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몇 번에 걸쳐 연재한 글은 모두 이 16세기 몽골초원의 영웅 알탄 칸과 내몽고자치구의 성도(省都)인 허흐호트를 이야기하려다 파생된 얘기들이다. 알탄 칸은 칭기즈칸의 17대손이며 몽골족을 재통일한 다얀 칸(다얀은 쿠빌라이가 세운 ‘元’왕조를 부흥한다는 의미인 ‘大元’의 음역이다. 다얀의 본명은 ‘바트 멍크’이며 16세 때 26살 연상인 42살의 만도룬 칸의 미망인 만도하이와 결혼하여 7명의 아들을 낳는다. 칭기즈칸 동생인 조치 하사르 자손의 구혼을 거절하고 칭기즈칸의 정통 핏줄인 황금가 후손인 26살 연하남 바트 멍크와 결혼한 만도하이는, 이후 어린 남편을 잘 보필하여 몽골족을 재통일시키는데 일조한 정치 감각이 뛰어난 여걸이었다. 이곳 내몽고대학에 접하고 있는 공원의 이름도 만도하이 공원이다)의 손자이다. 이 다얀 칸의 2째 아들인 우루스·보라트는 황하가 휘돌아 흐르는 오르도스(‘오르도’는 칸의 궁전막사를 뜻하는데, 마치 동춘 써커스단의 거대한 천막과 주변에 수백여 개의 겔(천막집)로 이루어졌다고 연상하면 된다. 오르도스는 오르도의 복수이며, 현 위치는 내몽고지도를 보면 ‘허흐호트(일명: 호호트)’시의 한 행정구역인 ‘투메트좌기’와 접하고 있는 지역이다. 지금의 이곳은 천연가스와 지하자원으로 일인당 국민소득이 홍콩(香港)보다 높다고 한다)부족(部族)의 사위로 들어가며 그의 2째 아들이 후에 투메트 부족장이 되는 알탄이다. 즉 알탄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다얀 칸과 만도하이이다.
혼란했던 16세기 몽골고원의 諸세력을 평정하고 실력으로 실권을 장악한 뛰어난 투메트 부족장 알탄 칸은 35년간의 치세 동안, 이후 몽골 민족의 생활과 문화의 방향을 결정짓는 몇 가지의 대개혁을 단행한다.
그 첫 번째는 오이라트(서부몽골)를 압도하여 오늘날 몽골민족이 살고 있는 지역의 대부분, 즉 몽골국 영토의 대부분으로부터 청해(靑海) 지방까지를 회복하였고, 두 번째는 누차에 걸쳐서 명(明)에 침입하여 다수의 한인을 포로로 잡아온 것 외에 명의 도망병, 생활이 어려운 농민(당시 명 왕조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견디지 못한 한족들이 대거 내몽골 투메트쪽으로 이주해 왔다. 예나 지금이나 일반 백성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세금이다. 당시 유목지대에는 거의 세금이랄 것이 없었다), 백련교도 등이 몽골의 유목지로 들어온 자들을 받아들여 고원의 각지에 집단 이주시켜 농경에 종사시킨 것이다. 이러한 여러 이유로 몽골 지역으로 들어온 한인의 수가 수십만에 달했는데 이들은 풍요로운 황하의 수자원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다. 이들에 의해 생산된 농작물은 이후 몽골 유목민들에게도 현지에서 생산된 곡물을 싼 값으로 유목민들에게 공급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 한인들이 모여 살게 된 중심지는 자연히 정주형의 한식(漢式) 건물들이 늘어서면서 도시로 성장해 갔으며, 시장도 열려 도처의 대상들이 모여들어 다양하고 번성한 교역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도시를 ‘바이씽(百姓)’이라 불렀는데 그 중에서도 최대의 것이 바로 이곳 ‘허흐호트’이다.
오늘날 중국 내몽골자치구의 정부소재지인 허흐호트(푸른 성)는 이들 망명 중국 한인들이 알탄 칸에 의해서 1565년에 지은 중국식의 가옥인「판승(板升)」을 기원으로 한다. 판승(바이씽)이라는 것은 장막(겔)이 아닌 고정 가옥이지만, 실제로 이 단어의 내원은「백성(百姓:바이씽)」으로, 한인 농민을 가리키는 것이 그들의 가옥을 부르는 것으로 된 것이다.
1572년 알탄 칸은 중대 결심을 하여 투메(트)천(土黙川: 여기에서의 ‘川’도 ‘내, 강’이 아니라 평원을 의미)에 과거 원(元)왕조의 쿠빌라이가 건설한 대도(大都: 북경의 원대 명칭은 ‘대도’이며 원대의 대도는 지금 북경성의 원형이다)를 본떠 성시(城市) 건설을 결정한다. 이리하여 내지로부터 수공업자들을 소집하였으며, 명조(明朝)에서도 우호의 표시로 기술자들과 건축자재를 대량 원조하였다. 3년여의 노력 끝에 마침내 1575년 ‘허흐호트(庫庫和屯)-푸른 성’이 완공되었으며, 명(明) 정부에서는 ‘귀화성(歸化城)’이라는 명칭을 주었다. 막 완성된 이 ‘허흐호트’의 규모는 한 변이 200m의 방형이며 남과 북에만 각각 1개의 성문만 있는 그리 큰 규모의 성은 아니었다. 이 성을 ‘대판승(大板升)’이라 한다.
이후 이 성은 1581년 봄, 알탄이 말년에 얻은 젊은 미모의 부인인 삼랑자(三郞子: ‘鐘金哈屯’이라고도 쓰는데 ‘哈屯(하톤)’은 몽골어로 ‘부인(夫人)’의 의미)에 의해 대규모로 개축되는데 삼랑자가 친히 설계와 시공을 지휘하여 공정을 완성하였다한다. 알탄 칸이 죽은 후에도 삼랑자는 자신이 개축한 이 성안에서 백성들과 함께 수십 년을 살아 이 성을 ‘삼랑자성’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이 ‘허흐호트’의 유래이다. 이미 430여 년 전에 세워진 성으로 지금은 도시개발로 인해 거의 그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이후 18세기 청대(淸代)에는 이 성에서 동북쪽 5리(里)지역에 새로운 규모의 성인 수원성(綏遠城)을 쌓음으로써 허흐호트의 규모는 더욱 확대되기에 이른다.
첫댓글 선생 매일 매일 선생에 글을 기다리다. 드디어 ~~헉^^26세의 연상에 여인 이라니 만약에 40살이면 여자나이 66세
시방 선생이 혹시 날놀래줄라고? 증거를 대보시요. 나라면 절대 나라를 통째로 준다해도 장가를 절대 안가겠소이다.
좌우당간에 증거~~증거를 대라우요 살룸
세첸님 몽고족하면 위대한징기스칸 후손...쿠빌라이....목축업,몽고바오... 그렇게까지밖에 생각을 안해봣는데 이제 역사를 조금이나마 이해할수잇어요. 미진진해요..열심히 듣고 공부해서 내년 여름에 역사체험 학습여행 갈께요...몽고족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네요...
늘 북여동을 위해서 봉사하시는 왕징의 왕오빠 그리고 보보님 안녕하십니까?
저 같으면 갈꺼 같은데요? 일단 칸 위에 오르면 위험도 있겠지만 세상 모든 것이 자기것인데 왜 마다하겠습니까? 칭기즈칸도 실제 칭기즈칸의 자식을 낳은 부인은 4명이라지만 설에 의하면 하톤이 500명이었답니다. 물론 당시에는 전리품의 개념이었지만 말입니다. 다얀도 아들이 11명이랍니다. 만도하이와의 사이에서 7명, 다른 하톤 사이에서 4명. 딸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건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다얀과 만도하이와의 나이 차이는 26살이 맞고요, 증거는 다음 주저리 글로 바로 올리겠습니다.
호호트시 오탑사에 있는 알탄 칸의 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