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홍차, 그 붉은 향연과의 만남
대만홍차, 그 붉은 향연과의 만남 -대만홍차 여행기- 박숙희(한국차문화협회 충북지부장)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진홍색 홍차를 볼 때마다 어린 시절 마당 한 귀퉁이에서 여름 장마비를 맞고 서 있던 붉은 다알리아꽃이 생각난다. 출발 5일전 대만홍차여행 소개를 받고 가능할까 걱정하며 문의를 했더니 다행히 한 자리 남아 있다 길래 겨우 7월 27일부터의 4박5일 여정에 합세할 수 있었다. 석사논문 <한국다례연구>를 마치고 차구경 겸 대만으로 떠났던 때가 1995년 1월이었으니, 10년만의 나들이이다. 당시 나의 눈에 비친 대만은 근검절약하는 생활 속에서 나름대로의 평온함을 즐기며 茶를 중요산업으로 여기는 모습이었다. 타이베이 대만사범대학 근처 찻집에서 철관음을 맛보며 그 향기로움에 매료되어 茶를 살 때에는 좋은 차를 만들어 높은 값을 받는다는 느낌이었다. 서로 다른 배경의 식민통치 아래에서 오랜 시간 시달렸음에도 이제는 노력한 만큼 제값을 받을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편안함이 은근히 부러움을 주었다고나 할까? 레이차와 동방미인, 고산오룡과의 친교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울 것이라는 우려와는 달리 타이베이 공항에서 신죽으로 가는 길은 평온하고 한가한 여름을 만끽하게 했다. 대만의 茶人 장선생이 안내한 식당의 점심은 토속음식을 그대로 맛볼 수 있었고 우리 남도토속음식과 비슷하여 가까운 이웃에 놀러온 듯 친근했다. 식당 옆에는 개인이 운영하는 「생활사 박물관」이 있어서 모두들 호기심에 들어가 보았다. 겉보기에는 60년대 허름하고 작은 가구점처럼 보였는데 층계를 따라 내려가니 대만인들의 지난 세대 삶의 자취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이 도심 속 초등학교 운동장보다 커다라서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중국인들의 현실적인 실속파 모습을 대변하는 꾀죄죄한 티셔츠 차림의 박물관 주인의 이면은 대만의 허세 없는 부유함을 은근히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박물관에서 한참을 걸어서인가 배불리 먹은 점심은 모두 잊고 베이푸의 ‘레이차’를 마시러 갔다. 객가문화를 대표하는 최고의 명차로 14가지 곡물과 포종차를 방망이로 곱게 갈아 우리 미숫가루처럼 물을 부어 마시는데 진한 맛과 향은 갈증해소는 물론 소화를 촉진시키는 한방효과까지 있다. 다음 일정은 모두 기대하는 백호오룡차를 맛보는 일. 보통 오룡차를 연4회 만드는데 비해 1년에 한 번 만들고 농약도 전혀 쓰지 않는, 동방의 미인과 같다하여 동방미인차로도 불리는 이 차는 엄격한 심평을 거쳐 그 등급이 매겨진다. 일찍이 대만의 수출품이었던 사탕수수, 장뇌는 쇠퇴하고 차는 더욱 발전하여 민족문화의 특성을 지닌 산업으로 성장하였다. 대만의 자활이 차에 실려 있다는 것을 제다인들은 물론 차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인지하고 합심해서 좋은 차를 만들려는 의지로 똘똘 뭉쳐있다. 그런 만큼 그들의 차에 대한 등급은 엄중하고 신중하다. 좋은 등급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엿보며 우리 차의 어려움을 논하는 우리의 모습이 이곳에서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구나 라는 생각으로 한국의 다우들에 대한 대접으로 내는 고급 동방미인차가 결코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입맛은 살아 있어 그 달콤한 과일향을 어찌 거절할까? 몸과 마음의 피곤이 일시에 가시는 듯 하다. 대만 최대의 오룡차산지 남투현. 여행 동안 봉사의 기쁨으로 안내를 맡은 대만 茶友 수란선생의 남편은 오룡차 제다대회 최고상인 신농장(神農狀)을 수상한 명인이다. 녹곡 수란선생 댁을 저녁식사 후 방문하여 명인이 만든 오룡차의 향기와 맛을 음미하고 있자니, 멀리 한국에서 온 다우들을 환영하기 위해 대만차인회 다우들이 하나씩 모여든다. 국경이나 언어의 제한도 없는 ‘茶’의 미묘한 힘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녹곡의 깊은 숲속에 자리 잡은 대만에서의 첫 숙소 맹종산장은 그 자체가 자연의 일부였다. 산뜻한 나무 냄새 속에 새벽 산길을 걸으며 맛있는 홍차를 만들러 갈 준비를 했다. 홍차제다인 대열에 서서 포리(埔里)의 죽기(竹器), 칠기(漆器)박물관을 들러 가다보니 아름다운 일월담이 눈앞에 펼쳐진다. 고산지대의 좋은 토양과 호숫가의 안개가 어우러진 천혜의 우량차 생산지. 일본통치시절 만들어진 ‘다업개량장어지분장 홍차시험장’은 내일까지 대만차인회 30여명과 우리팀 20명이 함께할 홍차학습장이자 차연회장(茶宴會場)이다. 일본통치시절 아삼종을 들여와 파종에 성공하며 현재 대만차 수출시장의 주요차종으로 자리를 넓혀가고 있는 홍차. 차잎이 그대로 살아있는 공법으로 만드는 대만형 홍차는 위조, 유념, 해괴, 발효, 건조의 5개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제다과정 설명을 듣고 생전 처음 중엽종 차잎을 따서 시들리기를 하며 서로 미소로 우의를 다졌다. 저녁을 먹고 합동 차연회장으로 향했다. 구겨질새라 조심스레 갖고간 모시옷을 차려입고 준비해 간 다구로 우리차를 우리고 청주에서부터 가져간 다식과 음식전문가 김동희님이 만들어온 너무 예뻐서 먹기조차 아까운 매작과를 윤영예, 노군자씨가 냈다. 연회장은 금방 차향 속의 정다운 담소장이 되었다. 한문으로 필담(筆談)을 나누며 우리차를 소개하고 대만의 다양한 차자리를 접하며 명함을 주고받자니 이웃집에 놀러온 듯 유쾌했다. 차자리를 접고 일월담 호숫가 숙소에 모여 서로 노래와 춤을 선보이며 여흥을 즐겼다. 못하는 노래가 결코 부끄럽지 않은, 서로 부족함을 박수와 웃음으로 채워주는 시간이었다. 늦게 잔 탓일까 호숫가 산책도 못하고 아침식사를 마쳤다. 어제 위조실에 널어놓은 찻잎을 유념하러 가니 대만차련회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30분 정도 유념을 하니 구리빛으로 찻잎이 변한다. 발효하고 건조시키는 동안 회의실에서 대만차의 현황에 대한 청장님의 강의를 들었다. 홍차시험장의 온갖 차나무재배시험장과 끝이 안 보이는 차밭 때문인지 차수출량이 엄청날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대만은 차수입량이 더 많은 곳이란다. 수입된 차는 다시 가공하여 대만차로 둔갑하여 수출하는데, 이에 따른 생산, 제조, 유통일지를 체계적으로 만들고 농약문제 해결을 위해 주력하고 있단다. 홍차에 대해 그는, 「홍차는 ‘좋은 차’이다. 성공여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대량생산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더 좋은 홍차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하였다. 드디어 홍차가 완성되었다. 심평실에는 우리가 만든 차가 번호가 매겨져 심평배에 담겨 있었다. 시험장 관리자들은 4등까지 순위를 매겼는데 우리팀 단장이신 양교수님이 2위를 하셨다. 모두들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서로의 차를 감별하며 차맛을 보고 한자리에 모여 기념촬영을 하고 작별을 하였다. 이제 대만 고유문화가 숨쉬는 대남으로 간다. 차와 음식의 자연스러운 화합 대남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물줄기 옆으로 음식 맛이 소문나 손님이 줄을 선 식당에서 맛있는 저녁식사를 했다. 문화의 고장답게 정갈하게 담긴 음식들은 함께 참여한 음식전문가들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최고급 호텔에 앉아보지도 못하고 짐만 내려놓은 채 거리로 나왔다. 늦은 시간인데도 손님들로 북적이는 거리의 음식점들. 그 속에는 차를 유난히 선별하는 우리와 달리 자연스럽게 차가 어우러져 있었다.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다는 ‘한림다원’으로 갔다. 1층은 주류와 책판매점, 2층은 차음식점, 3층은 차전문점으로 이루어진 곳인데, 버블티와 보이차빙수를 주인에게 대접받고 차전문잡지도 한 권씩 선물받았다. 차판매소인 ‘가목당’으로 자리를 옮기니 소박한 풍취가 베인 주인은 직접 보이차를 만들기도 하는 차전문가답게 40년된 보이차를 손수 우려 대접하며 우리를 맞는다.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의 사진엽서를 선물받고 진열된 다기, 책, 보이차를 구경하였다. 보이차는 대만도 무척 비쌌다. 보이차뿐만이랴? 그래서인지 사소한 차 한통이라도 애정을 갖고 깔끔하게 관리하는 모습이 이 차 저 차 대충 늘어놓고 마시는 나에게 여러 가지 반성의 마음이 일게 하였다. 다음 날 일찍 다시 신죽으로 출발했다. 성업 중인 차음식점 ‘수룡음’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특히 조개와 어우러진 수세미 요리는 담백하고 시원하여 다섯 번이나 덜어 먹었다.문산포종차로 유명한 평림(坪林)의 차박물관은 차역사와 제다법, 자사호를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박물관장이 주신 최고급 문산포종차와 다식을 먹으며 잠시 갈 길을 잊었다. 삽상하고 향기로운 차향을 뒤로 하고 타이베이 중심가로 왔다. 천인명차 분점에서 본음식, 디저트, 차를 개인별로 달리 주문하여 ‘골라 먹는 재미 속의 저녁’을 먹으며 대북의 차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중화차련회장인 도예가 장선생댁을 방문했다. 찻잔 2개씩을 선물받고 대만차의 핵심인 육우다예중심 강사가 우려주는 맛있는 차를 마시며 좋은 다기들을 감상하노라니 밤이 깊어가는 것도 잊어버렸다. 마지막 날 아침, 근교 앵카의 도자박물관을 둘러보고 공항으로 왔다. 여행 동안 안내하느라 집에도 제대로 못 들어간 수란선생과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대만의 차는 생활자체이다. 차를 높여 구분하지도 않고 따로 감싸지도 않는다. 그들은 서로 공유하고 힘을 모아야만 발전할 수 있고 살아남는다는 논리를 터득하고 그 방법을 나름대로 실천하고 있다. 좋은 차를 만들어 좋은 평가를 기다리는 초조함이 위기감마저 감돌만큼 곳곳에 넘치지만 아무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우리는 얼마만큼 좋은 차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가까운 이웃끼리 힘을 모으는가? 신중한 계획과 성실한 노력도 없이 우선 내보이고 싶은 성급한 욕심을 내세우는 것은 아닌가? 좋은 차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제다법을 배우고 공유하는 넓은 마음, 좋은 차를 감별하기 위해 많은 차를 마시고, 다양한 차전문지를 읽으며, 내 옆의 다우들을 격려하고 아끼노라면 나날이 성장하는 나의 모습을 그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숙성을 기다리는 내가 만든 홍차. 홍옥처럼 붉은 찻물을 따르며 좋은 차문화여행을 마련해주신 주최측에 감사하며, 함께 한 다우들과 즐거움을 나눌 날을 꼽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