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사평
웅숭깊은 사유, 높은 시적 성취
왜 울음인가. 이채민의 심사대상에 오른 작품들을 통독하면서 문득 그런 물음을 떠올렸다. 그 울음들은 무채색에서 달 울음에 이르기까지 외연도 넓었다. 상식적인 소리지만 울음은 슬픔의 표현이다. 그리고 타자와의 소통의 한 형식이다. 노모의 장례식에서 우는 울음도 역시 그렇다. 그 울음은 사람들을 정답게 둘러앉게 만든다. 그러나 이내 역한 냄새를 풍긴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울음이어서 이내 상투화된 탓이다. 이처럼 가장 강력한 감정인 울음도 속내를 들여다보면 허위일 수 있다. 나날의 일상이 때로는 ‘참’을 배반하는 경우가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을 것인가. 반면 수상작의 경우처럼 울음이 “외딴섬 같은 눈물”인 경우도 있다.
이번 수상작으로 선정한 「다시, 사나사 1」는 일종의 여행시다. 눈에 묻힌 절집을 오르는 공간이동 형식을 취한데다 시적 주체가 깨달음에 이른 내적과정을 겸하여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화자는 겨울산사를 찾고 거기서 은행나무를 만난다. 그 나무는 “몸엣 것 다 내어준 지금, 외딴섬 같은 눈물을” 떨구고 섰다. 그 같은 정황 탓에 화자는 문득 나무에게서 나를 발견한다. 결국 화자는
핑계만 있으면 울 준비가 되어있는
내 몸의 상처들이
툭, 툭, 실밥을 터트리며 비집고 나온다
고 한 순간 격한 감정에 휩싸인다. 그 ‘핑계’만 있으면 실밥처럼 터지는 울음은, 미루어 가늠하자면, “불구의 사랑”에 잇달린 정서적 반응일 터이다. 여기서 불구의 사랑이란 서로 마주서서 “잎 티우고 견뎌야 하는” 은행나무 특유의 사랑의 방식을 뜻하는 것. 그런 사랑의 방식 탓에 시적 주체는 깊이 아플수록 더 가벼운 생을 얻기 마련이란 웅숭깊은 깨달음에 마침내 이른다.
이채민의 시는 때로 보들레르나 고흐 같은 장식성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는 미덕이기보다는 취약점일 수 있다. 심사과정에서도 이 같은 논의가 따랐음을 밝혀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공은 튼실해서 “우듬지하나 없는 절해고도”에서도 깊은 적막을 껴안는 정신의 큰 자세를 보여준다. 씨의 보다 큰 시적 성취를 기대하며 다시 한 번 이번 수상을 축하한다.
문효치, 이화은, 홍신선(글)
<2014 미네르바작품상 수상작>
다시, 사나사 1
-은행나무
이 채 민
가라하지 않고 오라고 내어준 길을 따라
다시, 사나사에 오른다
풍경소리마저 눈(雪)에 잠긴 산사山寺
적막을 다스리는 키 큰 은행나무가 반갑다
저 나무, 만삭의 몸으로
만월 같던 첫사랑 덥석 받아주었는데
몸엣것 다 내어준 지금, 외딴섬 같은 눈물을 떨구고 있다
핑계만 있으면 울 준비가 되어있는
내 몸의 상처들이
툭,툭, 실밥을 터트리며 비집고 나온다
하나만은 남겨둬야 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잎 틔우고 떨구면서 견뎌야 했던,
해와 달을 품으며 불구의 사랑을 키워야 했던,
서로의 물컹한 아픔을 이제야 바라보고 보듬고 있다
얼만큼을 버려야 꽃잎 같은 가벼운 생을 얻을 수 있을까
우듬지하나 없는 절해고도, 그 나무 아래
산사의 얼룩으로 남은 작은 내 그림자
키 큰 그림자의 적막에 서서히 든다.
<대표시 5편>
우는 집
남자의 노모가 죽던 날 울음을 잃어버린 그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으로 느릿느릿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었다
그의 사타구니를 빠져나온 늙은 고양이는 골목에 달라붙은 무성한 소문위에 찐득한 울음을 부려놓고 있었다
줄장미 넝쿨을 잡고 골목을 따라 나간 울음들은 밤이 되어 돌아왔다
무채색의 울음들은 정답게 둘러 앉아 고기와 술을 먹는다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은 울음들은
참이슬보다 빠르게 맑아졌지만 냄새는 역했다
고양이는 그들이 주는 고기를 먹지 않았다
역겨운 울음의 냄새들이 하나 둘 떠난 뒤
허물어진 담장 밑에 느릿느릿 중독된 울음이 고여 있었다
등골나무 하얗게 꽃을 피운
9월 이었다
너를 보냈을 뿐
뼈는 굴곡 없이 물렁하고
혈압과 맥박은 말라붙은 우물이다
반이 떨어져나간 심장은 쿵쿵쿵
운명이 문 두드리는 소리로 요란한데
무시로 찾아드는 두통에
해와 달이 뜨는 것을 보지 못하고
눈만 껌벅이는 나는
걸어 다니는 묘지다
밤마다 뼈들을 조율하며 걸어 나오는
잉카의 미이라 소녀도
스틱스 강가를 휘돌다 뱀처럼 감겨오는 바람도
끈끈한 내 불면에 붙들려 있다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마른 가슴에 떨어뜨린 명왕성의 눈물이
주먹만큼 크다는 것을 안다
너를 보냈을 뿐인데
체념을 모르고 경적 울려대는 슬픔이 무겁다
착각은 잠시 아름다웠어
초저녁 꽃잎은 새벽을 지나 동이 틀 때까지 배고프지 않게 날았지
침묵이 빚은 낯설지 않은 풍경을 마주하고 우리는 아버지가 들어가신 그 마지막 문을 밤새 지킨 것처럼
가슴으로 날아들다 또 벼랑 끝으로 날아가는 저 꽃잎들의 의미를 밤새워 읽고 있었는지 몰라
그리고 그것들의 몸을 포개어 서로의 찻잔에 가득히 넘치게 부어주었는데 착각 착각 착각 시계의 시침소리가 마지막 탱고의 선율처럼 아름답게 어둠을 제압하고 있었어
착각은 고뇌하지 않는 회피의 충분한 조건이었으므로 우리는 소리에 예민하지 않았어
어둠을 조준하던 꽃송이가 야위어 갈 무렵 한 방울로도 충분한 눈물로 우리는 서로에게 공손한 이별을 전하고 오래전에 오염된 미소를 말갛게 헹구어 보냈던 것 같애
아름다운 건 오래 머물지 않는다며 망명을 택한 혁명가처럼 뼈들이 삐걱 거리는 의자와 탁자, 그리고 채 비우지 않은 찻잔이 놓인 자리를 우리는 빠르게 지나쳐버렸지
지상을 덮은 하얀 꽃잎이
침묵하는 또 다른 슬픔을 굽고 있거나
야위어가는 또 하나의 영혼을 기다리고 있는 중 이었을 때.
슬픔에 관한 짧은 리뷰
그을리고 쪼그라진 심장에 물집이 생겼다. 혈관을 뛰어다니던 피들도 제자리걸음이다. 수많은 전쟁에도 끄떡없던 내안의 교회와 성당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누구의 뼈가 부러졌는지 바람도 나도 많이 휘청거렸다.
생의 중심에 고여 있던
너를 비워내는 일이
나무와
돌과
새들이
우는 일과 같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파꽃
누구의 가슴에 뜨겁게 안겨본 적 있던가
누구의 머리에 공손히 꽂혀본 적 있던가
한 아름 꽃다발이 되어
뼈가 시리도록 그리운 창가에 닿아본 적 있던가
그림자 길어지는 유월의 풀숲에서
초록의 향기로 날아본 적 없지만
허리가 꺾이는 초조와 불안을 알지 못하는
평화로운 그들만의 세상
젊어야만 피는 것이 아니라고
예뻐야만 꽃이 아니라고
하늘을 향해
옹골지게 주먹질하고 있는 저 꽃
<수상소감>
완전한 완성은 없다, 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꽃 마중 가기도 전에 봄의 문턱에서 꽃비가 펄펄 내리고 있다. 순간에 찾아온 봄은 수만 갈래의 길로 이렇듯 빠르게 지워져가고 있는데, 시의 향기를 찾아내기 위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외출 중이다. 그리고 가끔 나 여기 있다고, 힘껏 소리를 던져보지만 내 목소리는 멀리 가지 못하고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세상의 많은 시, 그 벽 앞에 부딪치고 만다. 벽은 실체이므로 향기 없는 꽃은 꽃병에 담아두지 않는다.
내 불분명한 의식 안에서 문맥을 잃고 시름시름 앓다 영혼 없이 사라진 가여운 나의 시편들과 이 영광의 소식에 경계를 두지 않겠다. 그리고 미안하다.
환상의 감각으로 시가 나를 따라오고 있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잠깐의 착각이었지만 선택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시의 무게를 느꼈을 때 환상은 현실의 파열점을 향해간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미련한 자는 바람이 사라질 때 까지 기다렸다 촛불을 켠다. 아둔한 착각에 빠져 영원히 시의 촛불을 밝힐 수 없을 뻔 하지 않았던가. 소중한 경험으로 혼자서 날아가는 어리석은 새가 되지 않겠다.
푸른 바다에서 고향의 산과들을 내다보는 것은 소통의 부재이다. 부재와 방랑이 범람하는 행간은 스스로 용서하지 않겠다. 시를 향해 카타르시의 해소라는 무한한 자만도 용서하지 않겠다.
이 세상에 완전한 완성은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 완성을 향하여 충만한 의식으로 순도 높은 시의 빛깔을 찾을 때까지 노력하는 시인이 되겠다. 거추장스러운 장식을 떼어내고 불안이 없는 시의 놀이터에서 더 멀리 더 깊이 뛰어보고 싶다.
허물어진 내 마음과 정신이 환해지는 것을 느낀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머리 숙여 깊이 감사드린다.
약력 : 충남 논산 출생. 2004년 <미네르바> 등단. 시집; <동백을 뒤적이다> 외1권. 시예술상 수상
첫댓글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시간을 더해 미네르바작품상 수상을축하드립니다
이채민 시인님의 수상에 이렇게 늦게나마 멋적은 축하 인사를 드립니다.
모처럼 겨울비 내리는 밤, 아름다운 시들의 향기에 흠뻑 젖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축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