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법주사(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209
* 창건 역사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의신(義信)스님이 창건했다. 스님은 인도에서 돌아온 뒤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절터를 찾아다녔다. 지금의 법주사터에 이르자 나귀가 더 가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렀다. 스님은 이곳에 절을 짓고 ‘부처님의 법이 머문다’는 뜻에서 법주사라고 하였다.
그 뒤 신라 혜공왕 12년(776)에 진표(眞表)율사(718~752)에 의해 중창되면서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미륵불은 56억 7천만 년 뒤에 오실 미래불이다. 미륵부처님은 이 땅에 오신 뒤, 용화수(龍華樹) 밑에서 세 번에 걸쳐 법을 펼친다. 이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고 한다. 진표율사는 금산사(金山寺) 중창, 법주사(法住寺) 중창, 금강산 발연사(鉢淵寺) 창건으로 용화삼회를 나타내려 하였다.
오늘날 법주사는 진표율사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1990년 높이 33m 금동미륵대불을 모시고 모든 이들의 행복과 이 땅의 평화를 기원하고 있다.
* 속리산 법주사 뜻
속리산(俗離山)은 속세를 떠난 산으로 풀이된다. 속리산 숲길을 걷다 보면 누구나 속세의 모든 근심을 내려놓게 된다. 그리고 울창한 숲과 맑은 물이 어우러진 숲길은 곧 평화로운 세상과 만나게 한다. 그곳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이 머무는 법주사이다.
일찍이 신라의 명문장이었던 최치원(崔致遠)은,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진리를 멀리하려 하는구나.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는데 속(俗)이 산을 떠나려 하는구나(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라며 산 이름의 속뜻을 시로 풀었다. 예로부터 조선팔경 가운데 속리산이 빠지지 않았던 것은 단지 산세의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라 그 속에 법주사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 법주사 돌아보기
법주사에는 국보3점, 보물12점, 지방유형문화재22점 등 많은 문화재를 간직한 사찰이다.
이 가운데 몇 가지만 소개한다.
팔상전(오층 목탑)(국보 제55호)
법주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전각은 팔상전(捌相殿)이다. 의신스님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으며, 정유재란 때 소실된 후 조선 선조 38년(1605)에 다시 세워졌다. 현재 옛 건물로써 한국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5층 목탑이다. 팔상전은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을 모신 전각이다.
현재 팔상전 안에는 4폭의 팔상도가 봉안되어 있는데 한 폭에 각각 2상(相)을 나타냈다. 세로 200㎝, 가로 90㎝로 1897년에 조성하였다. 종각을 바라보는 불화가 제1상으로 여기서 왼쪽으로 돌아가며 석가의 일대기를 표현하였다.
1. 도솔천에서 하강하는 모습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2. 룸비니에서 탄생하는 모습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3. 4문을 나가 생로병사를 관찰하는 모습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4. 성을 넘어 출가하는 모습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5. 설산에서 고행하는 모습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6. 보리수 아래서 악마를 굴복시키는 모습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7. 녹야원에서 설법하는 모습 [녹원전법상鹿園轉法輪相]
8. 사라쌍수 아래서의 열반한 모습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팔상도 앞에는 네 면에 걸쳐 4구의 불상을 안치했는데 높이는 약 85㎝이다. 근래에 조성된 목조불상으로서 수인만 다를 뿐 동일한 양식이지만 1구 만은 석가여래의 열반모습을 재현한 와불상(臥佛像)이다.
불상 주변에는 소형의 오백불상이 늘어서 있다. 19세기 말에 용화보전이 파손될 때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미래천불을 상징하는 천불상이 있었으나 대부분 파손되어 지금은 오백불 정도만 남아 있다고 한다.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
팔상전 뒤로 쌍사자석등이 있다.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사자 두 마리가 석등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근데 자세히 보면 입 모양이 다르다. 한쪽은 입을 벌리고 있고, 한쪽은 입을 다물고 있다.
석연지(국보 제64호)
석연지는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조성하였다. 원래 이 석연지는 법주사 본당이었던 용화보전이 있었을 때, 그 장엄품을 설치했던 것으로 극락정토의 연지(연꽃 연못)를 상징하며 화강석으로 조각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대웅보전 안에는 닫집 없이 후불탱화의 위를 막아 천룡이 불상과 불화를 호위하도록 했다. 170평에 달하는 건물의 내부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을 주존으로 석가여래(釋迦如來)와 노사나불(盧舍那佛)이 협시한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하였다. 연화대좌 위에 좌정한 삼신불은 흙으로 빚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규모로서, 1624년 대웅보전을 중창하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크기는 전체 높이 550㎝이고 허리둘레 390㎝로서 우리나라의 소조불상 중에서 가장 크다. 삼신불의 모습은 대체로 서로 일치하고 수인만 다르다. 즉 비로자나불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이고, 오른쪽의 노사나불은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한 손은 밖을 향하는 설법인(說法印), 왼쪽의 석가불은 한 손은 위를 향해 펼치고 한 손은 바닥을 향해 있어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였다. 전체적으로 경직된 상호에 눈과 코, 입의 선이 작고, 목은 웅크린 듯 짧게 표현하였다.
- 대웅보전은 무량사(無量寺) 극락전, 화엄사(華嚴寺) 각황전(覺皇殿)과 함께 우리 나라 3대 불전(佛殿)의 하나로 손꼽힌다.
- 법주사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앞면 7칸, 옆면 4칸의 2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옛기록과 기단석(基壇石의) 양식으로 보아 지금의 건물은 고려 중기에 처음 세운 것으로 보인다.
신라 때 창건했을 무렵에는 대웅보전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당시에는 미륵장륙상을 모신 용화보전이 있어 미륵신앙 도량인 법주사의 중심 역할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1624년(인조 2)에 중건하였고 이후 잦은 중수를 거듭하였지만, 조선 중기의 양식을 잘 갖추고 있어 보물 제915호로 지정되었다.
대웅보전 바로 옆으로, 삼성각, 명부전, 진영각. 그리고 팔상전 옆으로 범종각, 약사전 등이 있음.
법주사 미륵대불
1939년에는 미륵불상 조성이 시작되었다. 당시 주지 장석상(張石箱) 스님이 발원하고 전북 태인에 살던 김영곤(金永坤)거사가 시주하여 80척의 미륵상 조성이 시작되었으나 조각을 맡았던 김복진(金復鎭)이 요절하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희사로 1963년 3월에 재착수하여 1964년에 완공하였다.
1976년에는 주지 탄성(呑星) 스님이 대웅보전을 보수하고, 범종각을 새로 지었다. 1990년에는 주지 월탄(月誕) 스님의 원력으로 청동미륵상을 대대적으로 중수하였으며, 그 좌대의 지하에 성보전시관인 용화전을 마련하였다. 1996년에는 지장보살도를, 1997년에는 약사후불도를 각각 조성 봉안하였다.
2002년 불상 전체를 금으로 장엄하였다.
<놓치지 말고 꼭>
법주사의 마애여래의상(磨崖如來倚像)(보물 제216호)
능인전 옆의 추래암(墜來岩) 암벽에 새겨진 고려시대의 마애불상이다.
의상(倚像)이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의자 대신에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양식상의 특징과 연관지어 미륵불로 추정하고 있다.
전체 높이는 5m로서 두 손은 가슴까지 들어 전법륜인(轉法輪印)을 취하였다. 다리는 연화대좌 위에 걸쳤는데 한껏 벌리고 앉은 모습이 부자연스럽다.
한편 마애여래의상 왼쪽 아래에는 2개의 또 다른 조각이 있다. 그 하나는 짐을 싣고 있는 말[馬]과 그 말을 끌고 있는 사람이 음각되어 있다. 이는 절의 창건주인 의신조사가 인도에서 경전을 싣고 돌아와 법주사를 창건했다는 설화를 도설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말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소[牛]의 모습이다. 이는 절의 중흥조인 진표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법주사로 가는 도중에 한 소가 진표율사에게 무릎 꿇고 경의를 표했다는 설화를 나타낸 것이다.
마애여래의상 북쪽 벼랑에는 또 다른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심하게 마멸되어 정확히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대좌에 앉아 있는 의상(倚像)의 모습이다. 왼손에는 지장보살이 지니는 특유의 여의주가 새겨져 있어 지장보살로 추정한다. 상호의 표현과 옷자락의 모양 등으로 미루어 마애여래의상과 동시대인 고려 초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 사리가 모셔진 세존사리탑
법주사 청동미륵대불의 왼쪽에는 별도의 담장으로 구획한 전각이 있다. 이곳에는 능인전(能仁殿)과 사리각, 세존사리탑, 사리탑비 등이 있다.
이 사리탑은 고려 후기인 1362년(공민왕 11)에 조성하였다. 1650년(효종1)에 조성한 세존사리비에는 사리탑 조성 과정 전한다. 홍건적을 격파한 후 공민왕은 그 공덕이 부처님의 은혜에 있다고 믿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법주사를 찾은 왕은 통도사의 적멸보궁에 모셔진 석가여래 진신사리 1과를 이곳에 옮겨 봉안하라고 하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