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로 가는 길-23] 고흐와 테오는 깊은 우애를 간직한 형제였지만 꽤 자주 갈등했다. 형이 좀 더 성공적인 예술가의 길로 가기를 바라며 아낌없이 지원했던 테오와 달리, 고흐는 어떤 새로운 호기심을 자극하는 대상을 발견하면 망설임 없이 돌진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고흐가 안트베르펜에 이어 파리에 머물렀던 시절은 형제의 갈등이 폭발하던 시기였다. 안트베르펜에서는 고흐가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안트베르펜 예술학교에도 다니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 고흐는 '내 그림을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다'는 생각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한참 색채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복잡한 가필 없이도 한 번에 그릴 수 있다는 이상에 사로잡힌 시기였기에 다른 사람에게 그림을 배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훌륭한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차분히 그림을 배워보리라는 마음으로 찾아갔던 안트베르펜 미술학교에서 고흐는 여러 번 상처를 받는다. 물감이 뚝뚝 흘러내리는 고흐 특유의 즉흥적인 그림은 아카데미 미술다운 차분함이나 섬세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순간적인 직관이 흘러넘치는 고흐의 그림을 보고 학생들은 물론 교사들이 당황했기 때문이었다.
▲ 안트베르펜 광장의 모습. /사진=이승원
안트베르펜 미술학교의 원장이었던 베를레는 고흐가 그린 유화 작품을 보고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런 엉터리 작품은 도저히 고쳐줄 수가 없으니, 빨리 소묘반이나 가보라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고흐는 수치심을 참지 못하고 유화반 교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베를레의 조언을 받아들여 소묘 수업에 등록을 했다. 하지만 석고상 하나를 그리는 데 최소한 16시간을 투자하는 당시의 수업 방침을 고흐는 따를 수가 없었다. 기계처럼 정확한 석고상 소묘에 고흐는 도무지 재능을 보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소묘를 가르치는 교사 또한 갑자기 폭탄처럼 떨어진 이 '길들이기 어려운 학생 고흐'를 어찌 할 줄 몰라서 만나기만 하면 서로 얼굴을 붉혔다. 소묘반에서는 작품 하나를 끝내는 데 일주일을 주었지만, 고흐는 몇 시간도 안 되어 작품을 여러 개 그려냈으므로 소묘반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작업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신중하게 고치기보다는 바로 휙 찢어버리거나 뒤로 던져버리는 고흐의 충동적인 모습에도 학생들은 충격을 받았다.
▲ 안트베르펜 미술 학교의 모습.
그리는 그림마다 악평을 받고, 동료 학생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자 고흐는 점점 실의에 빠진다. 안트베르펜에서의 생활이 점점 파국으로 치달을 무렵, 고흐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외로움에 지쳐 더 이상 혼자 버틸 수 없다고 느낀 고흐가 파리에 가서 테오와 함께 살고 싶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문제는 고흐가 테오의 허락을 받지 않고 무작정 파리로 쳐들어가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동생과 충분한 상의도 없이 충동적으로 내린 이 결정에 테오는 당황스러웠지만 결국 고흐를 받아주었다. 파리에서 테오와 함께 지내던 시절, 고흐는 고갱을 알게 되었고, 로트레크를 비롯한 수많은 파리의 화가들과 친분을 맺게 되었으며, 인상파 화가들은 물론 그들이 깊은 영향을 받았던 일본의 그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파리 체류 시절 고흐의 그림은 유례없이 다채로운 색조로 물들게 되는데, 이것은 인상파와 일본 판화 우키요에의 영향이 다분히 느껴지는 대목이다.
파리에서 고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수많은 작품들을 관람하기도 하고, 화가들을 만나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모네, 르누아르, 쇠라 등 당대의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접했고, 고갱과 들라크루아의 그림에 매료되었다. 테오가 직접 개최한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회에서 고흐는 당시 무명화가였던 고갱을 처음으로 만났다. 강렬한 원색을 대담하게 쓰는 고갱의 화풍, 들라크루아의 자유롭고 과감한 색채 이론, 일본 판화 우키요에의 화사하면서도 다채로운 색조 등에 복합적으로 영향을 받은 고흐의 파리 시절 그림은 말 그대로 '색채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다. 고흐는 이 시절 더욱 대담한 색채 선택과 과감한 붓놀림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갔다. 파리 시절의 대표작인 '탕기 영감의 초상'에서 고흐는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 노란색 등 채도와 명도가 높은 강한 원색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이때 고흐는 '자연을 표현하는 색채'를 넘어 '화가의 마음을 표현하는 색채'를 탐구했던 것 같다. 고흐는 이 그림을 통해 자연 그대로의 색채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격정을 표현하는 색채를 꿈꾸었다.
▲ 고흐의 파리 체류 시절 그린 "탕기 영감의 초상"(1887)
파리에서 고흐의 가장 큰 수확 중 하나는 그가 밀레를 향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밀레는 고흐의 출발점이었지만 종착역은 될 수 없었다. 고흐는 도시 사람들의 다채로운 표정과 의상, 골목골목의 소담스런 풍경들, 파리에 체류하고 있는 화가들의 온갖 천태만상을 바라보면서 그림의 소재는 물론 색채와 구도가 무한히 확장되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다른 화가들로부터 배운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보다는 '다른 화가들과 나는 어떻게 다른가'를 처음으로 확연하게 느꼈다. 주로 인쇄된 그림을 통해 다른 화가들의 그림을 보아야 했던 과거와 달리, 화가들을 직접 만나기도 하고, 그들의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직접 보기도 했으며, 다양한 전시회나 미술관에서 원작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가지게 되자 고흐는 큰 혼란을 느끼면서도 '내가 가야 할 길은 어디인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상상해볼 수 있었다. 파리에서 고흐는 밀레로부터의 자유, 농촌생활과 농민들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와 다른 화가들이나 유행들로부터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기 시작했다. 대중의 요구나 당시의 유행에 따라갈 수 없는 고유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고 싶은 열망을 예전보다 더욱 강렬하게 느꼈던 것이다.
[정여울 작가·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