되었는데, 소년 에르네스토가 먹여주고 재워주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데려오는 굶주린 친구들이나 광부의 아이들, 호텔 노동자들의 아이들로 들끓었다. 다행히도 집이 꽤나 넓고 집세 또한 비싸지 않았던지라 동네의 어느 집보다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 되었다. 무엇에 씌었는지는 모르지만 게바라 가족은 그런 생활에서 특별한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집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었다.
이렇듯 '어린 체'는 일찌감치 인디오 친구들과 나누며 사는 법을 배우며 자라고 있었다. 두 번에 걸쳐 찾아왔던 심한 천식 발작 때문에 할 수 없이 학교를 쉬어야 했던 기간 동안 그는 프랑스 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어머니가 빌려주신 책을 비롯하여 아버지의 서재에서 가져온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어느새 그는 소포클레스부터 로빈슨 크루소, 프로이트, 그리고 삼총사까지 닥치는 대로 섭렵한 게걸스러운 독서광이 되었다.
1939년, 바다 저편에서 끔찍한 전운이 감돌고 있던 그 해, 에르네스토 자신도 처음으로 '부당함'이라는 쓰디쓴 경험을 맛보았다. 그는 동생 로베르토―게바라 가족은 여섯 식구로 불어나 있었다. 에르네스토, 셀리아에 이어 1932년 5월 18일에 로베르토가 태어났고 1934년 1월 28일에 안나 마리아가 태어났기 때문이다―와 함께 몇 푼의 용돈이라도 벌어보겠다며 풀란이라는 사람이 갖고 있는 포도농장에서 수확하는 일을 하게 해달라고 아버지께 부탁했다. 2월은 여름방학 기간이었으므로 어머니는 진작에 허락했고 아버지 또한 나름의 생각이 있어 이 일을 허락했다. '나는 자식들을 가르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에게 한 사람으로서 제 몫을 할 기회를 주는 것이라 생각했다'라고 후일 그는 『나의 아들, 체(Mi hijo, Che)』라는 책에서 쓴적이 있다. 그러나 두 형제는 에르네스토의 천식이 심해지는 바람에 나흘 만에 집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정말 치사한 사람이에요.'
에르네스토는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천식이 심해져서 아무래도 일을 계속하기가 힘들 것 같아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얘길 했죠. 그래서 우리가 그 동안 일한 품삯을 계산해 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반밖에 줄 수 없다는 거예요. 그 사람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유명하더라구요. 이번 일도 처음이 아닌 것 같고. 그러니까 아버지가 같이 가셔서 다시는 그런 짓 못하게 그를 한 방에 날려버리세요…….'
1943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게바라 가족은 코르도바로 이사하기 위해 다시 짐을 꾸렸다. 아버지가 코르도바에 있는 건축사무소에 자리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 해에 에르네스토의 바로 아래 누이인 셀리아는 여자중학교에 입학했고 에르네스토는 서민층 아이들이 주로 다니던 데안 푸네스 국립중학으로 옮겼다.
칠레가 288번지에 있던 그 집에서 에르네스토의 막내동생 후안 마르딘이 5월 18일에 태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집 역시 전과 다름없이 '민중의 집'이 되어갔다. 아버지가 '미세리아(miseria, 가난 또는 빈곤이라는 뜻:역자)'라고 불렀던 이웃 동네 아이들이나, 지진으로 동네 전체가 쑥밭이 되어버려 오갈 데 없게 된 아이들이 묵을 곳을 찾아 그의 집에 몰려들었다. 이 시기에 에르네스토는 이모부이면서 좌파적 사상이 담긴 시를 많이 쓴 코르도바 이투르부르의 시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시를 직접 에르네스토에게 낭송해 주는가 하면 아르헨티나의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애기해 주곤 했다.
비록 천식이 종종 발병하기는 했지만 에르네스토 소년은 무럭무럭 자라갔다. 그는 동생 로베르토와 함께 테니스와 골프를 쳤으며 체스에도 푹 빠져들었다. 그가 그라나도 집안의 삼형제들과 친해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들은 토마스, 그레고리오, 그리고 알베르토였는데 누구보다도 당시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던 사람은 학생 시위를 이끈 혐의로 감옥에도 갔다온 전력이 있었던 여섯 살 위의 알베르토였다. 그라나도 형제들은 당시 영국에서 건너온 지 얼마 안 된 럭비라는 낯선 운동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을 따라 리오프리메로에서 열린 럭비시합에 다녀온 에르네스토는 알베르토에게 자기도 럭비를 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알베르토는 양볼이 핼쑥하고 호리호리한 이 소년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럭비를 하고 싶다고? 미안한 얘기지만 넌 첫 번째 태클이 들어오는 순간 두 동강 나고 말 걸…….'
그러나 에르네스토의 불 같은 시선을 되받은 알베르토는 일단 테스트를 해보는 것만은 승낙했다. 그는 에르네스토에게 헬멧을 빌려준 뒤 의자 두 개를 놓고 양쪽 등받이 위에 막대기를 걸쳐놓은 뒤 그 위를 그르듯 뛰어 넘어보라 했다.
'두 번, 다섯 번, 열 번, 그는 가볍게 장대를 뛰어 넘었어요. 어찌나 쉬지 않고 열심히 해대는지 내가 나서서 말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죠.'
그날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 알베르토 그라나도는 아바나의 미라마르 구에 있는 자신의 집 테라스에서 럼주가 든 잔을 홀짝거리며 마치 바로 엊그제 일어났던 일인 양 그 일을 회상하고 있었다. 알베르토는 나중에 유명한 생물학자가 되었으며 젊은 시절의 친구인 에르네스토를 따라 쿠바에 정착했다. 그 또한 나름의 방식대로 기아와 빈곤과 싸워온 사람이었다. 그는 우유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젖소를 개량하는 데 성공했다. 알베르토는 '체'가 되기 이전의 에르네스토 게바라의 젊은 날의 모습을 어느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보아온 사람이었다.
에르네스토는 마침내 럭비화를 신을 수 있었다. 그는 럭비선수로서 자신의 예명을 푸리분도 데 라 세르나(Furibundo de la Serna)의 줄임말인 푸세르(Fuser)라 지었다. 비록 그는 돌진하는 형은 아니었지만 공격적인 태클에는 명수여서 얼마 안 가 믿음직한 '옆날개'로서의 제 몫을 다 하게 되었다. 에르네스토보다는 더 동분서주했던 알베르토는 '미알(Mi Alberto:나의 알베르토의 줄임말)'이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불렸다. 에르네스토는 여전히 갑작스런 천식 때문에 운동장에 나설 수 없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가 호흡곤란을 겪을 때마다 친구나 식구들 중 누군가는 호흡보조기를 들고 뛰어올 채비를 해야 했다. 어느 날인가는 에르네스토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보다 못한 부모들은 그가 선수로 뛰고 있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SIC(산 이시도르 클럽)―그의 아버지가 창립 멤버 중의 하나였던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럭비 클럽―를 탈퇴하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에르네스토는 부모 몰래 2부 리그의 아탈라예 클럽에 등록하여 여전히 운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겸손과 복종, 무엇보다 강한 용기를 요구하는 스포츠인 럭비는 뒤마의 『삼총사』에서 나오는 '모두를 위한 하나, 하나를 위한 모두'라는 구절처럼 명예를 존중하는 에르네스토의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기질과도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알베르토의 회상에 따르면 에르네스토는 당시 럭비 이외에 다른 운동에도 관심을 보였던 듯하다.
'그는 이십여 미터 아래로 무시무시한 급류가 흐르는 나무다리 난간 위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며 균형을 잡곤 했었죠.'
이 얘기를 하며 알베르토는 당시 신문에 실린 기사들과 여남은 장 정도 되는 사진들을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그 중에는 팀 동료들과 함께 찍은 럭비 헬멧을 쓴 소년의 모습도 있었고, 40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아찔한 협곡 사이를 이어주고 있는 좁다란 파이프 위를 걸어가는 모습도 있었다. 그가 럭비 선수로서 얼마나 훌륭한 자질을 갖고 있었는지는 사진만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언젠가 그는 아버지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럭비는 그에게 있어 가장 힘든 순간이었던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의 그 혹독한 싸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그는 으레 후반전 중간쯤이면 운동장을 나왔다. 그럴 때마다 그는 팀 동료들에게 멘도사 포도주나 아니면 이상하게도 정신력을 북돋아 주었던 마테차가 담긴 병을 남겨주곤 했다. 그는 평생을 통해 알코올을 가까이 한 적이 없었다.
1946년에 후안 페론이 권좌에 올랐다. 그때 열여덟 살이었던 에르네스토는 데안 푸네스 대학에 합격해 놓고 있었다. 그는 토목분야를 전공할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약간의 돈을 벌기 위해 이런저런 일거리를 찾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와 친구 토마스에게 교량과 도로를 건설하는 회사인 비알리다드 코르 도베사의 지방 사무소에 '재료 분석' 업무 두 자리를 알선해 주었다. 사실 에르네스토나 토마스 모두 횡령과 독직이 난무하는 그런 세계라면 이미 전에도 겪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듬해인 1947년, 새해 벽두에 에르네스토는 식구들에게 깜짝 놀랄 결심을 알렸다. 천식 때문에 고통받았던 자신의 처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후두암으로 고통받다 돌아가신 할머니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의사가 된다면 주변 사람에게는 그보다 다행스러운 일이 없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올라온 새내기 의대생은 닥치는 대로 자신의 에네르기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럭비, 축구, 수영은 그가 특히 열을 올렸던 운동이었고 제1회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열릴 무렵에는 체스 선수권 대회와 장대높이뛰기 선수권 대회에도 참여했다. 그러면서도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아 그 해 기말시험 세 과목을 전부 통과했다. 게다가 당시 유고 콘돌레오등을 비롯하여 뜻이 맞는 친구 몇 명과 함께 《태클》이라는 제목으로 럭비 전문잡지를 펴내기도 했다.
'어느 날 저녁이었어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아직도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콘돌레오는 당시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해 주었다.
'우리가 다음 호 작업을 한창 진행하고 있었는데 글쎄 경찰들이 우리 아파트에 밀어닥친 거예요. 우리가 공산당 팜플렛을 만드는 줄 알았던 거죠!'
에르네스토는 '찬조(chancho : 아기 돼지)' 또는 '창조(chanzo)'라는 필명을 장난스레 사용했다. 엄숙함을 거부한 이런 익살은 그의 삶에서 매순간 드러나곤 하던 재치를 보여주는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했다.
그가 2학년이 되던 1948년, 그의 가족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다시 돌아와 아라오즈가 2180번지에 자리를 잡았다. 총명한 학생이었던 에르네스토는 당시 알레르기학의 세계적 권위자였던 살바도를 피사니 박사에게 인정받아 그의 연구실에서 연구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지느라 그랬던지 곧바로 실무를 경험할 일이 생겼다. 이미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알베르토가 자신이 일하고 있던 코르도바 북쪽에 있는 산프란시스 코데차나르 나병원에서 방학 동안 일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해 왔던 것이다. 세상 두려울 것 없이 혈기왕성했던 스무살의 청년 에르네스토는 수도로부터 무려 8백5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던 그곳으로 가겠다며 당장 자신의 전동자전거에 올라탔다. 그가 꾸린 짐은 갈아입을 옷가지와 간디의 숭배자였던 네루의 『인도의 발견』이라는 책 한 권이 전부였다.
목적지에 가기까지 그는 여태껏 겪지 못했던 많은 만남을 경험하였다. 어느 날인가 그는 수확하는 농부를 거들어주고 난뒤 녹초가 되어, 들판에서 자고 있던 떠돌이 행색의 어떤 사내곁에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에르네스토가 잠시 자전거 타이어를 갈아 끼우고 있을 때 그 사내도 잠에서 깨어나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얘기 끝에 사내는 자기가 이발사였으며 당장에 시범을 보여주겠노라고 했다. 역시 행색이 말이 아니었던 에르네스토로서도 특별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사내는 호주머니에서 녹슨 가위를 꺼내더니 에르네스토의 머리를 깎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사내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한귀퉁이가 깨져나간 거울을 들이밀며 보라고 했을 때 에르네스토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결국 그의 가운데 가마는 오간 데 없어지고 듬성듬성 머리가 잘려나가도록 놔두는 수밖에 없었다.
알베르토는 에르네스토가 나병원에 도착한 당시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고 했다.
'그가 '황소뿔'로 만든 핸들을 잡은 채 병원 문앞에 멈춰섰을 때 나는 도대체 누군가 싶었어요. 챙 모자 아래로 겨우 보일까 말까 한 얼굴에 그나마 커다란 검은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었으니 말이지요. 그 정체불명의 사내가 얼굴을 드러내자 비로소 나는 놀라 소리 질렀죠. 세상에, 펠라오!'
펠라오, 즉 펠레는 당시 에르네스토의 또 다른 별명이었다. 알베르토는 키가 작았던 까닭에 '페티소'로 불렸다.
에르네스토는 산프란시스코데차나르에서 알베르토가가 일하는 모습을 보며 실제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간혹 느껴지는 병원 종사자들과 환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알베르토는 이런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때 에르네스토는 등 부위를 나병균에 침식당했던 어떤 예쁜 여자 환자에게 반했었나 봐요. 종종 그녀 얘기를 꺼냈던걸 보면 말이죠. 그런데 그녀 역시 에르네스토에게 반한 모양이어서 병원 근무가 끝난 뒤에 내가 에르네스토를 위해 베푼 파티에 참석시켜 달라고 내게 간청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나는 에르네스토에게 알리지 않고 딱 잘라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한 술 더 떠 에르네스토의 눈앞에서 그녀가 진짜 환자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그 예쁜 인디오 소녀에게 뜨거운 물 테스트를 실시했어요. 나병환자는 감염 부위에 아무런 감각을 느낄 수 없다고 알려져 있었으니까요. 실제로 그녀는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못했으니 진짜 환자라는 사실이 입증된 셈이었죠. 하지만 에르네스토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나에게 달려들 듯 따지더군요. 아직도 그가 나에게 한 얘기가 귀에 선연합니다.
'형은 변했어, 그렇게 잔인해질 수가 있다니…….'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어요. 비록 내가 한 행동이 정당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떠나서 내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죠.'
정신없이 보낸 방학이 끝날 즈음 에르네스토는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왔다. 그 여름의 긴 여행은 에르네스토의 가슴속에 이른바 '아르헨티나 기층민중들'의 일상적 삶의 모습들과 진을 들이키고 밤새도록 모닥불 옆에서 치나들과 춤을 추는 가우초들의 모습을 선명히 각인시켰다.
에르네스토는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번잡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당시의 아르헨티나는 대량의 밀과 옥수수를 미국과 유럽으로 수출하면서 번영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후안과 에바 페론 부부 역시 그들의 인생에서 절정기를 맞고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라틴 아메리카의 어느 도시보다도 유럽적인 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도시였다. 카바레의 불빛은 꺼질 줄 몰랐고 카를로스 가르델이 부른 탱고와 쿠바에서 건너온 맘보 같은 카리브 해의 음악들이 늘상 울려퍼지고 있었다. 도시의 거주자들인 '포르테뇨'들―어쨌든 비교적 여유있는 계층인―에게 이 시기는 상상이 현실로 되어가는 유토피아나 다름없었다.
에르네스토라고 이런 북새통과 완전히 동떨어진 생활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부르주아지의 아들이라는 안락한 생활에 빠져들지만은 않았다. 그는 여러 계층의 친구들을 사귀고 있었다. 그는 도시 변두리 벌판에 다닥다닥 지어진 바라크에서 살고 있는 두 명의 떠돌이와도 만나고 있었다. 종종 그는 대학의 친구들과 바에서 토론을 하다가도 홀로 빠져나와 자전거를 타고 자기가 '유목민'이라 불렀던 그들을 찾아가 함께 소시지 등을 구워먹으며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는 부모가 주머니에 찔러주는 용돈도 받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스스로 벌기를 원했으므로 도서관 사서부터 펌프 담당 선원, 혹은 구두를 팔거나 의무요원으로 해상 상인들의 배에 승선하여 남쪽으로는 파타고니아와 화전지역까지, 북쪽으로는 안틸레스 해의 쿠라사오와 트리니다드까지도 가보았다. 그는 여전히 반은 호기심으로, 반은 자신에 대한 시험으로 각종 스포츠에 매달렸다. 펜싱과 권투, 그리고 바스크 지방의 민속경기인 펠로타까지……. 이런 다양한 경험이 바탕이 되어 그는 후일 쿠바의 시에라마에스트라 한복판에 있는 험한 강에서 접영 솜씨를 펼쳐 보임으로써 게릴라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의 왕성한 독서열은 식을 줄 몰랐다. 천식으로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면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으며 밤을 하얗게 지새우곤 했다. 그 습관은 시에라마 에스트라에서 게릴라 생활을 할 때에도 계속되어 다른 게릴라들이 단잠에 곯아떨어진 한밤중에 그는 책을 읽느라 밤을 지새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천식은 체 게바라의 운명과 떼어놓을 수 없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지나치다 싶을 만큼의 과도한 활동성과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 세 배로 농축하여 살았던 날들, 그리고 그가 럭비 경기장에서 몸을 구를 때조차도 그를 떠나지 않았던 고통들을 모조리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한편으로는 질병이 이유가 됐을 수도―매 순간이 마지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누구보다도 꽉 찬 시간을 살았다.
1951년도 저물어갈 무렵, 그는 기말시험에 통과했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피사니 교수조차도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으로 그를 꼽을 정도였다. 그러나 당장에는 전혀 다른 계획이 에르네스토의 머리 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에르네스토와 알베르토는 거대한 여행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산프란시스코데차나르까지의 긴 여행 이후 두 사람은 자주 그 계획을 상의하면서도 한편으론 많이 망설였다. 알베르토는 당시를 이렇게 얘기한다.
'비록 우리는 아르헨티나인이었지만 우리 조상들의 문명의 터전이랄 수 있는 유럽을 먼저 떠올렸습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 혁명의 발상지인 프랑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선 우리의 모국이랄 수 있는 스페인도 가보고 싶었죠. 그리고 파라오와 피라미드의 나라인 이집트도요. 아마 몇 주일을 꼬박 고민했을 겁니다. 하지만 에르네스토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대륙이 가장 큰 의미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인으로서 우리의 뿌리를 찾아 떠나자, 대륙 발견이전 시대의 문명을 발견해 보고, 마추픽추를 기어올라 그 비밀을 손수 풀어보자. 그리고 잉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도 알아보고……. 결국 유럽과 이집트, 그리고 나머지 세계는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 실천문학사 『체 게바라 평전』35-61쪽 내용을 옮겨 실었습니다
■ 출판사 리뷰
1928년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의 한 중류 가정에서 태어난 체 게바라(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는 20대 초반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의학을 공부한 엘리트였다. 하지만 두 번에 걸친 남미여행을 통해 가난한 민중들의 삶의 지켜본 게바라는 빈곤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혁명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이 세계의 모순을 먼저 치료하는 것이 더 본질적인 문제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1953년 과테말라로 간 그는 과테말라의 진보정당이 미국이 지원한 쿠데타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미국이 진보적 정부를 반대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멕시코로 간 게바라는 1956년 7월 카스트로 형제를 만나면서 구체적인 쿠바혁명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 해 11월 쿠바에 상륙,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을 중심으로 게릴라 활동을 벌이며 혁명군을 모은다. 1958년 산타클라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승기를 잡은 카스트로와 게바라는 1959년 1월 결국 수도 아바나에 입성한다. 그 뒤 게바라는 쿠바 정부에서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 등을 역임했고, 공산권과 제3세계를 돌며 모든 종류의 제국주의, 식민지주의에 반대하는 외교활동을 벌인다. 이때부터 검은 베레모와 구겨진 군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그러나 1965년 4월 쿠바에서의 2인자 자리를 버리고 당시 내전중이던 아프리카 콩고로 가 콩고혁명을 위해 노력했다. 1년 뒤 게바라는 볼리비아로 숨어들어갔다. 볼리비아는 남미 5개국과 접경을 이루는 요충지로서 이곳에서의 활동이 혁명의 불씨를 전남미로 확산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볼리비아 정부군을 지원하는 한편 CIA 요원을 파견, 게바라를 체포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고, 결국 게바라는 1967년 10월 8일 체포된 뒤 처형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아르헨티나 의사 출신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독재에 대항하기 위해 전세계 전장을 뛰어다닌 체 게바라는 1960년대 저항운동의 상징이었다. 검은 베레모에 아무렇게나 기른 긴 머리칼, 덥수룩한 턱수염, 그리고 열정적인 눈빛, 굳게 다문 그의 입술은 진보적인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여 있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성공시킨 뒤 쿠바의 2인자 자리를 박차고 아프리카 콩고와 남미 볼리비아 등지에서 게릴라 활동을 계속하다 전장에서 숨진 게바라. 이 열정적 투사에 대해 당시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우리 세기에서 가장 성숙한 인간'이라고 평했다. 쿠바를 '해방'시킨 뒤 국립은행 총재 등의 고위직에 있으면서도 사탕수수밭에서 노동을 하던 게바라의 모습은 가난한 민중들에게 성자로 추앙받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체 게바라 열기는 그의 활동영역이 아니었던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도 식지 않고 있다. '단지 그의 정치적인 입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시의 '시대정신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 인간'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라는 수많은 회고담 속에서 잘 드러나듯 좀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세계인들의 가슴속에 체 게바라는 언제나 살아 있다. 쿠바의 한 지도급 인사는 '세월이 흐를수록 체와 같은 사람을 찾아보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60년대라는 시대상과 그 시대를 불꽃같이 살다간 게바라와 같은 인물을 다시 기대할 수 없는 이상 게바라는 앞으로도 '이상을 꿈꾸는 인간의 대표'로 남을 것이다.
'죽은 게바라가 산 독재자를 물리친다'라는 말이 있다.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처형된 지 30여 년이 된 현재 그가 추진했던 혁명은 아직 미완일 뿐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게바라의 죽음이 그 자체로서 남미 등 많은 지역의 반독재투쟁의 지표로 오늘날까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게바라의 후예들'은 그가 직접 활동했던 아프리카 콩고와 남미 볼리비아는 물론 멕시코, 미얀마 등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활동하고 있다.
장 코르미에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전기작가이다. 그 동안 그는 체 게바라에 대한 많은 저술을 써왔고, 체 게바라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한 전문가로 인정을 받아왔다. 게바라에 관한 자료들을 집대성한 이 책은 프랑스에서 출간되자마자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켰고, 세계 각국에서 번역 출간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책에서 그는 체 게바라에 대해 남겨진 모든 자료들을 일갈해서 엮어놓고 있다. 체의 아버지를 비롯해 체가 살아 생전 관계했던 모든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생생한 그의 모습을 전하고 있으며, 그가 남겨놓은 편지글이나 잡문들 거의 대부분이 이 책에 실려 있다.
그 동안 체 게바라에 대한 책은 수십 종이 출간되었으나, 67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더 이상의 체에 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을 만큼 체의 생애와 사상을 집대성해 놓은 이 책이야말로 '체 게바라' 전기의 최종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미의 전설적인 혁명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와 미국 흑인인권운동의 대부 마틴 루터 킹의 전기가 나란히 출간됐다. 두 사람 모두 가난과 억압에 대항해 가장 인간다운 사회적 삶을 살았던 전형적인 인물들로 사후에도 오랫동안 존경받는 대표적인 존재들이다.
'체 게바라 평전'(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실천문학사)은 게바라에 관한 자료를 집대성해 프랑스에 출간되자마자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켰고 세계 각국에서 번역 출간돼 큰 반향을 일으켰던 책이다. 전기작가 코르미에는 이 책에서 게바라의 아버지를 비롯해 그가 생전에 관계했던 모든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생생한 모습을 전하고 있으며 그가 남긴 편지글이나 잡문들을 대부분 함께 수록했다.
1928년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의 한 중류가정에서 태어난 게바라는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의학을 공부한 엘리트였다. 그러나 그는 두번에 걸친 남미여행을 통해 가난한 민중들의 삶을 목도한 뒤 빈곤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혁명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이 세계의 모순을 먼저 치료하는 것이 더 본질적이라는 자각을 하게 됐다. 멕시코에서 카스트로 형제와 만난 뒤 그는 구체적인 쿠바혁명에 돌입한다.
산악지역을 중심으로 게릴라 활동을 벌이며 혁명군을 모아 1958년 산타클라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카스트로와 게바라는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입성한다. 그 뒤 게바라는 쿠바 정부에서 요직을 역임했지만 쿠바 2인자의 자리를 버리고 새로운 혁명을 위해 자신을 또다른 사지를 향해 스스로 몰아갔다. 결국 게바라는 볼비아에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도움을 받은 정부군에 의해 체포돼 처형당하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 39세였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그를 '우리 세기에서 가장 성숙한 인간'이라 칭했고, 사람들은 그가 '시대정신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 인간' 혹은 '이상을 꿈꾸는 인간의 대표'로 추앙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자서전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클레이본 카슨 엮음,이순희 옮김.바다출판사)는 킹 목사의 생애와 사상은 물론 지금도 미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킹 목사 암살의 거대한 음모까지 상세하게 수록하고 있다.
킹의 삶은 '사랑과 정의를 향한 지칠 줄 모르는 열망' '폭력과 위선으로 가득한 세계에 맨손으로 맞선 용기' 등으로 정의되곤 한다. 어린 시절부터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을 목격하면서 불의의 사회를 개혁하려는 열망을 지녔던 킹은 폭력이 아닌, 정의의 몸짓으로 미국의 흑인인권운동에 불을 붙인 사람이다. 불의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번번이 경찰에 연행되어 감옥에 갇히고, 피부색에 근거한 아무 근거없는 편견에 사로잡힌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서 온갖 협박과 테러, 죽음의 위협을 당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육신은 살해당하고 말았지만 그가 부르짖었던 '정의'는 지금도 살아남아 흑인들의 영원한 스승으로 기려지고 있다.
--- 세계일보 00/3/22
체 게바라―. 검은 베레모에 손질하지 않은 긴 머리칼.텁수룩한 턱수염.정 열적인 눈빛.굳게 다문 입술…. 아르헨티나의 촉망받는 의사출신으로 인간을 옭아매는 모든 독재에 대항하 기 위해 전세계 전장을 뛰어다닌 1960년대 저항운동의 상징 체 게바라.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우리 세기에서 가장 성숙한 인간”이라고 칭 송했던 체 게바라의 일대기를 다룬 ‘체 게바라평전’(장 코르미에 지음 실 천문학)한글판이 처음 나왔다.
혁명가였지만 너무나 인간적인,인간에 대한 불가사의한 애정때문에 생애 자체가 화제인 체 게바라.1928년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의 한 중류가정에서 태어 난 체 게바라는 20대 초반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의학을 공부한 엘리트 였다.
그러나 가난에 찌든 민중의 아우성을 두번에 걸친 남미여행을 통해 확인한 뒤 “인간의 질병을 고치는 것보다 이 세계의 모순을 치유하는게 우선”이라 고 결심,혁명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한다.1959년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성공시킨 체 게바라는 보장된 2인자자리를 스스로 내던진다.쿠바 국립은행총 재 재직당시 사탕수수밭에서 노동하던 모습으로 민중에게 강한 인상을 심은 그가 대신 선택한 삶은 아프리카와 남미에서의 목숨을 건 게릴라활동.
1967년 10월9일.31세의 나이에 쿠바혁명을 이끈 위대한 혁명가 체 게바라는 혁명가로서의 삶을 마감한다. 1년전 남미민중해방운동의 요충지인 볼리비아 로 숨어든 그는 볼리비아정부군을 지원하는 미국 CIA의 정보망에 걸려 죽기 하루전 체포된 뒤 다음날 바로 처형당하고 만다.
인간만을 믿으며 늘 새로운 것을 추구했던 체 게바라.1956년 멕시코에서 어 머니에게 보낸 편지 한 구절은 39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한 그 의 진면목을 엿보게 한다.“저는 예수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저 들이 나를 십자가에 매달아두게도 하지 않을 것이며 어머니가 바라시는 방식으로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 스포츠서울 00/3/21 박인권 기자
‘마틴 루터 킹이 옳았는가,말콤 X가 옳았는가’‘간디의 길과 네루의 길,어느 쪽이 정당한가’‘칠레의 산디니스타 선거 혁명과 체 게바라의 무장 투쟁 중 무엇이 역사의 정도(正道)였는가’
이런 질문이 반드시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란 문제로 귀결되는 건 아니다.역사가 후세에 남긴 해답 역시 그리 간단하지 않다.세계대전과 냉전,60년대 학생운동까지 20세기 중반 역사의 격랑을 헤쳐간 두 사람의 변혁가 이야기는 이상(理想)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두 갈래 길을 보여준다.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1929∼1968)의 일생을 사후에 엮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바다)와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1928∼1969) 평전’(실천문학)이 나란히 출간됐다.한 사람은 풍요의 나라 미국의 핍박받는 흑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미국의 경제적,정치적 수탈로 신음하고 있는 남미 대륙의 백인.두 사람이 1년의 시차를 두고 북미와 남미 대륙을 거쳐갔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킹 목사는 흑인분리 정책이 엄격했던 남부 애틀란타에서 태어났다.한때 흑인 차별 철폐를 위해 무장폭동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던 그는 ‘시민 불복종’ 운동을 펼친 데이비드 소로와 인도 간디를 통해 비폭력저항주의를 평생의 운동노선으로 택한다.흑인 파크스 부인이 백인 남성에서 버스 좌석을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몽고메리 사건’은 민권 운동가로서 킹 목사의 이름을 알린 계기가 됐다.킹 목사를 중심으로 몽고메리 흑인들은 ‘흑백분리법’ 철폐를 요구하며 버스 승차 거부에 들어갔다.56년 미 연방 최고법원은 알라바마 흑백분리법에 위헌 결정을 내렸고 이후 애틀란타,조지아,버밍햄 등으로 남부 흑인 운동의 불길이 확산됐다.
킹 목사는 68년 왕성한 활동의 와중 제임스 얼 레이에 의해 암살된다.지난해 미국에서 “킹 목사 암살사건은 중앙정보국,군 관련자 등이 관련된 준비된 사건”임을 시인하는 재조사 결과가 발표되긴 했지만 킹 목사 암살 사건은 여전히 실체가 규명되지 않은 채 J.F.케네디 사건에 이은 미스테리로 남아있다.이순희 번역.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서민 가정 출신의 의학도.대학 시절 친구 알베르토와 함께 남미 추키카마타 광산 등을 여행하며 제국주의와 부르주아 계급에게 수탈당하고 있는 인디오,메스티조 등의 삶을 목격한 그는 꿈꿔왔던 슈바이처의 길 대신 게릴라 투쟁을 선택한다.55년 7월 멕시코에서 피델 카스트로와의 운명적인 만남.미국의 압제에 신음하는 남미 대륙을 구해내기 위해 카스트로와 머리를 맞댄 그는 산타클라라 전투의 승리로 59년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입성한다.혁명의 성공은 게바라의 검은 베레모와 군복을 남미 혁명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이후 게바라는 권력의 자리를 미련없이 버리고 남미 혁명의 소용돌이에 뛰어든다.65년 내전 중인 콩고를 거쳐 볼리비아로 건너간 그는 게릴자전을 감행하다 총에 맞아 생포된다.볼리비아 군부는 체가 총상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한다.하지만 게바라가 67년 10월 볼리비아의 한 학교에서 사살됐다는게 저자의 주장.
“무릎 꿇고 살기보다는 서서 죽는다”고 했던 전사 게바라의 최후였다.일간 ‘파리지앵’의 기자로 81년부터 게바라에 관한 자료를 수집해온 장 코르니가 쓰고 김미선이 번역했다.
--- 국민일보 00/3/20 이영미 기자
'사랑 없이는 혁명도 없다’던 30여년전 그의 외침은 이제 젊은 세대를 겨냥한 광고문구 정도로 무장해제 돼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의와 인간애 같은 것이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그의 외침은 여전히 박제되지 않은 ‘복음’이다.
체 게바라. 본명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세르나. 1928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1967년 볼리비아 산골에서 처형당한 사회주의자. 97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이 책은 체 게바라 전기의 결정판으로 꼽힌다. 저자는 15년간 체 게바라 가족 동료들의 증언과 그의 일기 메모 등을 모았다. 체 게바라는 하나의 특징으로 유형화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의사이자 고고학자였으며 시인, 언론인이었고 혁명 후에는 쿠바국립은행의 총재도 지냈다. 뿐인가. 아마추어 사진사였고 베레모에 군복을 입고 골프를 치면서 시거를 즐겼다.
그러나 체 게바라를 혁명가로 만든 현실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다. 세상을 위해 인술을 펴겠다는 꿈을 품었던 햇병아리 의사의 가슴에 ‘변혁’의 열망을 심은 것은 칠레 추키카마타 구리광산의 모습이었다. 미국인 광산소장이 하루 수백만달러의 수익을 거둬가던 광산의 거대한 노동자용 공동묘지. “얼마나 묻혔나요?” “대략 1만명” “미망인들과 자식들은 어떤 보상을 받았나요?” “…”
그러나 혁명가로서의 그는 고독했다. 사회주의 국가의 맹주였던 소련을 향해 “어떤 점에서는 사회주의 국가들도 제국주의적 착취에 일조를 하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사회주의는 성숙되지 않았다. 그 안에는 많은 오류가 담겨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할 수만 있다면 혁명의 성과를 즐기는 기득권층이 됐겠지만 그는 다시 군화를 신고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총살당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네 자녀에게 남긴 편지는 이랬다. ‘이 세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행해질 모든 불의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구나. 너희 자신에 대해 가장 깊이. 그것이 혁명가가 가져야할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란다.’
--- 동아일보 00/3/18 정은령 기자
수탈과 압제, 제국주의에 맞선 그의 게릴라 투쟁은 실패와 죽음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가 남미의 제3세계 국가에 전파하려 했던 혁명의 이념은 이제 하나의 ‘전설’로 남았다. 그러나 그의 혁명적인, 너무나도 혁명적인 삶은 “무릎꿇고 살기보다는 서서 죽는다”는 한마디의 말이 모든 것을 웅변해준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전사 체 에르네스토 게바라. 1967년 10월 볼리비아의 남부 협곡에서 체포된 그는 다음날 처형됐다. 그는 죽기 두달 전에 쓴 ‘볼리비아 일기’에서 “혁명의 물결 앞에 우리의 목숨은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비장한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전문번역가 김미선씨가 우리말로 옮긴 '체 게바라 평전'(실천문학사)은 20세기 최후의 게릴라였던 게바라의 일대기다.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장 코르미에가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쓴 이 책은 `게바라 평전의 최종본`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이 시대에 가장 완벽하고 성숙한 인간”이라 평했던 체 게바라는 1928년 6월 아르헨티나의 프티 부르주아지 가정에서 태어났다. 2살때 발병한 천식으로 평생 고생했던 그는 자신을 ‘시인이 되지 못한 혁명가’로 부를 만큼 어릴 적부터 네루다·보들레르·베들렌 등의 시에 심취했다.
53년초 부에노스 아이레스 의대에서 박사학위와 전문의 자격증을 딴 게바라는 그해 가을 과테말라의 진보정당이 미국이 지원한 쿠데타로 붕괴되는 것을 목격한다. 그후 게바라는 억압받는 민중들을 위해 총을 들었고 무지와 나태, 부패의 굴레를 벗어난 ‘새 삶의 창조’를 혁명의 대의로 내세웠다.
55년 7월 그는 멕시코에서 카스트로와 운명적으로 만나 '양키'라는 적에게 착취당하는 남아메리카 대륙을 구해낼 방안을 놓고 밤샘 토론을 벌인다. 여명이 밝았을 때 카스트로는 게바라에게 제안한다. '압제자 바티스타로부터 쿠바를 해방시킬 대장정에 동참하자'고.
혁명동지들로부터 '체(기쁨 슬픔 놀람 등을 나타내는 감탄사로 '나의'라는 뜻을 지닌 인디언 토속어)로 불린 게바라는 58년 산타클라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59년 1월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입성한다. 쿠바 혁명정부에서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 등을 역임한 그는 검은 베레모와 낡은 군복차림으로 남미 각국을 돌며 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외교활동을 벌인다.
그 뒤 쿠바에서 2인자 자리를 미련없이 버린 그는 65년 내전중이던 콩고로 날아갔고 이듬해엔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혁명을 위한 게릴라전을 감행한다. 그러나 대오를 이탈한 부하의 배신으로 그는 사선(死線)에 내몰린다.
그 최우희 결전에서 17명의 대원들과 함께 미국이 지원하는 327명의 레인저부대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운명의 신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적의 총알이 장딴지를 꿰뚫는 처절한 교전 끝에 게바라는 결국 체포됐다. 그의 유언은 짤막했다. '카스트로에게 전해주오. 이 실패가 혁명의 종말은 아니라고...'
--- 경향신문 00/3/14 박구재 기자
1968년 5월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학생혁명'의 깃발은 라틴아메리카가 낳은 한 게릴라 지도자의 초상과 함께 거리와 캠퍼스에 물결쳤다. 별이 달린 베레모를 쓰고 턱수염과 콧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강렬하면서도 매혹적인 눈빛을 지닌 얼굴이었다. 이 얼굴과 나란히 “바다와 대지 위에 체라는 혁명의 태양이 떠오른다”고 쓰인 플래카드가 나부꼈다.
본명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 그의 동지와 이웃들이 그냥 `체'(친구)라고 부른 게바라는 학생혁명의 주역들이 가슴에 품었던 모든 이상과 열정의 가장 적절한 상징이었다. 살아서 이미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고 죽어서 전설이 된 이 혁명가의 길지 않은 일생을 그린 전기 <체 게바라 평전>이 우리 말로 옮겨졌다.
프랑스의 저명 언론인 장 코르미에가 95년 탈고한 이 책은 밀림의 게릴라 지도자, 전투적 공산주의자로 각인된 게바라의 총체적 인간상을 밀도 있게 펼치고 있다. 지은이는 게바라의 맏딸 일다, 그의 아버지 에르네스토와 장시간 면담을 하고 그가 남긴 일기·책자 및 그와 관련된 자료를 두루 끌어모은 데다 게바라가 발자국을 남겼던 라틴아메리카 곳곳을 직접 답사한 끝에 670쪽에 이르는 두툼한 저작을 완성했다.
39살로 세상을 뜬 게바라의 삶은 크게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928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1955년 쿠바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와 운명적으로 만날 때까지가 그 첫 시기에 해당한다. 두 번째 시기는 카스트로의 오른팔로서 쿠바 혁명을 위해 게릴라 투쟁에 뛰어들어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낸 1959년 1월까지다. 정치가 겸 행정가로 탈바꿈해 혁명 정부의 중앙은행 총재, 산업장관, 전권대사를 지낸 1965년까지가 세 번째 시기에 해당한다면, 카스트로와 헤어진 뒤 볼리비아 혁명을 위해 다시 밀림으로 들어가 게릴라를 이끌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을 등에 업은 볼리비아 정부군에 붙잡혀 총살된 1967년 10월까지가 네 번째 시기를 이룬다.
이 네 시기를 면밀히 추적하면서 지은이가 거듭 부각시키는 것은 체의 인간적이고도 다면적인 면모다. 진보적인 생각을 지녔던 부모 밑에서 자란 게바라는 어린 나이에 벌써 정치적인 견해를 내보였다. 스페인에서 프랑코 장군이 내전을 일으켰을 때, 여덟살의 게바라는 “다른 아이들이 도둑과 경찰로 편을 갈라 놀 때 공화파와 프랑코파로 편을 갈라 전쟁놀이를 했다.”
지칠 줄 몰랐던 활동성은 그의 또다른 특징이다. 지은이는 이 활동성을 두 살 때부터 시작되어 죽을 때까지 그를 괴롭힌 천식과 관련짓는다. 천식의 발작이 올 때마다 죽음의 문턱을 보았기 때문이었는지 그는 삶을 “다른 사람의 두 배, 세 배로 농축해” 살았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라면 거의 모든 운동이 그를 매료시켰다. 특히 럭비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대학생 게바라는 <태클>이라는 럭비전문잡지를 발간하기조차 했다. 이때의 운동이 “나중에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그 혹독한 싸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런 활동성은 육체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그는 책을 놓지 않는 독서광이었고 끝없이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그를 알레르기 전문 의사이자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연구하는 고고학자로, 작가·언론인·사진가·시인·체스선수로 만들어주었다. 이를테면, 그는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의 전장에서 게릴라들을 이끄는 지도자였고, 전투가 끝나면 부상병을 치료하는 군의관이었으며, 문맹의 농민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혁명정신을 일깨우는 교사였다.
그는 투철한 평등주의자였다. 그는 지도자라는 이유로 특별대우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동시에 지은이는 체가 따뜻한 마음씨를 지녔으며 풍부한 유머 감각의 소유자였음도 빼놓지 않는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시가를 유별나게 좋아했던 그에게 친구들이 건강을 위해서 담배를 끊으라고 했다. 그는 하루에 딱 한대만 피우겠다고 해놓고선 다음날 1m짜리 시가를 주문했다.
지은이가 체의 인간됨 가운데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면 말하지 않는 그의 정직성이다. 그는 대사로서 외국을 순방하면서 미국의 제국주의뿐만 아니라 소련의 패권주의도 가차없이 비판했다. 이것이 결국, 소련에 의지하고 있던 카스트로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지은이에 따르면, 체가 장관직을 그만두고 밀림으로 다시 들어간 것은 카스트로에게 더 이상 불편함을 주지 않으려는 뜻이 컸다.
체는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요 공산주의자라고 믿었지만, 그것은 스탈린식 공산주의와는 전혀 종류가 다른 것이었다. “그에게 마르크시즘이란 순수함 자체였다.” 산업장관 시절 체를 만나 열띤 토론을 벌였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뒷날 그를 가리켜 “우리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했다. 지은이는 공산주의가 몰락한 지금도 체 게바라를 추모하는 행렬이 끊이지 않는 이유를 그의 삶의 밑바탕에 깔린 `휴머니즘'에서 찾는다. 게바라는 “모든 진실된 인간은 다른 사람의 뺨에 자신의 뺨이 닿는 것을 느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책은 95년에 나온 탓에 체의 시신이 어떻게 처리됐는지는 정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그의 유해는 지난 97년 볼리비아 바야그란데에서 발굴돼 사망 30주기를 맞은 그해 10월17일 쿠바의 산타클라라 묘지에 안장됐다.
--- 한겨레신문 00/3/6 고명섭 기자
지난달 ‘체 게바라 평전’을 펴낸 실천문학사는 요즘 희색 만면이다. 인터넷, 증권투자, 벤처열풍으로 인문 사회과학서적 매출이 바닥을 치는 와중에 유독 ‘체 게바라 평전’만 발간 1개월만에 1만부 판매를 돌파했기 때문이다. 4월 둘째주 서울 교보문고 베스트셀러집계 종합순위 4위, 씨티문고 6위…. 서울대 앞 ‘그날이 오면’ 등 대학가 서점의 반응은 더 뜨겁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독자 반응을 출판사도, 서점도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
현재 출판사가 파악하는 독자군은 두 부류. 1980년대 금서였던 체 게바라를 숨어서 읽은 30대와 대학생을 중심으로한 20대 초반 젊은이들이다. “그런데 20대 독자들의 성향이 잘 이해되지 않아요.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젊은이들이 체 게바라 브로마이드를 받겠다고 독자 초청행사 몇시간 전부터 와서 지키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도대체 체 게바라를 어떤 의미로 이해하는 것인지….”(실천문학 이순화편집장)
‘체 게바라 읽는 노랑머리들’의 암호를 푸는 코드는 의외의 곳에서 발견된다. 체 게바라 홈페이지(http://cheguevara.com.ne.kr)의 토론방이 그 한 예. ‘홈페이지가 있다는 것을 RATM 동호회 들어갔다가 우연히 보게 됐어요. 요즘 체 게바라 평전을 읽고 있는데…’ ‘전 이분(체 게바라)을 알게 된 게 RATM 때문입니다. 뭐하는 사람인가 궁금했는데…’
방문자들 사이에 체 게바라만큼이나 자주 언급되는 RATM(Rage Against The Machine)은 90년대 초 탄생해 빌보드차트를 휩쓴 미국의 하드코어 록 밴드. 공격적인 사운드에 ‘반제국주의’ ‘반 자본주의’ ‘혁명’ 등 정치적 저항성이 강한 메시지를 담는 이들은 공연때 체 게바라의 얼굴이 새겨진 셔츠를 입거나 기타 앰프에 체 게바라 사진을 붙여 90년대 젊은이들 사이에 체 게바라를 되살리는 기폭제 역을 했다.
RATM의 노래에 맞춰 헤드뱅잉을 하는 20대에게는 체 게바라의 전기를 읽고 그의 브로마이드를 방에 붙이고 배지를 가방에 붙이는 일이 동일한 맥락의 문화적 행위다. 80년대 세대들이 오로지 종이책으로만 체 게바라에 접근했다면 90년대 젊은이들의 ‘체 게바라 알기’는 하드록, 인터넷 홈페이지등으로 경로가 다양해진 것.
출판사는 정확하게 성향분석은 못했지만 이미 젊은 독자들의 ‘달라진’ 요구에 부응해 가고 있다. 체 게바라 브로마이드 1만장을 인쇄해 사은품으로 뿌린 데 이어 곧 체 게바라 셔츠를 만들어 대학가 서점 등에서 판매할 계획이다.
--- 동아일보 00/4/15 정은령 기자
혁명이라는 이름의 희망을 꿈꾸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체대장은 숨쉬는 오늘이다. 가진것에 의해, 피부색에 의해, 국적에 의해 인간이 차별받지 말아야 됨은 절대적 진리이다. 인간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그것이 종교이든 양심이든 마르크스주의 이든 모두 정당하다.
그러나 평등한 사회, 인간이 그자체로서 존중받기 위한 모든 노력은 붕괴했다. 종교는 타락했으며, 양심은 탐욕에 점령당했으며, 혁명은 배반 당했다. 그래서 오늘 체대장은 희망을 간직한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더욱 큰 모습으로 살아있다. 오늘 나는 꿈꾸어 본다. 체대장이 걸었던 시에라마스타의 산맥과 볼리비아의 정글에 서 있는 내 모습을....
영생은 무엇이고, 해탈은 무엇인가. 혁명의 성공과 권력의 달콤함을 뒤로하고 신념의 두 다리로 죽음의 강을 건너 희망을 간직한 모든 이들에 마음속에 살아있는 체대장. 체 게바라. 그 이름은 영생이고, 해탈이다.
--- 2000/04/27 (ihpark)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책 "백치"을 쓰면서 작품의 주인공인 명문 공작 집안의 후예 므이시킨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의 하나로 그리고자 했다고 한다. 그가 일련의 문학작품속의 주인공중 가장 아름다운 인물로 평가한 사람인 레미제라블의 장발장과 로시난테를 탄 동키호테와 함께...
체 게바라로 알려진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는 80년대에 대학생활을 했던 나에게는 두렵고 신비하고 과격한 그래서 감히 범접하지 못할 금서의 주인공으로만 여겨졌고 이념이 구 시대적 유물이 되어가고 있는 2000년대에 장 코르미에 덕택에 비로소 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20세기 역사에 드리워진 이념이라는 화두가 결과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피폐케 만든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중국의 한 가난한 소작인의 아들이 평등한 보다 인간적인 삶의 방식으로 공산주의를 선택하고 완전한 사회주의를 이룩하기 위한 쏟은 열정과 헌신위에 드리워진 문화혁명의 어두운 그림자를 잊지 못하듯이...
체 게바라의 위대함은 그 순수한 열정과 민중을 향한 무한한 애정이 라이게라(La Higuera)라는 조그만 학교에서 서른아홉의 나이로 사살될때까지 한결 같았고 20세기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라 평가되는 쿠바혁명이 무사히 완수 된데 머무르지 않고 항상 자신을 채직질 함에 있으며 그의 정신이 항상 세계 민중의 가슴이 살아있음에 있다.
--- 00/04/19 (sangoh)
가슴에서 불끈 솟아오르는 이 혁명에의 욕구는 지구 반대편의 체 게바라에게도 같은 것이었을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전세계, 전인류의 모순되고 썩은 부분을 도려내기 위한 거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수반되는 책임과 임무를 행한 진정한 실천가였지만, 나는..나는.. 그저 나 자신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희망하는, 그리고 희망하기만을 반복하는, 손과 발이 없는 하나의 뇌덩어리에 지나지 않으니까.
"이 세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행해질 모든 불의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 내가 한 일은 무엇이 있을까. 나는 나 자신만의 무사안일과 이기적인 욕심만을 위해 이 삶을 살아오진 않았는가? 부패를 저지르며 빈곤한 이웃을 돕는 데는 인색한 사람들에 대한 욕만 하고 정작 내가 한 번이라도 제대로 궁색한 이웃을 위해 무언가를 한 적이 있는가? 뉴욕의 화려한 불빛만을 동경하고 아프리카의 죽어가는 어린이의 눈빛은 외면하진 않았는가? 나 자신의 비열함과 무능에 치가 떨린다.
안되겠다. 정말로 이젠.. "자신에 대해 깊이" 더 깊이 알고 세계의 불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성을 갖도록 그리고 무엇보다 행동! 행동! 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아야 겠다. 그것이 비록 작은 것이라 할 지라도. 내가 비록 체 게바라는 되지 못할진 모르지만 체 게바라가 "체"가 되는데는 많은 죽어간 사람들이 있었듯이 나도 내 곁에 "체"같은 사람이 나타나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그를 알고 느끼고 기꺼이 목숨을 나눌정도의 인간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 00/04/09 (dreamout)
평소 '체 게바라'라는 인물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본 그의 첫 모습은 별이 하나 달린 베레모를 쓰고 입에는 시거를 물었으며 수염을 덥수룩했고 눈을 크고 검은 색이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쿠바 혁명의 지도자'란 것 정도였고 게릴라전의 귀재였다는 정도밖에는 없었다. 평소에 궁금했던 인물이라 이 책 '체 게바라 평전'을 선택했고 산뜻하게 제본된 책의 첫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첫 페이지에 쓰여진 그의 말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엔 불가능한 꿈을 하나씩 품자'라고 했던 그의 말이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과연 그는 어떤 삶을 살았던 인물일까? 책장을 넘겼다.
내가 원했던 것처럼 그의 삶에 대한 자세한 글들이 펼쳐졌다. 그의 탄생과 집안환경 그리고 그를 엘리트 의학도에서 게릴라 대장으로 변화하게 만든 그의 긴 여행 그리고그리고.... 쿠바에서의 힘든 전쟁. 강한 정부군과 그를 돕고 있는 강한 미국. 그러나 순수함으로 무장한 그는 끝까지 싸움을 했고 고질적인 심한 천식을 가진 엘리트 게릴라로서 변신했다.
혁명이 끝난 뒤, 자신의 동료들은 혁명정부의 각료로서 변신했다. 그 역시도 경제부장관 또는 외교사절로서 잠시 일을 했었지만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순수한 '사회주의 혁명'이었고 그는 아프리카와 남미를 돌며 혁명전쟁을 진두지휘하다가 결국 CIA의 공작에 의해 총살되고 시체도 목이 잘린 채 잊혀지고 만다.
공산주의가 이미 무너진 이 21c에 내가 그에게 매력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자유진영에 살며 미국문화를 광범위하게 접하는 나는 그를 미워하지 못하는가? 난 그에 대해 알아가면서 그토록 순수했던 인물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리얼리스트가 되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진정한 '로맨티스트'였다.
자신이 믿는 신념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때문에 게바라는 내가 아는 어떤 위인보다 아름다웠다. 순수한 마음으로.. 만약 그가 영달을 추구했다면 그는 아직도 쿠바에 핵심적인 정치인이었거나 그렇게 살다가 죽었을 것이지만 그는 자신과 동료들이 노력하여 해방시킨 쿠바와 같은 세계를 더 많이 만들기 위해 기꺼이 아프리카와 볼리비아의 늪지대로 발길을 돌렸다.
정부군에게서 빼앗은 M-1 소총 한 자루를 들고 말이다.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너는 네가 믿는 자유와 평화'를 위해 네가 이뤄놓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다시 고난의 길을 걸을 수 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답할까... 그가 쫓던 사상이 옳건 그르건.. 그가 살던 세상에서.. 그가 본 현실에서 그는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으로 그가 옳다고 판단한 신념을 믿고 행동에 옮겼다.
이 책을 끝까지 읽으며 '신념의 아름다움'과 '신념을 지키려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는 스스로 리얼리스트가 되자고 말했지만 내가 본 체 게바라는 진정한 로맨티스트였다. 그의 신념과 그가 이룬 미래와 그의 순수함에 이 글을 바친다. 덧붙여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내가 느낀 아름다운 그를 느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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