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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읍 독도 스크랩 권용섭의 독도 기행과 세계 알리기
빨간비타민 추천 0 조회 185 17.04.05 16: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경찰의 치안은 국민의 안전을 위해 필요합니다.

재판은 하는 것은 숱한 거짓들 속에서 사실을 찾는 것이고 , 문학은 허구를 통해서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의 이 독도그림들은 사실과 진실을 아름답게 표현하여 사람들에게 평온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독도를 놓고 일본과 전쟁 가능성보다 소송이 벌어질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합니다.

이에 우리 한국민의  할 일은 시위나 반일감정으로  외교에 걸림 돌이되어  관료들의 애물단지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경북도청과 경찰청에서 저의 그림전 유치에 난감함을 표한 이때에  귀 본청에서 저의 전시를 유치해 주셔서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이무영청장님을 비롯 살얼음판을 걷듯 수고해주신 경무국 담당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의 그림은 하늘이 준 아름다운 천연계 독도를 애정 과 사랑으로 그려 본 것입니다.

행여 있을 한일간의 분쟁으로 인해 국제 소송을 준비에도 보잘것 없는 이 화가의 활동이  문화 실효적 지배에 한 자료가 되기를 원합니다. (2000.6 한국 경철청 전시장 인사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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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문제, 조용, 무시 능사가 아니다

독도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당면과제이다.
국내에선 독도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자는 쪽과 조용히 있어야 한다는 상반된 의견이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다. 조용히 있자고 하는 측의 대표적인 인물은 박춘호 해양 재판관이다.

그러나 박춘호 해양 재판관의 독도 발언은 주의를 요한다.
"영유권 논리를 조용히 착실하게 보강해 나가는 길 밖에 없다. 우리가 고지를 점하고 있고 시간은 고지를 점한 쪽의 편이다."라는 부분이다.

이 말은 국제법적으로  ‘권리의 응고’ 이론을 원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가장 기초적인 국제법적 법리를 간과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권리의 응고는 정당한 권원에 근거하여 성립되어있는 확정적인 영토 주권에 대해서만 해당한다. 독도 상황처럼 영유권이 일본에 의해 심하게 훼손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응고의 법리는 적용되지 않는다.

응고의 과정을 거쳐서 국제법상 하나의 권리로 새롭게 성립되는 것은 적법한 권원이 없는 ‘사실상의 권리'에 관한 이론일 뿐이다. 권리의 응고라는 법리는 국제사회의 법적 안정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독도 문제는 조용히 놔두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한국 것이 된다’는 말을 따르게 되면 독도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꼴이 된다.
 
더구나 일본의 집요하고 강력한 항의와 다툼이 계속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권리의 응고는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이와 연계해서 “한국의 영토 주권은 확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쓸데없이 자꾸만 독도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불필요하며, 또 유해하기까지도 하다”는 박춘호 재판관의 의견은 그가 정말 국제재판관인지 의문이 들게 한다.

경쟁국가의 계속적인 항의와 대항적인 영토주권 주장을 묵인하면 아무리 완벽하게 성립된 영토주권도 결국은 소멸되거나 부정될 수 있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따라서 그냥 조용히 있자는 주장은 묵인이 가지고 있는 국제법상 권리인 ‘상대성의 본질’을 모르고 있거나 알지만 의도적으로 독도를 일본에 넘기려는 속셈임에 틀림없다.

2006. 4. 19일(수) 제6회 독도본부 독도위기 학술토론회
[독도위기-묵인으로 이끄는 매국 논리들과 그 비판]
 - 김영구 교수(려해연구소 소장,전 대한국제법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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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한국경찰청발간  '권용섭의 아름다운 독도'에서 발췌

2006 한민족 포럼기고 '내가 독도를 사랑하는 이유'

 

독도! 독도! 최근 우리대한민국의 가슴에 너무나 깊이 와 닫는 이름이다.
때로는 애국지사로 때로는 애물단지로, 300미터의 작은 섬이 그토록 한민족을 열광케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쪽 끝 심해선 밖의 한 점의 섬 울릉도로 갈거나......."
청마 유치환선생의 시에 매료된 20세의 젊은이는 낭만의 화가를 꿈꾸며 한반도의 비경을 찾아 스케치기행을 떠나기를 좋아했다. 그 낭만과 혈기로 독도를 찾은 1978년부터 독도와 나는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시작됐다.
친구와 함께 독도스케치를 가려고 포항에서 울릉도로 갔다. 그날따라 폭풍이 불어 도동항 벼랑에서 동료 6명중 4명은 파도에 쓸려 바위에 부딪쳐 목숨을 잃고 남은 둘은 그 시신과 같이 포항으로 돌아와야 하는 비극을 겪었다. “다시는 독도 쪽으로는 돌아보지도 않으리라” 맹세했건만 근30년이 지나고나니 소설이나 아른 한 영화 한 편 본 것같이 바쁜 생활과 함께 그 일들이 흐려졌다 다시 떠오른다.

독도를 가려는데 아! 이렇게도 애절함이

 

                                                                      보트를 젖어 독도탐사 스케치를 하는 <독도화가 권용섭작>

1977년 8월 16일.
포항선착장에서 뱃길로 청룡호는 7시간, 고급여객선 한일호는 3시간 반만에 도착한다고 하였다.
“야, 뱃삯이 싼 청용호를 타자.”
대전에서 직장 휴가차 고향인 의성에 와서 “모개(김범진)” 라는 친구와 함께 독도 기행을 떠난 것이다.
학교에 다닐 때 지리부도 시간에 잠을 잤던지 우리는 울릉도에 가면 독도는 간단히 돌아볼 수 있는 인접한 섬으로 알고 출발했다. 포항여객선 터미널에서 버너용 알코올도 위험하다며 압수당하고 주민등록증이 없어 한동안 사정을 해서야 간신히 선착장을 통과해 울릉도행 배에 올랐다. 독도기행을 요청한 우리가 이상하리 만큼 관계자는 "독도? 못 가요"라는 한 마디로
일축했다.

             독도를 가기위해 울릉도 도동항 현장에서 수묵속사


북한도 일본도 아닌데 왜,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며 울릉도만 다녀오기로 했다. 동해의 넘실거리는 파도를 타고 가는 청룡호의 승객들은 서너 시간이 지나자 대부분이 깡통을 하나씩 끌어안고 구토를 하며 배 멀미가 시작되었다. 그래도 나는 신이 나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구경을 했다.
쉽지 않게 첫발을 내딛은 울릉도 도동항에는 맑았던 하늘에서 굿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 배는 도동항에 도착하여 모두 하선을 했으나 뒤 따라 오던 쾌속선 한일호는 간발의 차로 폭풍이 불어 밤이 늦도록 부두에 접안하지 못했다. 선내에서 라면 급식을 하며 바다 가운데서 파도에 시달리고 있는 모습을 도동항에서 볼 수 있었다.
심한 폭풍 때문에 텐트도 칠 수 없어 민가를 찾았다. 약수터 가는 길 우측 편에 아늑한 언덕 집, 명광이란 학생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여장을 풀고 명광이네 가족과 인사를 했다. 여학생이 둘이나 되고 여객선사무실에 근무하는 아가씨하며 우리는 금세 어울려 떠드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닭다리 잡고 삐약삐약 아~" 당시에 유행하던 노래며 화투도치고 육지에서 온 우리와 섬 사람들의  화제는 만발될수 밖에 없었다.

또 심성 고운 아주머니가 계셔서 고향집 같이 더욱 편안하게 유숙할 수 있었다.
다음날도 쾌청한 날은 아니었고 우리는 비옷에 산행준비를 하여 숙소를 나왔다가 도동마을은 지형이 푹 빠져 고개를 치켜들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암석으로 치솟은 절벽 끝에는 600년이 되었다는 향나무고목은 비경산수화 그대로 이다. 그 아래 형성된 평화로운 섬마을 이 바로 울릉도 남면 도동이고 명광이네 집은 10번지고 독도는 1번지이다.
부두 가까이 나왔다. 풍파 속에 숙련되어 일하는 마을 사람들의 눈빛은 그렇게 선하게 보일수가 없었다. 태풍이 온다며 그 눈빛들이 반짝이며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나는 그들이 태풍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그 때는 알지 못했으나 몇 시간 뒤 엄청난 파도와 씨름을 하고서야 뼈저린 후회를 하게 된다.
아직은 갈매기들이 뱃전에 마을 사람들과 가족처럼 지내는 아름다운 낭만의 섬 울릉도,

 
밤늦게 입도한 한일호 손님까지 합세하여 도동항은 왁자지껄한 시골장터를 연상케 했다.
나는 무작정 기암절벽으로 눈길이 갔다. 부두에서 좌측 암벽 밑으로 좁고 나지막한 갯바위길이 무척이나 낭만적이었다. 지도상엔 별다른 표식이 없는 곳이라 호기심 과함께 기웃거리며 발길을 내딛었다. 때 마침 서성대던 관광객중 네 몇 명이 호기심에 차서 암벽 길에 동행하자면서 통성명을 했다.
서울의 모 대학생과 은행아가씨, 선생님들과 함께 여행 온 것이었다. 위험스런 길이었지만 여러 명이 모여지자 서로를 믿으며 암벽의 오솔길을 걸었다. 비경을 감탄하며 위험할 땐 서로 손도 잡아주며 금세 우리 여섯은 친근해졌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길이 끊어졌고 눈앞엔 거대한 동굴과 절벽이 어우러져 탄성을 자아냈다. 나는 수석이 있나 바위틈을 후벼 파 보기도 하고 스케치 할 자리를 찾느라 좌측벼랑 쪽을 살피고 있었다. 낮은 암벽 길은 파도가 밀려갈 때 벼랑이 되었다가 다시 파도가 밀려오면 우리의 신발을 적시고 바짓가랑이도 적셔 깔깔데는 웃음소리는 동굴에 메아리쳤다. 카메라를 든 핫팬츠 여학생은 짧은 복장을 자랑하며 물가에서 연신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모두는 파도가 올 때마다 메뚜기처럼 뛰며, 밀려오는 파도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암석을 두드리며 80도나 되는 가파른 벼랑을 오르기 시작했다. 내 키로 두 세 길이나 올라와 돌아보는 울릉도 앞바다는 훨씬 멋지게 보였다.
“야, 독도가 보이냐?”

"아니 아직은~"
내 아래에서 있는 일행들이 좀 걱정스러워 친구 이름을 불렀다.
“야~- 모개야~~ 이리와 저 파도는 좀 커,  올라오라니까~”
그중 한 선생님이 나를보고 도리어 내려오라고 했다. 바위가 부식된 것 같으니 그곳이 더 위험하다는 경고하였다. 하지만 우리 쪽으로 밀려오는 물결은 심상치 안다고 생각하며  뒷걸음으로 계속 올라갔다.
정말 산더미 같은 검푸른 물결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난 다급하게 또 소리쳤다.

“야 이리 올라와~ 얌마! 모개야 ~~”

이때 모개만 허둥돼며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푸른 파도가 하얗게 깨어지고 굉음이 터지는 것 같더니 바닷물이 내 발까지 덮친 것이었다. 너무나 순간적이었다.

눈앞엔 아무것도 보이질 않고 그 물결이 밀려가자 더 깊이 무시무시하게 파인 벼랑만 내려다 보였다.

순간 바위틈에서 물 밖으로 튕겨 나온 물고기처럼 퍼덕하는 한 사람이 보였다. 다시 일어서더니 또 넘어지다가 부두 쪽으로 혼비백산이 되어 도망가는 그는 모개였다. 나머지 사람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까불며 뛰놀던 바위 위에는 바닷물만 빈약하게 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 혼자 남겨지고 아무도 없다.

어디로 간 것일까?

나는 목이 매여라 야! 야~ 하며 물속을 내려다보고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대답이라도 하듯 물밑에서 튕겨 나오는 친구들을 볼 수 있었으나 또 금세 눈앞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또 여기저기서 동료들이 물 위로 떠올랐다. 계속해서 거센 파도에 휘말리기를 반복한다.  나는 이제 혼자 다음 파도와 함께 휩쓸리듯 뛰어내리기를 작정했다. 충격을 줄이기 위해 좀 더 바닥과 가까이 내려가려고 했으나 자칫하면 또 파도에 휩쓸릴 것 같기도 했다. 괴물 같은 파도는 사정없이 다시 왔다. 파 박! 굉음과 함께 내 몸도 날렸다. 물위에 얹혀서 속도가 느렸는지는 몰라도 요행이 넘어지지 않고 왔던 길을 허겁지겁 뛰어 나왔다.


앞서 간 모개는 정신이 없는지 손만 흔들며 동네를 돌아다니며 사람 살려달라고 고함을 쳤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엉덩이에 상처가 심한지 한 손으로는 엉덩이를 잡아 쥐고 절음 걸음으로 마을을 정신없이 뛰어다니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혼이 덜 나간 내가 뒤늦게 가세를 했다.
“사람이 빠졌어요!”
“바다 한 가운데로 밀려나고 있어요. 보트, 보트를 좀 내주세요!”
세 사람이 물속으로 빠져들어 갔고 또한 친구는 아까부터 보이지가 않았다.
파도는 쉼 없이 밀려와 암벽을 치고 있었다. 친구 모개는 여전히 엉덩이에서 손을 때지 않고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배여 나와 젖은 청바지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구조할 배를 띄운다는 것은 울릉도 동해 앞바다의 태풍이 허락하지 않았다. 마을의 한 청년이 옷을 벗어던지고 로프를 던지며 바다로 뛰어들었다. M양과 여학생은 꼭 껴안은 채 물위에 떠있었고 김선생님은 밖으로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계속해서 밀려오는 파도에 머리가 암벽에 여러 번을 부딪치며 회생 불가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친구의 상처를 인근 약국에서 응급조치해 숙소에 눕혀놓고 나는 다시 사고현장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 웅성 되고 있었다. 피물이 흥건한 중간에 김 선생님이 눕어 있었다. 용감했던 그 마을 청년의 투신의 정성에도 아랑곳없이 리어카로 병원까지 운반을 하였으나 끝내는....... 나머지 한 명의 행방이 묘연했고 밤 뉴스에 행방불명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핫팬츠학생의 어깨에 있어야할 고급 카메라는 어딜가고 헝클러진 머리사이로 창백한 시신으로 변해있었다.  
참으로 황당한 밤을 지내야만 했다.
다음날 아침 주인집 아들로 부터 우리는 또 한 번의 자지러질듯 한 소식을 들었다.
달려갔으나 결국 나머지 한 친구도 바위틈에서 온 몸이 헤어진 사체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폭풍이 쓸고 간 다음날의 울릉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햇살이 반짝이고 있었고 우리는 그 시멘트바닥 위에 누워 있는 거적을 덮은 네 구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여행자였음으로 누가 소리 내어 비통하게 우는 사람은 없었고 우리등 뒤에서 사람들의 혀 차는 소리만 들릴 뿐 허무하게, 그렇게 보내야만 했다.
우리가 그렇게 깔깔대며 즐기던 파도가 무시무시하게 변해버린 대 자연의 힘 앞에 속수무책이었던 우리들, 인간은 한없는 나약함에 부끄러움을 지금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사고소식이 TV 전파를 타고 고향집으로 우리보다 먼저 와있었다.
패잔병 처럼 배낭을 느슨히 메고 들어선 마을 어귀에서의 어머님의 포옹이 그렇게 안락한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또, 친지들이 찾아와 당부를 한다.
“용섭이 너 조상들이 돌봤으니 제사 잘 모셔라.”
지극히도 권 씨들의 문중다운 명언이었다. (계속)

 


수묵으로 일구어가는 독도

 

내가 독도를 사랑하는이유 2

 

30년이 지나가고 있는 이제 다시 독도를 찾아야할 이유들과 진정한 애국이 무엇인지 나라의 지도자인 정치인들과 교분을 갖으며 나의 민족미술의 철학관도 내 마음에 정립이된것 같다. 

그래서 요즘 독도가 왜 이슈가 되고 있는지,  죽음의 울릉도에서 다시 태어난 국민의 한사람이자 한국의 화가로서 독도를 탐사포기하지 못하고 또 스케치하면서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나를 두고 '독도화가'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그 후에 만난 사람들과 언론들은 "왜 독도그림만 그리나?" 라고 질문도 있었다.그 질문은 지금의 부인과 왜 사느냐는 말과 같다.
내 아내가 세상에서 꼭 최고 여서가 아니라, 맺어진 천륜으로 관계를 같고 사랑하다보면 더욱 서로를 깊이 알아가고 닮은 아이를 낳아서 보살피는 것과 다를바가 없듯이 내나라 내영토를 사랑하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지극히 보편적이다.

이렇게 사랑하는이와 정이들어 해어질수 없듯이 독도 역시 나에게 있어 하늘이 중매 해 준 나만의 사랑이며 다가 갈수록 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것 같았고, 그는 나에게 옥동자 같은 그림들을 낳아주었다. 그 옥동자들은 동도 언저리에 한반도 풀밭이과, 해태바위며 최근 발견 한 천지모양 등의 작품들 이다.

 

게다가 우리 진짜 마누라도 내가 독도를 지나치게 사랑하는데 대해 질투하기 시작했다.우리는 다투듯 독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내는 자기의 전공분야인 석화,즉 암벽에 이끼와 야생화들은 아내에 있어 너무 괜찮은 소재였다. 진짜 옥동자인 아이들까지 독도스케치에 참여시켜 그림을 그리게 했다. 가족들과 함께하니 너무나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고 있어 독도는 나에 있어 생활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황금어장 이다. 


꼭 독도그림만 그려서가 아니라 나는 그 속에는 자연을 사랑하고 우리 전통수묵화만이 표현 할수있는 재미있는 실경이 숨겨져 있는 그림의 소제가 메탄 하이드레이트 처럼 무진장 감추어져 있다.

여기서 잠깐 하이드레이트를 소개한다.

 천연가스의 주성분인 메탄을 함유하고 천연가스인데 연소시 이산화탄소 발생으로 공해가 거의 일으키지 않는 천연가스이다.

러시아 일본에서 이 연구 자료를 가지고 있는 획기적인 인류의 변수를 몰고 올 에너지원이다.  미국과학재단에서 발표한 21세기 가장 중요한 연구 제27개 중의 하나이다.

수심 깊은 바다 밑에 고압 저온 하에 저장되어 있는 이것을 개발하면 아시아에서 100년 간 쓸수 있는 에너지원, 이것이 바로 독도근해에 다량 매장되어 있다. 일본이 독도를 탐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아름다운 우리강산 독도를 (권용섭 작)

 독도의 일출그림으로 2002월드컵개최 축하 퍼포먼스 하는 독도화가( 60미터 3시간 30분)

 독도관광은 포항에서부터  미국을 방문한 박승호포항시장 과 독도화가여영난

 리바카 셀리프(치안국)국장 부부 삽살개 부채그림을 들고   

 

 

 교묘한 전략 일본의 다케시마

이웃나라 일본에서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한마디만 하면 한국에서는 피켓을 들고 대사관을 찾아가 시위를 하거나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고 할복까지 하는 극성스런 독도운동단체의  동료들을 이해할만은 하다. 여기에 대응점을 찾지 못하고 궁색한 조치로 독도사랑단체에 더욱 불을 붙이는 일이 있었다. “가만히 있어라 독도를 우리 땅 이라고 자꾸 주장하는 것은  내 마누라를 두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자꾸 내마누라라고 자랑을 하면 그 사람들이 의심을 하게 된다.”노무현 대통령과 정부 담당부서는 이런 내용으로 무 대응하다가 여론에 매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그냥 점잖게 있기에는 벌써 일본이란 나라에서 내 마누라를 자기 마누라라고 탐내고, 돌려주지 않으면 간통죄로 국제사법 재판을 해보자고 달려든다. 온 동내, 온 세계로 다니며 지도에 독도가 있는 한국동해를 일본해로 표기를 해 많은 나라 사람들은 독도가 일본의 마누라로 알고 있을 만큼 홍보가 되어 있다. 이들은 극우파나 소수국민이 아니라 국가를 대표하는 총리같은 공인들의 주장이다.

일본은 국제사법재판준비를 하고 있는가하면 독도무력 침탈 군사훈련까지 한다.

그래도 한국정부는 대안이 없고  간간히 정치인들의 인기발언이 국내 언론을 도배하고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속수무책이다.  내 임기 때만 어물쩍 넘어가자는 식이 아니라 각자의 전문분야에서 책임있게 독도를 지켜야 한다.  나는 국가행정은 문외한이라 정치인들의 꿍꿍이 셈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하지만 독도가 우리 땅이기에 그곳을 편람 하여 화가로서 그림을 그리고 그 예술 활동을 통해 독도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하였던가! 그런 펜도 언론 탄압이 시작 될 때 독도의 사건들을 취재하는 기자들은 많았으나 솔직히 필요할 때 보도되는 일들은 별로 없었다.  강한 펜도 한낱 철필에 불가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 기자들을 만나보고서야 그 펜들의 답답한 심정을 알 것 같았다.

국난 때 마다 부러지는 철필보다 우리 선조들의 의병정신과도 같은 문인화구들을 보자.

내가 즐겨 쓰고 있는 전통 필기구인 모필, 바로그 '붓'이다. 서구문명에 밀려나 알 수 없이 내갈겨 화려하지 않으면 반 현대 미술이라 하여 시대에 뒤쳐진 고리타분한 그림으로 취급당하는 것이 산수화이다. 현재 한반도의 묘한 정세 속에 살아가는 화가로서 붓을 든 민족화가이고 싶은 이유도 있다. 산수풍경을 그리며 초야에 묻힌 듯 어리석은 화가라 불릴 수도 있다.

그러나 외로운 산수의 기행은 금강산 개방, 독도, 평양 등 한국 근대사의 사건들마다 내화첩이 공개되었다.

억류되는 카메라나 부러지는 펜보다 이념의 화합을 이루는데 미약하나마 유일하게 화제가 되어왔으니 우리 전통화법을 더욱 고집스레 사랑하고 싶다.

 독도와의 사랑은 깊어갔고 그 아름다운 사랑을 세계만방에 고하는 전시회로 이어져 미술인으로 당연하고 자연스런 문화적 행사, 이것이 바로 요즘 영토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실효적지배'의 한 부분이다. 

 

*오늘의 스케치모험이 솔직한 독도의 역사

 

25년간 그림을 그리며 나만의 명예를 위하여, 나만의 고집이나 창작을 한다는 핑계로 외곬인생을 달려, 남들을 돌볼 줄도 모르며 사람들에게 신세만 진 것같다.

그러나 화가도 얼마나 할 일이 많은지…. 최근 독도 그림의 연대와 출처를 두고 프랑스해군 함정과 미국 함정이 그린 그림의 선두 논란이 있어서 자국인으로서 독도 그림그리기에 열정을 갖고 화가로서의 책임을 통감하고 싶다.

그 옛날 사진기가 없어 그림으로 대신해 인물화나 기록화를 남겼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사진기로 대신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공산국가의 땅이 된 금강산이나 왠지 통제하는 독도의 현실들을 그리기에는 나의 수묵속사가 용이했던 것이다.

 또 수묵화의 재료인 한지가 묵은 서양화의 캠퍼스나 인화지보다 보존기간이 월등히 높아 많은 이들이 수묵화를 선호하며 나 또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자연 경관까지 소유욕을 가지고 내 것이라 고집하는 시대가 계속되어 서로간에 웬 통제지역이 이렇게 많은지….

 나는 하늘이 준 아름다운 섬을 종횡무진 편람하며 대자연에 담겨진 하나님의 섭리를 다시 한 번 깨달았고 그것들을 화폭에 담았다. 스케치를 다녀와 여장을 풀기 전에 집사람과 아이들을 불러 산과 하늘과 바다가 어울려 노래하는 흔적들을 보여주었고 이들을 모아서 전람회를 가지며 이웃들과 함께 자연의 신비로움과 기쁨을 나누는 일을 해왔다.

 1999년은 내 인생의 클라이맥스였고 그것을 아름답고 원 없이 장식한 것은 금강산 시리즈 전이었다.

그 높았던 이념의 철벽을 넘자 막혔던 내 가슴에서 봇물 같은 그림의 시나리오가 쏟아져 나왔다.

북한 지역의 촬영금지와 우리들의 호기심이 팽배해지며 나에게는 책임감과 그 무엇으로 무척 분주했던 한 해였다. 그렇게 또 이어진 것이 익숙해진 이름이지만 새로운 테마로 내 앞에 다가온 ‘독도’였다.

그 아름다운 독도에 아무나 갈 수 없는 독도로 국민들이 의문이 갈만한 몇 가지 사건들이 있었다.

 

 몇 해 전 독도에 선착장공사로 인해 건설부 장관이 방문하려고 배를 타는데 취소하고 돌아오라는 청와대의 통보로 주변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1999년 말 행정책임자인 경북도지사는 독도의 해경을 위로방문하려고 정부에 출장신청을 했으나 역시 고위층의 반대로 출장은 무산되었다.

최근 2005년에 와서도 경찰청장의 독도방문도 허가하지 않았다. 

예술 부분에도 마찬가지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는 한국 정부가 이를 금지곡으로 지정했고 그 가수 정광태씨는 일본 비자를 발급받지 못했다.  

 2000년 새해맞이 해돋이 행사는 각 나라의 가장 동쪽 끝 영토에서 실시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가장 동쪽 끝 영토인 독도를 팽개치고 울산 광역시의 간절곶 등대에서 새천년해돋이 채화식을 거행했다. 한반도의 일출 정동진은 이제 대표적인 한국의 일출지로 알려지고 있다.

방송국들도 독도에서 일출행사를 거행하려 했으나 번번이 무산된다.

일반인이 독도에 들어가려면 외교통상부의 허가이외 15이상의 부처에서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요청시 대부분 반려되고 있다. 이유는 천연기념물 보호 때문이라는데 사유가 많았고 언제부터 외교통상부가 천연기념물을 관리했는지 볼 맨 소리가 국민의 여론이다.

 이런 때에 일본은 독도를 일본 영토와 가장 가까운 시마네 현 은기군 5개 촌에 편입시켜 놓았으며 독도에 일본인 호적까지 등록시켜 놓았다.

게다가 일본 시마네 현 청사와 경찰청 정문 앞에는 죽도는 우리(일본) 고유 영토입니다`라고 적힌 대형 입간판과 시마네 현 곳곳에는 죽도는 우리(일본)`이라는 현수막까지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의 어느 청사에도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입간판이나 현수막은 없다

 일본 시마네 현 관청은 독도의 공시지가까지 마련해 놓았으나, 울릉군청에는 독도의 공시지가 따위는 없었다.

일본은 1996년 신 어업협정을 발효시키며 배타적 경제 수역 내에 독도를 포함시켰다.

하지만 한국의 애걸복걸로 독도는 중간수역으로 정해졌다.

한국 어선이 조업시 독도에 정박하는 것은 발포를 무릅써야 하고 독도에 있는 경찰은 일본 경찰인지 의심을 갖게 한다.

1996년 한 홍콩의 경제주간지가 아시아 기업인들 상대로 독도영유권관련 설문조사에서 말레이시아 기업인들은 66.7%, 호주 58.8%, 인도 55.6% 필리핀의 기업인들은 54.5%가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인지하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62년 한 일 국교정상화 교섭 당시 독도 폭파를 일본 측에 제안했던 사실이 확인됐다고 요미우리신문이 워싱턴발 지지 통신을 인용보도 했다.

이 신문은 최근 해금된 미 외교문서에 한국 측 수석대표였던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독도 폭파를 제안했으나 일본 측이 이를 거부했다고 밝혔다.

정부는 유엔해양법협약 관련규정에 따라 현재 독도를 EEZ를 가지지 않는 [암석]으로 해석하고 있다.(98. 11. 8, 국회대정부 질의시 국무총리 답변)

하지만 일본은 독도가 자신들의 영토이지만 한국이 불법 점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남지나해의 [남사군도]는 필리핀, 중국, 베트남, 브루나이, 대만 등 여러 나라 간의 분쟁이 일고 있는 지역이다.

몇 년 전 중국 해군이 그 중의 한 산호초에 가건물을 지었다. 그 산호초는 필리핀이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곳이다.

전임 라모스 정권 때는 별 소용도 없는 외교적 항의로만 일관했다.

그러니 중국은 끄떡도 할 리 없었다. 그러나 에스트라다가 새로운 대통령이 된 후에 필리핀 해병대를 보내서 중국이 지은 가건물을 통쾌하게도 폭파해 버렸다.

중국과의 전쟁을 각오한 행동이었다.

그러자 지레 찔린 중국은 필리핀에 쳐 들어가기는 커녕 여태 자기 영토, 영해라고 주장하던 자세를 바꾸어 공동관리라는 선까지 후퇴했다.

현재 독도에는 독도 수비대라는 명칭의 전투경찰이 있다. 국방은 군인이 지키고 치안을 담당하는 게 경찰이다. 독도는 당연히 전경대신 해병대가 지키고 있어야한다. 일본은 독도주변 영해와 영공에 일본의 군함과 선박, 항공기를 자주 출몰시키고 있다.

한국은 독도를 경찰이 담당하지만 일본은 자위대라는 군대가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독도는 암석덩어리가 아닌 한국이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엄연한 한국의 영토임을 전 세계에 널리 홍보할 필요가 있다. 일본에게는 항의 정도가 아니라 지혜롭게 쐐기를 박는 강력한 국가행정 조치를 해야 한다. 어민들은  마음껏 조업을 하고 국민들은 언제나 즐겨 찾을 수 있는 영토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더욱 가야만했고 그려서 자랑할 만한 소제라고 생각이 들었다.

 

 독도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면 한국 실효지배(시카고전)

 

 

 

 

 

 

 엄지바위는 독도가최고! 한국이최고!라고 외치는 듯

 

 *문제의 독도가 나를 부른다.

 

 신앙인들이 보기에는 짓궂은 기도라고 하겠지만 나는 소원했다.

“기적으로 황당한 듯했던 금강산의 방북 길을 나의 기도로 열어 주셨다면 이번에 한번만 더 독도기행의 문을 열어 주시옵소서. 저 그곳으로 가야만 난 하나님을 믿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머리끝이 ?빗 서는 일이 생겼다.

 집사람과 함께 내가 삽화를 그려준 소암선생의 출판 기념회에 갔다.

 남의 출판 기념회에서 나로서는 쑥스러울 만큼  플래카드에 “금강산화가 권용섭화백 삽화”전 이라는 문구가 넣어 당시에는 금강산 개방 이슈와 나와는 땔 수 없는 인기가 여실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근엄한 행사 순서의 분위기를 깨는 한 여인의 목소리가 있었다.

“자기! 자기 이것 좀 봐요.”

평소에는 웬만해서 소리치지 않아 나는 곰띠 아니냐고 할 정도로 조용한 내 아내의 호들갑 떤 목소리였다.

 나는 반대로 소리를 낮추며 팔꿈치로 집사람을 꾹꾹 치며 집사람의 행동을 자제시켰다.

“뭐~얼 지금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는데---.

분위기와 관계없이 그래도 내미는 일간지신문이였다. 표지 탑 기사가 눈에 띄었다.

4 1일부터 독도 관광개방” 기사는 그다지 크지는 않았지만 내 눈에는 대문짝 만하게 보였다.

이 기사가 사실이라면 나의 기도는 정확히 17일 만에 응답된 것이다.

나는 믿어지지 않아 다른 신문을 확인했다. 대구지역 두 개의 유력 일간지에 동시에 발표 된 것이다.

 

*독도유람선은 취소되었지만

 

이렇듯 천연계를 대하며 그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나는 참으로 신묘한 영육간의 경험을 하게 된다.

 2000 4 1일 포항으로 가기 위해 경산자택에서 6시 첫 버스를 탔다. 여느 때 같으면 버스에서도 주위를 스케치하겠지만 신비의 섬 독도라는 환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고 그곳에 가면 어떤 영감과 구도들이 쏟아질지 생각하며 병정들이 비상대기하며 장비를 매만지듯 필기구와 스케치북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일 년 전 금강산기행 때와 똑같은 아니 더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포항 버스 정류장에서 105번 시내버스를 탔다.

등교시간이라 학생들이 빽빽하게 버스 안을 채웠고 거리에는 4.13 국회위원선거 운동원의 홍보인사가 요란한 가운데 활기 넘치는 포항의 아침을 가르며 15분 만에 선착장에 도착했다.

 여객선 터미널에 벌써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 있었고 울릉도로 가는 배표는 매진되었는지 매표소 앞에는 북새통을 이루어 뭔가 따지며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늘부터 독도유람선이 취항한다고 언론을 통해 보도된 적이 있어서 그런지 표가 바닥이 났나보다. 나 역시 그 기사에 한 가닥의 희망을 걸고 반신반의로 떠나온 것이지만 이번만큼은 꼭 성사시킬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있었다. 나는 조급한 마음으로 상황을 살피며 인파를 비집고 매표소로 갔다.

미국을 찾은 포항 상공회의소장, 시장

 

그런데 이상하게 독도로 가는 배편이 없다는 것이다.

바쁜 직원들은 신문기사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황당했다. 

실낱같은 연줄로 울릉도행 표를 얻어냈으나 독도행 여부는 미궁으로 빠지고 일단 울릉도에서 결정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잠시 혼잡스러웠던 포항의 선착장의 물살을 밀치며 떠난 썬플라워호는 울릉도를 향해 217킬로의 항해가 시작했다.

 

 3시간이 걸려 울릉도 도동항에 도착하였고 모든 승객과 함께 하선을 했다. 점심식사를 하며 경산에서 울릉경찰서로 전근 온 지 2년 되는 김 종두 경관(사진작가)을 만나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울릉도~독도를 출항 한다던 유람선 동해호는 전면 취소가 되었고, 어제는 폭풍주의보로 인해 독도경비용 함대까지 되돌아 왔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도 나에게는 실망이 없었다. 금방 우리를 태워 온 썬플라워호가 갑자기 독도를 간다는 것이었다.

초대형 쾌속 카페리 여객선으로 그것도 반시간이나 단축하여 다녀온다니. 나의 여행길에 항상 동행하는 행운의 천사를 또 한 번 경험하며 감사하는 순간이었다. 그날 내가 탄 독도 행  썬플라워호는 이웃마을을 가듯 조용히 독도로 순항했다.

 

“아! 이리하여 나는 독도로 가는구나. 나의 천사 나의 선생은 각 도처의 천연계속에 에 있구나. 천연계와 나를 이어주는 천사 같은 모필이  나를 미지와 이상의 세계로 인도 하는구나. 천연계를 찾을 때 마다 나의 일정을 퍼즐처럼 맞추어 주시는 나의 하나님을 의지하며 외롭다는 독도, 괴롭다는 독도에 겸허한 마음으로 나는 독도에 간다.”

 

*옛날 옛적부터 독도는

 

우리나라 동쪽 끝에 위치한 독도는 동도, 서도로 나누어져 80개의 애기 섬들을 거느리고 있다. 금방이라도 거친 파도에 씻겨갈 듯 힘겹게 버텨온 외로운 한반도의 막내마을이다. 촛대바위, 숫돌바위, 권총바위, 보찰바위, 삼형제굴, 천장굴, 독립문바위, 동기바위들의 이름들을 가진 기암괴석들이 가족처럼 옹기종기모여 태초의 신비를 보여주고 있다.

 옛날 성종실록에 의하면 동해 가운데 누구도 가보지 못한 수수께끼의 섬이 있다며 영안도 관찰사는 수차례 사람을 보내어 이 섬을 찾도록 했으나 한 번도 발견하지 못하였고 후임 관찰사 이극균이 보낸, 영흥사람인 김자주 일행 12명이 탐사하여 삼봉을 발견하고 왔다고 한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섬 북쪽에 삼석이 서 있고 다음에 소도가 있는데 바닷물이 서로 유통하고 섬 사이에 인형과 같은 것이 300M쯤 나란히 서있으므로 겁이나 섬에 가지 못하고 도형을 그려왔다는 이야기가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김자주 일행이 본 삼봉도 모형은 바로 지금의 독도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비록 그때의 김자주의 모험에 비할 수 없는 정보와 호화장비의 여객선에 의지한 몸이지만 잠시 그 옛날로 돌아가 신비의 섬을 발견한 기분으로 뱃전으로 나갔다. 독도가 보이길 기대한지 1시간 만에 가물거리는 한 점의 바위섬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드디어 우리 땅 독도를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 얼마나 애타는 만남인가! 주위엔 갈매기 떼들이 나를 반기듯 끼룩끼룩 노래하며 우리 배를 에워싸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황홀경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그런, 그것도 잠시뿐, 내 가슴엔 예리한 칼이 스치듯이 간담이 서늘해 왔다.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 땅 독도를 두고 일본의 망령된 욕심대로 지나치리만큼 급속히 진전이 되어가고 신한일 어업협정 중간수역에 독도가 포함되어 있어 시간이 갈수록 독도를 탐내는 일본에 명분을 준 것이 아닐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일본인들이 독도로 호적이전을 했다는데 , 나는 화첩으로 아예 등기이전(?)을 시작했다.

억지 호적이전은 사실상 억지 행정도구요 상징적인 것이라면 현지에 여행하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실효적 지배라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더욱 애정담긴 마음으로 독도를 그렸다 

 

 최근 일본 북해도 삿포로 지방에서는 독도에 일본어민들을 위해 의사들을 파견하라는 시위가 연이어 벌어지고 있다.

 그들은 벌써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것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어놓았고 시마네 현에서는 독도주변에 광업권을 허가하고 세금까지 징수하며 독도로 본적을 옮긴 일본인이 7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현재는 호적만 옮겼지만, 다음 수순은 분명 일본어민들의 독도상륙일 것이라고 뗏목탐사대 세미나에 가서 들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 CIA, 북태평양조약기구 (NATO) 등 거의 모든 국제기구가 세계지도에 독도는 일본 영토로 표기되어있고, 대다수 외국인들도 그렇게 알고 있을 만큼 일본의 주장과 홍보 활동은 위험수위를 넘고 있다.

 

*잊어지지 않는 민족의 분쟁국 일본

 몇 해 전 77세로  생을 마감하신 아버지 생각에 잠긴다.

 아버지는 태평양 전쟁시 일본군에 징용되어 그 참혹했던 이야기들을 말로다 못하시고 [태평양전쟁]이란 기록장과 하와이 포로수용소에서 만든 회보를 내게 주시며 책으로 만들어보면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은 미국으로 전황이 기울어지자 한국 젊은이들을 강제로 징용하여 남자는 죽창부대로 미국의 신무기에 대항케 했다. 테레핀을 만들어 비행기 연료를 쓰기위해 솔가지공출, 무기를 만들기 위한 쇠뭉치공출 뿐 아니라 처녀공출을 강요하여 꿈 많은 소녀들을 위안부로 전지에 투입시켜 짐승처럼 부려먹었던 이야기들이다.

 

 이같은 남양군도 사지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아 하와이 포로수용소 생활까지 아버님의 기록들을 낱낱이 읽으며 삽화를 그렸던 나는 일본에 대한 남다른 감정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기록에는 죽음의 바다 이야기가 나온다. 내 몸에는 전율이 흘렀다. 지금도 내 눈앞에 일본의 하얀 순시선이 아무 이유 없이 독도를 배회하고 있다. 폭풍이나 태풍으로 인해 3~4미터 파도에 돌아가지 않은 고성능 경비정은 독도 경비대원들의 신경을 자극하여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다고 한다.

독도를 사랑하며 지키자는 민간단체와 현지에 상주하는 독도수비대 등 일본으로부터 독도를 애써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이 아름다운 독도를 몸으로 사랑하는 대열에 나도 한 몫하고 싶은 생각이 더욱 북받친다. 

 

 어느새 내 손에는 모필이 쥐어지고 수묵으로 우리 땅 독도를 내 화첩으로 기암과 풀 한 포기까지 사생하며 외로운 독도를 수묵의 붓으로 보듬고 일깨운다.

뱃전으로 날려 온 파도와 물보라가 온몸을 적셨다.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독도 구석구석을 담았으니 두툼해진 화첩에 독도사랑을 담아 돌아오는 나도 모르게 휘파람이 흥얼거렸다. 독도가 가물거리며 보이지 않을 때 쯤 나도 모르게 화첩 표지에 이렇게 써넣었다. “온 몸으로 독도를 사랑하는 민족만이 내 땅이라 주장 할 수 있다.

 

*나의 일정을 퍼즐같이 짜 맞추는 천사가

 

 그림 기행을 떠날 때마다 풍요로운 마음으로 준비하지만 막상 일정을 포기하기도 하고 기상이 좋지 않는 어떤 때는 며칠씩 발이 묶여 있어야 할 때도 있는 울릉도는 나에게 특별한 곳으로 여겨진다.

 오늘도 회항해 배가 들어오다 고장이 났다.

 포항에서 들어온 여객선이었는데 오늘은 도동 앞 바다 가운데서 배 후미가 물속에 잠겨 퍼덕이고 있는 것이다.

 오후 4시경에는 육지로 나아가기로 예약한 배인데다 그 배에는 현역 의원을 포함한 국회의원 후보 합동 연설단이 타고 있었다.

 그들의 일정도 나 못지않게 빠듯하게 시간이 짜여졌을 텐데, 선거를 열흘 앞두었으니, 5분도 쪼개어 쓰는 사람들이었다.

 터미널에서는 오늘 수리될 가능성이 없으니 내일이 되어야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를 안내하던 전 씨는 호텔방을 예약하겠다며 하루 더 쉬었다가 가란다.

 내가 바쁘다고 난처해했더니 대안으로 묵호로 가는 배를 타고 대구로 돌아가는 방법을 제시했다.

 나는 좀 더 두고 보자며 일정은 하늘에 맞기고 며 20년 전 사고지점으로 가서 고인들을 생각하며 몇 장의 그림이나 더 그리기로 작정하고 부둣가 절벽 가까이 갔다. 여전히 고장 난 배는 진척이 없는 것 같았다.

 너무 여유 없던 일정이라 못다 한 일들을 하려고 우선 울릉 군청도 찾아 갔다. 일요일이었는데 당직이던 직원은 울릉도에 대해 꼼꼼히 자료도 챙겨주었다.

 

  25년 전 사고당시에 민박을 했던 내가 찾던 집도 찾아보았다. 그 집의 장남은 사진작가 가 되어 있는 이명수 선생도 만나 볼 수 있었다.

약속은 했지만 못 만났던 김 부군수도 연설단을 배웅나와 부둣가에서 만나게 되었다.

고장 난 여객선 때문에 못다 본 일을 모두 챙긴 셈이라 나에겐 요행이었다.

 그나저나 합동 연설단들은 한시바삐 돌아가야 되기에 어떤 정당에서는 헬기까지 요청한다고 야단들이었다.

 나중 일은 나중에 해가 지면 염려할 일이라 생각하고 나는 다시 도동의 우측 벼랑으로 스케치를 다녀왔더니 고장 난 배가 수리되어 30분 후면 배가 포항으로 간다는 것이다.

 전화위복이였다. 난 늘상 이렇게 복이 많았다.

 또 출항 직전에 여객선 관계자 한 분이 내 표를 보자고 하더니 보통에서 우등표로 바꾸어 주는 것이었다.

 해안의 절경이 훤히 보이는 전망대를 겸비한 VIP석이었다.

 아름다운 울릉도를 보이지 않을 때까지 또 그림을 그렸다. 이틀간 총 50여점의 그림을 그렸나보다. 더러는 바빠서 대충 하다만 풍경들을 내 가슴에서 사라지기 전에 보충을 하고 수정을 하는데 현장의 감동들을 자질구래할 정도로 적어 놓기도 하며 지루한 것 같은 해로를 거뜬히 달려와 배는 포항에 도착한다.

 

 예정보다 시간이 반이나 늦게 도착했다. 집에 돌아왔더니 기다리던 최 기자가 말했다.

 ? 오늘 울릉도에서 그 배 고장 나서 못 돌아온다고 뉴스에 나오던데 권 샘 어떻게 왔지?”

 나는 그 신나는 간증들을 오늘 이야기 할 수 없다며 “하늘에 천사가 동행했다”는 한마디로 일축하고 그동안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잠을 청했다.

 

 

*언제까지 냄비근성 행사를 할 것인가

 

 2001년 여름밤 서울 정동 극장에서 한미사령관을 비롯하여 미군 고위 장교들과 그 가족들, 한국국제교류 재단관계자들이 참관한 전통예술 공연이 열렸다. 3개 국어 자막 중 일본어는 삭제하라는 관객의 항의로 공연에 찬물을 끼얹은 일이 생겼다. 연일 뉴스에서 독도문제와 역사왜곡 등이 보도되면서 민감한 반일감정에 의해서였다. 2차대전 직전 독일과 미국은 극도로 사이가 나빴지만 미국의 철강회사는 개전 직전까지 독일에 철강을 열심히 팔아 국익을 챙겼다고 한다. 2002월드컵 한일 공동주최를 계기로 우호를 회복할 절호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반일감정은 시들지 않았고 일본과 문화교류를 시도한 각지 자체행사들이 줄줄이 취소되었다. 그러나 일본오키나와 문화 관계자들은 오히려 의연하게 “몇 달만 기다려 봅시다.” 라고 한 적이 있다. 이는 파르르 끓어오르는 한국의 냄비근성을 간파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내가 체험한 또 다른 이면은 아이러니했다. 8.15기념행사로 예술의 중심지인 인사동 거리에서 대형 화폭을 펼치고 30 미터 가량으로 “권용섭의 독도그림 수묵속사 시연회”를 독도단체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현지에서 완성된 그림은 뉴욕에서 전시회를 갖기로 계획하고 있었으나 반대를 표기하는 단체가 있었다. 인사동 거리의 00 번영회였다. 이유는 일본 관광객이 찾아 매상을 올리는 그곳에서 독도 그림을 그리면 일본인들을 자극한다는 내용으로 당당하게 서면통보를 해왔다. 나는 애국화가도 못되지만 자국민에게 폐를 끼쳐 가면서까지 하는 예술 활동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인사동 행사는 취소하고 계획대로 뉴욕 현지에 가서 퍼포먼스까지 하기로 했다. 미국으로 떠나는 기내에서 아무리 눈을 붙여도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몇 천 원짜리 액세서리를 팔기 위해서라면 끓던 반일감정의 냄비마저도 순식간에 엎어버릴 수 있는 근성이 서글펐다.

 

       *행복한 가정, 독도테마로 10 여회 전시회

 

 2001 3 5일 서울에서 스님과 신부, 장로회, 민노총 등의 성원으로 수백 명이 독도를 찾는 날이다. 우리부부는 독도에서 현장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초청을 받았다. 그날따라 동해의 파도가 높아 우리가 타고 갈 썬 플라워는 포항에서도 꼼짝도 못하고 묶여있었다. 선착장에서 독도를 지키자는 구호만 외치며 그날 행사를 마무리 지었다. 학교에 결근까지 한 집사람에게는 못내 긴 아쉬움으로 표출되었다. 그 모습을 본 두 딸이 한결같이 말했다.

“엄마 또 다시 가면 안 돼? 우리가 기도해 볼까?

“그래 우리 가족만이라도 가 보자.”며 나는 썬플라워회사 측과 섭외를 했다. 이번에는 부부만 아니라 두 딸까지 함께 가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아들의 환호에 나는 감사의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영육 간에 궁핍이 올 때마다 두 아이들로 하늘의 기별을 들어왔기 때문이다. 몇 해 전 두 딸은 번갈아 가며 교통사고를 당했다. 큰딸은 당일, 둘째딸은 3일 만에 멀쩡하게 퇴원하여 경찰과 주위사람들을 의아하게 했던 적이 있었다.

 

2001 4 7일 우리가족과 이웃집 수민이네까지 덤으로 독도로 갔다. 신비의 섬으로 우리 일행을 데려다 주는 썬플라워호가 나에게는 두 번이나 손오공의 구름같이 신기한 독도행 교통수단이었다. 또 이번 독도기행은 큰딸 청실(13)에게는 필리핀으로 공부하러 가는 고별의 가족 여행이기에 더욱 심금을 울리는 추억의 장이 되었다.

그 행사는 덕헌갤러리 개관기념전으로 이어져 동아갤러리, 경북대학, 필리핀, 미국 등을 순회하는 여행으로 계속되었다. 사람들이 참으로 부러워하며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가정이라는데 나는 부인하고 싶지도 않다. 올 한해만 해도 그렇다, 독도란 테마로 200여점의 그림을 그려서 국내외 10여회의 전람회를 가졌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필리핀과 미국을 여행하며 부부전과 가족전을 추진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학교, 호텔 관공서 등 가는 곳마다 갤러리가 비워있거나 신설되어 있었고 각 경찰서들은 예산을 만들어 포돌이란 이름으로 갤러리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IMF불황과 테러가 극에 달한 미국 전시는 건강 세미나까지 곁들어 가며 성공으로 마치고 돌아오니 “권선생, 전용 비행기 있어요? 도대체 어떻게...” 미술계 찬사와 언론들의 열광까지 나는 즐거운 비명이라 부인하고 싶지 않다. 내 모든 행사를 하나님께 맡기는 하는 결과이었기 때문이다.

 조건이 있었다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족한 인간임을 시인할 때만 이루어졌다는데 있었다. 23차 독도탐사는 계속되었다.

  

해태바위이야기, 독도를 지키는 상징이다.

최근 완공된 국방부 신청사 앞 연병장 사열대에는 좌우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안다는 상상의 동물인 ‘해태’ 석상 두 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해태라는 전설의 짐승은 뿔을 하나 가진 대단한 영물로 사람의 시비곡직을 판단하는 신령스런 재주가 있어 사람을 도와 현명한 일을 많이 했다는 말이 있다. 만일 잘못 된 사람이 있으면 그 뿔로 받아 넘기는 정의의 동물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해태라는 임의의 괴물은 있는 위치에서 지킨다는 뜻으로 전해져 오고있다. 독도는 군사적 위치와 지하자원과 황금 어장을 가지고 있어 외세로부터 탐심을 불러오게 하는 만큼 신은 이곳에 해태을 두어 독도를 지키게 했나보다. 삼형제 굴은 보는 방향에 따라 사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해태의 모양과도 흡사하여 묘사해 봤다.

 

독도에는 백두산 천지와 같은 모양의 바위도‥

독도에도 백두산 천지와 같은 모양의 바위가 있다. 기암들이 눕고 세워져 있어 절경들을 시각에 따라 즐겨 그릴 수 있는 소재의 백미가 있다.

 당시 나는 어렵게 입도한 독도에 배를 대자마자 섬 청소용으로 가지고 간 고무보트를 타고 암초 탐사에 나섰다. 동도 선착장에서 눈앞에 보이는 삼형제바위, 일명 사자바위라 부르기도 하는 사자의 앞발사이와 같은 굴을 통과했다. 화산 분화구로 형성된 전장굴은 태고의 신비를 보여주고 있었다.

 

 독도에있는 바위(2003년작) 찾아보시기 바람

독도를 청소하던 고무보트를 빌려타고 그림그리다가  발견한 천지인데 너무 신기하다.  아직 아무도 못 찾았다고들 한다.

이 때 경북 경찰청 (김상봉청장)새로운 헬리콥터 도입에 조종사 경관 배씨가 내게는 자랑하길래 나도 함께 가자고 했다 하지만 출입기자들과 어떤 여인들을 태워서 독도순시를 했다. 몇 일 뒤 신문에 '경찰헬기로 여자들 태워 독도 유람한 경북 청장해임' 기사가 나왔다. 

 하지만 나는 쪽배를 타고 독도 구석구석을 탐사스케치 하며 발견 한 것이다.

경찰청헬기를 얻어타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면 보이지 않는 낮은 곳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소재이다.

 백두산천지 실경 수묵속사 권용섭(1995작)

 

화산암은 밤새 파도로 인해 뒤집어 쓴 듯한 바닷물을 한 방울씩 떨어뜨려 화첩을 적셨다. 동해의 거친 파도사이에 이렇게도 한가로운 굴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암초 주변을 살펴보니 아름다움에 대한 도취는 잠시 뿐이었다. 민족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독도는 분뇨, 기름투성이에 버려진 의류와 폐자재까지 쌓여 사랑스런 국토의 막내라고 하기에는 생색이 말이 아니었다. 정부가 환경 보호를 한다면서 민간인의 출입만 통제한 것에 대한 의혹만 가지게 되었다. 일행은 나를 작은 바위에 내려주고 그림이나 그리라며 보트에 실을 수 있는 만큼 오물을 싣고 나가 소각을 한다.

"온몸으로 독도를 사랑하는 민족만이 내 땅이라 주장할 수 있다!"

이곳의 경비를 담당하는 경북 경찰청은 44명의 병력을 교대로 상주하며 근무한다.

이들을 위해 막사 남방, 정수, 헬기장 관리 등 시설관리에 반입되는 유류만 해도 연간 8만 리터에 이른다고 하니 잔류처리를 보아 짐작이 가기도 했다. 아무튼 버리고 치우며 사랑하는 것이 곧 실효적 지배의 과정이며, 생활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내 할 일을 위해 작은 섬들을 헤아리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탐사중 동서도 사이에 물이 빠지고 난 뒤 나를 흥분케 하는 소재를 발견했다. 백두산 천지와 같은 바위였다.

한국의 산천을 편람하며 그림을 그릴 때 자주 동행하는 친구가 있다면 수석인이다.

 

그 수석광들이 하던 말이 생각난다. "그림을 그려야만 예술가인가? 나도 예술가야". 수석인 에게는 '발견의 미'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같은 돌밭에 가서도 누가 먼저 보고 줍느냐하는 탐석의 묘미는 주워 본 사람만의 기쁨이다.

 사물을 보는 시각을 달리해 보면 독도에서 천지 모양을 보게 될 뿐만 아니라 동도에서는 한반도 모양의 풀밭을 발견할 수 있다. 나에게 있어서는 노다지 그림소재 광산을 발견한 샘이었다. 정말로 실감나는 발견의 미 체험현장이었다.

천지모양의 독도그림은 2005LA전에서 처음으로 발표한 만큼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이 신묘한 비경을 찾아왔다.

 

국토사랑, 독도사랑은 가족사랑에서

 

어느 가정도 365일 평탄한 가정은 없다.

사랑하는 가족들끼리도 그러한데 하물며 나라와 나라사이가 평화를 유지하기란 얼마나 힘이 드는지 인류 역사를 보면 답이 나온다. 나라가 위급하면 그 비극은 고스란히 양민들에게 돌아온다.

인류의 안위는 곧 가정의 행복에서 온다. 그런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우리 집 가훈도 “웃으며 준비하자” 로 정하고 약속장소보다 항상 10분 일찍, 행사를 조금씩만 일찍 즐기며 준비하자는 것을 권장한다. 우리가족이 독도를 찾아 그림을 그리고 지구촌을 돌며 전시하는 것은 내 조국의 자랑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시작은 내 가정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도전과 모험에는 늘 불안과 위험이 따르고 그때마다 무기력 속에 의지할 곳은 하늘 밖에 없었다. 실로 그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심을 체험한 독도 가족스케치와 지구촌 여행이다. 우리의 전시여행들이 가족애처럼 아름다움으로 녹이고 한일간에 우호와 한미간에 평화로운 문화교류의 장이 되었으면 한다.

전시는 독도현장에서 도와주신 대아항운 썬플라호, 한국 경찰청과 경북도청, 미국 전시를 마련해준 많은 관계자들의 노고로 이루어 졌다. 아직 서투른 이국생활에 용기와 격려를 먹으며 더욱 굳세게 한국인의 긍지를 굽히지 않을 것이다. 더 좋은 교분으로 조국과 인류사랑에 주력을 다해 갈 것을 다짐해 본다.

-독도화가 가족일동-

 

 


독도에 살고 있는 현지 삽살개들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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