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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씨시조 분파도
가락 왕손(駕洛 王孫)의 갈래
왕후를 맞이한 수로왕은 나라의 옛 제도를 새롭게 고치고 나라안을 잘다스려 백성 사랑하기를 아들처름 하여 그 교화가 엄하지 않으면서도 위험이 따르고 그 다스림은 너그러우면서도 잘 이루어졌다. 왕과 황후의 금슬은 하늘이 땅을, 해가 달을, 그리고 밝음이 어두움을 짝짓듯 했다고 전한다. 허황후는 태자 거등(居登))을 비롯하여 아들 10형제, 딸 자매를얻고 189년 3월 1일 세상을 떠난다. 백성들은 땅이꺼진 듯한 크나큰 슬픔속에 구지봉 동북언덕 (현재 김해 구산동에 있는 허황후릉)에 장사 지냈다. 대왕께서는 생전에 왕후가 늘 그의 성(姓)이 이 땅에 전하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자 이를 가엽게 여겨 10왕자 중 이자(二子)로 하여금 허씨(許氏)로 사성하여 후세까지 모성(母姓)을 전하게 하여 허황후의 아름다운 내조에 보답 했다. 이 허씨로 사성받은 왕지의 후손들이 후에 여러개의 본으로 분류된다. 가락국이 신라에 병합된 후 신라의 사민(徙民) 정책에 의해 가락의 왕손이나 유민들은 여러 지방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들 허씨 후손들이 이주하여 집단으로 세거한 다섯 곳의 지명을따라 허씨는 5개의본으로 나뉜다. 김해에 계속 머문 허씨 후손 들은 김해허씨, 하양으로 옮겨 세거(世居)한 후손들은 하양허씨, 그외 양천허씨, 태인허씨, 함창 등으로 분류되지만 모두 가락국 김수로왕의 후손이다. 한편 신라 35대 경덕왕때 허씨의 후손중에 아찬의 벼슬에 있던 허기(許奇)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그 때 당나라 황제는 현종이였다. 현종은 초기에는 훌륭한 치적을 쌓았으나 양귀비를 후궁으로 들인 후부터 정사를 어지럽혀 미침내 안록산의 난이 일러났고 이 반란군이 당나라 서울 장안에까지 쳐들어왔다. 이 난리통에도 허기는 현종을 호종하여 멀리 촉(蜀)에까지 따라갔다. 난이 끝난후현종은 허기에게 황성 (皇姓)인 이(李)씨를 사성하고 소성백(邵城伯)이란 작위와 식읍 1천 5백호를 내렸다. 그러나 신라 조정에서는 허기가 당에 오래 머물러 4년 만에 돌아왔으므로 이를 허물하여 당나라 황제가 내린 작위와 식읍을 주지않았다. 그래서 허기의 10세손인 허겸(許謙)에 이르기까지 「이,허」복성을 사용하였다. 그 후 허겸의 아들 한(翰)에 이르러 허성은 쓰지않고 이성 단성을 쓰게되어 가락왕손은 또 하나의 갈래를 이루 웠으니 고려조에 크게 현달한 인천이씨(仁川李氏)들이 곧 이들이다.
김수로왕 허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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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세 허기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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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30세 허선문(양천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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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30세 허사문(태인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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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33세 허강안(하양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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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35세 허염(김해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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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 이허겸(인천이씨) |
첫댓글 태인 허씨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 본이라는데 맞는지 궁금합니다.그런데 인터넷에 보면 태인 허씨 카페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