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문고의 줄을 고르듯이, 그러나 양변을 여의지 않고
덕현스님
계성변시광장설溪聲便是廣長舌인댄,
산색기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가
야래팔만사천게夜來八萬四千偈나
타일여하거사인他日如何擧似人이리요.
이것은 옛 중국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었던 소통파의 게송입니다.
계곡 물소리는 문득 부처님의 사자후와 같은 장광설이거니,
산빛인들 어찌 청정법신 비로자나의 몸이 아니랴?
밤이 오는 것이 마치 팔만사천의 게송과 같으나,
뒷날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들어 보일 것인가?
원래 소동파는 유불선儒佛仙에 통달한 석학이었습니다. 당대 불가의 뛰어난 선지식들과도 많은 교류가 있었는데, 어느 날 상총常聰 선사라는 분을 찾아가서 법담을 나누다가,
"자네는 큰 스님들의 법문을 널리 참문했다지만, 어찌 무정의 설법은 들으려고 하지 않는가?" 하는 말씀을 듣습니다.
무정無精이란, 유정有精 곧, 우리 사람이나 다른 동물들처럼 정신이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저 초목이나 대자연과 같이 정식精識이 없는 것들을 말합니다. 원래 법은 부처님이 깨달아 설하신 것이고, 또, 우리가 그 진리에 나아가 지혜의 눈을 떠야 비로소 설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설법은 감히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상총 선사께서는 부처님이나 조사뿐만 아니라, 일체의 무정이 다 설법을 하고 있다고 일갈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꽃 한 송이가, 또 여러분이 깔고 앉은 좌복이 하는 설법을 듣고 계십니까? 바로 이런 설법을 들을 줄 알아야 된다는 것이죠. 이 게송에서 나오듯이, 저 산빛이나 물소리, 그 어떤 것도 부처님의 법문 아닌 것이 없고, 또 부처님의 참 몸 아닌 것이 없습니다.
처음에 소동파는 스님의 경책을 듣고 참담하고 무안하기만 했지, 그 묘의를 투득透得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답답한 마음을 안고 산문을 나서 골짜기 따라 길을 내려오는데, 문득 폭포수를 만나 계곡물이 큰 우레 같은 굉음을 내며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고 확연히 가슴이 열리며 대오大梧했습니다. 그리고 이 게송을 읊은 것입니다.
이 세상의 진리 자체는 부처님이 계시다고 해서 세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요, 부처님이 입멸하셨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분이 깨달음으로써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에나, 우리가 눈길 두고 귀 기울이는 그 모든 곳에 현존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순간순간이 진리를 벗어나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 진리가 우리를 이 생사의 고통에서 건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생사가 온통 괴롭고 답답하고 문제투성이인 것 같아도,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이 순간순간에, 그리고 도처에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느 때나, 오가는 어디에나 펼쳐지는 대자연의 법문을 듣고 법열에 잠기며, 그 법안에서 부처님처럼 안심입명安心入命하고 열반涅般의 대락大樂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다만 우리의 눈을 뜨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 그 법문을 듣고 그것과 하나가 되기만 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오늘 불기 2558년 갑오년 하안거 결제를 맞았습니다. 안거安居의 문자적 의미는 '편안하게 머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일상은, 자연 속에서 끊임없이 도전을 받으며 하루하루 온갖 문제에 시달리는 일이어서 하루도 편한 날이 거의 없습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가 늘 희구하는 것은 대안락이지만, 그것은 먼 미래나 가능할지 모르는 공상일 뿐, 대부분 현실의 우리는 그런 경지, 이상세계를 그저 희망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속에서 어떻게 진정으로 안거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는 자기 마음을 크게 열어서, 분별이나 시비에 사로잡히지 않고 일체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들 본연의 아름다움이나 깊은 울림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눈 먼 사람이 그들 앞에 펼쳐지는 온갖 아름다움이 있다한들 그것을 취할 수 없듯이, 진리에 눈을 뜨지 못해서 우리 목전, 존재 구석구석에 드러나 있는 진리를 순간마다 놓치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안거에 들어가면, 치열하게 정진하는 것도 참으로 중요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스님들처럼 목숨 걸고 선원의 일과대로 정진하지는 못할지라도, 우리 일상의 순간순간 내 마음을 잘 챙겨가다 보면 어느 날 문득 활연히 마음의 눈을 떠 소동파 거사처럼 부처님의 법을 참으로 깨달아 수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장애 속에서 참 해탈을 얻는, 진정한 안십입명의 길이죠. 우리가 느끼는 온갖 제약이나 한계,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의 상황……. 이런 것들도 엄밀히 말하면 모두 우리 마음속에서 공연히 시비하고 분별하며 선을 그어 놓은 장애들이지, 실제로 그것들이 우리를 묶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눈 뜬 자에게는 그런 장애속의 현실이 법계의 법문이고, 이 세상의 온갖 소음이나 눈엣가시들이 그대로 부처님의 장광설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크고 활연한 마음을 가지고 이 세계 전체를, 순간순간 법으로 보고 듣고 하다가도 가끔은, 이 생사의 괴로움을 실답게 벗어나기 위해 한 번 목숨 걸고 수행에 투신하는 대결단도 필요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스님들처럼 출가도 감행할 수 있고, 또 이번 여름에도 있을 법화림 수행 프로그램 등에도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옛날 신라 혜통慧通 선사라고 하는 분이 계셨는데, 이분은 출가 전 어린 시절에 사냥을 매우 즐겼다고 합니다. 하루는 물가에서 수달을 만나 놓치지 않고 화살을 날려 단번에 잡았습니다. 놈의 껍질을 벗겨내고 살을 대충 저며 뼈다귀는 근처에 아무렇게나 버리고 잘 구워 먹었지요. 그런데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잠이 들었다가 꿈속에서 웬 짐승 새끼들이 거푸 가슴을 부여잡고 매달리는 통에 연신 떨쳐내다 몹시 석연찮은 기분으로 깨었답니다. 뭔가 느낌이 있어, 전날 수달을 잡아먹었던 곳을 다시 찾아가 보았죠. 그랬더니 놀랍게도 버려둔 뼈다귀가 없어진 거예요. 자세히 보니, 땅바닥에 졸졸 누가 끌고 간 자국이 나 있더랍니다. 자기도 모르는 힘에 끌려 제법 멀리 떨어진 산속의 한 굴까지 따라 들어가게 되었지요. 마침내 안을 들여다보고 혜통은 경악했습니다.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간 그 수달 뼈가 갓 나은 새끼들을 안고 누워 있었습니다. 말을 잊고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 모르던 혜통은, 살생을 좋아하고 아무 거리낌 없이 짐승의 몸을 잡아먹던 그간의 생활에 대해서 크게 뉘우치고 그 길로 출가를 결행했습니다.
이후로는 치열하게 구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별다른 소득이 없자, 마침내 중국으로 구도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큰 선지식으로 알려진 무외삼장을 찾아가 그 문하에서 수행을 배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삼장법사는, 조그만 나라 신라에서 온 중이, 그간 살생이나 일삼으며 동물들을 얼마나 숱하게 잡아먹고 했는지 몸에서 고약한 냄새만 나고 살기가 느껴진다며, 결코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간절한 도심을 더욱 다지고 진심으로 스승에 귀의하는 마음으로 3년이나 기다렸지만 어떠한 가르침도 받지 못했지요.
어느 겨울날, 혜통은 크게 분발하는 마음이 일어나 선사가 계신 방 앞으로 가 이글이글 숯불이 타는 쇠화로를 들어 머리 위로 이고 서 있었습니다. 정수리가 지글지글 타는데도 그대로 버티자, 나중에는 머리가 깨지는 큰 소리가 들리면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제야 무외삼장이 뛰어와서는 불에 탄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진언을 암송했습니다. 놀랍게도 금세 그 상처는 아물었고, 깨어난 혜통은 차차 스승의 친절한 지도를 받아 오래지 않아 도를 깨닫고 큰 법력을 지닌 선사가 되었습니다. 그때 머리에 난 상처로 혜통 선사는 중국에서 왕 화상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그 상처가 '임금 왕'자 모양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었죠.
후학인 우리는 이 혜통 선사와 같은 치열한 구도심도 꼭 지닐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을 크게 넓게 가지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법문 아닌 것이 없고, 부처님 법신 아닌 것이 없지만, 우리가 아직 소동파 거사처럼 확철히 진리에 눈 뜨지 못했다면 여전히 세상살이는 괴롭고 보잘 것 없는, 초라하기만 한 중생놀음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 크게 분발해서 한 번 목숨 걸고 도를 구해보아야겠지요.
저는 어제 법회를 마치고, 치과에 가서 잇몸 치료를 좀 받았습니다. 마침 금강경 강의에 나오시는 한 분의 거사님이 치과 의사로서 친절하게 거듭 내방을 권하는 바람에 그분 병원으로 가서 진료를 받게 되었는데, 여러 가지로 깊은 감명이 있었습니다.
우선 의원으로서의 큰 자비심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병자들이 있고, 환자들을 치유하고 돌보는 의사들 또한 많이 있지만, 사실 의사로서 큰 자질이나 직업적인 소명의식보다는, 돈벌이나 생계의 수단으로 의료 행위를 하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 시대의 진정한 의사로서 부족함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디든 탈이 나서 자기 몸을 의사에게 맡기고 있다 보면, 이 몸뚱어리가 깨끗하지도 않을뿐더러 참으로 초라하고 못난 것이라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만날 이런 음식, 저런 음식 맛이 있다 없다 평하면서 씹어 먹고 살다가 그 이에 문제가 생겨서 그것을 사진으로 찍고 들춰가며 치료를 받고 있자니, 이토록 추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더러워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큰 자비심으로 다해주는 손길이 아주 거룩하게 여겨질 따름이었습니다. 그분의 부모형제이거나 자녀들일지라도 그렇게 하기 어려웠을 텐데 그런 한결같은 자비심으로 살펴주시는 게 순간순간 감사해서, '아, 이런 마음이 진짜 보살마음이고, 구도의 마음이로구나,'하는 감탄이 일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부처님을 '의왕醫王'이라고 합니다. 삼계에 윤회하고 있는 중생들이 겪는 근본적이며 벗어나기 힘든 고통은 바로 생사의 고통입니다. 모진 고통을 당하며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느라 또 참혹한 고통을 겪고, 태어난 이상 또 죽는 고통을 피할 수 없고……. 살아가는 내내 크고 작은 안팎의 우환과 고뇌에 시달리고 ……. 그야말로 생사윤회의 고통의 거듭되는 거죠. 나고 죽는 그 큰 고통을 알아차리고 거기서 벗어나려 한다고 해도, 그 안에서 길을 찾기란 참으로 힘이 듭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이 생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 주시고, 우리의 마음에 있는 무지와 진심의 병을 실제로 치유해주시는 것은, 살면서 몸으로 겪는 크고 작은 어려움이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세상 어떤 의사의 치료보다 크고 완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잠시 병에 시달리다 치료를 받아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물론 필요한 일이고, 그런 의료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이 그와 같이 오래 아프다가 지병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머지않아 또 다시 크고 작은 병고에 시달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러나, 부처님께서 우리를 삼계의 고해에서 건져 생사고라고 하는, 정말 지중한 큰 병을 고치시는 일은, 한 번 그 병을 떨치고 일어나면 다시는 아프지 않고, 영원히 병들어 죽지 않는 참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의료행위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진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거사님은 일찍이 불교에 입문해서 나름대로 수행을 치열하게 해오던 분이었습니다. 당신이 하고 있는 치과 치료를 수행 삼아 늘 자기를 돌아보는 삶을 살아온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의왕이신 불타의 가르침을 세상의 의사로서 보다 철저히 증험해 온 셈이죠. 그것이 둘이 아님을 닦고 깨달아 온 것이었습니다. 손이 너무 떨리거나 힘이 없이 치료를 더 할 수 없을 때까지는, 나이가 많이 든다 해도 수행삼아서라도 진료를 계속 해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한 번은 그 거사님이 어떤 분으로부터,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할 때 '루뻬'라고 하는 돋보기안경을 끼면 훨씬 더 잘 볼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즉시 그것을 실제로 쓰기 시작했는데요, 그전까지는 맨눈으로도 구석구석 세밀하게 살피고 잘 치료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물을 불과 두어 배 크게 보이게 하는 그것을 쓰고 보니, 그전에는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못하면서 얼마나 함부로 기계나 연장을 다루며 환자를 보아왔던가, 크게 반성을 했다고 합니다.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잘 진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성제四聖諦에서 먼저 이 세상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깨달아야 그다음에 고통의 원인을 찾게 되고 이 고통이 다 사라진 열반을 향한 길을 나아가게 된다고, 마침내 그 방법을 찾아 실행하게 된다고 배우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의료 행위에서도 먼저 병을 잘 진단해야 그 병인을 잘 찾아내고 말끔히 치료해낼 수 있는 거죠. 약을 잘 짓거나 침을 잘 놓는 의사보다는, 진맥을 잘 하는 의사를 더 뛰어난 의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진맥이나 진단은 모두 높은 안목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볼 때도 바르게 눈뜨지 않으면 이 세상의 고통이 무엇인지, 찾지 못하고, 결국 고통에서 해탈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 그분이 진료를 해오면서 심화해온 것은 사실 의사로서, 수행자로서의 안목眼目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그동안 치료를 계속해오면서 인간의 육신과 마음, 영혼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깊이깊이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저에게도 이것저것 지내온 삶이나 수행해 온 과정을 물으시면서, 스님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몸을 잘 쉬는 것이라고 조언하기도 했습니다. 요즘처럼 제 이에 문제가 생긴 것은 교통사고를 당한 후의 일이었습니다. 온몸의 기혈 순환이 흐트러지면서 이런저런 병증이 생겼는데, 잇몸이 붓고 들뜨게 된 것도 그 중 하나였지요. 사고로 인해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던지라, 사실은 그때까지 해오던 것처럼 산속에서 수행하고 일하면서 사는 것은 힘들겠다 싶어서 모든 것을 인연에 맡겨버리고 내가 이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길상사 주지를 맡았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항상 힘든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그럭저럭 지내온 것 같습니다.
그 인연을 따라, 그런 마음으로 지금 여기까지 왔네요. 그런데 그분의 지적을 받고 보니 여러 가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정신없이 상황에만 휘말려오다, 한번 자신을 객관화시켜 보게 된 것입니다.
원래 수행은 나와 남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 함께 열반으로 나아가기 위해 해나가는 것입니다. 발심發心도 자기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으로만 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 그 고통을 내가 덜어줘야겠다는 마음으로만 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 그 고통을 내가 덜어줘야겠다는 보살심으로, 큰 보리심을 일으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는 해도, 자기 자신이 정말 다른 사람을 건질 만한 아무런 도구도 없는데, 그저 안타깝고 급한 심정만으로 무작정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 보살심은 거룩하지만, 뛰어든들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함께 끌어안고 죽는 일밖에 없겠죠.
결국, 수행은 결과로 다른 이들을 돕고자 한다면 먼저 자기 수행을 철저하게 해야 하고, 비로소 자기 자신이 안심입명한 후에 다른 이들 앞에 나서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그런 길을 열어 보이고자 출가하셨고, 수행하여 성도하시는 모습을, 45년 설법보다 먼저 보여주신 거죠.
저는 이번 하안거부터 조금 많이 쉬려고 합니다. 조금 더 수행자의 본분으로 들어가려고요. 그렇다고 지금까지 해오던 법회라든지, 불가피하게 사람들을 만나는 일들을 전격 중지하지는 않겠지만, 그 또한 많이 조절해가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수행에 몰두할 수 있는 공간이나 기회들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이는 단지 저만의 안위가 아니라 삶에 지쳐가고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해 필요한 일임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흔히 온갖 사건사고와 병고들에 시달리면서 근본적으로 거기서 한번 훤칠하게 벗어나길 원하기도 하지만, 지금껏 지내온 삶의 흐름이나 주변의 요구에 휘말려 크게 떨치고 나오지 못하고, 그래서 정작 해야 할 일은 수행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수시로 벌어지는 자잘한 요구들에 되는 대로 응하면서 시간을 허비하게 되지요. 그러다가 결국 큰 것들은 놓치고 큰일을 당해서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는 인생을 살게 되고요.
이런 기회에 여러분도 스스로의 삶을 크게 한번 돌아보고 중요한 일을 먼저 할 계획들을 꼭 세우셨으면 합니다. 최소한 이번 하안거에는 여러분도 꼭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얼마 동안이라도 아주 진지하게 수행해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걸고 한 번 해봐야겠다는 마음을 내셔야 합니다. 시간도 짧고, 여러가지 여건들이 여의치 않을지라도, 여러분의 원이 크고 생사의 고통을 통해 일으킨 발심이 진실하다면, 비록 단 한 번의 수련회에 동참한다 해도 결코 소홀한 수행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이번 여름 안거는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을 챙겨가면서 뒷날에 널리 중생들을 건지는 일을 기약하는 기점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한편으로는 넓고 큰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 모든 것이 진리의 현현이자 부처님의 모습이며 이것을 떠나 따로 부처나 진리가 있지 않다는 것을 깊이 믿으시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진실로 존재를 걸고 가행정진加行精進해서 부처님이 깨달아 증득하신 것을 얻지 못하면, 이 세상의 수많은 이웃들의 고통을 눈앞에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분발해야 합니다.
가끔은, 최소한 한 번은, 묵은 틀을 박차고 나가 모든 것을 떨치고 수행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이 안거가, 또 이번 생이, 그리고 이 순간순간이 우리 모두에게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는 돌파구를 마련해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고인의 게송입니다.
차신불향금생도此身不向今生度 이 몸을 금생에 건지지 못하면,
갱대하생도차신更待何生度此身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할 것인가?
모두 성불하십시오.
2014년 5월 13일 결제법문 中
소식지 法華법화 2014 / 6
첫댓글 맑음님,
하안거 결제 법문을 다시 새겨보고 싶어도 이런 저런 이유로 미루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이렇게 수고를 아끼지 않고 올려주시니 고맙습니다.
이 공덕으로 날마다 행복하고 좋은 날 되시길 ^^ _()_
" 이 안거가, 또 이번 생이, 그리고 이 순간순간이
우리 모두에게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는 돌파구를 마련해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