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바나바 <행 15:36-41, 찬송 483장>
대광교사. 2003.06.07.
36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바나바 -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본문에 나오는 바나바는 바울이 첫 선교여행을 떠날 때 줄곧 동행했던 바울의 중요한 동역자였습니다. 바울에 대해서는 대부분 잘 아실 테니 자세히 설명 드리지 않겠습니다만 바나바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조금 설명을 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4절에 보면, 바나바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성경에 이렇게 기록될 정도면 바나바가 얼마나 훌륭한 인물인지, 그리고 하나님 앞에 얼마나 헌신된 사람이었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
그런데 본문 말씀을 보면, 그토록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고, 그것도 오랜 시간 동안 함께 동역했던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심히 다투었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2차 선교여행을 떠나면서 누군가 한 명을 더 데리고 가야겠다는 데에는 뜻이 통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데려갈 것이냐 하는 문제에서 서로 생각이 달랐던 것입니다.
바나바가 추천한 사람은 마가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전에, 자신과 뜻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떠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심성이 관대하고 착했던 바나바는 과거에 좀 문제가 있었다고 해서 계속 그 일을 염두에 두고 사람을 기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반면에 강직한 성격의 바울은, 사적인 일도 아니고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나서는 중요한 일에 과거에 문제가 있었던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본문의 짧은 기록만 가지고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두 사람의 생각에 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어쨌든 이 일로 인해서 두 사람은 “심히 다투고 피차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하나님의 사람들]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연약성과 한계를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베드로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큰 소리 쳤다가, 정작 자신에게 위험이 닥쳤을 때 주님을 부인하고 또 부인하더니 세 번째는 주님을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습니다. 그 일은 베드로가 큰 소리 치고 나서 불과 몇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모세, 여호수아, 다윗, 솔로몬, 수많은 선지자들과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을 포함해서,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 중에, 흠 없고 티 없는 영웅의 모습으로만 묘사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까지도 그 연약함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기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민하고 슬퍼하시면서 십자가를 피하게 해 달라고 그렇게도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인간의 나약함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성경의 이러한 솔직한 기록에 의해서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습니다. 저 역시 실수할 수 있고, 연약할 수 있는데, 그 모든 사실에 대해서 마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염려하지 말아라. 너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내가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불렀다. 너는 다만 최선을 다 하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가 크게 다투고 피차 갈라섰다는 본문의 기록에 대해서도 조금도 당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완전한 것처럼, 부족함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런 사람은, 오히려 자신이야말로 정말로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일 겁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을 기록한 오늘 이 본문 말씀을 통해서 같은 목표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얼마든지 견해를 달리 할 수 있고, 다툴 수도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요. 성경은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누가 더 “옳다 그르다”는 평가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만을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사람이 사는데 견해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견해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내 생각만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단정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다른 견해를 갖고 계신 분들에 대해서 너무너무 안타까워하시는 경우를 봅니다.
예를 들어서, A라는 분이 계신데, 이 분이 여러 가지 경험이나 근거를 통해서 자기 견해가 옳다는 확신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B라는 사람이 그걸 모른다고 매우매우 안타까워하십니다. 자신은 분명히 볼 수 있는 명백한 사실인데, B가 그걸 모르는 이유는 철이 덜 들어서 그렇고, 하나만 알고 둘을 몰라서 그렇다고 확신을 하고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B라는 분도, 자신이 살아온 삶의 여러 가지 경험이나 근거를 통해서 자기 견해가 옳다는 확신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A라는 사람은 그걸 모른다고 똑같이 안타까워하십니다. 자신은 분명히 볼 수 있는 명백한 사실인데, A가 그걸 모르는 이유는 역시 철이 덜 들어서 그렇고,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서 그렇다고 A라는 분과 거의 같은 유형의 확신을 갖고 계십니다.
A라는 분이나 B라는 분이나 본인이 그렇게 확신하는 충분한 근거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생각이 틀림없이 옳다”고 확신하기 전에,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좀 열어두면 어떨까요? “저건 틀림없이 아니다”라고 생각되더라도 그 얘기가 옳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열어두고 그 쪽 얘기를 진지하게 한 번 들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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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자신의 입장은 변하지 않더라도 다른 견해에 대한 이해는 넓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갖게 된 다른 견해에 대한 이해는, 견해가 다른 사람에 대해 가질 수도 있는 혐오감이나 경멸감으로부터, 그리고 그 감정으로 인해서 갖게 되는 괴로움으로부터, 어느 정도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견해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을 것이며, 서로를 충분히 알지 못해서 일어날 수 있는 오해와 충돌을, 상당부분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어쩌면 너나 할 것 없이, (물론 저 자신도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인생(두 인생이 아니라)을 살기 때문에, 하나만 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둘을 알기 어려운 게 우리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만 아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종교학에서 잘 쓰는 용어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모든 정황에서도 일반적으로 통하는 진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떤 한 분야에 대해서 아무리 박학하고, 아무리 많은 책과 자료를 섭렵하고 능통한 사람이라도, 그와 다른 견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었던 사람은, 무서울 정도로 배타적이고 편협한 성향을 띠게 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진지하게 역지사지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 한 분야에 대해서만 지나치게 몰입하고 확신하는 것은 조화와 균형을 잃게 하고, 독단으로 흐르게 할 위험성이 항상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논리나 경험을 절대화하는 사람은, 혹 그 분야에 대한 전문가라는 말을 듣는다 하더라도, 한 쪽만 알기에 하나만 아는 것이고, 결국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과 결별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게 하여,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부족하고 연약한 면이 있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하나님, 그래서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