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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김종덕과 의성지역 유교문화] 답사.
2012년 11월 17일 영남유학연구회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 1724년∼1797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도언(道彦), 호는 천사(川沙)이다. 만취당 김사원의 손자인 양진당 김상린(金尙璘)의 현손이며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다.
1753년(영조 29)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오직 학업에만 열중하였다.
또한, 과거란 선비의 학문에 대한 뜻을 흐리게 하는 것이라고 배척하고,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관계진출을 사양하였다. 관력은 1779년(정조 3)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를 지냈을 뿐이다.
유림에서 불천위로 모시고 있으며 문집에 《천사문집》, 저서에 《성학입문(聖學入門)》 《예문일통(禮門一統)》 《석학정론(釋學正論)》 《정본고증(政本考證)》 《초려문답(草廬問答)》 《예서(禮書)》 등 후학을 위해 많은 저서를 남겼다.
유자정 (孺子亭)
유자정은 정조11년(1787) 사촌마을이 낳은 큰 유학자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의 제자들과 영남 유림이 마을 뒤편 작은 터골 입구에 지은 정자이다.
퇴계 이황선생의 학맥을 이어 오던 당시의 대산 이상정의 학문을 이어받아 유학자로서 길을 걸으며 천사는 이 정자에서 영남 동북부 지역의 유림을 지도하면서 저술에 힘쓰던 곳이다.
1896년 병신의병때 소실된 것을 2010년 7월 복원하였다.
사촌마을(沙村마을) 소재지 :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사촌마을은 고려중기 출장입상(出將入相)의 훈신(勳臣)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후예인 감목공(監牧公) 김자첨(金子瞻)이 안동(安東) 회곡(檜谷)에서 1392년 이곳으로 입향 하여 중국의 사진촌(沙眞村)을 본 따 사촌(沙村)이라 하였으며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 등 많은 유현들이 이 마을 에서 태어났다.
그후 1750년경 병촌(屛村) 유태춘(柳泰春)이 이곳에 이주하여 수백년 동안 안동김씨(安東金氏) 풍산유씨(豊山柳氏) 등이세거한 반촌마을이며 임진왜란과 병신(1896) 의병을 주도한 마을이기도 하다.
또한 마을 북편은 송림이 뒤덮인 자하산(紫霞山)이 있으며 서편에는 안동김씨가 사촌으로 입향 할때 조성한 남북방향으로 길게 놓인 사촌리의 가로숲(천연기념물 제405호)이 마을의 방풍 겸 경관지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밖의 문화재로는 퇴계 문인 김사원(金士元)이 선조 15년(1582)부터 3년간에 걸쳐 완성하여 자신의 호를 딴 만취당(晩翠堂 , 경상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169호)과 그 옆에는 수령이 약500년 된 의성사촌리 향나무(경상북도 지방기념물 제107호)가 있으며,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 1468~1563)가 연산군 때 관직을 버리고 운둔생활을 하며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지은 영귀정(詠歸亭,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34호)이 있다.
의성 만취당 (義城 晩翠堂)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인 이 건물은 조선시대 퇴계 이황의 제자이며 부호군을 지낸 김사원(金士元)선생이 선조15년(1582)부터 3년간에 걸쳐 완성하였으며, 자신의 호를 따서 만취당이라 하였다.
그 후 숙종32년(1711) 부분적인 보수가 있었고, 영조3년(1727)에는 동쪽 방(복제-復濟)을, 동왕40년(1764)에는 서쪽 방을 증축함으로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전체적인 형태는 "T" 자 형이고 우물마루와 온돌방이 꾸며져 있으며, 임진왜란 이전에 건립된 그리 흔치 않는 목조건물 이다.
현판의 글씨는 김사원과 동문인 명필가 한석봉(韓石峯)선생이 썼다.
의성 사촌리 향나무 경상북도 지방기념물 제 107호
이 향나무의 수령은 약 500년에 이르며 높이 8m, 수관폭 25m이다.
조선조 연산시대(燕山時代) 학덕을 겸비한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1468~1563)선생이 심었으며 스스로 이를 만년송(萬年松)이라 하였다.
단구서원(丹邱書院)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분토리에 있는 서원으로 1856년(철종 7) 지방유림의 공의로 신적도(申適道)와 신열도(申悅道)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경내의 건물로는 묘우(廟宇)인 상덕사(尙德祠), 강당인 명교당(明敎堂), 동재(東齋)인 거인재(居仁齋), 서재(西齋)인 적의재(迪義齋), 주소(廚所) 등으로 되어 있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관리가 중단되면서 자연히 멸실되었다. 1873년 대원군의 집정이 끝나자 제단을 설치하여 매년 향사를 지내왔다. 1989년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