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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N EMPEROR. Constantin I, the Great, 307 - 337 AD AE Follis. 321 AD
ROMAN EMPEROR. Constantin I, the Great, 307 - 337 AD AE Follis. 321 AD
Obv: CONSTANTINVS AVG - Laureate head, right
Rev: DN CONSTANTINI MAX AVG / VOT.XX / PA - Crescent moon with star, A, VOT / XX in laurel wreath
Diameter: 18.0~19.1 mm Weight: 3.56g RIC VII 239
2018.10.20 Gorny & Mosch
Constantinus I. AE-Follis London Sol
Constantinus I. AE-Follis London Sol
Kaiser: Constantinus I., 307-337 n.C.
Nominal: AE-Follis.
Stadt: London.
Vs.: IMP CONSTANTINVS AVG Bel. Büste des Kaisers nach rechts.
Rs.: SOLI INVICTO COMITI Sol steht nach links, hält Globus und hebt die Hand, SF, PLN.
Erhaltung: sehr schön bis vorzüglich, gutes Portrait, braune Patina.
Maße: 2,96g, 20.6~21.5mm. Kamp.: 136.180.
2017.9.27 dionysos_numismatik
CONSTANTINE THE GREAT (326 AD) Ae3 Follis. Trier
Constantine I 'The Great' - Roman Emperor: 307-337 AD
Date: C. 296-297AD
Obv: CONSTANTINUS AVG. Laureate head, right
Rev: PROVIDENTIAE AVG G. Military Camp gate with two turrets and one star, PTR
Size: 17.8mm Weight: 2.9g
Ref: RIC VI 31b
Condition: Dark tone with clear detail
2017.9.21 carpe-nvmismatics
Constantinus I. 306~337 for Helena. AE Follis, 326 Ticinum (콘스탄티누스 1세의 모후)
Constantinus I. 306~337 fur Helena. AE Follis, 326 Ticinum. (VII, Ticinum)
OBV: FL HELENA AVGVSTA - Diademed, draped bust right
REV: SECVNITAS AEIPVBLICE/ PuT - Securitas standing left, holding branch
Diameter: 19.6mm Weight: 3.58g RIC 202.
2020.3.19 KUNKER
콘스탄티누스 I세(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AD 271~337)는 중기 로마 황제(재위 306년 - 337년)이다. 흔히 기독교
사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통칭하며, 동방 정교회는 모두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여 성 콘스탄티누스(Sanctus Constantinus
Magna)로 호칭한다. 306년 브리타니아의 요크에서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어 죽는날까지 로마를 통치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첫 번째 기독교인 로마 군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치세는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303년 선
포된 디오클레티아누스 칙령에 의한 기독교 박해정책은,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밀라노 칙령이 선포되며 기독교에 대한 박
해는 끝나고 사실상 정식 종교로 공인했다. 또한 교회의 압류된 재산을 돌려 주고 이에 대한 국가의 보상을 정했다. 그는 또한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기독교의 발전에도 기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비잔티움을 ‘새로운 로마(Nova Roma)’로 공표하고 330년 공식적으로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정하였
다. 337년, 그가 죽자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명했고, 세계 최초의 기독교 도시로서 이후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존재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I 세는 272년 또는 273년 2월 27일 로마 제국의 모이시아 수페리오르 속주(현재의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나이수스에
서 장군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그의 첫째 부인 성녀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성녀 헬레나는 여관 주인의 딸로 콘스탄티
누스 1세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92년 아버지는 헬레나를 버리고 제국 서방 구역의 정제인 막시미아누스의 딸인 테오도라
와 결혼했다.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사두정치체제에서 2명의 부제 중에 하나로 임명된 직후 젊은 콘스탄티누스는 동방 정제 디오클레티
아누스의 휘하로 들어가 니코메디아(터키 지역)에서 복무했다. 305년 2명의 정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은퇴하고 콘
스탄티우스가 막시미아누스의 뒤를 이어 서방의 정제로 승격하자 콘스탄티누스는 즉각 갈리아에 있는 아버지의 휘하로 들어갔다.
부제로는 서방에는 세베루스, 동방에는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추대되었는데 사실상 부제의 위치에 있었던 콘스탄티누스와 막시미아누
스의 아들인 막센티우스는 권력에서 소외된 셈이었다
1년 후인 306년 7월, 브리타니아 원정에 나섰던 콘스탄티우스가 에보라쿰(지금의 요크)에서 병사하자 그의 휘하의 장병들은 즉각 콘
스탄티누스를 정제로 추대하였다.
병사들에 의한 콘스탄티누스의 정제 승계는 당시 사두정치 체제 아래에서 적법성에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는 동방 정제
인 갈레리우스에게 자신의 권좌승계에 대해 확인을 요청하였고,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의 영토를 승계하도록 하되 부
제로 인정하고 서방 정제로는 세베루스를 임명하였다
제국 내에서 콘스탄티누스의 관할 구역은 히스파니아, 브리타니아, 갈리아, 그리고 게르마니아 지방이었다. 이로써 그는 중요한 라인
강 방위선의 강력한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갈리아 지방은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방 중에 하나였으나 이른바 제3세기의 위기 동
안에 인구는 소실되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306년부터 316년까지 10년 동안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라인 강 방위선을
굳건히 하고 갈리아 지방을 재건하는데 힘썼다. 당시 그의 주요한 거주지는 트리어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지역의 안정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부족들의 반란이 일어나면 즉각적이고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붙잡힌 포로들은
원형경기장에서 모두 살육하는 무단정치를 과시했다. 이러한 그의 전략이 나름대로 효과를 나타내어서 그의 통치기간 동안 라인 강
방위선은 상대적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한편 로마 국내정치는 사두정치의 한계를 드러내며 복잡한 내전 상황으로 빠져 들어갔다.
307년 막센티우스가 로마에서 사두체제와는 다른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면서 봉기하고 막시미아누스도 은퇴 생활에서 복귀하여 아들
을 도왔다. 서방의 정제인 세베루스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진격하지만 퇴임 정제인 막시미아누스가 지휘하는 군대에 궤멸당하고 세베
루스는 로마로 잡혀가 자살을 강요당해 죽는다.
이후 동로마의 정제인 갈레리우스가 막센티우스를 단죄하기 위해 군사행동에 들어갔지만 실패하고 결국 퇴임 정제인 디오클레티아누
스와 막시미아누스 그리고 동방정제인 갈레리우스 세 사람이 모여 회의를 한 결과 서방의 정제에 리키니우스를 임명하기로 했다.
이에 막센티우스는 불만을 품게 되고 아버지인 막시미아누스와 논쟁끝에 갈라서게 되었다. 아들과의 불화로 막시미아누스는 트리어
에 있는 콘스탄티누스에게 와서 자기의 딸 파우스타와 혼인을 조건으로 합류했지만, 콘스탄티누스가 야만족을 격퇴하러간 틈을 타 쿠
테타를 시도하다가 예상보다 빨리 돌아온 콘스탄티누스에게 공격당하고 310년 마실리아(현재의 마르세유)에서 죽음을 맞았다.
311년 갈레리우스가 죽자 리키니우스가 동방의 정제로 취임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와 동맹을 맺고 독자적인 황제의 권리
를 주장하는 막센티우스를 처단하기 위해 출정했다.
312년~324년
312년 초 콘스탄티누스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했고 투린과 베로나에서 막센티우스군을 차례로 무찔렀다. 이후 벌어진 유
명한 밀비우스 다리 전투로 결국 막센티우스 군은 콘스탄티누스에게 대패하고 막센티우스는 전사한다. 이 전투로 인해 제국 서방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유일한 강자이자 정제로서 군림하게 된다.
밀비우스 다리 전투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 밀비우스 다리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건축
313년 동방의 정제 리키니우스와 서방의 정제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에서 만나 콘스탄티누스의 동생 콘스탄티아를 리키니우스에게
결혼시켜 서로의 동맹관계를 확인하고 제국의 여러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기독교를 사실상 공인하게 되는 밀라노 칙령도 여기서 발표
된다. 이 회담은 짧게 끝났지만 동방의 부제인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황제 리키니우스의 영토로 침범을 하였
다. 리키니우스는 막시미누스 다이아의 공격을 격퇴하고 동방에서 일인자의 지위를 굳혔다.
이로써 제국의 서방과 동방에 두 명의 황제만 남게 되었고 그들의 동맹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두 정제의 세력은 서로 충돌하였는데
315년 키발라에 전투, 317년 마르디아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가 승리하게 되고 두사람은 휴전협정을 맺었다. 이후 몇 년간 콘스탄티
누스는 아들 크리스푸스의 도움으로 야만족과의 싸움에 전념한다
324년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는 이제 로마의 패권을 놓고 일대 결전을 벌인다.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벌어진 육상전에서는 콘스
탄티누스의 승리로 끝났고 이어 비잔티움 근처의 해전에서도 콘스탄티누스의 아들 크리스푸스가 이끄는 콘스탄티누스의 해군이 승리
했다. 이어 소아시아에서 벌어진 지상전에서도 리키니우스는 패하고 항복하여 강제로 테살로니카로 은퇴당했고 이듬해 반란을 꾀한
다는 명목으로 재판도 없이 처형당했다. 이로써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제국의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324년~ 죽음
콘스탄티누스가 유일한 황제로 등극하자 제국의 권력과 부와 문화 등의 중심지는 급격하게 동로마 제국으로 이동하게 된다.콘스탄티
누스는 비잔티움을 자신의 도시로 대대적으로 개조하고 원로원과 로마와 같은 공공건물을 지어 새로운 로마 Nova Roma로 불렀다.
그의 사후에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의 콘스탄티노플로 개명된다
주장했지만 재판도 없이 29세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아내 파우스타도 목욕을 하다가 죽은 것으로 위장하여 죽였다.
콘스탄티누스는 337년 죽기 바로 직전에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에게 세례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당시 기독교인들의 전례
를 따른 것으로 죽기 직전까지 세례를 받는 것을 미루어서 현세의 죄를 온전히 씻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신은 비잔티움으로 옮겨져서 매장되었다. 그의 권좌는 파우스타가 낳은 세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II세와 콘스탄티우스 II세, 콘
스탄스에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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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1세의 모후 헬레나>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I)의 어머니인 성녀 헬레나(Helena)는 소아시아 북서부 비티니아(Bithynia)의 드레파눔(Drepanu
m)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270년경에 로마(Roma)의 장군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를 만났는데, 그녀의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둘은 결혼하였다. 그들 사이에서 콘스탄티누스가 태어났다. 293년에 남편 콘스탄티우스는 그리스도교의 박해자
중 한 명인 막시미아누스 황제 휘하에서 카이사르(Caesar)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그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헬레나와 이혼하고 막
시미아누스 황제의 의붓딸인 테오도라(Theodora)와 결혼하였다.
306년 막시미아누스 황제가 사망하자 콘스탄티누스의 휘하 군인들이 그를 황제로 선포하였고, 312년 10월 12일 밀비안 다리(Milvia
n Bridge)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격파하고 승리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로 입성하였다. 그 후 그는 그의 어머니인 헬레나에게 ‘아우
구스타’(Augusta)라는 칭호를 드렸다. 헬레나가 언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그녀의 노력으로 밀라노(Milano) 칙령
을 반포하게 하여 로마 제국 내에서 그리스도교를 인정하고, 투옥된 모든 신자들을 석방하였다.
그녀는 이때부터 그리스도교적인 모든 일을 도우면서 수많은 성당을 짓고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었다. 그 후 아들이 동서 로마제국
모두를 장악한 뒤에 만년에 접어든 헬레나는 326년경에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성지에 오래 머물면서 골고타 언덕에 주님 무덤 성당(성
묘 성당)을 세웠다. 전설에 의하면 그녀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십자가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래서 성녀의 상징은 십자가이며, 이콘
에서 십자형의 십자가를 들고 있는 성인은 오직 헬레나뿐이다. 그녀는 330년 8월 18일 오늘날 터키의 이즈미트(Izmit)인 니코메디아
(Nicomedia)에서 사망하여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 안장되었다. 동방교회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함께 5월 21일에 축
일을 기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