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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무명낳이 전설
정 원 구
느닷없이 핸드폰 진동이 느껴진다. 전화를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곧장 건너온다. 그녀가 여보세요? 라고 다시 그를 채근질 했을 때 그는 결국 핸드폰을 닫고 베갯머리에 내려놓고 말았다. 다시 드러누우려다가 그녀와 함께 지리산 자락 배양마을에 있는 목화 전시관을 거쳐 무명옷 ‘천연염색낳이’ 홍계할머니를 찾아가기로 한 약속이 불쑥 생각났다.
그는 다시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꿈속의 어머니를 기억하게 하는 공 선생 그녀의 물먹은 듯한 은근하고 축축한 목소리는 제법 오래 전부터 익숙해져 있었다. 금세 막 목욕탕에서 간단히 목욕을 끝내고 마지막 머리에 묻은 샴푸 거품을 헹궈내기를 끝낸 듯한, 채 물방울도 털어 내지 못한 듯한 젖은 목소리로 여보세요? 하는 통에 가끔씩은 할 말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불쑥 그녀의 보조개가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살짝 웃는 얼굴이 다가선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좀은 따분하고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명옷 토종 염색이라니? 한참 시대가 뒤떨어진 이야기 같지만. 그녀 말대로라면 자연염료로 빛깔 곱게 물들인 무명베 우리 옷들이 요즘 자연산 기호 풍조에 따라 제법 관심들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좀은 따분하고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빛깔 고운 무명옷이라니? 그 또한 한참 시대가 뒤떨어진 이야기가 아닌가.
공 선생은 오는 토요일 오전 열 시에 출발하쟀다.
도서관은 조용한 분위기로 가라앉아 있았다. 오후 세 시 무렵의 햇살이 약간 비끼어 유리창을 넘나들고 있었다. 때마침 건너편 언덕에 마주하고 있는, 최근 서울 국립 최고의 대학에 수석 합격자를 배출한 사립 여자고등학교 타임벨이 은은한 가락으로 도서관 앞 꽤 넓고 잘 정돈된 정원을 살짝 흔들다가 가라앉는다. 잠시 열람실 안의 분위기도 약간 소란스러워지다가 차분히 가라앉는다.
지난 밤 꿈속은 몹시 안타까웠다. 집에 가고 싶어-. 집에 가고 싶어-. 어린애가 다시 울음을 터뜨릴 때 그는 퍼뜩 눈을 떴다. 혼미한 정신이면서도 주변이 낯설었다. 혼자 외롭고 무서워서 엄마를 부르며 막무가내로 집에 가자고 울고 있는 어린애가 바로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 아니면 만나 볼 수 없는 어머니. 그런데 그를 나무라는 목소리가 너무나도 생생하여 꿈인 줄 알면서도 순식간에 꾸중하던 어머니의 목소리 여운을 가시는 데 시간이 걸렸다.
가끔씩 꾸는 꿈속이지만 그는 왜 울고만 있을까? 깨어나면 두통이 오면서 전신에 맥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아무리 꿈속이라지만 무슨 까닭으로 집요하게 집에 가자고 우는 건지. 어떤 때는 정말 울고 난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렸다. 며칠 전부터 모래가 들어간 듯 거칫거리는 눈에 달라붙어 있는 눈곱을 떼어내는데 창을 뚫고 들어온 아침 햇살이 강렬하게 눈을 찔렀다.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하기를 반복하는 어설픈 동작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눈을 다스리는 동안 자꾸만 어깨가 결려 왔다.
그는 좀 무료한 느낌으로 창문을 열었다. 화단에서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낯익은 정원수들이 눈앞으로 다가선다. 후피향나무, 돈나무, 꽝꽝나무, 은목서, 금목서, 오색남천, 월계수, 동백나무, 홍단풍, 서부해당화, 당종려, 앵두나무, 살구나무, 호랑이발톱, 목련, 도장나무………그 너머로 키 큰 향나무가 말끔히 전지를 당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대열을 짓고 쭉 늘어서 있다. 그 앞쪽으로 지난봄에 총총 달린 열매를 따서 술을 담아 향기로운 맛을 보게 했던 매화나무가 다섯 그루씩 양쪽으로 늘어서 있을 것이고, 그 더 너머로 빨간 꽃을 풍성하게 매달곤 하던 장미 넝쿨이 운동장 스탠드를 따라 다발로 누워서 길게 늘어서 있을 것이다.
처음 느낌으로는 이렇게 정원에 관상용 나무들을 다양하게 갖추고 있는 경우가 드문데? 하는 생각과 함께 사뭇 뜻밖의 마음씀씀이로 다가선다. 그건 아마 이 학교의 개교 업무를 맡았던, 그리고 유일하게 일반직 출신으로서 초대 교장으로 부임했던, 꽤 유명했던 사람의 교육에 대한 애정이 매우 두터웠던 까닭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디선가 좀 진한 만리향이 코끝에 와 닿는다. 도서관 입구 현관 오른쪽에서 둥글게 머리를 다듬어 빗고 서 있는 금목서 가지 끝에 자잘하게 다발로 핀 노란 꽃잎들이 아침 이슬에 깊은 향을 녹여 머금었다가 따스한 햇살에 입김으로 멀리까지 불어내고 있을 것이었다.
망연한 죄책감이 그를 한동안 몹시 괴롭혔다. 왜 그랬을까? 어머니는....? 마지막 수술을 포기하도록 까지 당신이 고통을 숨기시다가 퉁퉁 부어올라 온 몸이 망가지도록 참고 견디신 것은.....? 당신의 고집스런 모진 인고를 생각하면 어머니가 오히려 몸서리치도록 무서웠다. 마지막 눈을 감으면서도 손자 손녀의 이름으로 된 통장을 남겨주신 어머니. 그는 너무너무 섭섭하고 억울하고 죄스러워서 한동안 잠을 잘 수 없었다. 몇 번이고 왜 그랬을까? 하는 이 괴로운 자책감. 어머니의 지독한 한을 상상하면서 그는 꿈을 자주 꾸게 되었다. 몹시 허기진 어머니를 향한 안타까움. 원망스러움. 그러나 꿈으로만 만나볼 수 있는 어머니를 향한 목마름.
홍계할머니의 다급한 전화 목소리가 심상찮았다. 대학병원 응급실로 급히 올라오라고 했다. 벌써 유방암 3기를 넘어 이미 온 전신에 전이가 된, 아주 안 좋은 상태라고 했다. 너무나도 갑작스런 통고에 그는 어머니 손을 잡고 놓지를 못했다, 끝내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어머니 머리맡에 그대로 꿇어앉았다. 어머니 당신의 모진 삶의 인고는 무슨 의미였을까? 마냥 무서움으로 속내를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한 주먹 진통제로 아픔을 숨기려던 어머니의 웃음은 오래도록 마음 언저리에서 습기를 머금은 채 그를 괴롭혔다. 그는 어머니의 손을 오래도록 놓치지 않으려 했다. 어머니는 그를 항상 죄인으로 형벌을 내려주시곤 했다.
여섯 살이던가? 소년이 태어나고 자란 초가삼간 집 바로 앞에 무논에서는 미꾸라지랑 논고동이 참 많았다. 거머리는 또 어떻게 그리도 많든지. 개구리밥으로 파랗게 덮인 무논을 헤집고 다니던 개구리는 밤이 되면 와글와글 시끄럽게 울었다. 논두렁에는 수양버들이 쭉 늘어서 있고 그 너머로 옥산 구비를 돌아 들녘을 가로지르는 시내가 맑게 흘렀다. 참 혼자서라도 놀기 좋은 집이었다. 그 집을 떠나 읍내의 커다란 기와집 문간방으로 이사를 했다. 소년을 읍내 학교에 입학시키려는 어머니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해가 저물 무렵이면 여러 날을 어머니에게 집에 가자고 들볶곤 했다. 도저히 다닥다닥 이어간 큰 동네의 대갓집 문간방에 정이 가지 않았다.
가끔씩 어머니는 소년에게 콩알이 박힌 사탕을 입에 물려주면서, 이제부터는 여기가 우리 집이라고 어르다가 그래도 막무가내로 집에 가자고 보채는 소년을 노려보면서 버럭 화를 내곤 했다. 이제 시골의 그 집은 우리 집이 아니라고. 여기가 우리 집이라고. 아무리 철없는 아이라지만 사내대장부는 아무데서나 눈물을 흘리면서 고집을 부려서는 안 되는 거라고. 엄하게 꾸짖던 어머니의 앙칼진 목소리는 소년을 몹시 두렵게 했다. 월남 전쟁에서 베트공 기습을 받아 전멸한 비둘기부대의 한 병사이던 아버지의 유골을 땅에 묻고 난 후의 일들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아이가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중고등, 대학을 거쳐 교편을 잡을 때까지 밤낮없이 무명베를 가위로 자르고 만지면서 낡은 재봉털을 돌렸다. 가끔씩은 명주 비단옷을 만들거나, 가는새 하얀 광목 안팎에 목화솜을 속감으로 받친 누비적삼과 바지를 만들어 윗채 마나님과 며느님에게 가져다드렸다. 이웃마을 밥술깨나 먹는 집 아낙네들의 부탁을 받고 색깔 고운 인조비단옷을 만들어 가져다주기도 했다. 수입도 꽤 괞찮아서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중등학교 교사 임용고시를 거처 여기 고등학교로 부임했을 때는 큰 도로변에 한복집 점포를 내어 꽤 유명했다.
느닷없이 거미 한 마리가 창문 바로 앞에서 벌써 칙칙한 단풍으로 물들어 있으면서 가끔씩 낙엽을 떨구는 살구나무 가지 사이를 비집고 거물을 쳐두고 가만히 엎드려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거미는 머물 곳 없이 헤매다가 사람의 온기가 풋풋한 창가에서 실로 짜 맞춘 촘촘한 그물 집을 짓곤 한다. 놈은 가을 반짝거리는 오후 햇살의 흔들림에서 참으로 묘한 빛의 허우적거림을 연출한다. 표정 없는 바람이 불 때마다 측은한 낮달이 수줍음을 뿌리게 되고, 여덟 모서리 둘레로 수없이 작은 소망의 방울들을 매달고 있다.
거미는 허구한 날을 허공에 떠서 자기 몸을 얽어매는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한마디 불평도 없다. 허지만 저렇도록 길게 뿜어내는 거미줄은 아마도 나름대로 깊숙한 속의 바닥에서 애처로운 욕망을 한 가닥 타래실로 사려두었다가 허허로운 시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슬슬 풀어내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 만큼 거미의 한이 깊고 오랜 사연의 이야기일는지? 어쩌다가 거미줄은 한 마리 벌레라도 걸려들기만 하면 영원한 미로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하다가 고스란히 박제를 만들어버리는, 신비로운 전설의 고향일 것만 같은 생각을 해 본다.
엊그제께 밤늦게 초산 당숙의 카랑카랑한 금속성 전화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나무라고 있었다. 항상 그렇지만 당숙의 사리분명하면서도 묘한 단호함과 권위의식을 지닌, 그러면서도 좀은 현학적인 다변에 부담스러움을 느끼고 있는 편이었다. 약간 마음으로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투에서 뭔가 소화가 잘 안 되는 거부감을 가끔씩 남기곤 했다. 문중 일에 소극적인 족하들을 가끔씩 나무라고 있지만, 그래 바쁜 사람을 두고 어쩌라는 말인가, 하는 불평들을 은근히 품게 했다.
지난번에 우리 문중 <퇴헌공정천익사적보존회> 정 회장 외 문중 대표이사 일동이 문화관광부에 건의사항으로 공문을 보냈던 거는 알고 있제? ………그 게 우리 문중 뜻대로 <문화재(사적) 지정 명칭 변경예고 통보> 공문이 회신 통고문으로 왔단 말이다. 그러니껜 이번에는 저쪽 남평 문씨 문중에서도 꼼짝 못하게 된 거 아닌가. ……… 이젠 우리가 뒷마무리를 지어야 안되겠나?. 저쪽 문씨 문중에서 또 멈칫거리다가 그 염치없는 짓거리로 고집하고 있는 사적 제 108호 팻말 말이다. <문익점선생면화시배유지>라고 고집하고 있는 그 팻말부터 우선적으로 문익점 함자를 빼고 <목면시배유지>로 고쳐 놓아야 안 되겠는가. 물론 지난 해 3월에 세운 우리 선조 퇴헌공 <정천익선생신도비>에는 배양 마을에서 목면 씨앗을 심고 싹을 틔우고 널리 퍼뜨려서 무명옷을 입게 된 내력을 분명히 밝혀 두었으니깐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겠지. 그러니까 아무리 바쁘더라도 시간을 내서 현지답사를 부지런히 다녀와야 하고, 단성 유림회에도 들러서 문화재(사적) 지정 명칭 변경 사실을 알려야 하고, 관보에도 공고가 되었으니 명칭 변경 예고기간 삼십 일이 지나면 산청군 공보과에도 들러서 독촉도 하고, 또 확인을 해봐야 안되겠나? 그러니 교육자인 자네가 시간을 내어서 당신과 동행을 해 주었으면 한다는 이야기였다.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남평 문씨 문중과 진양 정씨 문중에서 케케묵은 문제를 두고 입씨름을 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더욱이 삼우당과 퇴헌공은 사위와 장인 사이였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정작 문제의 본질이 되고 있는 무명옷에 대한 것도 한참 시대에 어긋나는 관심이다. 요즘 같이 살기 좋은 시대에 무명옷 타령을 하고 있으니?
목화에 관하여 어릴 적부터 머릿속에 잠재되어 있는 상식으로는 대강 이렇다. 고려 말 공민왕 때 삼우당이 중국으로부터 목화씨를 붓 자루에 넣어 숨겨 들여왔다. 그의 장인 퇴헌공이 심은 목화씨 하나가 싹을 틔우는데 성공했다. 목화씨앗은 많이 심어도 도대체가 싹을 내는 건 시원찮았다. 어느 날 마을 앞을 지나던 허름하게 입은 옷차림의 낯선 호승이 퇴헌공 댁을 찾았다. 가문의 전래 풍습대로 융숭히 대접을 했다. 목화 씨앗을 발라내는 여인네들을 보고 있던 호승은 씨앗 발아의 어려움을 듣고 쾌히 답을 내놓았다. 간단했다. 솜을 발라낸 목화씨앗을 하루 동안 오줌통이거나 볏짚 태운 잿물에 담가두었다가 심어보라고 했다. 과연 목화씨앗은 이듬해 봄에 열에 아홉이 튼튼한 싹을 틔었다. 그 후 삼 년 간 목화 씨앗을 불려서 이웃마을에 퍼뜨렸다. 더 나아가 호승의 도움으로 퇴헌공이 목화솜에서 씨를 발라내는 씨아를 만들고, 솜털을 고루는 활을 만들었다. 그 외에도 무명실을 뽑아내는 물레와 무명베를 짜는 베틀 등을 만들어 무명옷을 널리 입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 목화를 심고 씨앗을 퍼뜨린 퇴헌공이 은거하던 마을 이름을 배양마을이라 하여 내력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고려사>와 <태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여러 학자들의 문헌연구에서도 이미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초산 당숙이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은 상식 수준의 틈새를 남평 문씨 문중에서 왜곡하고 있다. 무명에 관하여는 삼우당 선생이 씨앗을 가져온 것은 정설이다. 그러나 시종 일관 목화씨앗을 틔우고, 퍼뜨리고, 더 나아가 삼우당 선생의 아들들이 물레와 베틀을 만들어 무명베를 짜서 우리의 의생활을 개선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다. 우리 선조 퇴헌공의 업적을 전혀 무시하고 왜곡하고 있다.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는 지경이다. 어감생심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초산당숙은 못내 안타까운 마음 끝을 추스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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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쑥 요즈음 아이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꽃이 생각난다. 바로 목화다. 살짝 연분홍이거나 하얀 꽃이 떨어지면 초록 열매 다래가 솟아오른다. 말랑말랑한 다래를 초록껍질 벗기고 속을 씹으면 달짝지근한 솜사탕 알맹이 맛이 참 먹을 만 했다. 어릴 적 다래를 주머니 가득 따 가지고 다니면서 먹었던 기억이 난다. 또래 아이들이랑 목화밭 두렁을 지나면서 무심코 다래 서리를 한 것이다. 요즘같이 설탕과 조미료로 길들여진 입맛으로야 “무슨 맛이 있다고...” 할지 모르겠다. 허지만, 배고픔에 익숙했던 아이들에게는 별로 간식거리가 없던 시절이어서 다래 속을 깨물면 달착지근한 게, 맛이 꽤 괜찮았던 것이다. 더욱이 다래에는 항암활성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하니 간식거리 치고는 최고급이었던 셈이다.
홍계할머니는 절에서 자주 만났다. 할머니는 가근방의 큰 절 대원사 공양주보살님의 동생이고 어머니의 외숙모가 된다고 했다. 반평생을 무명낳이로 스님들의 옷을 지어드린다고 했다. 바느질 솜씨가 좋은 어머니에게 절복을 짓게 했다. 무명베를 모아 먹물이거나 쑥물, 잿물로 염색을 해서 바람에 잘 말려 장만한 옷감을 마련해 두었다가 어머니에게 절옷을 짓게 했다. 어머니가 한복 전문점을 내어 스님들의 옷을 여러 절집 보살님들에게 가져다 줄 때는 가끔씩 소년을 데리고 갔다. 근엄한 부처님 앞에서 어머니를 따라 절을 세 방향으로 아홉 번 씩 하라고 했다.
지리산 자락 밤티재 아래 두 갈래 참 맑은 물줄기가 모여 합수하는 계곡 주변에는 꽤 넓은 들녘이 펼쳐진다. 산비탈 층층으로 길게 널어진 다락 밭에는 가을이면 목화가 하얗게 지천으로 핀다. 홍계할머니는 이 목화를 따다가 꼬치를 만들어 밤이면 호롱불 아래서 물레로 실을 뽑았다. 할머니의 물레질과 베틀에 앉아 무명베를 짜는 모습을 턱을 괴고 누워 신기하게 바라보다가는 가끔씩 억지를 부리곤 했다.
"할머니 나도 해보고 싶어. 내가 해 볼 께..."
막무가내로 졸라대면 홍계할머니는 빙그레 웃곤 했다.
"어림도 없다. 요놈아..."
하면서도 물레를 내 손에 넘겨주시곤 했다. 그때마다 무명 실타래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지만 할머니는 마냥 웃고만 있었다.
목화로 실을 뽑아 베를 짜 옷을 해 입었다는 사실은 까마득한 옛날 얘기 같지만, 불과 3~40년 전 이야기다. 그 무렵 딸 가진 집에서는 해마다 목화를 몇 두럭이라도 심었다. 그래야 솜이불이라도 마련해 시집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무명은 하얀 목화솜을 자잘하게 타서 얇게 발라 적당한 크기로 떼어 낸 것을 대살 같은 꼬챙이로 두루마리 가래를 만든 후에 물레로 실을 자아내어 옛날 베틀에 올려 짠 우리 고유의 옷감 베이다. 여인네 손으로 직접 짜서 손무명 또는 미영이라고도 한다. 무명을 짜는 일을 ‘무명낳이’라고 한다. ‘무명낳이’란 탐스러운 목화송이가 옷을 지어 입을 수 있는 무명이 되기까지의 오랜 역사가 만들어낸 옛인들의 지혜로운 노동과정이다. ‘낳이’란 길쌈 곧 베를 짜는 일 또는 사람이란 뜻이다. 마치 소중한 아이를 낳듯이 무명을 낳는다라고 말맛을 맞춘 것 같은 표현이어서 참으로 고생스러움이 배여 있으면서도 오히려 따스하고 부드러운 정겨움이 느껴진다.
처음 목화에서 딴 목화송이를 말리는 일부터 시작된다. 볕살 좋은 날 덕석에 널어 말리는데 근방에 불씨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 보송보송 잘 말린 것일수록 씨가 잘 빠진다. 씨 빼는 일을 ‘씨아’라고 한다. 씨아의 가락 사이에 목화를 펼쳐놓고 돌리면 솜은 뒤쪽으로 나오고 씨는 앞쪽으로 떨어진다. 씨를 뺀 솜은 대나무를 휘어서 활처럼 만든 무명활로 타는데 활 끝의 진동에 따라 솜이 뭉게뭉게 피어나게 된다. 부푼 솜을 수수깡이나 참대로 길고 둥글게 말아 빼면 고치가 된다.고치말기가 끝나면 물레질을 하여 실을 뽑아낸다. 물레바퀴와 물레고동을 물레 줄에 연결시켜 꼭지마리를 돌리면 고동에 걸린 줄이 돌아가면서 고동도 같이 돈다. 가락의 중심에 짚 껍질로 옷을 입혀 가락 맺힘을 한 뒤에 실을 잣기 시작한다. 뽑은 실은 꼭지마리를 오른쪽으로 돌리면서 가락에 감아 ‘뎅이’를 만든다.날틀로 뎅이의 날을 고르면 올의 굵고 가늘기에 따라 새가 정해지는데 새에 맞추어 무명 올을 바다에 꿰어 끝을 도투마리에 고정시키고 이것과 바디 사이의 올을 조절해 놓은 위에다 좁쌀 풀을 골고루 바르고 밑에는 왕겨 불을 피워 은근하게 말린다. 뱁댕이를 넣은 도투마리를 감아가면서 올을 감아 맨다. 무명 올이 담긴 도투마리는 베틀로 옮겨져 무명베가 짜여진다.
무명을 짜는 베틀에 앉은 여인네의 모습은 그림으로나 아니면 민속 박물관에나 가서야 모형으로 볼 수 있다. 무명옷을 해 입고 다니는 사람도 보기가 드물다. 어쩌다 절에서 기거하는 스님이나 공양주 보살 할머니들이 먹물을 엷게 들인 회색 빛 장삼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무명옷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온기를 조절해주는 묘한 촉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마치 토담집 방문을 밀가루 풀을 쑤어 한지 창호지로 얇게 발랐어도 따뜻한 방안 공기와 바깥 차가운 공기를 잘 아울러서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을 괴롭히는 고뿔을 예방해주는 묘한 느낌과도 같다.
모든 수공예품이 그렇듯이 첨단기계로 짠 색깔 고운 옷감과는 견줄 데 없는 깊은 손맛이 무명에도 배여 있다. 감꽃이거나 껍질을 우려낸 물에 식초 몇 방울을 떨어뜨리고 좀 오랫동안 담궈 우려낸 코발트색 굵은새 무명옷은 매무새가 평화롭다. 따뜻한 느낌과 함께 소박하고 단정해서 산 속 깊은 암자에서 면벽으로 화두를 어루만지고 있는 눈빛 서늘한 스님과는 썩 잘 어울린다. 색깔 고운 치마저고리를 입고 대청마루에서 내려다보며 예쁘게 웃던, 화랑에서 동양화 작품들을 해설하던 개량한복의 공 선생 그녀의 고집이 부담스러우면서도 언뜻 귀여움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 것은 왜일까?
천연염색은 옷감의 종류에 따라 염색의 색깔이 다르게 물이 든다. 옷감의 조직이 평직이냐, 능직이냐, 수자직이냐에 따라 색의 느낌이 다르다. 무명, 비단, 삼베, 모시 등 재료에 따라서도 느낌이 다른 손맛을 느끼게 한다. 옛날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이 해 오던 전통적인 천연염색 방법을 되살려 옷감을 물들이면 색상과 느낌부터 따뜻하고 정겨움이 돋아난다고 했다.
무명낳이 홍계할머니는 일찍부터 베틀에서 내려왔다. 염색낳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직조기술 발달로 다량 생산된 광목이거나 명주, 삼베, 모시 같은 우리 고유의 옷감 재료들을 황토나 쪽풀, 먹물, 홍화, 치자 열매, 감물, 밤 껍질, 볏집 뿌리 등 천연염료를 쓰서 빛깔 고운 옷감을 만들어 빨랫줄에 늘어 말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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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의 공간이 텅 비어있는, 썰렁한 느낌이 좀은 싫었다. 오른쪽으로 몇 걸음 옮겨서 멈춰 선다. 삼원색에 가까운 색깔로 무늬처럼 짓이겨 놓은 단순한 화폭이 화들짝 눈앞에 뛰어든다. 언젠가 신문에서 본 괴팍스런 피카소의 입체파 기교를 느끼게 한다. 또박또박 여자의 구두소리가 귓바퀴를 두드린다.
“그 그림 자연이 그리울 때 쳐다보고 싶은 그림이죠! ”
어느 사이에 개량한복 맵시로 안내양이 다가서고 있다. 그는 순간 얼떨떨해지면서 벽면에 걸린 화폭에 다시 시선을 멈춰 세운다. 그랬나? 저 그림을 눈여겨보고 있었나? 그러고 보니 눈앞의 그림이 <산>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살짝 다가서는 느낌이지만 무지개의 색깔을 참 잘 어울리게 배색을 하고 있구나 싶다. 구도는 단조로운데 속 알맹이가 깊숙이 숨겨진 무거운 분위기를 뱉어내고 있다. 그러나 그림 보는 눈이 그리 깊지를 못하다는 것은 스스로가 잘 알고 있는 처지인 것을. 그래서 좀 자신이 없어지는 수줍음을 내비치면서 그녀를 눈빛으로 담는다. 왠지 모르게 개량한복 차림이 아무래도 낯이 설지 않고 눈빛이 익었다. 때마침 화랑 입구 쪽 책상머리에서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공 선생! 전화요......?
바깥채로 걸어 나온 마님의 눈치를 피해 어지럽게 널린 부엌 살림살이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못내 불안하다. 바깥마당을 건너 대문을 나서던 마님이 몸을 돌려 다시 소년을 측은한 눈빛으로 어루만진다.
“고놈 눈빛이 초롱초롱 한 게 똘똘하게 생겼구만. ”
묘한 웃음을 띠우더니 사뿐사뿐 걸어 반쯤 열린 대문을 나간다. 마냥 수줍어진 소년은 왈칵 부끄러운 기분이 들면서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바깥에서 두런거리는 소리들이 다가서더니 대문이 활짝 열렸다. 색깔고운 비단으로 차림 한 한복 맵시가 예쁜 젊은 부인과 함께 소년 또래의 푸른 치마 색동저고리를 곱게 입은 여자아이가 마님의 손을 잡고 들어선다. 여자아이는 소년을 한참이나 쳐다보더니 생긋 웃었다. 섬돌 위에서 대청마루를 올라서면서도 빤히 소년을 돌아보고 서서 생긋 또 웃고 있었다.
공선생 그녀는 외할머니 댁 사랑채 문간방에서 외롭게 놀고 있던 소년시절의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소년의 어머니가 만든 색동옷을 입고 참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의류학과를 나온 공선생의 색깔 고운 무명 한복에 관한 관심과 고집이 좀은 유달스러웠다. 개량 한복의 예쁘고 단아한 품위에 대한 집착 또한 어지간했다. 요즘에는 눈 높고 까다롭다는 유럽 쪽 사람들이거나 까탈스런 일본인들이 재래식으로 짠 우리 옷감과 나염 솜씨를 보고 반하는 이가 많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돈 많은 부인들이 곱게 물들인 가는새 무명천으로 개량한복을 해 입고 다니는 모양새도 그럴 듯하다고 했던가. 전통성과 현대 미감을 아우른 그럴 듯한 개량한복 전시회를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히 경제적 가치가 있다고 자신했다.
고속도로는 제법 붐볐다. 단성IC를 벗어나자 말자 문익점 목화 기념관이 곧장 다가설 것이다. 바로 그 직전 도로변에 서 있는 두 개의 큰 비석 앞 빈터에 차를 세웠다. 세계 효孝문화를 주도했던 국학자 홍박사님이 지은, <고려의조상서진양정양천공휘유愈지위 효우사적비>가 왼쪽에 자리하고 있다. 양천강 옛 지명과 관련하여 <형제투금>의 설화와 연유 유추되는, 퇴헌공의 부친이신 양천공의 비문을 읽었다. 고려사 효우열전 34권 73항에 등재되어 있다고 했다. 오른쪽에 있는, <면화 시배> 전설의 주인공 <진양판부사치사진양군문충공 퇴헌정천익선생신도비명>을 읽기 전에 비명을 지으신 중재선생과의 생전 인연을 생각하며 좀은 감격스러운 회포를 가다듬으면서 잠시 묵념을 했다. 공 선생은 벌써부터 디지털 카메라를 맞추고 있다.
조금 더 걸어서 면화전시관 기념비를 잠시 눈여겨보다가 기념관을 들어섰다. 제일 먼저 배양마을 <문익점선생면화시배유지> 푯말을 찾았다. 분명히 삼우당 존함이 빠져 있었다. 퇴헌공 존함도 빠져 있었다. 초산 당숙의 침방울을 튀기는 목소리가 귓바퀴를 맴돌았다. 무명낳이 전설이 하늘을 거닐고 있는 구름덩이처럼 멀어져 가면서 유난히 새파란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끝)
*정원구: 호 동림. 사진 약력은 <남강문학>4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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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무명낳이 전설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전설이 아니고 실화가 아닌지요
미영이란 말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정다운 단업니다
천연염색 재료 중 지자는 치자가 맞을 것 같습니다 만/구자운
자랄때
포목상 하는 아버지 어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진주 중앙시장에서 제일 큰 포목상이었습니다
무명과 삼베 명주 광목 모시가 주된 품목 이었습니다
동림님의 글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포근합니다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안병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