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중요민속문화재 제119호
명 칭 : 병와이형상유품(甁窩李衡祥遺品)
분 류 : 유물/ 생활공예/ /
수량/면적 : 일괄(59점)
지정(등록)일 : 1982. 08. 07
소 재 지 : 경북 영천시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 전주이씨병와공파종중
관리자(관리단체) : 전주이씨병와공파종중
병와 이형상(1653∼1733)은 효령대군의 10대손으로 숙종 6년(1680)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좌랑 등을 역임하고 덕유산에 도적이 많아지자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추천되어 금산군수로 부임, 도적을 평정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영조 3년(1727) 호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영천에 호연정을 세워 학문에 열중하였다. 이듬해 가선대부가 되고 후에 한성부윤에 이르렀다.
병와 이형상 유품에는 인장 23점, 호패 9점, 거문고 1점, 화살 9점, 갓끈 5점, 관자 4점, 홀 1점, 옥피리 1점, 칼 2점, 표주박 2점, 벼루 1점, 추구통 1점 등이 있다.
이 유품들은 그의 귀한 인품을 보여주고 있으며 지금은 볼 수 없는 귀한 유물로 가치가 크다.
제119-1호
인장(印章)
수량/면적 23과
「李衡祥仲玉章, 聖聞, 完山世家, 仲玉, 夢松, 霞堂」등 병와 이형상의 이름, 호, 당호(堂號) 등을 새긴 인장과 후손들의 인장이다. 광소(光紹), 석거(石渠) 등은 후손 중 6세손인 응우(膺宇)의 초명(初名)이다.
인장 중에는 그의 이름과 호로 된 것들이 있고, 후손의 인장도 상당수 있다.
제119-2호
호패(號牌)
수량/면적 9점
호패는 그가 문과에 급제한 해에 발급된 것이며 후손들의 것이 다수 보관되어 있다.
상원하방(上圓下方)의 막대기로 호패에는 주소, 성명, 직역, 본관, 연령 등을 적었다. 호패 중에는 이형상이 별시문과 병과로 급제한 해인 1680년에 발급된 것이 있으며, 그 외에도 아들 이여항(李如沆) 3점, 손자 이약송(李若松) 1점, 이후송(李後松) 1점, 이기송(李期松) 1점이 있으며
장손인 증손 이동세(李東世) 호패가 2점 있다.
이여항(1677~1742)은 병와의 차남이고 그의 호패는 1726년, 1728년, 1735년에 각기 발급된 것이다. 약송(1698~1775)의 호패 연대는 1752년으로 거주지 경기도 양근(현 양평)에서 발급하였다. 후송(1705년생)의 호패는 1728년 것으로 서울에서 받았다. 역시 손자인 기송(1714년생)의 호패는 1758년 것이고 상주에서 발급하였다. 동세(1731~1774)의 호패 2개는 모두 1756년 발급인데 하나는 병자(丙子), 다른 하나는 낙인(烙印) 없이 병자식(丙子式)이라고 쓰여 있다.
제119-3호
거문고
효령대군의 10대손인 병와 이형상(1653∼1733)이 제주목사로 있다가 사임하고 돌아올 때, 그의 선정을 높이 산 한 노인이 선물했다는 거문고이다. 그 노인은 오씨란 성만 전해지며, 거문고는 한라산 백록담에서 저절로 말라죽은 박달나무로 만든 것이라 한다. 이 거문고에는 거문고에 관한 서문 등이 새겨져 있다.
제119-4호
홀(笏)
홀이란 국가의식 때 손에 들고 예를 표했던 것으로 보통 나무나 상아 등으로 만들었으며, 평상시에는 허리띠에 차고 다녔다고 한다.
홀은 4품 이상이 사용할 수 있는 상아홀(象牙笏)로서, 조복(朝服)을 입을 때 사용하였던 것이다.
제119-5호
옥피리
옥피리는 이형상이 평소에 애용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 당쟁이 격화되는 실태를 악학(樂學)을 익히지 않아 그러한 것이라고 할 정도로 악학에 대한 깊은 관심과 조예가 깊었으며 가사를 짓기도 하였으며, 악학(樂學)에 대한 깊은 관심과 조예(造詣)가 많아 이에 대한 저술(著述)도 많이 남기고 있다.
옥피리는 일부 파손되어 두 토막으로 갈라져 있던 것을 수리를 하였다.
제119-6호
칼
수량/면적 2점
병와 이형상(1653∼1733)의 유품 중 칼 종류로 곡도(曲刀)와 은장도 2종이다. 곡도는 칼의 길이가 긴 장도로 길이 67.8㎝, 폭 3㎝, 자루길이 12.3㎝이며 임진왜란 이후 장도형식의 변천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유품들은 길이 71㎝의 철제 화살과 함께 문무를 겸비했던 그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제119-7호
표주박
수량/면적 2점
표주박은 모두 흑색으로 옻칠을 하였으며, 허리에 찰 수 있게 고리를 달았으나 크기는 각각 다르다.
표주박은 둘 다 함께 흑색(黑色)으로 옷칠을 하였으며, 허리에 찰 수 있게 고리를 달아 끈이 매어지게 되어 있고, 크기는 각각 다르다. 이로써 그가 풍류(風流)를 즐겼음도 알 수 있다.
제119-8호
벼루
벼루는 흑색으로 옻칠이 된 함에 넣어져 있는데 크기는 16.8㎝, 두께 3.4㎝, 너비 11.6㎝로 그가 평소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119-9호
추구통(抽句筒)
추구통은 흑색으로 옻칠이 되어 있으며 안에는 대나무로 만든 심지인 죽첨이 가득 들어있으나 사용자는 확실하지 않다. 사서삼경 등을 배강(背講), 즉 암기하는 시험을 볼 때 통에 들어있는 대나무쪽을 뽑아 거기에 적힌 장의 첫 귀를 일러주어 그 장의 내용을 외우게 하는데 사용한다.
제119-10호
화살
대나무로 만들었으며 길이는 71㎝이다.
제119-11호
입영(笠纓)
수량/면적 5점
갓끈인 입영으로 입영(笠纓) 중에는 상아입영(象牙笠纓) · 호박입영(琥珀笠纓) · 옥입영(玉笠纓) · 흑옥입영(黑玉笠纓) 등이 있는데, 이 유품(遺品)은 그를 위시하여 후손(後孫)들이 사용했던 것이라 한다.
제119-12호
관자(貫子)
수량/면적 4점
관자(貫子)는 망건(網巾)줄을 꿰는 작은 고리인데, 이에는 옥관자(玉貫子) 1쌍(雙), 호박관자(琥珀貫子) 1쌍(雙)이 있다. 위의 입영(笠纓)의 장식재료 관자(貫子)의 재질(材質) 등은 당시 품계(品階)를 나타낸 것이기도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