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주허태후비음기(普州許太后碑陰記)
1) 해설 이 글은 앞의 「수로왕납릉비음기」와 더불어 1646년(인조 24)에 허목(許穆)이 쓴 것이다. 당시 수로왕릉과 왕후릉을 보수하면서 함께 비석을 세웠는데, 허목이 경상도관찰사 허적(許積)의 부탁을 받고 두 비석의 음기를 작성하였다. 이 글에서는 허왕후의 출자, 허성(許姓)의 유래, 왕후릉의 수축 경위를 적고 있다.
2) 원문 및 해석 太后姓許氏 譜牒記阿隃陀國君之女 金官古事 或曰 南天笁國君之女 又曰 自言西域許國君之女 許 或曰許黃之國 태후의 성은 허씨이다. 보첩(譜牒)에서 아유타국왕(阿隃陀國王)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금관고사(金官古事)에는 혹은 남천축국왕(南天笁國王)의 딸이라고 되어 있으며, 또 스스로 서역(西域) 허국왕(許國王)의 딸이라고 말하였다고도 하는데, 허국(許國)은 허황국(許黃國)이라고도 한다.
方外別國 其有一國互稱 或如中國之殷商梁刑 古遠後世傳說不同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나라가 여러 가지 호칭을 가지는 것은 마치 중국이 은(殷)나라, 상(商)나라, 양(梁)나라, 형(邢)나라로 불리는 것과 같은 것이리라. 너무나 아득히 먼 옛날의 일인지라, 후세에 전해진 이야기가 서로 다른 것이다.
誌記 其先君之命曰 東土當有駕洛元君 得汝爲配浮海而至云 首露王立爲后 號曰普州太后 或曰皇玉夫人 當東漢光武皇帝建武二十四年 首露王七年 책에 기록되어 있기를, “동쪽 나라에 가락국의 시조가 있는데, 너를 배필로 삼을 것이다.”라는 부왕의 말을 듣고 바다를 건너 왔다고 한다. 수로왕께서 맞이하여 왕후로 삼고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 불렀는데, 혹은 황옥부인(皇玉夫人)이라고도 했다. 후한 광무제 건무 24년(A.D. 48)이자 수로왕 7년의 일이다.
及靈帝中平六年三月 太后薨 壽百五十七 太后有十人 得后姓者二人 후한 영제 중평 6년(189) 3월에 이르러 태후께서 세상을 뜨시니, 향수(享壽)는 157세였다. 태후는 아들 열 분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어머니의 성을 따른 자가 두 분이었다.
後世 各以其所受封之地 別爲族 爲孔巖河陽之許 又其餘各以其鄕著姓者非一 而其初皆本於太后 후세에 각기 책봉을 받은 지역에서 따로 일족을 이루었으니, 공암(孔巖) 허씨와 하양(河陽) 허씨가 그들이다. 또 그밖에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장을 본관으로 삼은 자들도 한둘이 아니지만, 본래 그 시초는 모두 태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太后墓 在王陵後一里 舊俗 邦人以冬至日 大祀先王 以太后配食 至今不絶也 태후의 능은 왕릉의 뒤쪽 1리에 있다. 옛 풍속에 이 지방 사람들은 동짓날이면 수로왕에게 큰 제사를 올리고 아울러 태후를 배향하였는데, 지금도 그 풍속이 이어지고 있다.
我昭敬大王二十五年 有倭寇 掘先王墓 幷及太后葬 邦人更封築之 上之二十四年 嶺南觀察使許積 大修墓 仍立石 記其事 有父老傳 萬曆八年 古有觀察使許公曄 嘗修二陵云 至今追計六十七年 우리 소경대왕(昭敬大王)1) 25년(1592)에 왜적의 노략질이 있어 수로왕릉과 태후의 능이 함께 파헤쳐졌다. 이에 이 지방 사람들이 다시 봉토를 쌓아올리고 보수하였는데, 지금 주상2)이 보위에 오르신 지 24년째 되는 해(1646)에 경상도관찰사 허적(許積)이 능묘를 크게 수리하고, 아울러 비석을 세워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부로(父老)들이 전하기를, “예전에 만력 8년(1580)에 관찰사 허엽(許曄)이 두 능을 보수한 바 있다.”고 하니 지금으로부터 계산하면 67년전이 된다. 1) 소경대왕(昭敬大王)은 선조(宣祖)를 지칭한다. 명나라로부터 받은 시호이다. 2) 지금 주상은 인조(仁祖)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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