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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황산여행기(2007년 11월)
운해의 바다 황산의 절경에 빠지다.
상하이로 향하는 아시아나 항공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35분이나 연발하여 인천 국제공항을 이륙하였다.
말로는 세계적인 서비스를 외치는 아시아나가 멘트도 없이...승객 알기를....
항공기 이륙이 늦어지면서 오늘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항공기에서 주는 기내식은 정갈하고 맛깔스러웠다.
상하이 포동공항까지는 이륙 후 1시간 40여분이 걸렸다.
상하이 공항에서 이번 일정을 책임지고 안내를 해 줄 여정은이라는 조선족 연변 출신 3세인 가이드를 만났다.
가이드는 여행 중에 꼭 필요한 몇 가지를 꼭 챙기도록 당부를 한다.
첫째는 건강을 잘 챙겨야 한다.
둘째는 여보를 챙겨야 한다. 여권과 가방을 잘 챙기라는 말이다.
특히 작은 가방을 메고 다닐 때는 꼭 가방이 앞으로 오도록 메고 다녀야 한다. 중국에서는 가방을 뒤로 가게 메는 것은 도둑에게 가방에 든 물건을 모두 갖고 가라는 신호와 같다고 한다. 가방을 옆으로 오게 메면 반은 도둑의 것이라는 말이 된다고 한다.
셋째는 식수를 조심해야 하는데 되도록 생수를 마시거나 끓여서 마셔야 한다.
중국의 차 문화가 발달된 원인이 식수에 있다고 한다. 또 중국의 음식들은 모두 기름에 볶아내는 데 기름기를 제거하는데도 차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넷째는 이번 일정에 같은 호텔에 두 번 묶는 일이 없으므로 호텔을 나올 때 두고 나오는 물건이 없도록 해야 한다.
중국에서 물건을 잊어버리면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중국 사람들은 교통규칙 지키기를 소홀히 하여 교통신호를 무시할 때가 많으므로 항상 교통에 유념해야 한다.
중국은 우리나라와 한 시간의 시차가 나므로 시간 조정을 중국 시간에 맞추고 행동을 해야 한다.
중국은 4개 직할시가 있는데 직할시로 지정하는 조건이 인구 1,000만 명이상이라야 한다. 중국의 직할시는 북경과 상하이, 천진, 중칭이라고 한다.
또 타이완을 포한해서 23개 성이 있고 5개 자치구가 있다고 한다. 그 외에 홍콩과 마카오는 2개의 행정체제를 갖고 있다고 한다.
중국은 960만㎢로 대한민국의 98배나 되는 영토에 공식적인 인구가 13억 명이고 비공식적으로 15억 명이 넘는다고 한다.
중국의 한족들은 한 가정 1자녀 갖기를 법으로 정해 놓았기 때문에 2자녀 이상 낳으면 호적에 등재를 시킬 수 없고 이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학교에도 못가고 각종 혜택에서 제외가 된다고 한다. 공민으로서 혜택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서커스를 배우거나 마사지를 배워 생계를 잇는다고 한다.
인구가 포화상태인 중국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상하이는 중국 최대의 도시이다.
상하이 여름철 최고 온도는 항상 39℃로 일정하다.
이유는 40℃가 넘으면 그 날은 누구든 일을 안 해도 되기 때문이다. 일은 안하지만 월급은 꼬박꼬박 주어야 한다는 중국의 법이 있기 때문이란다. 실제로 2006년도 여름철에 40℃가 넘은 날이 19일이나 되었다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여서 공산당 지그들 맘대로 이다. 눈 가리고 야옹하는 셈이다.
상하이 여자들은 남편 없이는 살아도 에어컨 없이는 못산다고 한다.
상하이 겨울철 기후는 최저 기온이 영하 2℃ 이며 습도가 높고 비가 자주 내려서 빨래가 안 말라 빨래가 마르려면 4~5일은 걸리므로 대부분 가정에서는 아파트 베란다에 길게 대나무를 걸치고 거기에 빨래를 너는데 이 모습이 상하이에서 명물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을 빨래 관광이라고 한다.
상하이 관광은 도시 관광이 주류인데 상하이는 빌딩을 지을 때 같은 모양의 빌딩이 나오지 않도록 시에서 사전 심의를 했기 때문에 상하이에는 같은 모양의 건물이 없다고 한다. 상하이에서는 빌딩을 보는 것만으로도 상하이 관광을 하는 셈이다.
상하이는 중국의 경제를 좌지우지 하는 도시이다. 중국에서 한자리 하고 싶으면 북경에서 살고 돈을 많이 벌고 싶으면 상하이에서 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어둠이 내려앉은 상하이 거리를 달려 상하이가 중국이 자랑하는 동방명주타워(높이 468m)에 갔다.
이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왔는지 타워를 올라가는데 길게 줄이 늘어서 있다.
263m 전망대로 올라갔다. 오르는데 48초가 걸렸다. 전망대에서 상하이의 야경을 만끽했다.
동방명주 타워는 세계에서 3번째 높은 타워라고 하는데 이 타워가 중국인들의 자부심을 한껏 고조 시키고 있다는 걸 느꼈다.
우리나라의 서울 남산 N 타워는 비교가 안 된다고 한다. 고층 타워를 가진 것도 자랑이고 최고층 빌딩을 가진 것도 자랑인 셈이다.
우리나라에도 세계 최고층 타워나 빌딩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 특이한 사항은 동방명주 타워의 엘리베이터에서는 안내양이 직접 설명을 한다. 녹음이나 녹화를 하면 될 것을 그 것도 여러 나라 말로.....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이므로 누구에게나 정부에서 직장을 주어야 하므로 이런 곳에 안내양을 배치하지 않고 녹음이나 녹화를 하는 건 일자리를 줄이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지. 최첨단 빌딩에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여 외국인들도 자기나라 말로 설명을 들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중국인들은 남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로 100억짜리 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집에는 자기네가 살지 않고 외국인들에게 전세를 놓고 정작 자신들은 허름한 집에 산다고 한다. 그들은 남을 의식하지 않으므로 잠옷을 입고도 못가는 곳이 없고 더우면 웃통을 홀랑 벗어 던지고 길거리를 활보를 한다.
잠옷입고 백화점을 드나들고 고급 레스토랑을 다니는 사람들이 중국인들이다.
중국인들은 빨간색을 유난히 좋아한다.
빨간색은 액을 면하게 하는 색이라고 한다. 그래서 여자들이 즐겨 입는 속옷들 대부분이 빨간색이라고 한다. 빨래 줄에도 빨간 속옷이 많이 걸리는데 아침에 빨간색 속옷을 보면 그날 재수가 좋다고 하니....
상하이의 젓줄인 황포강 지하터널을 건너서 포서지역인 외탄으로 갔다.
황포강은 수심이 7~10m 정도이고 강폭은 500m 정도라고 한다.
황포강을 사이에 두고 구 도심권은 포서, 신 도심권은 포동이라고 한다.
포동과 포서를 잇는 다리가 6개가 놓여 있고 지하터널도 6개를 만들었다고 한다. 황포강의 아름다운 풍경을 살리고 전망을 좋게 하기 위해서 다리는 강 양쪽 끝에 설치를 했다고 한다.
포서지역의 대표적인 명소인 외탄에서 100여 년 전에 상하이가 개항될 때 지어놓은 외국풍의 건물의 야경을 감상했다.
청나라 때 열강들이 등쌀에 못 이겨 남경 조약을 맺고 개항을 한 상하이....
당시 외국인들은 청나라 정부에 소 한 마리만큼의 땅을 개항하라고 했지만 열강들은 소한마리를 죽여서 가늘게 실을 만들고 그 소로 만든 실을 이은 둘레의 모든 땅을 개항하라고 해서 상하이 전체가 개항을 했다고 한다.
상하이에는 당시 지은 서양식 건물 26채가 찬란한 조명을 받으며 멋진 폼으로 내게 다가 왔다.
상하이 시내를 오가며 보니 10여 년 전에 왔을 때 보다 교통질서를 잘 지켜진다는 것이다. 내년 북경 올림픽과 2010년 세계 박람회를 대비해서 인민들을 열심히 계도를 한 덕이 아닌가 싶다.
중국에서 2,000여년전의 역사를 알려면 서안을 가고 500여년전의 역사를 알려면 북경으로 가며, 100여년전의 역사를 알려면 상하이로 가야 한다고 할 정도로 상하이는 중국의 근대사를 아우르는 도시이다.
태가촌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북한식 고전무용을 감상했다.
밤길을 3시간동안 달려 항주로 이동을 했다.
고속도로 노면이 울퉁불퉁해서 차가 많이 흔들린다. 거기다 30여분 마다 고속도로상에 설치를 한 요금소 때문에 고속도로로서의 흐름을 끊고 있어 고속도로인지 저속도로인지 분간이 힘들다.
왜 고속도로상에 요금소를 만들었는지....이것도 중국인들이 기질이라서......
‘하늘에는 천당이 있다면 땅에는 소항이 있다’는 중국인들이 말을 빌어보면 중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낙원이 소주와 항주인 셈이다.
항주는 중국의 7대 고도에 속하는 도시라고 한다. 중국에서 고도란 100여년 이상 나라의 도읍지로 정했던 도시를 말한다고 한다. 항주는 2200여 년 전 월나라의 수도였다고 한다. 이때 생겨난 말이 오월동주라는 고사라고 한다.
또 항주는 미인의 고장이라고 한다. 항주의 대표적인 미인으로는 서시를 들 수 있는데 나중에 월나라 왕이 서시를 오나라로 시집을 보내어 오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한다. 서시를 패월이라고 하는데 이때부터 미인계가 생겨났다고 한다.
서시가 살던 시기에 못생겼으나 돈이 많은 동시라는 여자가 살았다고 한다. 당시 서시는 위장이 안 좋아서 항상 양미간을 찌푸리고 다녔다고 한다. 여자들은 멋쟁이 여자들은 양미간을 찌푸리고 다녀야 하는 줄 알고 너도 나도 양미간을 찌푸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 가운데는 가장 못생긴 동시도 들어 있었다니...가관이었을 게다.
항주에는 자전거 오토바이라는 탈것들이 거리를 누빈다. 밤샘하여 충전을 하면 오토바이로서 80~100Km를 달릴 수 있고 충전이 안 되었을 때는 자전거로 패달을 밟고 다닐 수 있으니....좁은 골목도 손쉽게 달리고 주차가 용이하여 날로 불어만 가는 제주의 교통을 개선하기 위해서 이런 교통기관을 들여와 사용하는 것도 바람직 한일이라고 생각을 해 봤다.
중국사람들의 소원은 기후가 온화한 소주에서 태어나고, 사람이 가장 살기 좋다는 항주에서 살며, 경치가 좋은 계림에서 놀고, 요리의 천국이라는 광동에서 먹으며, 죽어서는 요하에 묻히는 걸 최대의 행복이라 생각을 한다.
그러고 보니 항주는 중국인들에게는 이상향인 셈이다.
항주는 일찍부터 차를 많이 재배를 해서 중국의 다른 농촌에 비해서 소득이 높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항주에서는 온통 차 밭만 보인다. 중국에서 최대 명차라는 용정차도 항주에서 생산되는 차라고 한다.
상하이나 항주는 중국에서 여자들이 가장 살기 좋은 도시라고 한다. 결혼을 한 다음날부터 여자들이 하는 일은 온종일 마작이나 포커를 하는 일이라고 한다. 남자들은 직장을 다니고 시장엘 다녀오며 식사 준비를 하고 청소나 빨래도 남자들이 몫이라고 한다. 여자는 아이만 낳아 주면 되고 육아는 남편이 책임을 진다고 하니...한국에서 온 남자들은 상하이나 항주의 여자와는 거리를 두어야 할 것 같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열심히 본 중국의 남자들은 한 달만이라도 한국의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한국여자와 살아 봤으면 하는 게 소원이라고 한다.
동방문화원을 찾았다.
이곳은 유불선 3대 종교를 한곳에 모아 놓은 관광지라고 한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고 이곳에 들어 가보니 중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어서 돈을 주고 들어갔다는 자체와 시간을 허비했다는 생각에 아쉬움만 남는 장소였다.
돌아오는 길에 가이드에게서 중국에서 가장 많은 것 3가지와 중국인들의 소원 3가지를 들었다.
중국에서 가장 많은 것은
첫째가 사람이다.
둘째는 짝퉁이 많다고 한다.(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짝퉁을 많이 만드는 나라이다. 근데 중국이 짝퉁만 만들고 싸구려 물건만 만드는 건 아니라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중국에 물건을 주문하면서 가장 질이 좋게 만들어 달라고 해서 일본에는 중국에서 만든 물건 중 가장 질이 좋은 걸 수출을 한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자기가 만든 물건 중에서 1등품을 쓴다고 한다. 한국의 바이어들은 중국에 주문을 내면서 가장 싼 물건을 찾는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 수출이 되는 물건들은 질이 떨어지는 물건만 수출을 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들으니 얼굴이 화끈해 진다. 그래서 한국에서 중국물품들이 넘 형편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우리나라 무역을 하는 사람들도 싸구려 물건만 찾을 게 아니고 제대로 만든 물건을 들여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봤다.)
셋째는 자전거 왕국이다. 요즈음 중국에는 자동차가 많아지는 추세이지만 중국에서 자전거 숫자는 인구 숫자와 같다고 한다.
중국 사람들이 일생의 소원은
첫째가 죽을 때까지 중국 땅을 전부 밟아 보는 것이고,
둘째는 중국에서 만든다는 요리를 모두 먹어 보는 것이며,
셋째는 죽을 때까지 중국의 글자를 다 배워 보는 것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인터넷 환경에 맞추어 계속해서 새로운 글자를 만들고 있고 중국에서 학식이 높은 학자라도 한자를 1만자정도만 사용을 한다고 하니.....일반인들은 일생동안 5천자도 안 쓴다고 한다.
숲속에 자리를 한 백초당엘 갔다. 중국에서는 양자강을 사이로 북쪽의 의술은 동인당이라 하고 남쪽의 의술은 백초당이라고 한다.
중국의사 두 분이 와서 진맥을 하고 처방을 내린다.
항주의 버스들은 차들마다 행선지를 전광판으로 안내를 하고 있는데 어떤 버스는 행선지 번호만 있고 어떤 버스는 K자가 행선지 번호 앞에 붙어있는데 K자가 들어간 버스는 에어컨 버스로 2원이고 K자가 없는 버스는 가야콘버스(에어컨이 설치되지 않아서 차가 움직여야 시원해진다고 해서 별칭이 붙은 버스)로 이용료는 1원이라고 한다.
항주에서 유명한 강인 전단강엘 갔다.
전단강은 중국에서 장강, 황하, 회하, 송화강 다음으로 긴 강이라고 한다.
전단강에는 2층 다리가 설치되어있는데 중국 사람들은 뻥을 넘 좋아해서 전단강을 5층 다리가 놓여진 강이라고 한다. 강물에는 고기가 다니고 그 위로 배가 다니며 그 위에는 기차가 다니는 철로가 있고 그 위에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 있으며 다리 위 하늘에는 비행기가 다닌다고 한다.
중국 사람들의 뻥은 알아주어야 한다.
전단강 옆에는 중국의 국보인 육화탑이 있다.
육화탑이 유래는 옛날 전단강에 심술이 사나운 용이 살았는데 이 용은 성질이 난폭하여 항상 전단강물을 소용돌이치게 하므로 농사도 못 짓게 하고 고기잡는 것도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또 사람도 잡아갔다고 한다. 전단강가에는 육화라는 예쁜 계집애의 아버지가 고기를 잡으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 왔는데 하루는 심술궂은 용이 육화의 아버지를 잡아갔고 남편을 찾으러 나선 육화의 어머니도 잡아갔다고 한다. 육화는 매일 전단강의 용에게 돌을 던지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내 놓으라고 했다고 한다. 육화의 돌팔매에 배겨내지 못한 용은 육화의 부모를 돌려보내면서 앞으로 1년에 한번 정도만 물결을 일으키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한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이 육화의 공을 새기기 위해 이곳에 탑을 세우고 탑의 이름을 육화탑이라고 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이다.
인공호수 서호에서 유람선을 탔다.
화창한 날을 기대했지만 뿌연 날이어서 풍경이 생각만큼 좋지가 않았다. 거기다 유람선은 서호 한구석만 빙빙 맴돌다 만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서호는 기대뿐이었다.
중국의 여걸 중 한사람인 서태후가 이곳 서호를 보고 북경에 이화원을 만들고 거기다 서호를 닮은 인공호수를 만들었다는 일화가 있다.
서호에서는 3가지를 금지한다.
첫째는 수영금지다.(서호는 인공호수여서 바닥을 진흙으로 만들어 안전사고의 위험이 높단다.)
둘째는 빨래금지이다.(서호의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서다. 옛날엔 서호에서 빨래를 했다고 한다.)
셋째는 낚시금지이다.
소동파가 제일먼저 만들어 먹었다는 동파육(돼지비계를 이용한 요리)과 거지닭으로 점심을 먹었다.
용정차가 생산된다는 용정에도 들렸다.
용정차 단지를 다녀오다가 차에 연료를 채우기 위해서 어느 주유소엘 들렸더니 주인이 손사례를 친다. 주유소에 기름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지금껏 주유를 해 봤지만 기름이 없어서 주유를 못한 주유소는 이번이 첨이다. 웃기는 주유소도 다 있다.
항주의 자랑이고 중국의 자랑이라는 송성가무쇼를 보러 갔다.
항주가 남송이 도읍지여서 송나라시대를 무대로 가무쇼를 만들어 보여 주고 있다.
송성가무쇼를 구경을 하려면 사전에 예약을 하고 쇼 한시간전에 표를 매표해야 구경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구름관중이 모인다.
한시간전인데도 주차장엔 차들로 만원이다.
쇼장은 송나라시대 부락으로 꾸며져 있는데 이곳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모두 송나라시대의 복장을 하고 장사도 송나라시대와 같은 방법으로 한다. 시간을 거슬려 타임머신을 타고 송나라 시대로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송나라 부락은 영화의 대형 세트장처럼 볼거리도 많고 먹거리도 많으며 놀거리도 풍부했다. 쇼를 보러 한시간전에 입장을 한 사람들이 무료 하지 않도록 잘 꾸며져 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송나라시대의 유물이나 문물을 접해도 보고 양꼬치와 약밤을 사 먹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쇼를 하는 대형 극장으로 들어갔다. 미리 예약을 했지만 2천여석이 넘는 대형 극장에 입추의 여지도 없이 사람들로 대 만원이다. 이 극장에서는 매일 저녁마다 하루 3회 공연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송성가무쇼는 그 명성에 알맞게 무대와 의상이 화려하고 배우들이 연기 또한 일품이었다.
쇼중에는 대포가 날아가고 홍수가 나며 비가내리고 눈이 내렸다 무대 위로 말이 달리고..... 무대뿐이 아니라 객석에 까지 비가 내린다. 넘 환상적이었다.
기상천외한 쇼를 보면서 나도 그 쇼에 출연을 한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져 들어 간다.
쇼를 보면서 중국인들이 자부심을 다시 본다. 상하이의 동방명주탑에서 보았던 그런 자부심이다. 그 자부심은 우리가 해냈다는 자부심이다.
쇼의 마지막에는 한국, 일본, 대만의 무용이 선보인다. 한국무용은 아리랑가락에 장고춤과 농악놀이로 중국인들에게 눌렸던 기분을 업되게 했다.
쇼장에서는 동영상 촬영을 금지한다는 가이드의 말과 영상 자막에서도 나왔으나 막무가내로 찍어댄다. 외국인도 있고 중국인도 있다. 말로만 엄포를 놓는가 싶다.
조선족이 경영하는 한식집엘 들렸다. 그런데 이곳 한식집은 중국풍이 다되었다. 한식에는 식사를 가져오는 차례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밥을 먼저 가져다 놓고 다음엔 반찬을 그 다음엔 국을 가져 왔으며 맨 마지막으로는 삼겹살을 가져온다. 배가 고파서 밥을 찬거리로 대충 먹었는데 다 먹어서야 국이 나왔다. 숭늉으로 마시라는 건지...거기다 가관은 밥을 다 먹고 일어서려니까 오늘 음식이 하이라이트인 삽겹살이 들어온다. 배가 불러서 삽겹살 구워 먹는건 포기를 했다.
한국에서 이렇게 장사를 했다간 손님이 모두 끊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기집에 갔으면 고기 먼저 가져와야 하는데...상차리는 방법이 중국식이라서 아무리 자신들은 한식집이라고 해도 내가 보기엔 중국음식점으로 밖에 보이질 않는건 무슨 연유에서일까......
항주에서 황산까지 3시간동안 밤길을 달렸다. 황산호텔에서 키가 작고 까무잡잡하고 행동이 민첩할 것 같은 자기말로는 ‘황산 다람쥐’라는 조선족 황산가이드인 김광열이라는 청년을 만났다.
가이드가 황산 등정에 대한 안내를 해 준다. 황산에서는 해발 1600m에서 자야 하므로 따뜻한 겉옷을 준비를 해야 하고 짐을 두 개로 나누어서 꾸려야 한다고 한다.
황산에서는 들고 다니는 가방은 들고 갈 수가 없으므로 배낭에 황산에서 쓸 물건을 담았다.
황산에서는 지팡이가 필요할 것 같아서 호텔샵에서 우리 돈 1,000원을 주고 나무 지팡이 하나를 샀다. 그런데 비취계곡에서는 지팡이가 4개에 천원이라고 해서 황당했다. 이것이 중국에서 물건을 파는 모습이다.
황산은 중국의 23개성중에 안휘성에 속하는데 연중 280일정도가 비가 내리거나 궃은 날씨라고 한다. 그래서 황산에서 좋은 경치를 보기가 힘들고 일출이나 일몰을 보기는 더더욱 힘들다고 한다.
황산의 날씨 중에서 가장 좋은 날을 만나려면 10월중순 이후에 황산을 찾아와야 한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번 여행은 마침 알맞은 계절에 왔다는 생각이 든다.
황산의 운무는 유명한 황산의 절경을 더 운치있게 하는데 황산에 운무가 생기는 이유는 황산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졌는데 화강암은 공기 중 습기를 빨리 빨아들이고 빨리 내 뺃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황산은 특수한 기후 조건을 가진 산이라고 할 수 있다.
황산에는 소나무가 유명하다. 황산에는 대나무를 조림해서 중국의 유명한 무술영화를 황산에서 촬영을 한다고 한다.
황산에는 원숭이가 산다고 한다.
날씨가 화창하고 더운 어느 날 두 청년이 황산 여행을 갔다가 날이 더워서 시냇가에서 멱을 감았다고 한다. 멱을 감고 있는데 황산이 원숭이들이 나타나 두 청년의 옷을 가져가 버렸다고 한다.
멱을 감고 나온 두 청년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고 옷을 찾아 헤매는 두 청년을 보고 원숭이들이 눈이 휘둥그레 졌다고 한다.
원숭이들은 자심들은 꼬리가 뒤에 붙어 있는데 청년들은 꼬리가 앞쪽에 붙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숭이들은 청년들이 모습을 보면서 박장대소 난리법석을 떨었다고 한다.
황산시내에는 명나라와 청나라시대의 거리가 그대로 보존이 되고 있다. 그곳을 갔다.
그 거리는 모택동시대 문화혁명으로 다 파손되어 새로운 건물로 탈바꿈을 하였으나 800여m 정도가 남아있어서 지금도 그곳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장사도 하고 있었다.
몇 백 년이나 된 집들과 돌로 포장을 도로의 모습을 보면서 당시의 생활상을 눈여겨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황산시내에는 신안강(新安江)이라는 강이 흐르는데 이 강을 황산사람들은 어머니 강이라고 한다. 이강이 황산시민들에게 식수를 제공하고 농업용수로도 요긴하게 사용하였고 육로가 정비되지 않았을 때 이곳 사람들은 신안강에 배를 띄어 항주까지 다녀오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오염이 심해서 식수로 사용을 안 하고 있고 빨래도 금지를 하고 있으나 사람들은 오늘도 강에서 빨래를 하고 있다. 여름에는 멱을 감는 사람도 보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무리 좋은 법이라도 지킬 사람이 지키지 않을 때는 도리가 없는지......
황산으로 가는 길에 가이드가 지난번 있었던 일이라고 하면서 여행 중에 물건을 챙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말해 주었다.
한 할아버지가 황산관광을 하다가 가이드에게 호텔에 틀니를 놓고 왔다고 했단다. 호텔에서 멀리 떠나 온 뒤라 그쪽으로 돌아 갈 수도 없고 해서 가이드가 호텔로 전화를 했더니 화장실에서 틀니를 찾았다고 한다.
문제는 틀니를 어떻게 돌려 주느냐하는 문제가 생겼다. 관광을 하면서 다른 도시로 와버려 호텔로 돌아 갈 수 없는 처지 이므로 할아버지와 상의를 한 후 틀니를 할아버지네 집으로 부치기로 하고 호텔에 주소를 알려 주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그 후 할아버지는 별 일 없이 정해진 여행 일정을 마치고 귀국을 했다고 한다.
문제는 할아버지 보다 먼저 집으로 부쳐온 소포를 열어 본 가족들은 할아버지 틀니만 도착을 했으므로 할아버지가 여행 중에 큰 변을 당한 줄 알고 집안이 벌집 쑤신듯 난리가 났다고 한다.
황산은 산이 검고 칙칙하게 보인다고 해서 이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후 당나라 이세민(태종)이 황산을 보니 황금색으로 보여서 황산이라는 이름이 불렸다고 한다. 황산의 이름은 황제가 지어준 이름이라한다.
황산은 12만개의 계단이 놓인 산으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계단을 가진 산으로 이름이 나있다.
황산을 중국 사람들은 바다라고 부른다. 그래서 황산에는 북해. 남해, 서해, 동해가 있다. 구름바다인 셈이다. 현재 황산에는 서해를 모두 개발을 해서 사람들에게 개방을 하고 있으며 북해는 일부만 개발이 완료 되었으며 동해와 남해는 개발 계획 중이라고 한다.
황산은 4경이 유명한데 구름바다를 이루는 운해, 1830m 절벽에서 자라고 있는 기송, 그리고 아무리 봐도 신기한 괴석, 등반 후 피로를 말끔히 풀어주는 온천을 말한다.
황산 입구에는 영화촬영지로 유명하다는 비취계곡이 있다.
비취계곡은 연인들이 계곡이라 할 정도로 연인과 연관을 지어 이름을 붙이고 있다.
겨울철로 접어들어서인지 명성에 비해서 비취계곡이 아름다운 계곡이라는 생각이 들지를 않는다. 비취계곡보다 더 훌륭한 계곡이 우리나라에 쌓이고 쌓였다는 생각이 든다. 실망만하고 내려 왔다.
황산을 오르는 셔틀버스를 탔다. 셔틀버스는 천길 낭떨어지를 이리구불 저리구불 돌며 운곡 케이블카역까지 올라갔다. 멋진 경치에 감탄을 하고 천길 낭떨어지를 보며 조마조마하며 올랐다.
50여명이 타는 케이블카로 오르려다 생각을 바꾸고 8인승 케이블카를 탔다. 가이드의 권유도 있고 해서 (우리 돈 1만원을 냈다.) 운곡사역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황산의 절경을 구경하며 해발 1,600여m에 있는 백아령역까지 갔다.
케이블카에서 보는 황산의 절경은 바로 여기가 신선들이 사는 고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중국의 금강산.....중국에서는 황산을 보고 나면 다른 산은 볼 필요가 없다고도 하고 중국 사람들이 일생의 소원이 황산을 한번 구경을 하는 것이라고 하던데 그른 말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기암괴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 같은 소마무가 넘 운치가 있다.
케이블카를 내려 다시 한 시간 정도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오늘의 숙소인 북해빈관으로 갔다. 가면서 절경에 감탄을 하며 앵글에 절경을 열심히 담았다.
운무가 감싼 산허리를 보며 감탄에 감탄을......신비하고 황홀한 경치에 도취하며 어떻게 걸었는지 모르겠다. 황산이 날씨를 걱정했는데 걱정은 기우에 그치고 이처럼 멋있는 날을 나에게 선사를 해 줄줄은 미쳐 몰랐다.
보이는 경치마다 모두 절경이다.
황산 72봉 중에서도 경치가 가장 뛰어나다는 시신봉엘 올라서 여기서도 멋진 경치를 앵글에 담느라고 넘 바빴다.
그런데 사람이 넘 많다.
수많은 사람들이 황산에 올라 절경에 감탄을 하고 탄성을 발한다.
중국인들이 일생의 소원이라는 황산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워진다.
황산의 계단은 천길 낭떨어지 절벽에 구멍을 파고 철심을 박아 만들었기 때문에 계단 밑이나 옆에서 보면 하늘에 떠있는 것 같다. 어떻게 절벽에 구멍을 뚫고 계단을 붙여 놓았는지 볼수록 신기하다.
중국인들이 일을 하는 것을 보면 하루에 고작 여섯삽을 뜨면 된다고 한다. 오전에 세삽을 뜨고 점심을 먹고는 2~3시간 쉰 후 오후에 세삽을 뜬다고 한다. 즉 관리가 볼 때만 일을 하는 척 한다는 중국인들이 어떻게 황산의 절벽에 계단을 놓았는지 감탄이 절로 난다.
중국에서는 환경단체가 없는지 맘만 먹으면 산에 계단도 설치를 하고 케이블카도 놓고 산위에 호텔도 짓고....황산에 케이블카가 4개(태평케이블카, 운곡케이블카 2곳, 옥병케이블카)나 설치되었고 호텔도 5곳(백운빈관, 배운루빈관, 서해빈관, 북해빈관, 서림대주점)이나 만들었으며 절벽에 철심을 박아 12만개나 되는 계단을 놓을 때도 누구 한사람 환경을 해친다고 반대를 한 사람이 없다. 그런데 제주도의 사정은 영 말이 아니다. 뭔가 일을 하려면 벌떼같이 반대를 하는 환경단체들.....어떤 때는 반대를 위한 반대도 하는 그들...뭔가 반대급부가 있지 않나 생각을 해 본다. 제주는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긴 틀렸다. 제주인들 만을 위한 잔치를 하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모습을 보며 어떤 때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 개발이 만사는 아니다. 그러나 개발을 해야 하는 사항에 대해서는 무조건 반대가 아닌 대안을 내 놓고 반대를 해야 맞는 것이 아닌지.....답답하다.
황산에 각종 시설을 해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온다고 황산이 황폐된 건 아니라는 사실을 보았다. 중국인들과 제주 민들의 생각이 다른 건 민족적인 생각이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
각종 시설을 한 중국의 황산은 이제 세계인이 사랑하는 산이 되었다.
덕택에 나도 편하게 케이블카를 타고 황산엘 올라 황산의 멋진 운해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운해를 보며 감탄을 했다.
케이블카를 놓으면 많은 사람이 산을 오르므로 산이 크게 훼손 될 수 있다는 원리가 성립되겠지만 그걸 놓으므로서 평생 산엘 오를 수 없는 노약자나 장애인도 산을 쉽게 오를 수 있는 반대급부가 있게 마련이다. 그 대신 등반로를 모두 폐쇄하므로서 등산으로 파괴되는 등반로의 훼손을 막을 수 있으니 어느 방법이 꼭 옳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두 가지 방법에는 모두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그대로 두느냐..아님 인공을 가미한 보존이냐....일부사람들은 자연 그대로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데 그럼 후세 사람만 사람이고 현세 사람들은 주어진 자연들도 구경할 권리가 없는 사람이라는 말인지.....케이블카가 없는 한라산이 훼손 안 되고 잘 보존을 하고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가끔씩 보도를 통해 접하는 내용은 한라산이 등반객들로 인해 많이 훼손이 되어서 일부 등반로는 폐쇄를 하고 휴식년을 설정하고.....제주의 문제는 생각만 해도 답답하다.
황산은 등소평이 황산에 오르고 황산을 온 인민이 보고 즐길 수 있게 하라는 말을 한 후 개발을 하고 개방을 했다고 한다. 이제는 중국의 온 인민뿐이 아니라 전 세계인이 찾아와 탄성을 울리는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오늘의 숙소로 정해진 북해빈관에 도착을 했는데 안개가 너무 많이끼어서 눈앞을 분간할 수가 없다. 숙소에 짐을 놓고는 서해대협곡을 다녀 오려던 계획이 무산 되었다.
숙소에서 짐을 정리하고 잠시 쉬었다. 호텔측에서 과일을 소담하게 바구니에 담아서 갖다 놓았다. 투숙기념이란다. 과일에 손을 대다 그래도 아쉬워 밖에 나가 보니 앞을 분간할 수 없었던 안개가 사라졌다.
얼른 카메라를 챙기고 해가 지기 전에 한 컷이라도 담으려고 호텔 앞쪽에 있는 사자봉을 향해 뛰었다.
산정에 오르니 운무사이로 해가 진다. 황산의 일몰이다. 열심히 앵글에 황산의 일몰을 담았다. 황산의 일몰은 장엄하였다. 일행 중에서 황산의 일몰을 본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일몰 이미지를 보며 모두들 부러워했다. 일몰 생각도 안하고 숙소에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내일은 황산의 일출을 담아야 하므로 다시 장비를 점검하고 일출촬영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잠자리에 들었다.
황산에서의 일출은 오전 6시30분경이라고 한다. 5시부터 일어나 준비를 하고는 일출로 유명한 사자봉으로 갔다. 근데 어제 본 수많은 사람들이 일출을 보기 좋은 곳을 모두 점령을 해서 내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일출시간은 다가오는데 일출 담을 장소를 찾지 못해 산을 오르락내리락 뛰다가 넘어지기까지 했다. 사람들이 많지 않는 곳을 찾아 그곳에서 일출 장면을 담기 위해 기다렸다.
높은 곳에서부터 탄성이 터진다. 탄성은 점점 아래로 내려온다. 드디어 내가 있는 곳에서도 장엄한 황산의 일출을 담을 수 있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회가 밀려온다. 황산을 여행하면서 일기가 좋을지도 모르고...그런데 황산에서 일출과 일몰 그리고 황산의 운해를 보고 앵글에 담기도 했으니 황산에서 축복을 받은 것이다.
지난 6월 백두산에 갔다가 4박 5일 간 비만 맞은 생각이 잠시 떠오른다. 그 때 얼마나 안타까웠는데.....날씨가 황산 여행의 축하라도 해 주는 것 같다.
황산 최고봉은 연화봉(해발 1864m)이다. 현재 황산 최고봉은 출입을 통제시켜서 제2봉인 광명정(해발 1840m)으로 향했다.
숙소에서 광명정을 거쳐 서해대협곡 입구까지는 5.5Km라고 이정표에 표시 되어있다.
‘태산이 높다하되....’란 시구처럼 묵묵히 광명정을 향해 해발 1,600m에서 출발을 했다.
드디어 광명정엘 올랐다. 발아래로 황산의 서해가 펼쳐진다. 절경인 청량대, 비래석, 배운정의 멋진 경치를 감상하며 걸었다.
황산에서 가장 빼어난 절경 서해 대협곡으로 갔다.
기암괴석과 멋진 소나무 눈 아래는 천길 낭떨어지........기암절벽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것 같이 보이는 소나무...(어떻게 소나무가 저기서 자랄까...감이 안온다.) 깎아지른듯한 절벽들, 절벽과 절벽사이에 위태롭게 놓인 계단들......절경에 심취하며 계단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황산의 모든 절경을 섭려하려고 눈을 크게 뜨고...그러나 천길 낭떨어지를 보면...발이 후들후들....심장이 쿵쾅쿵쾅....드디어 서해대협곡의 절경들을 모두 섭렵하였다.
하산은 황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설치를 했다는 태평케이블카를 이용하였다. 발착역인 단아역으로 갔는데 한낮이라서 하산하는 사람이 적어서 100명이 탄다는 케이블카에 30여명이 타니 창밖을 통해서 황산의 모습을 맘껏 구경할 수 있어서 좋았다.
산 아래 송곡역에서 내려 황산시내에서 점심을 하고 난징으로 4시간을 달렸다.
황산을 우리말로 설명이 되어있다는 CD(우리 돈으로 10.000원)를 구입했는데 집에 와서 틀어 보니 앞부분만 나오는 불량품이었다. 대신 황산 화보집(중국 돈으로 78元)을 보면서 황산을 되새겨 본다.
고속도로, 일반도로, 다시 고속도로(실은 중국의 고속도로는 중간 중간에 요금을 받으려고 막아 놓아 저속도로이지만....)를 달렸다.
날씨가 좋아서 차창 밖으로 중국의 농촌이 한눈에 들어온다. 들국화가 곱게 핀 들판이다. 중국에서는 쉽게 볼 수가 없는 묘지들도 보인다.
황산에서 난징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우리차가 전세를 낸 도로인지 달리 달리는 차가 없다. 그 때문에 휴게소를 들렸는데 휴게소는 아예 문을 잠궜고 화장실은 못질을 해 놨다. 할 수 없이 볼일은 휴게소 뒤쪽 으슥한 곳에서 해결했다.
오후 4시 30분경 목적지 난징에 도착을 했다.
부자묘 야시장으로 갔다. 이곳은 난징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드는 먹자골목이면서 번화가이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왔다 몰려간다. 각종 상점들도 손님맞이에 분주하다.
중국인들은 야시장을 좋아해서 가는 곳마다 야시장이 있다. 밤 문화를 즐기는 그들의 풍습을 엿볼 수 있는 기회다. 수로가 잘 만들어져 있고 각종 유람선을 띄어서 난징의 수로를 달리는 것도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저녁 식사 후 발 마사지로 황산에서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냈다.
귀국하는 날이다. 난징 시내로 나갔다. 출근시간과 맞물려서 시내는 무척 혼잡하였다.
중국 사람들에게서 가장 추앙을 받는 손문(쑨원)의 묘실과 좌상, 와상이 안치된 증산릉으로 갔다.
산곡대기에 릉원이 있어서 계단을 올라 산위로 갔다.
중국인들이 쑨원이 동상 앞에 헌화를 하며 쑨원의 업적을 새기는 것 같다.
증산릉에 이웃한 영곡사 영곡탑을 올랐다. 이 탑은 8각 9층탑으로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의 사리가 묻힌 탑이다.
이곳도 계단을 올라서 산꼭대기로 가야 하므로 이곳에선 계단을 오르기가 힘든 사람들을 위해 전기로 움직이는 자동차를 운행하고 있다. 오르는데 중국 돈 10원(우리 돈으로는 1500원)을 내어야 한다.
탑을 오르는 중간에 신해혁명 기념관이 있다. 중국을 바꾼 신해혁명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이해 할 수 있게 마네킹을 이용하여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탑에 도달하니 탑의 내부에는 9층까지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헉헉 거리며 9층까지 올라갔다. 탑 위에 오르니 난징 시내가 눈 아래 펼쳐진다. 난징 시내와 영곡사 수림을 감상한 후 계단을 내려왔다.
영곡탑 9층에서는 상쾌한 공기가 환영을 하는 것 같다.
난징공항으로 향했다. 난징공항은 새로 개항을 한 공항으로 난징 시내에서 고속도로로 한 시간을 달려야 한다. 공항의 규모는 작으나 깔끔하다.
정시보다 50분 늦게 아시아나 항공이 난징 공항을 이륙했다. 아시아나는 정시에 출발을 하지 않는지...올 때 갈 때 모두 연발이다. 그러니 연착을 할 수 밖에.....쯧쯧쯧
멘트도 안하고....아시아나가 돈 좀 벌었나.....말로만 서비스 제일이라면 뭘해....
승객에 대한 서비스가 뒷전인 항공사.....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데.......아시아나는......(?????)
인천국제공항에 내려 김포공항으로 발길을 돌리고 다시 대한항공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니 밤 10시 30분이 되었다.
이번 여행을 마치면서 여행을 함께한 친구들과 여행을 주선해 주고 각종 정보를 주시고 도움을 주신 참 좋은 여행 관계자님께 감사를 드린다.
여행에 필요한 정보
상하이 정보
외탄관광터널 (外滩观光随道)
◆ 한마디로 : 푸동지역과 푸서지역을 잇는 관광터널
◆ 여기있다 : 와탄의 가운데 위치
◆ 강추이유 : 황푸강을 건너기 위한 방법 중 가장 휘황찬란한 선택!
◆ 완소특징 :·화려한 빛과 레이져 쇼, 646.7미터의 판타스틱한 경험!
고음질 음향설비로 효과음 또한 일품!
외탄관광터널은 푸동지역과 푸서지역을 잇는 곤돌라형의 귀여운 차가 오가는 수중 터널로 외탄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푸서쪽 출입구는 외탄 진의(陳毅)광장 북쪽에 있으며, 푸동쪽 출입구는 국제회의센터 남쪽, 동방명주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터널의 전체길이는 646.7미터로 내벽에 갖가지 색깔의 레이저와 조명을 사용하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놓았다. 5분정도의 짧은 시간이지만 관광객들에게 작은 즐거움을 선사한다.프랑스에서 기술이 도입된 모노레일은 무인운행 시스템으로~ 7인승이지만 거의 만원사례가 없고 배차간격도 짧아~ 연인 단둘이 탄다면 또 하나의 낭만이 아닐까~ 은백색 외관의 귀여운 객차는 시야가 막히지 않도록 투명 통창으로 터널을 지나가는 동안 마음껏 환상적인 조명, 레이저쇼를 감상할 수 있고, 고음질의 음향설비로 청각 또한 즐겁다~ 터널 내에서 벌어지는 시각적 쇼를 한층 멋지게 느낄 수 있다.
상해의 상징인 외탄(外灘 : 와이탄)
외탄은 상해의 상징이자 상해 현대 역사의 축도이다. 전체 길이가 약 1.7㎞이며, 다양한 국가의 건축 양식이 모여 있어서 '세계 건축 박물관'이라고 불리며, 한쪽으로는 넓은 제방을 따라 많은 관광객들이 황포강의 경관을 즐기기 위해 항상 붐비는 곳이다. 황포강 위를 운행하는 여객선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것도 기념이 될 것이다.
밤이 되면 화려한 조명이 전체 제방을 비추어 유럽 도시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을 갖게 하고, 근처에 위치한 동방명주탑의 불빛이 외탄을 더욱 밝게 한다. 상해의 많은 연인들은 이곳에서 야간 데이트를 즐긴다. 외탄 중간부분에는 큰 동상이 하나 서 있는데, 중국 공산혁명의 원로인 진의(陳毅 : 천이)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중국 최고 높이의 방송 관제탑, 동방명주(东方明珠)
◆ 한마디로 : 중국의 상징이 된 중국최고 높이의 관제탑!
◆ 현지어로 : 동팡밍주
◆ 여기있다 : 푸동
◆ 강추이유 :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이~ 상하이에 갔으면 당연히 가봐야 하는 곳!
택시타서 성조무시하고 “동팡밍주” 외치면 다 알아듣는다.
◆ 완소특징 : 468미터! 세계에서는 세 번째 아시아에서는 최고의 높이!
순수한 중국의 자본과 기술로 만들어진 TV 송신탑!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운행하는 기네스북에 등재된 엘리베이터!
1991년 7월 착공에 들어가 1994년 10월에 완성한 동방명주탑은 상해의 월스트리트라 할 수있는 푸동 루쟈쭈웨이 금융구에 위치하고 있는 방송 수신탑으로써 총 높이가 468m로 아시아에서 첫번째, 세계에서 세번째로 높다. 중국의 펄 TV를 운영하는 미디어 그룹인 동방명주 그룹이 소유하고 있다. 263M 와 350M에 관광 전망대가 있으며 350M 전망대에는 귀빈실이 따로 있고, 일반 관광객들은 263M 전망대를 이용하게 되어있다. 동방명주탑 내부에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면 10초만에 전망대에 도착하여 상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데 탑 주변의 초고층 빌딩들과 황푸강을 바쁘게 오가는 선박들은 상해의 발전상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항주 정보
육화탑(六和塔 ; 리우허타)
북송 개보(開寶) 3년(970년)에 지어진 것으로, 전당강(錢塘江) 북쪽 연안 월륜산(月輪山)에 위치해 있으며 전단강의 대 역류를 막고자 하는 기도를 반영하여 세운 탑이다.
송대(970)에 건립된 탑으로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매년 음력 8월 18일을 전후해 바닷물의 역류가 이루지는데, 육화탑은 전당강 높은 물결을 가라앉히기 위해, 대역류를 막아달라는 기원으로 세운탑이다.
이탑의 이름인 육화(六和)라는 의미는 원래 불교에서의 규약인 '육합(六合)' 즉, '천지사방(天地四方)'의 의미다.
당시 건축계의 거장인 유호(喩皓)가 ≪목경삼수(木經三首)≫를 근거로 하여 설계하여 외관은 13층이며, 내부는 7층으로 나선형 계단을 이용하여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전체 높이는 59.89m이며, 중국 목조 건축 분야의 걸작으로 평가되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 하나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은 항주에서 꼭 들려가는 유명 관광지로 탑에 올라 전경을 감상할 수 있게 해 놓았다.
탑 안으로 들어가면 가운데 작은 방이 있고, 나선형 계단을 타고 맨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전당강과 그 위로 길게 이어지는 길이 1,453m의 전당강대교가 한눈에 바라다 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다.
현재는 국보로 정해져 있어 보수와 유지에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옛 모습을 어느 정도는 유지하고 있다. 탑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탑에는 104개의 풍경이 각 층마다 달려 있어 바람이 불면 풍경소리가 은은히 들려온다.
아름다운 여인 서시(西施)를 닮은 서호(西湖 ; 시후)
서호는 항주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유명한 미인 서시(西施)를 기념하는 의미로 '서자호(西子湖)'라고도 불린다. 서시에 대해서는 실제 인물인지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로는 월나라 왕인 구천(勾踐)이 오나라의 왕 부차(夫差)에게 바쳤던 인물로, 결국은 구천의 계략대로 오나라왕 부차가 서시의 미모에 빠져 나라 일을 돌보지 않게 되었고, 오나라가 멸망에 이르게 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중국의 역사상 양귀비 등과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미인으로 꼽힌다.
서호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으며, 호수에는 소영주, 호심정, 완공돈 등 3개의 섬이 떠있다. 호수의 총 면적은 60.8㎢이며, 그 중 수역의 면적은 5.66㎢이다. 서호는 안개가 끼었을 때나, 달 밝은 밤 또는 일출 때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준다.
서호 안과 근처에 위치한 유명한 명소 10가지를 서호 10경(西湖 10景)이라 부르는데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단교잔설(斷橋殘雪), 평호추월(平湖秋月), 소제춘요(蘇堤春曜), 곡원풍하(曲院風荷), 화항관어(花港觀魚)등 이다. 단교잔설은 중국의 오래된 신화고사인 백사전(白蛇傳)에서 백소정과 허선이 만난 무대가 된 곳으로 옛날에는 다리 중간에 문이 서있었다고 한다. 문 위에는 처마가 얹혀있었는데 눈이 내리면 눈이 처마위로 쌓여 멀리서 바라보면 눈 쌓인 다리가 문을 기준으로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 같이 보여 단교(斷橋)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평호추월은 넓이 400평방미터의 정원으로 호수 수면과 높이가 같아 평호(平湖)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소제춘요는 소동파가 항주에 지사로 부임했을때 쌓은 둑(제방)으로 사시사철 모두 아름답지만 이름에서도 추측할 수 있듯 봄날 새벽의 경치가 가장 절경이다. 곡원풍하는 소제춘요의 북서에 펼쳐진 풍경으로 여름에 연꽃이 피어 특히 아름답다. 화항관어는 봄에 모란꽃을 보며 용정차를 마실 수 있는 운치있는 공원으로 누각 등이 세워져 있으며 수많은 모란이 피어있는 목단원(牧丹園)이 유명하다.
항주에 오면 제일 먼저 白樂天이나 蘇東坡의 詩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西湖를 찾는다.
‘上有天堂 下有蘇杭’(하늘에는 천당이 있다면 지상에는 蘇州, 杭州가 있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름답다는 西湖.
唐代의 시인 白樂天과 북송의 시인 蘇東坡가 이곳에서 벼슬을 하며 제방을 쌓아서 지금까지 白堤와 蘇堤로 불리우는 제방을 걸어서 역시 배터리로 움직이는 유람선을 타고 저녁무렵의 서호를 둘러본다.
항주가 지상의 천국이라 일컬어지는 것도 서호가 있기 때문인데 서호 곳곳의 빼어난 비경 10곳을 골라 西湖10景이라 하는데,
즉 蘇堤春曉(소제춘효), 平湖秋月(평호추월), 曲院風荷(곡원풍하), 斷橋殘雪(단교잔설), 花港觀魚(화항관어), 柳浪聞鶯(유랑문앵), 雙峰揷雪(쌍봉삽설), 三潭印月(삼담인월), 南屛晩鐘(남병만종), 雷峰夕照(뢰봉석조)로 불리운다.
서호(西湖)는 인공호수로써 면적 6.38㎢, 둘레 15㎞, 평균 수심은 1.5m이며, 깊은 곳은 2.8m정도라고 하니 얕은 평야에 물을 끌어 들인 셈이다.
일 년에 한 번 호수의 물을 가는데 물갈이에 33일이 걸린다고 하며, 전당강(錢塘江)에서 물을 끌어 들이고 빠지는 물은 경항대운하(京抗大運河) 로 흘려보낸다고 한다.
동방문화원(東方文化院園)
동방의 찬란한 문화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
항주의 동방문화원은 국가에서 제정한 AAAA급 풍경구로, 전당강(錢塘江)과 부춘강(富春江), 포양강(浦陽江)등 이 세강의 합류지점에 있는 소산구 의교진 양기산(蕭山區義橋鎭楊岐山)의 남쪽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절강성의 중강건설그룹이 투자하여 개발한 곳으로 투자액만 9.5억원(인민폐)를 넘으며, 그 안은 세기광장, 불교지역, 도가지역, 레저구역, 작게 만든 후룬베이얼 초원, 식물원등 8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항주의 중요한 관광지로 항주시에서 소산까지 15KM거리에 떨어져 있을 뿐이어서, 이동이 편리하다.
동방문화원은 주역의 8괘에 따라 분포되어 있으며, 유가, 불가, 도가 3가의 건축물이 세워져 있고, 2728M 길이의 화려하고 예술적인 긴 통로가 문화원을 가로질러 지어져있다. 동방의 전통적인 문화가 풍부하게 드러나 있는 곳이다.
풍부한 문화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고려하여, 동방문화원은 이미 국가에 의해 세계 종교학숙 연구기지, 중국불교문화전시센터, 중화민족 동방문화원, 중화 청소년, 아동 문화예술활동 기지로 지정되었다.
용정차의 산지, 용정(龍井 : 롱징)
용정은 유명한 용정차의 명산지이다.
서부 서산 봉황령(鳳凰領)에 위치해 있으며, 서호 풍경구 3대 샘물 중의 한 곳이다. 샘물은 암석 틈 사이에서 나와서 맑고 깨끗하며,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용정의 물이 깨끗하여서 이 물로 용정차를 끓이면 그 향기과 맛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한다. 또한 수면 위에서 움직이는 분수령을 발견할 수도 있다.
원나라 때부터 재배해온 용정차(龍井茶;룽징차)는 항주(抗州;항저우)에서 재배되는 대표적인 녹차입니다. 용정이란 명칭은 원래 샘 이름이었고 이어 용정사란 절이 세워 졌으며 이 절에서 차를 재배한 것이 유래가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구여.. 용정차는 짙은 향, 부드러운 맛, 비취 같은 녹색 그리고 참새 혀모양의 잎새라는 네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어 '4절(四絶)'이라 호평 받고 있습니다.
용정은 물을 끓였다가 섭씨70-80도 정도로 식혀서 마시는데, 생선 요리 때 넣으면 비린내가 없어지고 냉장고에 넣어두면 냄새를 제거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식후에 마시면 가장 맛이 있고 지방질을 분해하므로 닭백숙에 차잎을 넣고 끓이면 아주 담백한 맛을 볼 수 있습니다.
용정차에는 비타민 C와 안기산 등 유익한 성분이 다른 차보다 다량 함유되어 있으며 중국 예방의학 과학원의 연구원이 항암 차로 발표한 17가지 차 중의 하나입니다.용정차는 그중 으뜸으로 꼽히고 있구여..
용정차는 모두 16등급으로 나누어지며 1등급차는 청명(4월 5일) 이전에 것으로 명전( 明前)차라 하고 2등급 차는 곡우(4월 20일) 이전에 따는 우전(雨前)이라합니다. 3등급은 5월의 것이고, 그외에 여름과 가을에 따는 차는 쟈스민차나 홍차를 만듭니다.
동파육
◇ <적벽부>의 소동파가 즐겼다는 동파육
항주의 먹거리로는 용정차, 동파육, 거지닭등을 볼 수 있는데 사진은 동파육이라는 돼지고기 요리이다.
중국 북송때 <적벽부>를 지은 소동파라는 시인의 호를 따서 지은 요리로 이 시인은 뛰어난 문학가이면서도 요리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래서 직접 요리를 만들어 내기도 했는데 이 요리를 소동파가 개발해 냈다는 얘기도 있고 소동파가 이 요리를 즐겨서 이름이 붙었다는 소리도 있다.
일종의 돼지고기 조림으로 돼지의 삼겹살이나 오겹살 부위를 썰어 기름에 튀긴 후 간장 양념에 오래도록 조려서 먹는 요리이다.
송성가무쇼
송성천고정이라는 송성 가무쇼는 제작비가 무려 5,000만 위엔, 우리 돈으로 약 61억원을 들여 제작을 하였다 한다. 이곳에 출연을 하는 사람이 모두 약 300여명이 된다고 하며 여기에 출연하는 이들은 송성입구에 있는 전문 가무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시험에 합격된 사람들이라고 한다.
쇼는 최첨단 시설을 동원하여 입체음향과 현란한 조명, 레이져 사용 등 빛과 소리의 조화를 이루었으며 무대의 다양한 변화를 위해 앞객석이 기둥지하에서 돌출되게 하였고 무대 옆으로 나누기와 보조 무대 활용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장면변화를 한다.
실제 기마의 등장과 성벽의 붕괴, 분수와 비내리는 장면도 실제로 물이 무대 천정위에서 떨어지게 하였으며 출연 배우들이 화려한 의상과 서커스와 기에 등을 동원하고 박진감 있는 무대와 환상적인 무대 연출에 최첨단 기술을 동원 시켰다.
송나라의 역사를 집약시켜 보여주고 항주의 특색 그리고 세계로 뻗는 새로운 도약과 각국 민속 무용을 통한 세게 화합을 보여 주고 있다.
첫째장은 서호의 아름다움과 백사 청사의 전설로 남녀의 사랑 이야기, 둘째장은 송나라 전성시대 황제의 생일과 세계와 교역의 중심내용을, 셋째장은 송나라를 구한 악비 장군의 이야기, 넷째장은 관광도시 항주를 표현한 춤과 기예, 마지막 다섯째장은 한국, 대만, 일본, 동남아의 민속춤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현란한 조명과 화려한 의상의 출연진들이 보여준 송성가무쇼는 ‘당신이 하루를 내게 준다면 1,000년을 돌려 드리겠다.’는 구호처럼 그들은 이 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황산 정보
"登黃山 天下無山, 天下美境 輯黃山"
"황산에 오르고 나면 다른 산이 보이지 않고
천하의 절경은 모두 황산에 모여 있구나"
중국인들은 ‘황산을 보지 않았다면 산을 보았다고 하지 말라’고 말하는가 하면
"五岳歸來不看山, 黃山歸來不看五"
"五岳(오악)[泰山(태산), 華山(화산), 衡山(형산), 恒山(항산), 嵩山(숭산)]을 보고 온 사람은 평범한 산은 눈에 들지 않고
黃山(황산)을 보고 돌아온 사람은 그 五岳(오악)도 눈에 차지 않는구나"
할 정도로 중국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명산으로 꼽히고 있다.
황산은 36大峰과 36소봉, 즉 72개 봉우리로 그중 연화봉(蓮華峰1,864m), 천도봉(天都峰 1,810)과 광명정(光明頂 1,840)이 3대 주봉으로, 약 1억년전까지는 바다였으나 중생대 4기에 융기하여 빙하에 깎기고 침식되어 오늘의 기암절벽을 이룬 것이다.
한편 5海 이외에 5개의 風景區(1.玉屏景区 2.云谷景区3.北海景区4. 白云景区 5.松谷景区) 로 나누고 각 풍경구에 속한 봉우리들 이름은 아래 별첨을 참고하면 알 수가 있다.
이럿듯 황산이 중국 여러 명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한 몸에 담아(天下美境 輯黃山) 것을 4絶(4가지 뛰어남)이라 불리우며 대자연조화의 기적으로 되고 있다.
즉 기송(奇松), 기암(奇岩), 운해(雲海), 온천(溫泉) 으로
첫번째 뛰어남은 신기한 소나무이다. 소나무는 황산의 가장 특이한 경관으로 백년 이상의 연륜을 가진 황산소나무는 수만그루를 헤아리고 이런 소나무가 암석 틈 사이에 자라 복잡한 뿌리줄기를 바탕으로 우뚝 솟아 아주 완강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특히 옥녀봉(玉女峰)의 영객송(迎客松)은 황산의 상징으로 되고 있다.
두번째 뛰어남은 황산의 괴석이다. 황산은 험한 봉이 즐비하고 절벽이 깎아지른듯하고 산봉우리에서 골짜기까지 수직을 이룬다.
산정과 산허리, 산골짜기 어디서나 괴석을 볼 수 있고 기이한 경관을 볼 수 있다.
세번째 뛰어남은 운해이다. 기후가 수직의 분포를 띠기 때문에 산골짜기 사이는 운무가 가득하고 산봉이 운무에 솟아 있어 가관을 이룬다.
네번째 뛰어남은 온천이다.
황산입구에 있는 온천은 시설이 낡아 새로 개발 중이다..
또 자연 경관 이외 황산은 깊고 두터운 문화적인 면을 가지고 있어, 역사적으로 수많은 시인, 화가와 기타 예술가들이 황산에 감탄되고 도취되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예술 작품을 창작하여 여러 측면에서 황산의 아름다움을 발굴하고 그려냈다고 한다.
세계유산위원회는 황산이 중국에서 문학 예술사상에서 널리 찬양을 받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 1990년에 世界의 自然과 文化遺産에 수록하였다고 한다.
황산 그림을 그린 석도(Shitao :石濤 淸代 화가 1641~1718)라는 화가는
“그림이라는 것은 인간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의 큰 법이요, 산천의 모습과 기운의 정의로운 피어남이요, 예로부터 지금까지 천지를 창생하는 기의 조화요, 음양 기상의 큰 흐름이다.
붓과 먹을 빌어 천지만물을 화면으로 옮기면서 그 천지만물이 나라고 하는 존재 속에서 생성되고 노닐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황산이 미친 영향을 알 수가 있다.
요즈음 중국관광객은 신사화를 신고 1,800여 미터의 고산을 구경하고 있으니 이는 모두 등소평의 덕분이다.
1979년 ‘등소평’주석이 75세 고령에 황산을 걸어서 등정하여 그 경관에 감탄하고는 “인민들에게 이 비경을 함께 볼 수 있도록 길을 만들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9년이란 긴 기간 완벽하게 설계를 끝내고, 1989년부터 공사에 들어가 12년만인 2001년 완공한 것이다.
<와호장룡>의 옥빛 연못과 부드럽게 흔들리던 대나무
비취계곡은 황산의 동쪽에 위치하는 풍경구로 "정인곡(情人谷)"이라 불리기도 한다. 연단봉(煉丹峰)과 시신봉(始信峰)이 계곡의 발원지이며 계곡의 길이는 6000미터 정도이다.
계곡에는 크고 작은 채지(彩池:색채가 아름다운 연못)가 수백개 있는데 그중 40여개는 면적이 100평방미터를 초과하고, 가장 큰 채지의 면적은 1000평방미터에 달한다. 비취계곡 채지군은 크기도 모두 다르지만 모양 역시 매우 다양하다. 이 아름다운 채지들의 맑고 투명함, 옥빛과 같은 우아한 푸르름 그리고 연못 아래에 깔려있는 암석들의 오색 빛깔이 화려하게 빛나면서 연못의 깊고 얕음의 차이에 따라 색채 역시 변화하는 모습은 매우 환상적인 광경이다. 유명한 채지로는 용봉지(龍鳳池)와 화경지(花鏡池),녹주지(綠珠池),옥환지(玉環池),천지(天池)등이 있으며, 그 중 화경지(花鏡池)는 영화 <와호장룡>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울울창창한 수풀림과 부드럽게 흔들리는 대나무 가지는 청량한 기분을 저절로 느끼게 한다.
몽필생화(夢筆生花)
황산의 동북부에 위치하는 몽필생화(夢筆生花)는 북해빈관(北海賓館) 앞의 산화오(散花塢)내에 자리잡고 있으며, 필가봉(筆架峰)과 가까이 있다.
뾰족하게 솟은 석봉 가운데 구불구불 굽은 한 그루의 기묘한 형태의 고송이 나무그늘을 길게 드리우고 자라고 있으며, 봉우리 아래에는 누워서 잠자고 있는 사람의 모습 같은 기이한 돌이 있어, 관광객들이 이 봉우리를 가리켜 夢必生花라 이름 붙이면서 황산의 유명 풍경이 되었다.
안타깝게 70년대 초에 소나무는 고사(枯死)했고, 현재 봉우리 가운데에 서있는 소나무는 모조 소나무이다.
일출이 가장 아름다운 곳, 광명정(光明頂:광밍딩)
황산에서 연화봉 다음으로 높은 곳이다. 황산 중부의 해발 1840m에 있으며 서쪽으로 돌이 하늘에서 떨어져 꽂힌 듯한 모양의 비래석(飛來石)이 보인다.
황산의 두번째 고봉이기는 하나, 36개 봉우리에는 들지 못한다. 봉우리 정상은 평탄하고 높으며, 일조시간이 길고 양광이 찬란하다. 등정을 하고 나면 동해의 기이한 경관과 서해의 무리져 있는 봉우리, 천도, 연화, 옥병 등을 바라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니, 서해의 연화봉 보다도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의 광경이 가장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또 봉정에는 화동지구 해발 최고의 황산기상대가 설치되어 있다.
비래석(飛來石)
광명정, 천해, 서해 등의 위치에서 볼 수 있는 바위로 비래봉상에 있다. 높이가 12m, 길이가 7.5m, 넓이가 2m, 중량이 360톤이다. 바위의 모양이 마치 하늘로 나르는 듯 하다 하여 비래석(飛來石)이라 이름 붙여졌는데, 북해에서 서해로 가는 길에 보면 또 복숭아나무같다하여 선도봉(仙桃峰)이라 불리기도 한다.
연속극 <<홍루몽>>에 나왔던 선도봉도 이곳에서 촬영된 것이고, 비래석을 노래한 청대시인의 시조도 유명하다.
광명정(光明頂)에서 서쪽으로 혹은, 배운정(排雲亭)에서 남쪽으로 가면 "비래석(飛來石)"에 다을 수 있다. 높이 12미터, 600톤 무게의 거석으로돌 밑바닥과 산봉우리가 확 트여 서로 갈라져 있어 마치 거석이 하늘을 나는 듯한 형태라 비래석이라 이름 붙여졌다 한다. 중국의 유명한 고전소설인 <홍루몽>의 영화에 나오기도 한다.
황산(비취계곡) 등정기
‘등황산, 천하무산“이라는 말이 있다. 황산을 오르고 나면 다른 명산은 눈에 차지도 않고 더 이상 오를 산이 없다는 뜻으로 천하제일의 명산이라는 뜻이며 황산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소나무, 기암괴석, 운해, 온천, 설경의 5가지 비경(황산5절)을 다 보아야 한다는데 우리는 이번 황산등정에서 과연 몇 가지나 감상할 수 있을 것인가?
버스로 황산시를 지날 즈음 주변 집집마다 베란다에 돼지 넓적다리를 몇 개씩 걸어놓은 풍경이 특이했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습한 날씨로 인해 집안에서는 마르지 않아 이렇게 소금에 절여 밖에 내걸어 말려서 1년 내내 잘라먹는다고 한다.
드디어 우리가 탄 버스는 개발이 한창인 황산시를 거쳐 황산 명승구를 굽이굽이 지나 비취계곡 입구에 도착하였다.
일명 사랑의 계곡이라는 비취계곡은 주윤발, 장쯔이 주연의 "와호장룡" 촬영지로서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숲이 일품이며, 폭포수와 계곡물 색상이 마치 비취 보석을 연상시킨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계곡의 물빛은 옥빛, 푸른빛이 어우려져 맑고 투명한 비치색이며, 쏴하고 흔들리는 대나무 숲 사이 오솔길을 걸으며 느껴본 대나무 특유의 톡쏘는 냄새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대나무와 푸른 잎사귀는 영원히 잊지 못할 듯 하다.
비취색 물빛과 와호장룡의 대나무숲 여운을 뒤로한 채 본격적으로 황산을 오르기 위해 케이블카 타는 곳인 해발 800미터 지점까지 버스로 이동하였다.
에구! 이건 말이 버스 이동이지 마치 비행기 타고 구름속을 떠가는 기분이지 않은가!
드디어 운곡사 매표소에 도착! 이제 차에서 내려 8분동안 2,804미터의 케이블선에 매달려 55인승 케이블카로 종점인 해발 1,670미터 백아령까지 올라야 한다. 깊은 계곡을 내려다 보며 거의 45도 이상의 각도로 한가닥 쇠줄에 매달려 흔들리며 위태롭게 올라가는 케이블카에 의지한 채로...
웬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 지! 꾸역꾸역 구석으로 밀려 들어간 55인승 케이블카에서 숨을 크게 내쉬려고 머리를 들어 창밖을 올려다보니, 와! 이건 신선이 노닌다는 그런 세상이 아닌가! 운해위로 솟아난 맑게 개인 황산의 수많은 봉우리들과 푸르디 푸른하늘 그리고 운해아래의 회색빛 안개속 세상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신선이 사는 곳에 둥둥 떠서 가고 있는 그 감격을 무엇으로 다 표현하랴...
드디어 16:50 황산정상(연화봉 : 1865미터)아래 북해호텔 도착!
호텔에서 바라본 주변 안개낀 계곡과 삐죽삐죽 솟아난 드높은 봉우리들은 환상 그자체이다. 한치앞이 안보이는 산안개 드리워진 계곡위로 하염없이 내리는 이슬비 소리 그렇게 이국의 숲내음 가득한 깊은 산속 작은 호텔방에서 그날 밤도 우리들의 감격어린 열띤 토론은 끝없이 이어지고 황산의 밤은 깊어만 갔다.
다음날 05:00 해돋이를 보기위해 우리들은 새벽잠을 설치며 서둘러야 했다.
안개와 비내리는 컴컴한 산속 오솔길을 인파에 떠밀리며 드디어 고대하던 황산의 해돋이 명소 청량대에 올랐다.
그러나 왠걸 안개와 비로 앞은 하나도 안보이고 수많은 한국관광객의 아쉬움 섞인 에휴~~ 하는 탄식 소리만 들으며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우린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그 유명한 사랑의 자물통이 매달려 있는 서해대협곡 입구인 배운정에 도착했다.
절벽 난간에 빽빽이 매달려 있는 사랑의 자물통! 황산에 오른 연인들이 사랑을 굳게 맹세하고 자물쇠를 채운 뒤 열쇠를 바로 아래 천길 낭떠리지 밑으로 던져버리면 그 열쇠를 찾기 전까지는 사랑이 깨어지지 않는 다고 한다. 그 열쇠를 어떻게 찾으랴!
사랑의 자물통이 매달려 있는 그 협곡은 그전부터 익히 듣고 보았던 장소라서 무척 애착이 갔다.
어렵지 않게 한국 연인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자물통을 찾아내곤 그옆에서 기념사진 찍기에 열중하였다. 서둘러 호텔로 내려와서 아침을 대충 먹고 다시 황산에서 두 번째 높은 봉우리인 광명정(1,840미터)을 향해 힘들게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비래석을 지나 30분을 더 오르니 정상인 광명정이다. 황산의 일출을 이곳에서 볼 수만 있다면 황산에서 누리는 최고의 행운이란다. 연중 200일 이상이 구름과 안개에 가려있어 좀처럼 일출을 보기 어렵다는 곳이다.
이제부터 하산이다. 돌계단을 돌고 돌아 멋진 운해와 잘 자란 소나무를 감상하며 터벅터벅 내려간다. 저 멀리로 멋지게 케이블카가 지나간다.
1시간 이상을 기다린 후 가까스로 케이블카에 올랐다. 발아래로 보이는 서해대협곡이 너무 아름답다. 황산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잠시 상념에 잠겨본다.
이번 산행에서 황산5절 중 과연 몇종이나 감상했던가! 음... 소나무, 기암괴석, 운해 이렇게 3가지 뿐이네...
온천과 설경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지! 하긴 짧은 일정에 황산5절을 다 감상한다는 것은 자연의 위대함을 간과한 인간의 욕심뿐이고 그저 황산에 올랐다는 것만으로 커다란 위안을 삼아야겠다.
청대 옛거리(老街)
우리는 3박4일간의 마지막 일정인 황산시에 위치한 청대 옛거리(老街)로 향했다.
청대 옛거리는 송나라때부터 형성된 거리로서 명청대의 옛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현재도 상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중국의 전통문화와 다양한 건축물들을 감상하기 위해선 꼭 들려봐야 할 장소이며 이곳에선 주로 골동품, 차, 민속품, 문방사우, 음식 등을 판매하고 있다.
수많은 인파에 밀려 골동품을 자세히 감상하지 못한 것과 상점에서 중국어로 가격흥정을 못했다는 것이 무척 아쉽다.
일출이 가장 아름다운 곳, 광명정(光明頂)
황산에서 연화봉 다음으로 높은 곳이다. 황산 중부의 해발 1840m에 있으며 서쪽으로 돌이 하늘에서 떨어져 꽂힌 듯한 모양의 비래석(飛來石)이 보인다. 황산의 두번째 고봉이기는 하나, 36개 봉우리에는 들지 못한다. 봉우리 정상은 평탄하고 높으며, 일조시간이 길고 양광이 찬란하다. 등정을 하고 나면 동해의 기이한 경관과 서해의 무리져 있는 봉우리, 천도, 연화, 옥병 등을 바라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니, 서해의 연화봉 보다도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의 광경이 가장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또 봉정에는 화동지구 해발 최고의 황산기상대가 설치되어 있다.
■ 황산의 기암 절경의 명당 배운정
비래석(飛來石)에서 북쪽으로 1KM정도 걸어가면 배운정(排雲亭)이 보인다.배운정은 중화민국 24년, 서해(西海) 입구에 세워졌으며, 이곳에서는 시야가 확 특여 황산의 기암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명당이다. 구름과 안개가 서해의 골짜기들을 휘감아 솟아오르다 이곳에 이르면 저절로 거쳐져, 물리칠 배(排) 에 구름 운(雲)을 써서 배운정이라 불리게되었다
■ 거석이 하늘을 나는 형태의 비래석
광명정(光明頂)에서 서쪽으로 혹은, 배운정(排雲亭)에서 남쪽으로 가면 "비래석(飛來石)"에 다을 수 있다. 높이 12미터, 600톤 무게의 거석으로돌 밑바닥과 산 봉우리가 확 트여 서로 갈라져 있어 마치 거석이 하늘을 나는 듯한 형태라 비래석이라 이름붙여졌다한다. 중국의 유명한 고전소설인 <홍루몽>의 영화에 나오기도 한다.
■ ‘와호장룡’의 옥빛 연못과 대나무 비취계곡
비취계곡은 황산의 동쪽에 위치하는 풍경구로 "정인곡(情人谷)"이라 불리기도한다. 연단봉(煉丹峰)과 시신봉(始信峰)이 계곡의 발원지이며 계곡의 길이는 6000미터 정도이다.
계곡에는 크고 작은 채지(彩池:색채가 아름다운 연못)가 수백개 있는데 그중 40여개는 면적이 100평방미터를 초과하고, 가장 큰 채지의 면적은 1000평방미터에 달한다. 비취계곡 채지군은 크기도 모두 다르지만 모양 역시 매우 다양하다.이 아름다운 채지들의 맑고 투명함, 옥빛과 같은 우아한 푸르름 그리고 연못 아래에 깔려있는 암석들의 오색 빛깔이 화려하게 빛나면서 연못의 깊고 얕음의 차이에 따라 색채 역시 변화하는 모습은 매우 환상적인 광경이다. 유명한 채지로는 용봉지(龍鳳池)와 화경지(花鏡池),녹주지(綠珠池),옥환지(玉環池),천지(天池)등이 있으며, 그 중 화경지(花鏡池)는 영화 <와호장룡>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울울창창한 수풀림과 부드럽게 흔들리는 대나무 가지는 청량한 기분을 저절로 느끼게 한다.
■ 몽필생화(夢筆生花)
황산의 동북부에 위치하는 몽필생화(夢筆生花)는 북해빈관(北海賓館) 앞의 산화오(散花塢)내에 자리잡고 있으며, 필가봉(筆架峰)과 가까이 있다.
뾰족하게 솟은 석봉 가운데 구불구불 굽은 한 그루의 기묘한 형태의 고송이 나무그늘을 길게 드리우고 자라고 있으며, 봉우리 아래에는 누워서 잠자고 있는 사람의 모습 같은 기이한 돌이 있어, 관광객들이 이 봉우리를 가리켜 夢必生花라 이름 붙이면서 황산의 유명 풍경이 되었다.
안타깝게 70년대 초에 소나무는 고사(枯死)했고, 현재 봉우리 가운데에 서있는 소나무는 모조 소나무이다.
■ 시신봉
북해의 동쪽에 있으며 1키로의 거리이다. 황산은 천하에 이름이 있다.
시신동의 솔나무는 가장 독특한데 형태에 따라 명명한 기송은 주로 흑호송, 연이송, 용조송, 화용송, 탐해송 등이 있으며 이런 나무는 일반적으로 400~500년이 된다.
■ 운해와 일출 모두가 아름다운 곳, 청량대(淸凉臺)
1690m 높이의 사자봉 중턱에 있으며, 운해와 일출 모두가 아름다운 곳이다.
통법대(通法臺), 법석대(法石臺)라고 불리기도 하고, 황산 사자봉의 허리부분에 위치해 있다. 청량대 한쪽에는 파석이 돌출해 있는데, 파석송(破石松)이라 불리는 바위다.
그 밖에도 이곳에는 재미있는 이름의 바위가 있는데, '저팔계 수박을 먹다','원숭이 바다를 보다' 등으로 이름만큼이나 바위의 모양도 기묘하다.
청량대 아래로는 봉운절색의 북해가 있고, 부근의 볼거리로 망선대, 사자관해 등이 있고, 바위에는 "청량세계", "천연도화" 등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사자석이라고도 불리는 사자관해는 황산의 유명한 바위로서 황산 북해사자봉 앞에 있는 평정산상에 있다.
■ 서해대협곡
황산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 중 하나가 서해대협곡을 일주하는 트레킹이다. 서해대협곡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황산의 절경으로 알려져 있다. 트레킹 코스가 갖춰진 것은 불과 수년 전이며, 20여 년에 걸친 등산로 정비 이전에는 서해대협곡에 누구도 쉽게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고 한다.
서해대협곡은 황산이 간직한 24개 협곡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끝에서 끝까지 걸으면 8시간이나 걸린다. 깎아지른 듯 뾰족하게 서 있는 기암괴석 옆으로는 좁은 계단길이 이어져 있고 다리 아래로는 낭떠러지가 펼쳐지지만 협곡의 절경은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매력적인 코스다.
■ 황산운해
황산에 가면 일출이나 운해, 둘 중 하나는 꼭 봐야 한다. 맑은 날이 일년 중 60일도 채 안돼 일출을 보기란 쉽지 않지만 산을 뒤덮고 있는 구름 또한 황산의 절경 중 하나이니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은 구름은 마치 파도가 이는 것처럼 움직여 또 다른 장관을 연출한다. 특히나 황산의 운해는 겨울에 가장 멋진 모습을 보인다.
중국 황산의 10대 名松
"황산에
돌이 없으면 소나무가 아니고 (無石不松),
소나무가 없으면 기이하지 않다 (無松不奇)"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황산에서 소나무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말이겠죠
1년중 280일 정도를 구름과 안개에 감싸여있는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꿋꿋하게 오랜 시간을 버텨온 황산의 소나무들중에서 10 그루의 소나무에 각각 독립된 이름을 붙여주었으니 이를 황산의 10대 명송(10大名松)이라고 합니다.
이중 5 그루의 소나무가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 되었다고 합니다.
1. 영객송(迎客松)
옥병봉(玉屛峰)동쪽 1680미터 고지(高地)에 자라고 있는 높이 13미터, 둘레 약 70쎈티미터의 황산의 대표 소나무입니다.
수령(樹齡)은 약 800년 정도 되었고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 되어 있습니다.
근래 들어와 잎이 누렇게 변색되는 등 상태가 좋지않아서 인공복제를 시도중이라고 합니다.
2. 송객송(送客松)
옥병루(玉屛樓, 황산 앞쪽의 1716미터 높이의 봉오리) 오른쪽 길가에 있습니다
높이 4.8미터, 수령은 약 450년 정도 되었고 나무의 생긴 모습이 손님을 배웅 할 때 몸을 굽혀 읍을 하는 형상과 비슷하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역시 세계자연유산입니다.
3. 접인송(接引松)
시신봉(始信峰) 동남쪽 1630미터 고지에 있습니다.
높이 4미터, 둘레 31쎈티미터..
접인이라는 말은 원래 불교용어로써 '중생을 극락정토로 인도하다'라는 뜻이라는군요
세계자연유산입니다.
4. 탐해송(探海松)
1670미터 천도봉(天都峰)정상 부근에 있습니다.
높이 3.5미터, 수령은 약 500년 정도로 곁가지가 앞을 향해 뻗고 있는 모습이 푸른 용이 바다를 탐하고, 뜬구름을 가지고 노는 듯한 형상이라도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5. 수금송(竪琴松)
와운봉(臥雲峰) 북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생긴 모습이 우산 같기도 하고 수금 (중국식 하프)같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6. 흑호송(黑虎松)
백아령(白鵝嶺) 케이블카 정거장 아래 언덕, 1650미터 고지에 있습니다.
높이 8미터, 둘레 72쎈티미터, 수령이 약 450년 정도로 옛날 이곳에서 도를 닦던 고승이 이 나무위에서 검은 호랑이가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7. 연리송(連理松)
시신봉(始信峰) 1630미터 고지에 있습니다.
높이 21미터, 수령 약 400년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지상 2미터되는 곳에서 나무 줄기가 갈라져서 같이 하늘을 향하고 있는.... 독특한 형상입니다.
이 나무는 지금 '사랑의 기념물'같은 대접을 받고 있어서 많은 연인들이 이 나무로 찾아와 나무 앞에 자물쇠를 채워놓고 사랑이 변치말기를 바라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시멘트로 하트 모양의 구조물을 만들어 놓다니....
세계자연유산입니다.
8. 기린송(麒麟松)
청량대 부근 길가의 1470미터 되는 고지에 있습니다
1.5미터되는 높이에서 나무 줄기가 둘로 갈라져... 넓게 퍼져 있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수령은 약 500년 정도로 추정합니다
9. 포단송(浦團松)
장대천의 '포단송'그림입니다.
옥병 케이블카 정거장 근처, 1610미터 지점에 있습니다.
높이 2.9미터, 둘레 35센티미터, 수령 약 350년 정도..
나무의 형상이 스님들이 좌선이나 불시를 할때 깔고 앉던 부들방석(포단)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10. 용발톱소나무
북해빈관앞에 소나무 뿌리가 용발톱처럼 생긴 소나무이다.
난징 정보
난징
난징은 관광도시는 아니다.
난징은 역사도시이고 4대 고도이다. 고대 여러나라의 도읍지이고 명나라 초기 도읍지이다.
난징은 또한 남경대학살로 유명한 역사적 사건의 도시다.
난징의 관광지에 대해서
1. 중산릉(中山陵 sun zhong shan 쑨쭝쌴) :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손문, 중국에서는 손중산이라 불리는 분의 묘가 있는 곳이다. 중산은 호이다. 손중산은 러시아 공산혁명의 영향을 받아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구상하여 국민당을 개조하여 혁명을 일어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중국에서는 존경받는 사람이다.
2. 미령궁(美齡宮 mei ling goang 메이링꿍) : 장개석의 부인의 이름인 미령의 이름 따서 바꾼 이름이다. 원래는 장개석의 관저였던 곳이다.
3. 현무호(玄武湖 xuan wu hu 쉔우후) : 진나라 원제 때부터 수군의 훈련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현무호라는 이름은 송대에 호수에서 검은용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공원 안에 크다란 호수가 있다.
4. 부자묘 (夫子庙): 난징시에서 가장 큰 공자의 사당이다. 부자묘 주변에는 난징에서
가장 운치가 있는 강남의 전통가옥이 있어 흥미가 더 당긴다. 부자묘 앞을 흐르는 작은 하천 진회화는 물 맑고 경치 좋은 강남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5. 고루(敲樓) : 명대에 세워진 난진 성의 대표적인 곳이다. 홍무제 때 세워져 아침 저녁으로 북을 쳐서 성문의 개폐 시간을 알렸으며 전시에는 주민의 대피용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대종정이라 불리는 23톤이나 되는 종를 볼 수 있는 종루가 있다.
6. 중화문(中华门): 명대에 만들어진 난진 성의 남문이다. 현존하는 명대의 성문 중에서
가장 크고 보존상태가 좋은 곳으로 난공불략의 성문으로 알려져 있다.
7. 명효릉(明孝陵) : 명나라를 개국한 홍무제 주원장의 무덤이다. 능의 입구인 신도(神道)는 약 800m 인데 각 종 동물의 조각상들이 참배로를 지키고 있다
8. 난진 박물관 : 1933년에 개관된 것으로 영국의 대영 박물관, 프랑스의 부브르 박물관에 못지 않는 곳이었으나 1948년 난진 함락전에 국민당에 의해 값진 보물들은 모두 대만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유물과 보물들이 있다.
9. 우화대 열사능원 : 중화민국 시절의 처형장으로 22년간 공산당원과 반국민당 세력이 처형되었던 곳이다. 지금은 추모공원으로 기념비와 기념관이 웅장한 모습으로 있다.
10. 난진 대학살 기념관 : 1937년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난진 대학살"을 고발하는 기념관이다. 당시 30만명이 살해되었다고 전해지며 기념관에는 유골과 사진, 명단이 있으며
대량의 유골이 발견된 만인갱이라는 구덩이 위에 지어졌다.
11. 태평천국박물관 : 난징 유일의 강남 정원을 개조해 만든 박물관이다. 1851~1864년에 실재했던 태평천국은 기독교에 심취한 홍수전에 의해 건설된 국가이다. 농민과 도시빈민들의 절대적 지지을 받았던 태평천국은 13년간 급격하게 퍼져나갔으나 자체 내분으로 갑자기 멸망하였다.
12. 장강대교 : 중국에서 세번째 긴 다리이다. 순수 중국 기술로 지어진 장강대교는 4.5km로 1층은 철도, 2층은 차도로 복합교이다. 60~70년대 중국인들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13. 해저세계 : 중국 제일의 규모를 자랑하는 수족관이다, 호주의 기술로 싱가폴의 자본으로 지어진 수족관으로 크기와 종류가 다양한곳이다.
14. 영곡사 : 1,500년의 역사를 가진 사찰로 명승인 빠오찌(宝志)스님의 유골을 묻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진다. 태평천국의 난에 불타버렸으나 무량전만은 남아 명나라 건축의 신비를 보여주고 있다. 국민당 정부의 북벌과정에서 사망한 전몰장병을 기리기 위한 600m 높이의 영곡탑도 빼어놓을 수 없다.
난징의 자랑, 중산릉(中山陵 : 중산링)
남경의 동쪽, 환중산에 위치한 손중산선생이 묻혀 있는 곳이다.
흔히 혁명의 아버지라 불리는 손문의 호인 중산(中山)이라는 이름을 붙여 지은 곳으로, 위대한 민주혁명의 선두자 손중산선생이 이곳에 잠들어 있으며, 중산릉은 그로써 중요한 역사적, 정치적 지위를 갖게 되었다. 이곳은 1926년부터 1929년의 약 3년에 걸쳐 완성되었는데, 넓이가 6.6km, 길이가 7km로 총 면적이 20여 평방km에 이른다. 지리적으로는 아열대북온대에 속해 있어서 사계절이 분명하고 기온이 적당하다. 연평균 강수량은 900-1000mm, 평균기온은 15.7도이상으로 강소성에서 제일 큰 삼림공원이기도 하다.
또 이곳은 한 사람의 묘라는 것을 잊게 할 만큼 주변 자연조건과 경관이 뛰어나 200여군데의 볼거리들이 있고, 600여종의 자연식물들과 어울러져 자연미와 인공미가 조화된 여행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중산릉의 앞에는 커다란 반월형의 광장이 있고, 광장에 손중산의 동상에 서있다. 또 중산릉으로 오르는 참배로의 계단은 392계나 되고, 계단 도중에는 금빛의 단지가 장식되어 있다. 계단을 다 오르면 제당이 있고 그 뒤에 묘실이 있다. 묘실에는 손문의 와상이 안치되어 있고, 지하에는 관이 안치되어 있다.
1925년 3월, 국민혁명이 한창일 때 북경에서 손문이 객사한 뒤인 1927년 6월, 손문의 장례가 국민정부 치하의 남경에서 국장으로 행하여지고, 이곳 남경 교외 자금산록에 그 유체를 매장하였다. 국민정권은 대만으로 옮긴 뒤, 대북에 중산릉을 만들었으나 그곳은 물론 진짜가 아니며, 이곳 남경중산릉이 진짜 손문선생의 묘이다.
손중산(孫中山)에 대하여...
이름은 일선(逸仙)이고, 호는 중산(中山)이다. 공화제의 창시자로 국민정부시대에는 나라의 아버지로서 최고의 존경을 받았다. 광동성의 향산(현재의 中山)이라는 곳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4세 때 하와이의 형에게 가서 호놀룰루의 신교계(新敎系)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8세 때 귀국하여 세례를 받고 홍콩의 서의서원(西醫書院:의학교)을 졸업(1892)한 뒤 마카오 ·광주 등에서 개업하였다.
삼합회(三合會)의 수령인 정사량(鄭士良)과 알게 되었으며, 홍콩 의학교 재학 때부터 반청운동(反淸運動)에 참가하였다. 중국을 서양으로부터 개혁하려 한 그는, 포르투갈 영지인 마카오에서 쫓겨난 뒤부터 본격적인 혁명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 때 하와이에서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한 뒤 이듬해 10월 광주에서 거병하였으나 실패하고, 1996년에는 하와이를 거쳐 런던으로 갔으나 그곳에서도청국공사관에게 체포되었고, 그때 영국에 머무르는 동안 견문을 넓힌 그는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구상하였다.
그 뒤 1905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동경에서의 유학생 등 혁명세력을 통합하여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하고, 반청(反淸)무장봉기를 되풀이했다. 1911년 10월 미국에서 신해혁명(辛亥革命)의 발발 사실을 알고는 귀국하였다. 귀국 후 임시 대총통(大總統)에 추대되어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을 발족시켰으나, 얼마 후 북부의 군벌들과 타협하여 정권을 원세계(袁世凱)에게 넘겨 주었다.
그는 수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러시아혁명을 본받아 국민당을 개조한 뒤, 공산당과 제휴(국공합작), 노동자 ·농민과의 결속을 꾀하였다. 그리고 국민혁명을 추진하기 위하여 북벌을 꾀하였으나, 미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혁명은 아직 이룩되지 않았다”는 유언을 남기고 북경에서 객사하였다.
영곡사
남경시내의 조그마한 사원, 영곡사(靈谷寺)
중산릉 동쪽에 있는 자금산풍경구에 속한 작은 절이다.
원래 이름은 개산사(開善寺)이고, 514년 남조 양무제때 건설되었다. 그때 처음 건설되었을때는 지금의 명효릉이 있는 자리에 지어졌으나, 명 홍무제 14년(1318)때 명태조 주원장이 명효릉을 만드는 바람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면서 이름도 개산사에서 영곡사로 바뀌었다.
영곡사는 수려한 산세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 종산풍경중에 제일로 꼽히며, 그 중에서도 무량전과 영곡탑은 이곳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무량전은 1381년에 이곳으로 사원 전체가 옮겨졌을 때 같이 옮겨온 것으로 높이가 22m, 넓이가 53.8m이다. 다른 사원에도 무량전이 많이 있지만 이것은 중국에 현존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큰 무량전이다.
또한 영곡탑은 영곡사 뒷쪽에 있는 높이 60m, 9층8면의 동탑이다. 1929년 중산릉의 주요한 공정이 완공된 후에 영곡사 뒷편에 개혁기념탑을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영곡탑이다. 또 탑속에 계단이 있어서 정상까지 오를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