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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遺産 保存會 寺刹 踏査 (5次)
1. 일 시 : 2009년 8월 30일 (일요일).
2. 장 소 : 희방사. 백룡사. 노계서원
3. 자료 조사 : 조 현 두.
4. 주 관 : 영주 문화유산 보존회.
1. 희방사
1) 창건 설화
희방사(喜方寺)는 경북 영주시 풍기읍에 있는 절로서 월인석보 등의 한글문헌의 판목이 전해 오던 곳이다.
신라 선덕여왕 12년(서기 643년) 두운조사(杜雲組師)는 태백산 심원암이란 암자에서 수도를 하다가, 지금의 영풍군 풍기읍 희방사가 있는 소백산으로 자리를 옮겨 초막을 짓고 수도를 계속하고 있었다. 초막이 있는 산기슭은 숲이 우거질 대로 우거져 낮에도 무시무시하였고,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찾아 볼 수 없었으며 무서운 산짐승들이 마구 쏘다니는 곳이었다.
어느 눈보라 치는 겨울날, 그날도 오직 수도에 여념이 없는 조사 앞에 암범 한 마리가 찾아와 괴로워하는 눈치를 보였다. 조사가 자세히 살펴보니 산기(産氣)가 임박해 있으므로 부엌에 검불을 깔아 새끼를 낳게 해 주었더니 범은 새끼 두 마리를 낳았다.
그 후 조사는 어린애처럼 알뜰히 거두어 주었더니 눈이 녹기 시작하는 초봄이 되자 새끼를 데리고 나갔다. 어느 날 저녁 문밖에 기척이 있어 내다보니 그 범이 와서 얼굴을 찡그리고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 무엇을 호소하는 듯 하였다.
조사는 반가이 맞이하면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어서 입을 벌려 보라"하고 입안을 살펴보니 목구멍에 커다란 은비녀가 걸려있지 않는가? 이것을 본 조사는 크게 꾸짖으며 "너같은 날랜 짐승이 무엇이 먹을 것이 없어 이런 못된 짓을 하느냐? 하면서 은비녀를 빼주고 두 번 다시 이런 것을 먹지 말라"고 타이르니 범은 사과하는 듯 사라졌다.
며칠 후, 이번에는 문 밖에 쿵하는 소리가 나므로 내다보니 그 범이 큰 산돼지 한 마리를 갖다 놓고 조사에게 드리려는 눈치였다. 이는 자기가 입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것인줄 알았지마는 조사는 "내가 술과 고기를 금하는 것을 너도 잘 알고 있으면서 어찌 이런 부정한 물건을 가져왔느냐? 이런 짓을 할려면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말아라"하고 야단을 쳤더니 범은 못 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어디론지 사라졌다.
다시 며칠이 지난 후, 달 밝은 어느 깊은 밤, 범이 또 찾아와서는 문을 흔들었다. 조사가 문을 열자 장삼을 물고 당기므로 따라가 보았더니 앞산 큰 바위 밑에 혼수상태에 빠진 한 처녀가 누워 있지 않는가? 조사는 자세히 살펴보니 나이는 18,9세쯤, 된 녹의홍상에 곱게 단장한 절색이었다. 그는 급히 처녀가 누어 있는 곳으로부터 떨어져있는 움막으로 처녀를 옮긴 뒤 물을 끓여 먹이고 정신을 차리게 한 후 이렇게 된 연유를 물은 즉 "저는 경주 계림에 사는 호장(戶長) 유석(兪碩)의 무남독녀로서 오늘 결혼식을 치른 후 저녁에 막 신방에 들어가려는 찰나, 불덩이 같은 것이 몸에 부딪히더니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을 느낀 후에는 어떻게 된지 모르겠사옵니다"고 하였다.
여기서 경주는 4백리가 넘는데 비호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로구나, "너희집에서 얼마나 걱정하겠느냐? 며칠 쉬었다가 곧 돌아가도록 하여라"고 하였다. 그 뒤 조사는 그 여자에게 남복을 입혀 총각처럼 꾸며 경주로 데리고 갔다.
그동안 유호장은 며칠을 두고 딸을 찾았으나 결국은 찾지 못하고 온 집안이 머리푼 초상집 같았으나 죽었던 딸이 다시 살아왔으니 온 집안이 기쁨의 울음바다로 변하였다. 딸의 이야기를 들은 유 호장은 조사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죄송하오나 조사님은 딸의 죽은 목숨을 살려 주신 은인이니 불민한 것이오나 거두어 인연을 맺게 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하고 은근히 사위 되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조사는 "나는 이미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산중에 들어가 수도하는 몸이요, 이미 따님과는 남매의 인연을 맺었으니 그런 당치도 않는 말씀은 하지 말아 주시요"하고 완강히 거절했다. 유호장은 조사의 수도생활에 대하여 이야기를 듣고 조사에게 큰 절을 지어 주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이곳은 신라의 휼륭한 문화의 자취와 고적이 많으니 한 3개월 동안 조용히 순례하면서 유해 주시오." 간청하므로 그는 순순히 응락했다.
2,3개월이 자나자 화창한 봄날이 왔다. 유호장과 조사는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났다. 풍기읍(豊基邑)에서 소백산 연화봉으로 가는 길은 새로 닦은 큰 길이 되었고 동구 앞 여울에는 쇠다리까지 놓아졌다. 그 뿐만 아니라 조사가 살던 초막은 없어지고 단청도 새로운 큰 법당을 비롯하여 많은 건물이 즐비하였다. 그제야 유호장은 사람을 보내어 3개월 동안 절을 지어 놓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전 가족에게 기쁨을 주었기에 희방사(喜方寺)라 절 이름을 지었고, 저 아래 다리는 수철교(水鐵橋), 풍기 서문 밖에 놓은 다리는 유다리(兪다리)라고 이름하였다."고 했다. 또 유호장은 조사와 인연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도솔봉 아래 조그마한 암자를 지어 유석사(兪碩寺)라고 하고, 토지 백여 두락(斗落)을 사서 공양미를 드리게 했던 것이다.
2) 희방사 이름 유래.
희방사의 원래 이름은 ‘池叱方寺’이며 17세기에 이름이 바뀌었다. 한국의 다른 절과는 달리 이두로 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 절은 신라 헌강왕(883AD) 때의 고승 두운조사가 창건하였다. 한 신라 재상이 호랑이에게 물려 간자기 딸을 구하여 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절을 짓고 그 기쁨을 표시하기 위하여 ‘池叱方(寺)’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그러니까 ‘池叱方’는 ‘기쁨’과 관련 있는 단어로 해석해 왔다. 설화와는 관계없이 ‘池叱方’는 ‘喜’와 대등된다. ‘喜’의 훈이 17세기 당시의 경상도의 발음 ‘짓버’와 일치하기 때문에 당시 유포되어 있었던 호식설화에 견강부회하여 창건설화가 탄생
1568년(선조 1)에 새긴 『월인석보』 1·2권의 판목을 보존하고 있었는데, 6·25전쟁으로 법당과 훈민정음 원판, 월인석보 판목 등이 소실되었다. 1953년에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경내에 희방사 동종(경북유형문화재 226)과 월인석보 책판을 보존하고 있다.
월인석보는 수양대군이 세종의 명으로 석가세존의 일대기를 국문으로 엮은 『석보상절』과 세종이 석보상절을 보고 석가세존의 공덕을 찬송하여 노래로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합친 책이다.
불경언해서로서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글자와 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1권 머리에 훈민정음 판 15장, 30면이 얹혀 있어서 국어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이용된다.
희방사는 한자어로 '喜方寺'라 쓴다. '기쁠 喜'가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기쁨을 주는 사찰'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듯하다.
조선시대 때 희방사에서 찍은 책이 몇 가지 있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하고 학술적 가치가 빼어난 것은 1568년에 간행한 『월인석보(月印釋譜)』 이다. 세종대왕이 만든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그의 아들 세조가 합쳐서 한 책으로 만든 것이 『월인석보』이다.
이 책은 부처의 일대기를 한글로 번역하고 부처의 공덕을 찬미한 가사로 구성되어 있다. 희방사에서 간행한 『월인석보』 앞머리에는 그 유명한 훈민정음 언해본이 실려 있다는 점에서 특히 가치롭다.
이것은 누구나 쉽게 한글을 배울 수 있도록 해설한 한글 학습 길잡이다.
이 책의 끝머리에 간행처를 기록했는데 희방사가 '池叱方寺'로 표기되어 있다. 같은 절에서
1569년에 간행한 『칠대만법』(七大萬法)의 간행 기록에도 '池叱方寺'로 되어 있다.
그런데 1592년에 이 절에서 간행한 『은중경언해』에는 절의 이름이 '其方寺'로 적혀 있다.
이 절의 이름으로 '희방사'(喜方寺), '딧방사'(池叱方寺), '기방사'(其方寺)라는 세 가지가 있는 셈이다.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여러 이름이 쓰였을까? 나는 이 수수께기를 풀어냈다. 신라 시대 한자 독법으로 '喜方'을 읽으면 '喜'는 뜻으로 읽고 '方'은 음으로 읽는다.
『삼국유사』 권3 '염촉멸신'(염촉滅身)조에서 일연대선사는 이런 독법을 '譯上不譯下'(앞 글자는 뜻으로 읽고, 뒷글자는 뜻으로 읽지 않는다)고 하였다.
'喜'를 뜻으로 읽으면 '깃브-'(기쁘다)의 '깃'이 되고, '方'은 소리로 읽어서 '깃브-'의 '브'(혹은 '깃바')에 해당된다. 용언의 동명사 어미 '-ㅁ' 혹은 '-ㄴ'까지 포함한다면 '方'은 '븐'혹은 '븜'으로 읽을 수 있다. 따라서 '喜方寺'의 고유어 명칭은 '깃븐뎔' 혹은 '깃븜뎔'이었던 것이다. 희방사의 옛이름이 '깃브-'와 연결됨은 절 이름에 들어 있는 '喜'가 직접적 증거이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喜方寺의 다른 명칭으로 적혔던 '池叱方寺'와 '其方寺'도 이 생각을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池叱方寺'는 '지질방사'로 읽은 것이 아니라 '딧방사'로 읽어야 한다. '
叱'자는 음절말의 ㅅ을 표기한 이른바 말음첨기자(末音添記字)이기 때문이다. '
池叱方寺'를 '못방사'로 읽을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으나 '딧방사'로 읽어야 '其方寺'와 순리적으로 연결된다. '其方寺'의 '其方'은 '깃븐뎔'의 '깃브'를 표기하려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其方寺'의 '깃'이 왜 '딧방사'(池叱方寺)'의 '딧'으로 적혔을까. 그 이유는 ㄱ구개음화 때문이다. '깃'이 ㄱ구개음화하면 '짓'이 된다. 그리하여 당시의 이 지방에 살았던 토박이 화자들은 '喜方寺'를 '짓방사'로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일부 유식자들은 구개음화 ㄱ>ㅈ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지방민들의 '짓'으로 발음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했다.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 유식자들은 '짓'을 '딧'으로 고쳤다. '짓'을 '깃'으로 바로잡지 않고 왜 '딧'으로 고쳤는가? 그것은 당시에 광범위하게 일반화되었던 구개음화 ㄷ>ㅈ 현상에 기인한다.
'딧'으로 고친 유식자들은 '짓방사'의 '짓'이 ㄷ>ㅈ 변화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짓'의 ㅈ을 ㄷ으로 고친 것이 바로 '딧'이고 이것이 '池叱方寺'로 표기되었던 것이다.
3) 희방사 동종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26호 희방사 동종은 원래 조선 영조 18년 (1742)에 주조된 충북 단양의 대흥사 종으로 승장(僧匠)이었던 해철(海哲)과 초부(楚符)등이 제작한 것이다. 형태는 쌍룡으로 구성된 용뉴아래 포탄형의 중신이 연결되었는데 종신부는 볼록한 종정으로부터 구연부를 향해 벌어지면서 내려오고 있다. 용뉴에는 도시화된 용두마리를 반대방향으로 배치하였는데 극히 기능화 된 경향을 보여준다. 종의 신부(身部)는 중앙에 쌍줄로 된 띠장식을 두고 위로는 둥근 모양의 범자로 된 상대(上帶)를 돌리고 그 아래 연화당초문으로 채운 유곽대와 연화문의 유두(乳頭)로 구성된 4개의 유곽(乳廓)과 연화가지를 지물로 든 4구의 보상입상이 교대로 배치되었다. 아랫부분에 종복(鍾腹)근처에 명문이 배치되어 있다. 구연부에는 연화문과 당초문의 2단으로 된 하대(下帶)가 둘려 있다. 이 동종은 전통적인 수법에 외래 요소인 쌍용(雙龍)구성의 용뉴와 띠장식이 가미된 조선후기 범종의 한 유형인 혼합형식의 종으로 비교적 안정감이 좋은 범종이다.
2. 백룡사
1) 백룡사 유래
백룡사는 희방사역이 내려다 보이는 북서편 산 중턱 가파른 곳에 자리한 사찰이다. 암벽에 붙혀 내어 본당인 용화전(龍華殿)을 세우고 주변과 뒤편 위쪽에 부속시설들이 세워졌다. 원래는 죽령마루에 있었다고 하는데 1949년 소거령으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2) 백룡사 석조여래좌상 (白龍寺石造如來坐像)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 282 호
지정일자 : 1993. 11. 30
소 유 자 : 국 유
소 재 지 :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 260-1
이 불상은 사찰의 불전 옆 인접한 암벽의 아래쪽에 안치된 여래좌상(如來坐像)이다. 중대석(中臺石)이 유리되어 좌불상의 앞쪽에 놓여 있으며, 하대석(下臺石)은 결실되었다. 현재 불상에는 광배(光背)와 상대석이 갖추어져 있다. 얼굴 부분의 조각은 많이 마모되어 있으나 윤곽과 광배, 대좌 등과 금색도료도 일부 남아 있다. 그리고 대좌(臺座)는 시멘트로 암벽에 고착해 두고 있다. 크기는 높이 75㎝, 머리 높이 30㎝, 어깨 너비 60㎝, 대좌 높이 20㎝, 광배 최대너비 90㎝, 지름 70㎝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불상을 안치하고 뒤에 주형광배(舟形光背)를 별석(別石)으로 구비한 형식이다.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며 길상좌(吉祥坐)를 취하고, 법의(法衣)는 양쪽 어깨에서 양쪽 무릎까지 덮는 통견의(通肩衣)이며, 복부(腹部)에는 승각기(僧脚岐)의 주름과 매듭이 조각되어 있다. 얼굴은 비만형은 아니지만, 볼이 두텁게 표현되어 있다. 이목구비(耳目口鼻)는 많이 마모되었고, 목은 파손되어 삼도(三道)의 유무를 확인할 수 없다.
또한 어깨 부분에 비해서 무릎이 굵게 표현되어 있으며, 법의(法衣)는 주름이 단조로우면서 골이 깊어서 두텁게 표현되었다. 주형(舟形)의 광배(光背)는 두광(頭光)과 두 줄의 띠를 새긴 신광(身光)으로 구성되었다. 두광은 활짝 핀 원형(圓形)의 자방(子房)을 가진 팔판연화문(八瓣蓮花文)으로 표현되어 있고, 신광에는 화불좌상(化佛坐像) 3구를 광배(光背) 상(上)·좌우(左右)에 각 1구씩 배치하여, 그 사이에 굵은 인동문(忍冬紋)을 새겼으며 그 바깥쪽의 외연(外緣)에는 화염문(火焰文)을 새겼다.
원래 불상의 위치는 죽령(竹嶺)으로 알려져 있는데, 6.25 동란 직후 현 위치로 옮겨지면서 원래 불상이 안치되었다는 백룡사(白龍寺)라는 명칭도 이 절에 붙여지게 되었다. 죽령에 안치했다는 백룡사에 대한 자료는 전혀 없으며, 불상 제작자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이 불상은 9세기 말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노계서원
1)노계서원(魯溪書院)
설립자 : 고장 사림
년 도 : 1787년
승 격 : 1813년
배 향 : 진중길, 한산두
소재지 : 영주시 봉현면 노좌리
정조 10년(1786) 노계서당(魯溪書堂)에서 향회를 열어 노계서당 강당에 지역 출신 진중길, 한산두의 위패를 봉안하고 1787년 노계서당 뒤편에 서원의 건축시작 1788년 완공되어 묘호를 노계사(魯溪祠)라 하였다. 헌종 13년(1874) 노계서원 승격 사당 강당 신문 주사등을 중수하였다. 서원편액 강당편액은 이휘준(李彙濬)이 썼다. 고유문(告由文)은 이휘녕(李彙寧)이 지었다. 초대 원장은 황중관(黃中琯)이다.
2)행정(杏亭)
행정은 진중길이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념하기 위해 지은 정자로서 잘 보전되어 오다가, 한국전쟁 시절 미군이 주둔했다가 후퇴하면서 불을 지르는 바람에 서원은 다 타버리고, 다행스럽게도 정자는 일부만 손상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지난 2004년 본래 정자가 있었던 곳에 노계서원을 옮겨 복원하면서, 행정도 부분적으로 다시 보수했다.
행정기(杏亭記)
고려 말기 판도정랑(版圖正郎)을 지내신 행정(杏亭) 진공(秦公)에게는, 그 옛날 풍기(豐基)의 남쪽 10리쯤 되는 곳 봉대(鳳臺) 아래에 집이 한 채 있었다. 그 곁에는 정자를 짓고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이 은행나무가 있었기에 자신의 호도 지으셨다. 그 후 이 주위에 자손들이 살고 있었으나 세월이 흘러서 정자는 무너졌고 땅 주인도 바뀐 지 몇 백 년이 되었다. 그러나 기주(基州)의 인사들은 진공의 절개를 추모하여 노계(魯溪) 땅에 사당을 짓고, 추월당(秋月堂) 한산두(韓山斗)와 함께 제사를 받들었다. 그런데 조선 말기 국책에 의하여 사당이 헐렸고, 그 후로는 공의 절개를 추모할 의례가 없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을 한탄해 온 진씨 종중에서 모임을 열고 상의한 결과 “행정은 우리의 조상이 마련하신 터전이다. 아무리 오래되고 여러 번 변화를 겪었다 하더라도 이 고장의 연로자(年老者) 모두가 이곳이 진씨(秦氏)의 터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니 주변에서 살아가는 후손들이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어찌 선조를 추모하는 정성과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서 있는 힘을 다 하고 재력을 동원하여 새롭게 정자를 짓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주위의 산천과 구릉, 계곡이 모두 진씨에게로 돌아온 것 같았다. 따라서 그 옛날 있었던 편액을 다시 달게 되었고 본인에게 기록해 주기를 청해 왔다. 청을 받기는 했으나 공이 가신 후 500년이 지나간 지금 그 때의 명성은 사라졌고 문헌 또한 남은 것이 없으니 무엇을 참고해야 될 지 걱정되었다.
그러다가 『태평통재(太平通載)』와 『목은집(牧隱集)』을 찾아보게 되었다. 거기에 의하면 진공은 고려 말기 충숙왕(忠肅王)·충혜왕(忠惠王) 때에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높아서 선비들 중에서도 추앙받았으며,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함께 수학하여 특별히 교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곡과의 사적인 관계로 덕을 볼 것이라는 세인들의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가장(家庄)에 머물면서 후진 양성에 힘쓰셨다. 공의 문하에서 수업한 사람 중에는 공의 공덕으로 벼슬에 진출한 선비가 많았으니 역사의 한 부분에 오를 일이며 오래도록 후인들의 추앙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서글픈 일이지만 옛날 명인들의 자취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오늘에 이르러 새로운 감흥을 치솟게 하여 옛 것을 수리하고 새로운 것을 공경하는 사례가 많다. 옛날 우물은 차마 메울 수 없고 옛날의 동산은 차마 황폐한 대로 방치할 수 없는 것이 인정이다. 남의 일의 경우도 그러한데 하물며 후손들의 심정이야 오죽하랴. 고려 말기 이래 사대부가에서 지은 정각(亭閣)과 명승장원(名勝庄園)이 여러 곳에 많았으나 대부분 허물어지고 거친 잡초 속에서 들판으로 변했으며, 그 후손들도 국내 어느 곳에 산재하여 살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게 되었다. 가까운 시골을 살펴보아도 그러하다. 북쪽 순흥 땅 사현(四賢)마을에는 안씨들이 살았었는데 지금은 타인이 주로 살고, 남쪽 양양(襄陽)에는 임서하(林西河)의 옛터만 있고 동쪽 선성(宣城)에는 우문희(禹文僖)의 유허(遺墟)만 있으며 복주(福州)에는 손정평(孫靖平)의 옛 마을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기주(基州)의 진씨들은 조상이 터전을 마련했고 후손이 그 터전 위에 살아오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서 크게 번성하지 못했지만 생전에는 옛 땅을 지키면서 밭을 갈고, 죽으면 가까운 언덕에 묻히면서 500년을 살아오고 있으니 다른 집안에 비해 보면 그 예가 드문 일이다. 더구나 이제 그 옛 땅 위에 정각(亭閣)을 복원하고 옛 뿌리를 찾았으니 문중의 작은 사업이 크게 드러나게 되었으며 이 시작이 오래 전부터 시작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본인이 듣건대, 이곳에는 진씨의 선조 때 세운 훌륭한 비석이 있었고 은행나무도 있었는데 긴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모두가 퇴락하여 폐허에 묻혔다고 한다. 그러나 증명할 길이 없던 중에 근래에 땅을 파보니 오래된 나무뿌리와 용과 거북이 모양이 새겨진 돌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일은 마치 신이 보호하고 있다가 기다리는 사람에게 준 것처럼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정각도 새로 지어졌으니, 새롭게 계승해 나가는 이치는 옛 사람이 이루어 놓은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후인들이 유지해 가려는 마음을 갖는데 있다고 하겠다.
이제부터 진씨의 모든 후손이 문학을 숭상하여 대대로 전하고 종족 간에 화합하여 선인들의 뜻을 받들며 후진들을 계발하는데 힘쓴다면 기본이 튼튼해져서 이 정각에 때때로 지붕을 덮고 도장(塗裝)을 다시 하는 그러한 일이 백세토록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제군들이 힘쓰기에 달려 있는 것이지 나의 말에 기대할 바는 아닌 것이라고 하겠다.
1890년(고종 27) 청명절(淸明節)에 영가(永嘉 : 安東) 권연하(權璉夏)는 삼가 짓다.
3) 진중길
행정의 주인인 진중길(秦中吉, 1308~미상)은 학문·문장·행실로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태평통재(太平通載)』·『목은집(牧隱集)』의 기록에 행정의 주인인 진중길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진중길은 고려 충숙왕(忠肅王)~충혜왕(忠惠王) 때 사람으로 뛰어난 문장과 반듯한 행실로 선비들에게 널리 알려져 존경을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함께 공부하여 매우 친한 사이였으며, 과거를 멀리하다가 40세의 늦은 나이에 과거를 보려고 하였다. 그런데 시험을 주관하는 관리가 그의 어릴 적 친구인 이곡이었다.
그러자 진중길은 “이곡은 어린 시절 나와 같이 공부한 친구 사이이니 내가 설령 요행으로 이번 과거에 급제한다 하더라도, 남들이 이곡이 내가 친구라고 봐 주어 급제했을 것이라고 의심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과거에 급제하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응시하여 이곡에게 누를 끼칠 수는 없는 일이다.” 하고는 응시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 후 조상의 음덕에 학행(學行)으로 판도정랑(版圖正郞)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했고, 다시 계림판관(鷄林判官)에 제수되어 취임했다가 이듬해에 물러났다. 오품(五品) 벼슬을 지냈으나, 나중에는 벼슬길에 더 큰 욕심을 내지 않고 물러나서 후진양성에 힘써서 그의 문하에서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였다.
본래 옛날에 선비들이 글을 읽고 자기 수양을 하는 것은 대부분 과거라는 제도를 통해 출세를 하고 관직에 나감으로써 자신의 정치적인 뜻을 펴고, 개인적으로는 영달을 하고 가문을 빛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런데 친구에게 폐를 끼칠까봐 그 기회를 과감히 버릴 줄 알았으니, 진중길은 참으로 고결한 성품을 지닌 선비였던 것이다.
훗날 이 고을의 선비들이 진중길의 덕망을 추모하여 1754년(영조 30) 진사 김여필(金汝弼) 등의 상소로 노좌리에 노계사(魯溪祠)를 세워 제사를 올렸다. 정조 때 후손 진영(秦泳)이 임금께 청하여 건물을 증축하고 노계서원(魯溪書院)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던 것이 고종 초에 나라의 국령으로 철폐되었다가, 2004년 풍기진씨 후손들이 조상을 추모하는 뜻에서 정성을 모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했다. 당시 문중에서는 고유제를 올리고, 그 동안의 기록들을 모아 『노계서원지(魯溪書院誌)』를 발간하여 그간의 사정을 알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