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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중국 선종사
1. 불교의 전래와 정착
불교가 종주국 인도로부터 다른 주변 지역으로 확산된 시기는 대체로 다음 4기로 구분한다. 제 1기는 B.C. 3세기 무렵 인도 남쪽인 세일론(지금의 스리랑카)으로의 전파이고[남전南傳], 제 2기는 B.C. 1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인도 북쪽 서역西域국가들로의 전파와 중국으로의 전파다[북전北傳]. 제 3기와 4기는 7~8세기 이루어진 스리랑카 상좌부上座部 불교의 동남아시아 전파와 9세기 이후 이루어진 티베트와 네팔로의 밀교 전파를 꼽는다.
1) 남방불교 북방불교
기원전 3세기 이후 불교는 인도뿐만 아니라 인도 밖으로 발을 넓혀 나간다. 아소카왕은 불교 전파를 위해 남쪽으로는 세일론(실론, 스리랑카)에, 서쪽으로는 헬레니즘 문화권인 시리아와 이집트에 이르는 장대한 지역에 선교사를 파견한다. 남쪽 세일론에는 4대 강국 중에 하나였던 아완띠Avanti국의 수도 웃자이니Ujjayinī를 중심으로한 서인도 계통의 상좌부 불교가 전해진다. 특별히 왕자 마힌다Mahinda를 보냈다고 하는데, 이는 나중에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 불교의 뿌리가 된 상좌부上座部 불교가 되었다.
전통과 계율을 중시하는 남방불교의 태도는 북방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보수적이고 소승적(小乘的)이라 하고 있지만 그들은 자기들이야 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전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사실 계율을 엄격히 지킴으로써 상가의 청정성을 유지하는 것 등은 배워야 할 점이기도 하다.
스리랑카 상좌부는 11세기에는 버마로 이식되었고 13세기에는 타이로 전파됐다. 타이에서 다시 라오스 · 캄보디아 그리고 베트남 남부지방까지 전파돼 오늘의 남방불교를 완성했다. 한때 스리랑카 상좌부는 법통이 단절된 일도 있었으나 버마로부터 승려를 영입, 부활되었고 다시 법통이 끊기는 사태가 생기자 타이로부터 승려를 맞아들였다. 남방불교에서는 이처럼 상가를 교류하는 전통이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동일한 법통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高崎直道 원저/洪思誠 편역,『불교입문』 p. 227.)
북쪽으로는 인도 북부 우타르프라데시 주 마투라Mathura 및 히말라야 산맥의 서쪽 끝 캐시미르Kashmir 지방 등지로 전해지고, 이후 중앙아시아 각지로 퍼져나가 가 “서역불교西域佛敎”가 되었다. 이 지역은 인도와 중국의 중간지점에 위치하여 전법의 중요 루트가 되는데, 동으로 전해져 중국에 이른다.
마우리아 왕조가 멸망한 후 북인도에서는 그리스와 그 밖의 외국인이 계속 침입해와 지배권을 확대했다. 이런 정세는 오히려 불교를 북방으로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스계의 왕 가운데는 메난드로스(B.C. 150년 경 재위)처럼 불교에 귀의했던 인물도 있었다. 이후 북인도는 스키타이(샤카족)족의 지배를 받는데 이때 불교는 중앙아시아(西域) 각지의 여러 민족 사이에 수용되었다.
북방지역의 불교전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A.D. 1세기 경 중앙아시아 출신의 대월씨(大月氏)의 한 종족이 인도로부터 중앙아시아에 걸쳐 건설한 쿠샤나 왕조였다. 불교는 그 사이에 중앙아시아로부터 더욱 동으로 진출해 중국에 전해졌다. 중국의 자료에 의하면 이때가 A.D. 56년이다. (高崎直道 원저/洪思誠 편역,『불교입문』 p. 218.)
당시 인도는 계율에 대한 논쟁으로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열이 일어나던 시기였다[근본분열, 석가모니 부처 입멸 백 년쯤 뒤인 기원전 383년경 인도의 바이샬리에서 이루어진 결집]. 상업도시 바이샬리를 중심으로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던 동인도 지역은 계율에 대해 진보적 성향을 보인데 반해, 서인도 지역은 바라문의 영향 등으로 계율에 엄격한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이들은 분열하여 각자의 길을 걸었다.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남쪽으로 간 상좌부 불교는 스리랑카를 비롯해 태국, 미얀마, 캄포디아, 라오스 등지로 가 남방불교가 되었다. 반면에 북쪽으로 간 대중부 불교는 티벳과 중국, 한국, 일본 등에 전파되어 북방불교가 되었다. 그래서 남방불교는 상좌부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고, 북방불교는 대승불교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 한편 남쪽인 스리랑카에 전해져 내려오는 경전은 빠알리어인데 비해, 북쪽인 서역과 중국으로 전해진 불교는 산스크리트어 문헌을 남기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근본분열이 일어난 원인에 대해 이들 두 문헌이 각기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빠알리어 문헌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로 10가지 계율, 즉 “십사十事”에 대한 이견 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반해, 산스크리트어 문헌에서는 아라한에 대한 비판을 담은 “5사五事”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부파불교시대에 아라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대천(大天, Mahadeva)이라고 하는 스님이 주장한 5사(五事)일 것이다. 대천의 5사를 기록하고 있는 대표적인 문헌은 상좌부의『논사』와 설일체유부의『대비바사론』이 있다. 이 두 문헌은 모두 대천의 5사를 강력한 어조로 비판하고 있다.『논사』를 주석한 붓다고사에 따르면, 대천의 5사를 인정한 학파는 동산파와 서산파와 같은 부파라고 한다. 그럼, 대천이 주장한 5사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 보자.
(1) 아라한들 중에는 천마에게 유혹당하여 부정을 흘리는 자가 있다.
(2) 아라한들 중에는 자신이 해탈하고 있어도 이를 모르는 자가 있다.
(3) 아라한들 중에는 자신이 해탈하고 있어도 여전히 의문이나 의혹이 있는 자가 있다.
(4) 아라한들 중에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서만 깨닫는 자가 있다.
(5) 아라한들 중에는 ‘도(道) 및 도지(道支)는 ‘고이다!’라는 말에 의해 도달할 수 있다.’는 견해를 가진 자가 있다. (이필원, 청주대 강사,「[아라한 다시읽기] 5사(五事), 아라한에게도 허물이 있다」)
5사에 대해 좀 더 설명을 덧붙이자면, 첫째 ‘천마에게 유혹당하여 부정을’ 흘린다는 것은 아라한일지라도 성욕이 남아있어 몽정夢精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여소유餘所有”라고 한다. 당시 상좌부의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깨달음의 지위에는 “성문4과聲聞四果”, 즉 수다원須陀洹, 사다함斯陀含, 아나함阿那含, 아라한阿羅漢이라 하여 네 가지가 있는데, 그중 사다함과에 이르면 성욕이 반으로 줄어들고, 아나함과에 이르면 완전히 없어진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보다 높은 단계인 아라한도 성욕이 남아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두 번째를 “무지無知”라고 한다. ‘해탈하고 있어도 이를 모르는 자’라는 뜻은 아라한이라도 자신이 아라한과를 성취했다는 것을 모를 수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유예猶豫”라고 한다. ‘해탈하고 있어도 여전히 의문이나 의혹이 있는 자’라는 것은 번뇌를 제거하고 의혹을 끊었다고는 하지만 아라한이라도 세속적인 의심은 남아있다는 것이다. 번뇌로 인한 의심은 사라졌지만 도리에 맞고 안 맞고를 분명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타령입他令入”이다.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서만 깨닫는 자’라는 것은 자신이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을 타인이 알려줌으로써 알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당신은 깨달았다!’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 알게 된다는 뜻이다.
다섯 번째는 “도인성고기道因聲故起”로 ‘도는 소리에 의해 생겨난다.’는 것이다. 아라한이 수행을 통하지 않고 ‘아! 고통스럽다’라는 말을 반복하므로 써 성스러운 진리를 자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라한도 괴로움이 남아있어 괴롭다는 탄식으로 불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성스러운 도를 일으키는 데 지극한 발심이 있어야 하므로 큰소리로 불러야 반응을 얻을 수 있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오늘날로 치면 염불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5사에 찬성하는 비구와 반대하는 비구들의 대립으로 교단이 분열되었다는 것이다. 다분히 소승불교의 최고 지위인 아라한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고 하겠다. 선종의 입장에서 아라한의 ‘해탈’을 깨달음으로 바꾸어 보면 의미 있는 지적이기도 하다. 그때도 그러한 문제가 존재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첫 번째 성욕에 대한 부분은 선종에『선문염송』「1463. 파자소암婆子燒庵」의 화두로 남아있어, 여전히 풀리지 않는 논란의 문제로 수행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2) 불교 전래의 통로, 실크로드Silk Road
고대 아시아에는 두 개의 커다란 문화권이 존재하였다. 인도 문명이 일어난 인도문화권과 요하, 황하 문명이 일어난 중국 문화권이다. 이들은 같은 아시아 대륙에 속해있었지만 교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높고 험한 티베트 고원과 히말라야 산맥이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각기 다른 문명을 일으키고 발전시키고 있었다.
기원전 2,000~1,500년 경 인도에 베다 문명이 일어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있을 때, 중국에서는 기원전 17세기 후반 은殷이라는 나라가 화려한 청동기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 인도에서는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인물이 활약하였던 시기, 중국에서는 공자나 노자, 장자 같은 수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이렇게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던 두 문화권이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기원전 2세기말 중앙아시아를 횡단할 수 있는 “동서교통로東西交通路”가 열리고 부터이다.
두 개의 문화권이 만날 수 있게 한 동서교통로(혹은 교역로)가 바로 비단길( 비단로緋緞路, Silk Road)이다. 비단길은 전한[前漢: B.C. 206-A.D. 8]시대 무제[武帝: 재위 B.C. 141-B.C. 87]에 의해 처음 개척되었다. 무제는 서쪽 변방을 괴롭히는 흉노족을 몰아내기 위해, 흉노족 너머 월지국과 연합하려 장건(長騫, ? ~ B.C. 114)을 파견하는데, 공교롭게도 장건은 흉노족에게 붙잡혀 10여년을 보내게 된다.
그곳에서 결혼까지 하지만 도망쳐 가까스로 월지국까지 간다. 그러나 정치적인 상황이 바뀌어 연합에는 실패하고, 아프가니스탄 북부 등지까지 둘러보았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오게 된다. 돌아오다 흉노에게 다시 붙잡혀 1년을 더 보내고, 13년 만인 기원전 126년 귀국한다.
장건의 보고를 듣고 서역의 여러 나라를 알게 된 무제는, 장건으로 하여금 다시 원정길에 나서게 해 결국 흉노를 물리친다. 이후 해마다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게 되었고, 이때부터 이 길은 서역을 연결시킨 동서 문화 교류의 통로로 자리 잡게 되었다. 비단길은 독자적인 문화를 이루고 있던 중국과 인도를 연결시켜 주는 가교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서역의 여러 나라 그리고 유럽까지 문화 교류를 가능하게 하였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는 통로 또한 비단길이었다.
이 통로가 훗날 비단길이라고 하는 실크로드가 되었다. 이 길은 서역은 물론, 이란, 이라크, 시리아, 그리고 로마까지 연결, 이 길을 통해 중국의 비단이 서역으로 팔려가는 교역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종래 비단길은 동서를 잇는 횡단로로만 생각되어 왔으나, 근래에는 육상 또는 해상을 통한 근대 이전의 동서교역로와 남북의 여러 통로를 포함한 하나의 거대한 교통망을 통칭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3) 불교의 중국전래
중국에 불교가 언제 전래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서력기원을 훨씬 거슬러 올라가는 설들은 대부분 신빙성이 없다. 학자들 간에 타당성이 있는 설로 간주되는 것은 진시황 때의 ‘석리방釋利房 전교설’, 전한 무제의 ‘금인예배설金人禮拜說’, 이존伊存의 ‘불교구수설佛敎口授說’, 그리고 후한 명제明帝의 ‘금인강정설金人降定說’ 등이다. 그중 가장 유력하고 가장 많이 통용되는 설은 금인강정설로, 후한의 명제(明帝: 재위 58-75)가 영평永平 10년(A.D. 67년) 불교를 들여왔다는 설이다. 내용을 정리하면 대강 이렇다.
명제가 금인金人이 서방으로부터 뜰로 내려오는 꿈을 꾸고 신하에게 물으니 서방에 불교라는 것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명제는 채음蔡愔과 진경秦景 등을 천축으로 보내 불교를 구해오게 하는데, 이들이 천축으로 가던 도중 마침 백마에 불경과 불상을 싣고 오는 가섭마등迦葉摩騰, 축법란竺法蘭을 만나게 되었고, 이들과 함께 낙양으로 돌아오게 된다. 명제는 기뻐하며 백마사白馬寺라는 절을 지어 두 스님을 머무르게 하는데, 이들이 백마사에 주석하며 번역한 것이 최초의 한역경전인『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이다. 백마사는 중국에 건립된 최초의 사찰이 된다.
남아 있는 기록 중 가장 이른 것은『위략魏略』「서융전西戎傳」에 있는 불교구수설이다. 이 기록만을 고려한다면 불교가 최초로 전해진 것은 기원전 2년 무렵인데, 기원 전후인 전한[前漢: B.C. 206-A.D. 8] 후기 무렵에는 불교가 이미 들어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세기 무렵부터는 낙양이나 장안 등지에도 서역에서 들어온 불교승려들이 활동하였다.
‘금인강정설’을 보면 후한[後漢: 25-220] 중기에는 불교가 보편화 되어 있었고, 국가도 불교를 공인하였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후 서역과 인도의 고승들이 계속 중국으로 넘어와 포교에 힘쓰지만, 불교가 중국에서 확실한 토대를 잡기 시작한 것은 후한 말기, 서역으로부터 안세고安世高와 지루가참支婁迦懺이 중국으로 들어와 불경이 한문으로 번역되면서부터이다.
4) 서역불교西域佛敎
기원전 3세기 인도의 북쪽 국경을 넘어 전파되기 시작한 불교는, 점차 중앙아시아의 사막 주위에 흩어져 있던 다수의 오아시스 국가들에도 흘러 들어간다. 그러던 것이 기원후 1∼2세기 무렵, 북인도 간다라 지방을 중심으로 불상이 제작 보급되면서부터 불교가 급속도로 퍼지게 된다. 불상과 보살상을 갖추게 되면서 종전보다 더욱 더 강한 전파력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에 불교가 들어와 성행하게 된 것도 대략 이 시기로, 서북인도에서부터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지방으로 전파된 불교가, 실크로드를 따라 점차 중국에도 알려졌기 때문이다.
인도불교가 수마트라섬과 말레이 반도를 우회하여 남부해로를 따라 중국남부로 전해지기도 하였지만, 초기 전파는 대부분 인도불교가 아닌 서역불교가 육로陸路를 따라 중국에 들어온다. 당시 중국은 황하 서쪽의 국경지대를 전진기지 삼아 서역 경영에 착수着手하던 때로, 비단길이 열리면서 이미 불교가 성행하고 있던 서역과 중국이 만나게 되었고, 길을 오가던 관리나 상인들을 통해 불교는 자연스럽게 중국사회로 퍼져나갔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중국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동서교역로를 따라 인도와 서역 승려, 상인, 혹은 정부 사절使節 등이 중국으로 유입되지만, 인도에서 직접 중국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극히 적었다. 거의 인도 북쪽에 있던 대월지국(大月氏國,현 아프가니스탄 지역), 안식국(安息國, 현 이란북부 지역), 강거국(康居國: 사마르칸트Samarkand, 우즈베키스탄 지역) 등 서역 지역 사람들의 주류를 이루었다. 마찬가지로 서역의 여러 나라 불교가 둔황敦惶을 거쳐 장안長安, 낙양洛陽 등에 전해지지만, 중국에 전해진 불교는 중앙아시아 지역에 속하는 서역불교였다. 서역불교는 순수한 인도불교가 아니라 인도불교의 바탕에 서역문화가 가미된 이른바 서역화된 불교였다. 그리고 당시 서역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대승과 소승 불교가 함께 퍼져있어, 대승과 소승이 구분 없이 중국으로 들어온다.
서역 지방의 문화나 불교는 서방의 영향이 크므로, 서역 승려에 의해 전해진 서역 불교는 반드시 인도 불교와 같은 것은 아니다. 중국 불교에 있어서 서역에서 전래된 불교와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가 확실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서역의 영향은 교학적인 측면보다도 신앙적인 면에서 크다고 생각된다, 즉 중국불교 초기에 유행한 미륵신앙(彌勒信仰)과 이것에 뒤따라 일어나 미륵신앙을 압도한 미타신앙(彌陀信仰) 등에는 분명히 서방으로 부터의 영향이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인도불교에서는 그다지 명확하지 않았던 이들 불·보살(佛·菩薩)에 대한 신앙이 불교 내부에서 일어나고 발달한 장소가 서역 지방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중국불교 전래 초기에 서역 출신의 역경승(譯經僧)들이 활약했다는 사실은 이들 역경의 원전(原典)이 인도에서 직접 전래 되었다기보다는 서역 지방에서 수용된 것, 혹은 이미 서역의 여러 언어로 번역된 경전에서 다시 번역되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佐マ木教悟·高崎直道, 井ノ口泰淳·塚本啓祥 共著, 權五民 譯『印度佛敎史』pp. 177~178.)
서역의 영향은 신앙적인 측면에서 두드러지는데, 미륵신앙彌勒信仰과 미타신앙彌陀信仰이 중국에서 유행하게 된 것이 서역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서역의 영향은 경전에도 나타나는데, 사문, 외도, 출가와 같은 말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에서 번역된 것이 아니라, 서역 여러 나라 언어에서 번역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인도불교가 서역으로 전해지면서 경전이 서역어로 번역되었다가, 이것이 다시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다시 번역되는 과정에서 인도불교에는 볼 수 없었던 용어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십이인연설’과 같은 용어도 범어에서 번역된 것이 아니라, 서역 도화라국覩貨羅國 언어로 된 경전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서역어로 된 경전이 한역되는 과정에서 인도 불교에 없던 용어들이 생겨났다는 것이고, 이는 초기 중국불교에서 서역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서역불교의 중국 전래는 삼국시대,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220-589] 시대를 거쳐 수[隋: 581-619] 나라에 이르기까지 거의 일방통행으로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300년 이상 중국은 오직 서역을 통해서만 인도불교를 받아들인 셈이다. 인도 불교와의 직접적인 교류는 수백 년이 흐른 동진[東晋: 317-419]시대 이후에나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이는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면서 핍박을 피해, 혹은 활로를 찾아 많은 인력들이 중국으로 건너오기도 하였지만, 인도로 가서 경전 수집 및 성지 순례를 열망하는 “입축구법승入竺求法僧”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구법승으로는 수계법에 의해 최초로 승려가 된 위魏의 주사행朱士行을 비롯하여, 동진東晋의 법현法顯, 보운寶雲, 지엄智嚴, 지맹智猛, 법용法勇, 후에는 당唐의 현장玄奘, 의정(義淨, 635~713)과 신라新羅의 혜초慧超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법을 구하기 위해 험난한 여행길을 마다하지 않고 인도로 떠났다.
중국불교사 초기에는 주로 서역 출신 승려들의 활동이 두드러지지만 불교가 발전함에 따라 몸소 인도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할려는 중국 승려가 속출하였다. A.D. 4세기 전후부터 8세기 전반에 걸쳐 인도로 구법(求法)여행을 떠난 승려의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 중에 그 이름이 밝혀진 자만해도 백여 명이나 되며 무사히 중국으로 돌아온 자는 4십 수 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인도여행기를 남겨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알려지고 있는 자는 겨우 수 명에 불과하다. (佐マ木教悟·高崎直道, 井ノ口泰淳·塚本啓祥 共著, 權五民 譯『印度佛敎史』p. 178.)
이들은 온갖 고난을 겪으며 불교의 고향인 천축天竺, 즉 인도로 가서 직접 불교 유적을 순례하고, 천신만고 끝에 돌아와 여행기를 남긴다. 그중 법현法顯의『역유천축기전歷游天竺記傳 (일명 法顯專ㆍ佛國記)』, 현장玄奬의『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의정義淨의『남해기귀전南海奇歸傳』그리고 혜초慧超의『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등이 유명하다. 결과적으로 중국불교는 인도불교 뿐 아니라 변화된 인도불교의 한 지류인 서역불교까지 섭력하였고, 기존의 중국 문화까지 융합融合된 동양의 범문화적 산물인 것이다.
5) 번역飜譯의 역사
인도에서 성립된 불교 경전은 서역에 전해지고, 다시 서역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인도나 서역의 문자로 쓰인 불교 경전은 한문으로 번역되기 시작하는데, 앞에서 언급한 ‘금인강정설’에 등장하는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최초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낙양에 도착한 이후 중국말이 익숙해지자 역경을 시작하는데, 채음이 서역에서 가져온 불경에서『십지단결경十地斷結經』『불본생경佛本生經』『법해장경法海藏經』『불본행경佛本行經』『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등을 번역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이중 이천여 글자 가량인『사십이장경』만이 남아 전한다.
불교 경전이 본격적으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2세기 후반 안세고(安世高, ?~168)와 지루가참(支婁迦懺: fl. 167~186)에 의해서이다. 안세고는 원래 안식국 왕자였으나 출가하여 여러 나라를 순력하다가, 후한後漢 환제(桓帝: 재위 146-167) 건화 초 수도인 낙양洛陽에 와서 번역을 시작, 영제(靈帝: 재위 168-189) 건녕 2년(169)까지 약 20여 년간 역경 사업에 종사하였다.
『전법륜경轉法輪經』같은 아함경전부터 선법禪法을 소개한『안반수의경安般守義經』까지 34부 40권의 불교 경전을 번역, 중국 불교 역사의 시작이 그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안반수의경』에 나오는 ‘수식관數息觀’은 당시 유행하던 황노도黃老道의 호흡법과 흡사하여, 당시 지식인 계층에 거부감 없이 수용되었고, 동진 시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200년간 지식인들의 애독서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게 된다.
안세고 당시에는 안식국에서 설일체유부 계통의 아비다르마 불교가 성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 때문인가 안세고는 아비다르마 불교, 선학(禪學)에 정통했다고 한다.(《출삼장기집》〈안세고전〉). 아비다르마 불교에 관해서는《아비담오법행경》 등, 아함부에 관해서는《인본욕생경》《사제경》《팔정도경》《전법륜경》등, 선학에 관해서는《안반수의경》《음지입경》《선행법상경》《도지경》 등을 번역하였다. 현상에 대한 분석적 고찰에 뛰어난 아비다르마 불교를 처음으로 중국에 전한 점, 수식관(數息觀)을 설하는《안반수의경》을 번역함으로써 처음으로 중국에 아비다르마 불교의 선법을 전했다는 점에서, 안세고의 작업은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불교적 사상과 수행의 물꼬를 튼 최초의 쾌거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종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북경대 교환교수),「동아시아의 첫 역경가 안세고」, 법보신문 2004.08.10.)
지루가참은 안세고보다 20여년 늦은 환제 말 166년경에 낙양에 들어와서, 183년(중평 3년)에 이르기까지『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등 주로 대승경전大乘經典들을 번역하였다. 그는 중국에 대승경전을 전한 최초의 인물로, 소승불교국가인 안식국애서 온 안세고가 소승경전을 번역한 것과는 대비된다. 이 두 역경승 외에 후한 시대의 역경자로는 축불삭(竺佛朔: fl. 168~188), 안현(安玄: fl. 181), 지요(支曜: fl. 185), 강거康巨, 강맹상康猛詳, 축대력(竺大力: fl. 197), 담과曇果, 지량支亮, 그리고 중국 사람인 엄불조嚴佛調 등이 알려져 있다.
위진남북조 시대는 계속된 전란으로 혼란하여 내세의 안심입명이 요청되던 시대였다. 그중 5호16국五胡十六國시대는 더욱 혼란하여, 각국의 황제들이 국가의 안위를 지키고, 난리를 진압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역의 고승들을 초빙하였다. 이들 중 불도징佛圖澄, 축법호竺法護, 구마라집鳩摩羅什, 북량北涼의 담무참曇無讖,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등이 두드러진다. 이들은 중국에 들어와 황제를 도와 나라 경영에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경전의 한역 작업에도 종사하게 된다.
5호16국의 불교는 한결같이 국왕의 두터운 보호와 고승들의 배출로 찬란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국왕의 관심은 대부분 불교 그자체가 아니라 고승들에게 있었다. 불교승려의 최신 지식을 빌리고, 또 그들이 지닌 종교적 영험에 의지하여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였기 때문에 승려가 정치적 고문이 되었던 것이다. 불도징, 담무참 등의 신통력이 어떻게 나라를 태평하게 하였고, 도안과 라집이 국가의 발전에 얼마나 큰 공헌을 하였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계환 옮김, 미찌하다 료오슈 저자,『중국불교사』pp. 50~51.)
불도징과 그의 수제자 도안道安의 활약으로 불교의 바른 이해를 위한 역경이 붐을 이루게 되었고, 구마라집을 비롯하여 불타발타라, 담무참 등 대역경사들의 노력으로 불교경전이 거의 완벽에 가까우리만큼 번역되었다. 불타발타라의『화엄경』역출譯出과 담무참에 의한『열반경』역출 또한 중국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구마라습은 서명각(西明閣)과 소요원(逍遙園)에 머물면서 요흥의 절대적인 후원 아래 당대 제일 고승들의 협조를 받으며 10년 동안 35부 279권의 경전을 번역해 내는데 그 대부분은 대승경전들이었다. 그중의 대표적인 경전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아미타경(阿彌陀經)’ 1권(404년 번역; 종래의 402년 번역설은 구마라습이 401년 12월20일 장안에 이르렀다는 ‘고승전’ 기록을 사실로 믿고 이를 기준으로 산정한 것인데 403년 12월20일 장안에 이르렀으므로 402년은 모두 404년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유마힐소설경 (維摩詰所說經)’ 3권(406년 번역), ‘수능엄삼매경(首楞嚴三昧經)’ 2권(404~412년 번역), ‘미륵하생성불경(彌勒下生成佛經)’ 1권(404~412년 번역), ‘미륵대성불경(彌勒大成佛經)’ 1권 (404년 번역), ‘선비요법경(禪秘要法經)’ 3권(404~412년 번역), ‘좌선삼매경 (坐禪三昧經)’ 2권(404년 번역),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7권(406년 번역), ‘인왕반야바라밀경 (仁王般若波羅蜜經)’ 2권(412년 번역),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1권(412년 번역),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 27권(404년 번역), ‘소품반야바라밀경 (小品般若波羅蜜經)’ 10권(408년 번역), ‘대지도론(大智度論)’ 100권(404년 번역), ‘중론 (中論)’ 4권(409년 번역), ‘십이문론(十二門論)’ 1권(409년 번역), ‘백론(百論)’ 2권(404년 번역),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17권(412년 번역), ‘성실론(成實論)’ 16권(412년 번역) 등이다. 그의 문하 제자는 3000인을 헤아렸는데 특히 도융(道融), 승예(僧叡), 승조(僧肇), 도생 (道生)은 관중사걸(關中四傑)이라 하고 담영(曇影), 혜관(慧觀), 도항(道恒), 담제(曇濟)를 사영 (四英)이라 불러 습문팔준(什門八俊)으로 꼽는다. 이들의 활동은 중국 불교의 주류를 대승화하기에 족한 것이었다.
그런데 뒤이어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Buddhabhadra, 359~429년) 삼장(三藏)이 인도로부터 해상(海上)을 통해 청주(靑州)에 상륙하여 장안에 왔다가 구마라습파와 반목하다 축출당해 동진 건강으로 가게 됐는데, 때마침 구법승 법현(法顯)이 인도에서 구득해 온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60권(418~420년 번역)과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40권 (418~420년 번역)을 법현과 함께 번역해 낸다.
북량(北)에서는 담무참(曇無讖; Dharmaraks.a, 385~433년)이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40권(416~423년 번역)과 ‘대방등무상경(大方等無相經)’ 6권(414~426년 번역),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 10권(414~426년 번역), ‘불소행찬(佛所行讚)’ 5권(414~426년 번역),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 7권(426~428년 번역) 등을 번역해내니, 이제 대승불교에 대한 이해도 거의 완벽하다고 할 수 있게 되었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5) - 중국식 불상의 정수, 운강석굴」.)
소승경전小乘經典으로는『중아함경中阿含經』과『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을 번역한 담마난제(曇摩難提; Dharmanandi)를 필두로 불타야사(佛陀耶舍; Buddha-yasas)는『장아함경長阿含經』을, 승가제바(僧伽提婆; Saǹghadeva)는『중아함경』을 번역한다. 축불념竺佛念과 불타야사는 근본율장根本律藏인『사분율四分律』60권(408년 번역)과『십송률十誦律』61권(404년 번역) 등을 번역, 근본불교에 대한 경전들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들 역경자들이 불교 경전을 번역하는 데 얼마나 힘을 들였는가는 현존하는 번역경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만 초기 번역에는 음사어音寫語가 너무 많았고, 사용한 용어가 각기 달랐으며, 번역된 문장의 형식도 고르지 못했다. 사고방식이 다른 역경인들이라 번역이 난해하고 딱딱하였으며, 번역에 그치다 보니 사상적으로도 유치한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거기다 무슨 경전이 번역되었는지도 알 수 없어, 도안은 한역불전漢譯佛典 총목록인『종리중경목록綜理衆經目錄』을 작성하기 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의 시행착오나 결함들은 후대의 역경자들에 의하여 차차 개선되어 간다.
본격적인 불전 번역이 시작된 2세기 후반[後漢]부터 수당시대까지 약 700여 년 동안 역경이 일어나는데, 번역飜譯의 역사는 보통 ‘고역古譯’, ‘구역舊譯’ 그리고 ‘신역新譯’ 시대로 구분한다. 4세기에 활약한 쿠차 출신의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과 7세기에 활약한 중국 승려 현장(玄奘, 602~664)이 역경사에 있어 큰 획을 그은 인물로, 구마라집을 기준으로 고역과 구역이, 현장을 기점으로 구역과 신역이 갈라진다. 안세고, 지루가참, 지겸, 축법호 등이 고역시대를 대표하는 4대 역경자이고, 구마라집, 진제가 구역을, 현장, 불공 등이 신역시대를 대표하는 역경자이다. 신역시대에는 번역 용어와 음사 표기들이 산스크리트 원전에 가깝게 번역되었다.
(현장의) 번역은 逐語的으로 가장 嚴密하고 原典도 인도불교의 후기에 성립된 것이어서 종래의 譯法을 일변시키게 되었고, 그 이후는 거의 이 譯法에 따랐기 때문에 종래의 번역을 舊譯이라 칭하게 되었다. 譯經史上 羅什과 玄奘을 2大譯聖이라고 하는데 羅什은 舊譯의 대표자이고, 玄奘은 新譯의 대표자이다. 羅什과 玄奘 兩者를 비교하여 볼 때, 玄奘이 逐語的으로 嚴密한다면 羅什은 達意的으로 精練되어 있다고 하겠다. (東國大學校 出版部,『佛敎文化史』p. 79.)
6) 격의불교格義佛敎
위, 촉, 오의 삼국시대[三國時代, 220-280]를 거쳐, 서진[西晉, 265-317], 동진[東晋, 317-419] 시대에 이르면, 불교는 이미 양과 질에서 풍부해졌으며 사상적으로도 성숙의 단계로 접어든다. 이미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어 불교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북방 5호16국의 흥기와 함께 그들의 펼친 불교보호정책에 힘입어 불교는 대단한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대중들에게도 뿌리내리면서 종래 낙양과 장안에 머물러 있던 불교가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동진시대 불교는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불교를 받아들이던 시대에서 연구하는 시대로의 도약을 위한 노력이 이때 활발히 일어난다. 그렇게 된 데에는 서진 말부터 동진에 걸쳐 유행한 “청담淸談”사상이 그 저변에 있었다. 청담이란 원래 ‘세속을 떠난 맑은 담화’라는 뜻으로, 일부 지식인들이 하던 상식적인 유교 도덕을 넘어 노장사상老莊思想이 섞인 철학적 담론談論을 말한다.
유교 전성기인 한나라에서 위나라로 넘어가는 시기, 지식인들은 난세亂世에 생명을 부지하기 위하여 세속을 떠나 초야에 묻혀 세월을 보내는 풍조風潮가 있었다. 진晉나라 초 노장의 무위사상無爲思想을 숭상하며 죽림에 모여 세월을 보낸 죽림칠현竹林七賢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어쨌든 마침 퍼지기 시작한 불교의 교리까지도 청담의 대상이 되었는데, 당시 유행하던 청담으로 불교교리를 이해하다보니, 노장사상에 기초한 관념이나 용어가 자연스레 끼어들어가게 되었다.
예컨대 불교경전인『반야경般若經』에 나오는 ‘공空’에 대해 설명하면서 노장의 ‘무無’의 개념을 적용하는 방식이다. 이를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하는데, 노장사상에 정통한 학자들이 불교를 노장사상으로 이해하려 한, 일종의 불교 연구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 사상과 유가나 도가사상을 서로 비교하고 비판하는 과정을 통해 그 뜻을 유추함으로써 불교의 참 뜻에 다가가려 했던 것이다.
이 시대에 불교도가 노장사상에 정통하여 그 행동도 노장적이었던 것은 손작이『도현론(道賢論)』에서 축법호, 백법조, 우법란, 지둔, 축법심, 우도수, 축법승을 청담의 죽림칠현에 비유하여 칠현(七賢)이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또 라집은「주노자(注老子)」를, 승조는「노자주(老子注)」를, 혜관은「노자의소(老子義疏)」를, 혜엄과 혜림은 각각「노자도덕경주(老子道德經注)」를 저술하였으며, 그 밖에 축잠과 지둔 등 노장학을 강의한 사람이 많았던 것을 보아도 당시 노장사상이 얼마만큼 불교에 영향을 주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도교는 이러한 추세를 타고 차차 세력을 넓혀가면서 불교교학의 영향을 받아 교리적인 기초를 다지고, 특히 라집 등의 역경에 자극을 받아서 이들 경전을 모방하여 많은 도교경전을 만들어 내었다. (계환 옮김, 미찌하다 료오슈 저자,『중국불교사』p. 65.)
격의불교를 이끈 이는 4세기경 여러 종교에 박학다식하였던 축법아竺法雅가 대표적이다. 그는 숫자로써 교리를 정리하는 방식으로 격의를 시도하였는데, 불교의 오계五戒를 설명하면서 유교의 윤리개념인 오상五常을 차용한 것이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불교의 논리는 잘 알지 못했지만, 강법랑康法朗 등과 더불어 불교 경전에 나오는 말들을 불교 외의 다른 경전들과 비교함으로써 이해를 도왔다고, 혜교慧皎의『고승전高僧傳』은 기술하고 있다.
격의불교는 당시 중국 사상계는 물론 이후에도 크게 영향을 끼쳐, 중국에서 새롭게 탄생한 선종禪宗에도 그 흔적을 남긴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선禪을 연구하고 선을 서양에 알린 독일인 신부 하인리히 두몰린은, 선종에 스민 도가의 색체를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도가사상은, 불교가 중국에 다다랐을 때부터 불교에 영향을 주었다. 육조시대(581~618)와 그 다음의 당나라 때에 노자, 장자, 열자 같은 도가의 현인들의 가르침은 인기의 상승을 누렸다. 이때의 선사들 속에 있는 도가적 색체는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다음의 인용문은 마조의 직제자의 한 사람인 유명한 선사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의 어록에서 취해 온 것이다.
공겁(空劫) 시대에는 말(명칭)은 일체 없었다. 붓다가 지상에 나타난 이래 말(명칭)이 생겨났다.
이 말에 의거해서 사람들은 (사물의) 표면상의 특질만을 파악한다. ……
대도(大道)는 범(凡)과 성(聖)의 차별 없이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다.
명칭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 명칭 때문에 제한을 받게 된다. 그래서 강서노숙(江西老宿: 마조)께서 말
씀하셨다. 불시심(不是心), 불시불(不是佛), 불시물(不是物)이라고.
(하인리히 두몰린/박희진 옮김, 다르마 총서 12『禪과 깨달음』p. 86.)
그가 인용한 남전보원의 말은 노자『도덕경』제 1장에 나오는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에 대한 각주를 달고 있는 느낌이다. 다음 중국의 대표적 개념인 ‘도道’와 불교의 ‘공空’을 비교하면서 남전은 장자의 말을 인용한다. 선가의 선사가 도가의 말로 불교를 제창하고 있는 것이다. 논자는 이를 불교의 진리인 분별分別과 무분별無分別에도 적용 설명하고 있다.
절대적 실재는 고대 중국에서는 길을 의미하는 말인 도(道)로 표현된다. 여타 많은 선서에서 그렇듯이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도는 공(空)이며 제 1의 바탕이며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며, 모든 구분 짓는 행위 이전의 명칭 없는 어떤 것이다. 남전 보원의 말이《장자莊子》속의 한 구절을 되풀이 한다.
도에서는 모든 대립물은 하나로 합체된다. 나누어짐 속에 곧 이루어짐이 있고, 이루어짐 속에 공 허물어짐이
있다. 이루어짐도 없고 허물어짐도 없는 무릇 사물은 다시 하나로 합체된다.
(道通爲一 其分也 成也 其成也 毁也. 凡物無成與毁 復通爲一).《莊子》濟物論.
구분(차별) 짓는 식의 생각은 지혜로 나아가지 못한다. 불교철학은「구분 짓는」지식(vikalpa, 分別)과「구분 짓지 않는」지식(nirvikalpa, 無分別)을 이야기 하고 있다. 구분 짓는 지식은 욕망의 세계에 얽매이게 하고 구분 짓지 않는 지식은 자유스럽게 한다. (하인리히 두몰린/박희진 옮김, 다르마 총서 12『禪과 깨달음』pp. 86~87.)
이렇게 격의불교는 이질적인 불교를 중국에 토착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다시 말해 불교의 교리와 그 사상을 중국식 용어와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하여, 거부감 없이 중국 사상계에 뿌리내리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불교가 세력을 갖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전통 종교인 유교와 도교와 끊임없이 대립하고 투쟁하게 되는데, 이렇게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므로 인해 양자는 오히려 사상적으로 깊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보아야 하겠다.
격의불교는 한때 유행하였으나 격의만으로 불교의 참다운 진리에 도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어느 정도 불교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는 있었지만, 지나친 격의 행태는 불교의 진리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에 오히려 방해 요소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불교 경전 이해에 있어 노장이나 유교 등 전통 중국 사상의 개념을 적용하다보니, 불교 본래의 사상이나 교리와는 다소 괴리乖離가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동진시대 반야학般若學의 대가인 도안의 격의배제 운동이다. 격의로 해석하는 불교를 배제하고 본격적인 불교연구에 매진한 것이다.
도안은 최초로 노장사상으로 불교를 강술講述하고 주석註釋한 장본인이었으며, 한때 혜원(慧遠, 335~417) 등과 더불어 노장의 술어로 불교사상을 논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불교는 불교 자체의 입장에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반야경』을 여러 다른 번역본들과 대조하면서 참다운 뜻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중국적 상황에 따라 번역, 해석된 격의불교의 오류를 반성하고, 극복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격의불교의 문제점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격의불교의 폐단은 서역의 승려 구마라집이 중국에서 포교를 시작하면서 서서히 사라진다. 그가 불교 경전을 본래의 뜻에 맞게 바르게 번역 소개하였기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불교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서역 승려의 입과 글을 통해 교리를 직접 듣고 읽을 수 있게 되어, 더 이상 격의가 필요 없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은 해석일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역출경전을 연구하고 정리하는 “교상판석敎相判釋”의 시대, 즉 불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시대로의 진입을 예고하고 있었다.
7) 교상판석敎相判釋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220-589]시대, 불교는 융성해졌으며, 수많은 역경 승들의 노력과 대규모의 역경사업으로 경전들도 풍부해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떤 기준 도 체계도 없이 들어오는 경전들로 인해 중국 불교계는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들 번역된 경전들의 수준이 천차만별이었을 뿐 아니라, 어떤 경전들은 서로 모순되는 가르침을 펴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승경전들은 너무도 다양하여 어디까지가 붓다의 가르침인지도 모호하였다.
이는 일찍이 예고된 일이었는데, 인도에서는 역사적인 전개 과정을 밟아가며 성립된 불교경전들이, 중국에 들어올 때는 성립 시기나 이론적 발전과정과는 무관하게 일시에 무분별하게 밀려들어왔기 때문이다. 인도불교의 발달과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여러 가지 불교 경론들이 ‘전 방위적으로’ 소개되었을 뿐 아니라, 경전은 그렇다할 이론적 배경 없이 무작위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혼란상은 무슨 경전이 얼마나 번역되었는지도 알 수 없어, 도안이 한역불전 총 목록인『종리중경목록』을 작성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에 번역일변도에서 벗어나 불교 경전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본격적인 불교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경전을 설한 시간에 따라, 형식이나 방법에 따라, 혹은 교리 내용에 따라 분류하고 체계화하는 작업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는 결국 어떤 것이 고타마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인지를 판별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붓다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이나 논서들을 성립 순서에 따라 배열하고, 각 경전의 가르침의 깊이를 각자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체계화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5세기 초 시작되어 9세기경까지 이루어진 이러한 작업을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고 한다.
교상판석 중 대표적인 것이 천태종天台宗의 지의(智顗, 538~597)가 확립한 “5시8교五時八敎”, 법상종法相宗의 개조인 자은慈恩대사 규기(窺基, 632~682)가 세운 “3교8종三敎八宗” 등이다. 그리고 화엄종華嚴宗의 법장法藏이 세운 “5교10종五敎十宗”이 있었고, 종밀(宗密, 780~841)이 세운 “5교판五敎判” 등이 있었다. 오류도 있었지만 이로써 불교의 다양한 교설敎說들이 각 종파의 기준에 따라 분류 종합되어 하나의 유기적인 사상 체계로 확립된다.
교상판석은 천태종의 지의 등 거장들이 출현하는 초석이 되었을 뿐 아니라, 교학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중국에 맞게 편집되어, 중국화한 경전이 출현하는 계기도 되었다. 또, 각 경전의 불교사상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연구 집단인 학파學派가 형성되었는데, 수 · 당대에 이르면 교단을 형성하고 각 종파로 분화 발전하게 된다. 교상판석은 처음에는 불교의 교설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려는 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각 종파의 근본경전들을 알리고, 나아가서는 각 종파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의 우월성을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변질되기도 하였다.
중국불교는 대략 4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해 나갔다고 본다. 먼저 제1단계는 준비단계로서, 불교가 처음 전래된 이후 구마라집(鳩摩羅什)이라는 유명한 번역가가 중국에 들어오기(401년) 이전까지의 기간이다. 이 시기의 주된 사업은 산스크리트의 원전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일이었으며, 번역자들은 거의 외국의 승려들이었다. 소위 격의불교가 이 시기의 특징이었다. 제2단계는 연구단계로서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까지이다. 번역은 더욱 왕성해지면서 본격적인 연구에 있어서 많은 진전이 이루어졌고, 강의도 성행하여 연구 집단인 학파도 성립되었다. 제3단계는 건설단계로서 수(隋)와 당(唐)의 시대이다. 번역과 연구는 계속되면서 그간의 불전에 대한 가치 비판이 성행하였다. 소위 교판이 이 시기의 특징을 이룬다. 또 처음으로 종파가 성립됨으로써 다양한 종파들이 어깨를 겨룬 종파불교시대로 접어들었다. 제4단계는 계승단계로서, 이후의 시대이다. 하지만 그 계승이 성공했다고는 볼 수 없다. 온갖 영고성쇠를 거듭하였으나, 전체적으로 쇠퇴하여 갔다. (조계사 홈페이지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