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원 시집 『일교차로 만든 집』
시작시인선 0163
(주)천년의 시작에서 2014년 5월 발간된 정채원 시인의『일교차로 만든 집』.
정채원 시인의『일교차로 만든 집』 곳곳에는 죽음의 이미지들이 널려 있다. 그런데 정채원 시인의 시는 우리의 삶 도처에 산재한 죽음에서 출발하고 있는 듯하지만 이내 그것을 단숨에 능가하는 무한할 역동성과 에너지가 내장되어 있다. 그 힘의 출처는 어디일까. 아마도 “죽을힘을 다해/ 죽기위해/ 불타오른다.”(「불타, 오른다」)라는 역설적인 문장 하나가 이에 대한 답일지도 모르겠다. 즉 생이란 비록 죽음을 향해 뻗어있는 것이나 , “죽을힘을 다해" 불타올라야 한다는 것, 바로 그럴 때 생은 죽음을 뛰어넘어 다시 맹렬히 ”불타, 오른다“는 것. 가히 근래 한국 시단에서 쉽게 접해 볼 수 없었던 도저한 의지이자 아름다움이지 않은가. 더불어 이러한 생에 대한 궁극적 태조야말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최소한의, 아니 최대한의 윤리이지 않은가. 정채원 시인의 『일교차로 만든 집』은 한국시가 그간 끊임없이 도전해 온 웅숭깊은 심연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_출판사 평.
시집 해설 중에서.
정채원의 내면에서 흘러가는 것은 죽음의 언어다. 그러나 죽음의 언어는 ‘죽은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을 잃은 언어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모든 활동이 거기서 출발하는 언어, 아직 개념과 의미로 환원되지 않은 타자의 언어다. 거기서 한 움큼 집어올리기만 하면 시가 되는 언어다. 아직 이름이 없는 이 에로스 덩어리, 이 날것의 생명은 시인 정채원이 ‘변검(變瞼)’하듯 둘러쓰는 온갖 얼굴의근거지다. 낯선 공간에서 낯설게 돌출하는 하나 이상의 공간들, 그 공간들이 이어 붙거나 겹쳐지는 복합적 거주지들, 한 삶에서 다른 삶으로 이음매 없이 건너가는 기이한 시간 여행, 다른 존재를 중층적으로 끌어안고 또다시 다른 존재를 향해 계단을 밟고 올라서는 다중인격 존재는 정채원의 시 어디서나 만나게 되는 주제이다. 정채원은 여러 개의 자아를 안고 산다. 아니, 다중인격이나 복수의 자아라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정채원에게는 지극히 능동적인 에로스가 있다. 이 타자의 덩어리는 늘 풍경 하나를 형성하며 그때마다 다른 얼굴은 들고 출몰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말을 펼쳐 들었다가 그 미로 속으로 사라진다. 정채원의 시는 말이 곧 에로스인 것을 지극히 선명하게 보여 준다.
_ 황현산(문학평론가.)
시인 소개
**정채원 : 서울 출생. 1996년《문학사상》을 통해 등단.
이화여대영어영문학과 졸업.
시집 :『나의 키로 건너는 강』『슬픈 갈릴레이 마을』등.
시인의 말
내 몸 속에 다른 생물이 들어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어언 20년이 다 돼 간다. 아니,
훨씬 더 아득한 날부터다. 몸 안의 생물이 조종하듯 나는 한밤중에도 물가로 갔고 들
판을 헤매었으며 바람 속에서 꽃을 꺾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모래언덕을 기어
오르다 날이 밝아 오곤 하였다. 몸 안의 그 생물은 내 고독과 불안과 슬픔을 먹고 자
랐다. 자라면 또 알을 낳았고 유충은 자라면서 더 많은 먹이를 필요로 했다.
그를 품고 살며 늘 추웠다 한다. 얼었다 녹았다 하며 하루하루 모호하게 메말라 간다.
여러 겹으로 안전하게, 안전하게 부서져 간다.
2014년 4월
정채원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낙원 빌/ DD에 가면/ 막후/ 우로보로스/ 시신 없는 살인 사건/ 일교차로 만든 집/ 불타, 오른다/ 비가역 회로 1/ 비가역 회로 2/ 얼룩무늬 화물/ 발굴/ 에임즈 룸/ 문워커(Moonwalker)/ 자각몽/ 월요일 오후 4시 티타임/ 분열의 역사
제2부
공무도하記/ 우거지와 전구/ 입주/ 패치워크/ 젖은 손바닥/ 불쇼/ 검은 비닐봉지/ 쓰나미/ 사월/ 합선(合線)/ 공연/ 어떻씨와 함께하는 11월 저녁/ 안개표범벌레/ 벼룩시장에서 만난 해골/ 먹물/ 지구인/ 그레고르와 춤을/ 세외도원(世外桃園)
제3부
꽃잎, 점자/ 참외처럼 외로운 저녁/ 현대, 미술관/ 장미의 배경/ 조각 그림 맞추기/ 새장으 ㄹ키우는 사람/ 짝눈/ 재활용/ 원스 인 어 불루 문(Once in a blue moon)/ 불곰이 불쑥/ 20초 동안만/ 멍멍한 왼쪽 귀와 오른쪽 귀 사이/ 월명(月明)/ 천 년 여행/ 밖에는 비가 오나요
제4부
봉쇄수도원 1/ 봉쇄수도원 2/ 계단의 방향/ 울음이 내부/ 절강성/ 하지불안증후군/ 밤의 네 번째 서랍/ 통과/ 입/ 검은 달/ 절경/ 서더리탕/ 붉은 파도/ 지난 60년 동안/ 누설/ 여우호수
해설 : 암흑의 타자와 또는 에로스의 덩어리. _황현산(문학평론가)
시신 없는 살인 사건
(정채원)
자백 9일 만에 주범은 숨졌다
살아 있는 공범들은 말이 없다
그가 둔기로 J의 머리를 내려치는 순간
그들은 J의 양팔을 붙잡고 있었다는데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절벽에서 바다로 밀어 넣었는지
불태웠는지
토막 내 그들 가슴속에 한 조각씩 묻었는지
풍선처럼 불어서 하늘로 날려 보냈는지
J의 시신은 아직까지 발견도지 않았다
공범이라 밝혀진 A와 P,
비바람 거센 밤이면
A의 머릿속 계단을 오르는 발자국 소리 들린다
밤새 이어지는 발자국 소리
P가 거울과 마주치면 항상
등 뒤에 J가 서 있다
목 하나만큼 키가 큰 J가 거기
슬픈 눈으로
식당 벽면에 붙은 거울 속에서도
J가 밥을 먹는다
A가 곰탕을 먹으면 J도 곰탕 국물을 후루룩
계단으로 식당으로 시장바닥으로 교회로
그는 사방 돌아다닌다
A와 P만큼 바쁘게 돌아다니다
그러나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모든 A와 P가 사라진 뒤에도
어쩌면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죽인 적 없는
주범은 먼저 고백하고
먼저 발견되었다, 시신으로
일교차로 만든 집
꽁꽁 얼려 두었어요
언제 창문을 열 수 있을지
어떤 허기가 찾아올지 모르거든요
달 없는 밤에 홀로 깨어
눈뜬 채 얼어 있는 고등어와
눈을 맞추는 일
지느러미를 쓰다듬어 보는 건 어떨까요
출렁이는 물결에 자맥질 하던 시절
아직도 잊지 못했나요
사랑이 올 때와 떠나갈 때의
지독한 수온 차
그건 얼어붙은 갈치 은비늘 속에도 새겨져 있을 걸요
영하 20도로 얼어 있다가도
고춧가루 벌겋게 뒤집어쓰고 냄비 속에서
펄펄 끓는 건 시간문제이지요
조각난 무를 부둥켜안고 흐물흐물 풀어지는 몸
열탕도 냉탕처럼 에고 없이 찾아오는 거랍니다
포근한 솜이불에 파묻힌 당신
이따금 시리도록 흐느끼는 건
지느러미 찢긴 채 갑판 위에서 냉동고로 끌려가던 그날
그 악몽에 다시금 등이 얼어붙는 중인가요
함께 잠들어도 홀로 눈뜨는 밤
홀로 냉동고로 끌려가는 밤
지독한 일교차에 이불을 목까지 끌어 덮는
새벽이면 이어지는 마른기침 소리
불타, 오른다
정상이 바로 코앞인데 죽어가는 사람들, 로프에 매달린 채 이미 죽어 있는 사람들,
정상에 올라 깃발을 꽂고 사진을 찍고 하산하다 죽는 사람들, 칼바람 눈보라를 헤치
고 간신히 하산한 사람들, V를 그리던 손가락 얼어 터진 발가락을 자르고야 집을 돌
아가는 사람들.
살아남은 사람들이 다시 빙벽을 오른다
죽을 힘을 다해
죽기 위해
불타오른다
짧게, 혹은 조금 덜 짧게
겨우내
목을 꺾지 않던 동백도
붉은 눈으로 지새우던 나도
목매달 나무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