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無에로의 접근. 마이스터 에카르트
I. 들어가는 말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독일의 도미니칸 영성 스승들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위대한 사람이었다. 도미니꼬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에 근거한 그의 영성적인 메시지들은 7백 년 전에 그러했듯이 오늘날에도 효과적으로 우리의 영적 굶주림에 응답하고 있다. 신비적이고도 중세적인 스승이었던 에카르트는 한편 스콜라 신학에 집중하던 1300 년대의 학계에서 가르치는 일에 익숙했었다. 그러나 에카르트가 영성 생활의 지도자로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설교를 통해서였다. 그는 쾰른과 파리 대학의 “敎授” (Maister)로서 존경을 받고 있었으면서도, 관상 수녀들과 평신도들에게 한 說敎 덕분에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14세기 라인란트에서 번성했고 스위스,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에서 널리 퍼졌던 신비주의의 풍부한 흐름에 연결하게 된다. 그는 ‘가르치는 스승 (lese maister)’ 이 아니라, ‘삶의 스승 (lebenmaister)’이었다
에카르트의 가르침은 그의 사후 여러 세기 동안 계속해서 큰 影響을 미쳤다. 이는 그의 직계 제자들인 요한네스 타울러, 헨리코 수소, 얀 판 뤼스부룩의 가르침과 저술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젊은 마르틴 루터도 타울러의 저술들을 통해서 영감을 받았고, 19세기와 20세기에는, 철학자 셸링, 헤겔, 하이데거가 자신들의 사상이 이 독일 스승에게서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냐시오 로욜라, 토마스 머튼, 매튜 폭스, 그리고 선(禪) 학자인 D.T. 스즈키 등이 역시 에카르트에게 매혹되었다.
또한 유태계 독일태생으로 미국의 저명한 사회 심리학자였던 에리히 프롬도 자신의 여러 저서에서 에카르트를 평하기를 그야말로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중세의 대표적인 신비가로 묘사하였다. 분명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풍부한 지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재능을 학문과 연구, 또는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설교, 피정지도, 사목자로서 봉사, 그리고 원장, 관구장, 수련장으로서의 역할을 더 우선시했다.
그는 영감을 받은 심오하고 동정심 많은 영성생활의 스승으로서 現代를 사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말하고 있다. 福音을 설교하고자 하는 그의 熱情, 祈禱에 대한 그의 강조, 하느님의 단순성과 우리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그분의 생명에 대한 그의 서술, 그리고 어려운 시기를 살기 위한 그의 권고들은, 오늘날의 관심사와 유사한 것으로서 오늘의 영적 필요에 신선하게 응답하고 있다.
무엇보다 한 사람의 사상은 그의 생애와 무관하지 않기에 우선 “에카르트의 생애와 저서”에 대해서 살펴보고, 그다음으로 마이스터 에카르트 신비사상의 핵심인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Abgeschiedenheit)”과 관련한 그의 영성을 정리하고자 한다. 그는 당시의 문제로 부각되던 ‘가난(淸貧, die Armut)’에서 출발하여 모든 사물과 자기 자신마저도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 ”(Abgeschiedenheit)과 “영혼 속에서의 神의 탄생” ( Gottesgeburt im Seelengrund), 그리고 “人間과 神이 하나가 된다는 것” (die Einheit mit Gott)에 대해 말하고 있다.
II 시대상황과 생애와 저서
1. 시대상황
에카르트는 극적인 변화와 혁명의 문턱에서 기울어가고 있던 문화 속에 살았다. 14세 기 유럽은 아직도 봉건주의 권력 구조에 기초하고 있었고 위대한 문화적 발전을 자랑할 수 있었지만, 많은 불안과 폭력, 불의와 위험이 존재했었다. 마치 현대와 비견될 만큼 종교계에도 불안이 퍼져 있었는데, 하나의 전체로 통일되어 있던 그리스도교 세계가 갑자기 주변 집단들로부터 위협과 공격을 받게 되면서, 특히 평신도들 사이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공식적인 종교권력은 이교와 이단에 대한 전쟁으로, 종교재판소의 설립으로, 사상과 신앙의 검열로 이에 대응했다. 생겨난 수많은 집단은 흔히 이단으로 의심 받았지만, 이 형제 자매들 가운데 대다수는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가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목적 배려의 부재, 성직자들의 소심함, 그리고 로마 또는 아비뇽으로부터의 단죄 위험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내적이고 개인적인 하느님 현존의 체험을 중심으로 하는 일반적인 신심 생활을 하도록 했다. 이런 집단들은 특히 여성에게 쉽게 이단이라는 비난을 퍼붓거나 공적으로 그들을 박해로 내모는 엄격한 문화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사목적 배경이 되어, 그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었다.
라인란트 계곡은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이 널리 퍼지고 번성했던 곳들 가운데 하나였고, 마침내는 그 곳에서 라인란트 신비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이런 집단들과 관계를 가졌는데, 그 중에는 베긴회라고 불린 평신도 여성의 집단도 있었다. 베긴회의 가장 유명한 대표자는 마그데부르크의 메히틸다였는데, 그 영성은 성체에 대한 신심, 청빈의 실천, 그리고 강한 종교적 체험을 포함하고 있었다.
학자들은, 베긴회의 청빈에 대한 영성이 하느님께로 가는 길로서의 이탈에 관한 에카르트의 독특한 가르침의 발전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도 한다. 베긴회의 영향과 독일에서 여성들이 지니고 있었던 신심의 영향을 통해서 청빈사상은 그 원래의 종교적 의미로부터 확장되어 내면을 향한 추구와 영적 청빈을 포함하게 되었고, 이것이 에카르트의 주된 주제가 되었다.
베긴회는 신비체험에 관한 문학의 새로운 원천이 되었고, 그 회원들은 자국어로 글을 쓴 첫 사람들에 속하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도미니꼬회 관상 수녀들과 함께 에카르트의 만년에 그의 주된 청중이 되었고, 아마도 그의 설교들 중 많은 부분을 손으로 옮겨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열심한 종교적인 여성들이 그의 주제들과 그의 표현 방식에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2. 마이스터 에카르트의 생애와 저서
1)수도원장, 파리 대학 교수, 관구장 시기(1260 - 1311)
에카르트는 1260년경 튀린겐(Thuringen) 지방의 고타(Gotha) 근처의 호흐하임 (Hohheim)에서 기사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호흐하임 출신이라는 사실은 1303년 8월 22일 아우구스티누스 축일에 파리에서 대학 강사로서 그가 행한 “온갖 보석으로 장식된 순금 그릇” (집회서 50,9)이라는 설교의 끝에 “호흐하임 출신 마이스터 에카르트의 입을 통해서 설교된 바를 기록했다.”라고 된 것으로 확인된다.
그가 1260년에 태어났다는 것은 정확한 것이 아니고 추정해 낸 것이다. 그는 어렸을 때 독일 북부의 에어푸르트에 있는 도미니꼬회 수도원(Dominikanerkloster in Erfurt)에 입회했는데, 그 당시 도미니꼬회에 정상적으로 입회할 수 있는 나이가 제도적으로 15세였기 때문이다. 에카르트는 에어푸르트 수도원에 입회한 후 거기에서 수련기를 보내고, 아마도 그 후 쾰른의 수도원 대학에서 공부하고 이어서 파리의 대학에서 공부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수도원은 에카르트의 가르치고 지도하는 비상한 능력을 이미 일찍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에카르트는 이미 이 두 가지 능력을 동시에 가졌고, 이것은 그의 첫 독일어 작품인 ‘강화(Reden der Unterweisung)’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에서 그는 “다음 글은 튜린겐의 관구장 대리, 에어푸르트의 수도원장, 설교 수도회의 수도자 에카르트가 자신의 영적 자녀들을 위해 베풀었던 강화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강화’가 언제 작성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아마도 그것은 그가 쾰른에서의 수도원 대학(Studium generale)을 마친 후인 13세기 말경에 쓴 것 같다. 왜냐하면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강화’가 작성될 당시 튜린겐의 관구장 대리와 에어푸르트의 수도원장을 겸직하고 있었는데, 1298년에 개최된 도미니꼬회 총회에서 수도원장직과 관구장 대리직을 겸직하는 것을 금하는 규정을 결정했기 때문에 ‘강화’는 적어도 1298년 이전에 작성된 것이다.
또한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1294년 4월 18일, 부활절 파리 대학 신학부의 명제집 강사(Lector sententiarum)로서 부활절 설교를 맡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에, 그가 두 직책을 겸직했던 시기는 적어도 1294년 4월 이후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따라서 강화가 쓰인 정확한 연대는 1294년 이후 그리고 1298년 이전이다. 다시 말해서, 파리 대학에서 명제집을 강의하던 젊은 에카르트는 에어푸르트 수도원장의 직책을 맡게 되었고, 그래서 수도원 지원자들의 영성지도를 위해 독일어로 정규적인 영성강화를 했던 것이고, 이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 독일어로 된 첫 작품인 ‘강화(Reden der Unterweisung)’이다.
이것은 총 23개의 강화로 되어 있는데, 수도서원 중의 하나인 “순종”(Gehorsam)에 대한 강화로 시작하여 에카르트의 신비사상의 핵심 주제인 “마음이 비어 있다는 것” (Gelassenheit)과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 (die Abgeschie denheit) 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하나의 “청년기의 저서”로 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 속에는 후에 전개시킬 에카르트의 “신비사상”의 요소가 이미 엿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1300년 에카르트는 당시 서양의 영적인 중심지인 파리 대학에 있는 쌩 자크(St. Jaques) 수도원 대학으로 파견되었고, 2년 후인 1302년 그는 “마이스터”(Meister, 박사학위 - 오늘날의 교수 자격 학위) 학위를 획득한다. 이때부터 그는 “마이스터 에카르트”로 불리기 시작한다. 1303년 에카르트는 파리를 떠나 왔고, 그 후 에어푸르트의 수도원 총회는 그를 새로 생긴 삭소니아 관구의 초대 관구장으로 임명했다.
4년 후 (1307년)에 그에게 또 하나의 직무가 주어졌는데, 그것은 그동안 공석이던 보헤미아 관구(Provinz Bohemia)의 총장 서리(Generalvikar)로서의 직무, 즉 보헤미아 관구의 부패한 수도원들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엑하르트는 관구장 서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 ‘神的 慰勞의書 (Das Buch der gottlichen Trostung)’를 저술했다. 이것은 1308년 합스부르크 가(家)의 왕 알브레히트 I세의 암살로 슬퍼하고 있는 그의 딸 아녜스를 위해서 작성된 것이다.
그리고 루가 복음 19장 12절, 즉 “어떤 고귀한 사람이 먼 지방으로 가서 나라를 받고 돌아왔다.”라는 내용에 대한 설교인 ‘고귀한 사람(Vom edlen Menschen)’ 역시 이 저서에 속한 것이다. 에카르트가 ‘神的 慰勞의 書’와 ‘고귀한 사람’을 저술한 동기는, 왕후 아녜스의 고통과 시련을 위로하려 했다기보다는 고통과 시련을 일반적 문제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에카르트는 ‘慰勞의 書’를 세 부분으로 다루고 있다. 첫째 부분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참으로 그리고 온전히 위로 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 둘째 부분은 그에 대한 약 서른 개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셋째 부분은 현명한 사람들이 고통 중에서 남긴 말과 행위를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다. ‘慰勞의 書’가 고통과 시련의 문제를 고차원적인 그리고 추상적인 이론의 영역에서 시작하여 구체적인 실천의 영역으로 내려오는 하강의 길을 걷는 데 비해서, "고귀한 사람"은 경험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에서 시작하여 신적인 것과 하나가 되는 상승의 길을 가고 있다.
1310년 남부 독일의 토이토니아(Teutonia) 관구회의는 에카르트를 자기들의 지도자로 선출했으나, 1311년 나폴리(Neapel)에서 열린 도미나꼬회 총회는 에카르트의 선출을 승인하지 않고, 그를 또다시 파리 대학의 교수로 파견했다. 이로써 에카르트는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인 두 번째 파리 대학 교수 시기를 보내게 된다.
2)두 번째 파리 대학 교수 시기(1311 - 1313)
엑하르트는 두 번째 파리 대학 교수 시기를 보내는 동안 라틴어로 된 그의 主著인 ‘三部 作(Opus Tripartium)’을 저술한다. 이것은 이 시기에 완성된 것은 아니고 적어도 그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추정된다. ‘三部作’의 ‘전반적인 序文(Prologus generalis)’에 보면, 이 저서는 그 첫째 부분으로 여러 기본 명제를 다루는 “명제집”(Opus Propositionum), 둘째 부분으로 개별적인 문제를 다루는 “문제집”(Opus Quaestionum), 셋째 부분으로 구약과 신약 성서의 구절을 해석하는 “해설 내지는 주해집” (Opus Expositionum)으로 구성되어 있다.
에카르트의 철학적·신학적 주저인 이 ‘三部作’은 아주 방대한 것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오늘날에는 다만 그 일부분만이 전해져 올 뿐이다. 에카르트가 이렇게 방대한 ‘三部作’을 저술한 목적은 성서의 진리를 철학적으로 논증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렇게 해석된 성서는 모든 철학적 인식의 총화라는 사실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결국 에카르트는 하나의 새로운 “이성 개념" (Intellectus Begriff)을 통해서 철학자들의 神과 그리스도교의 神을 하나로 결합시키려고 하는 것이었다.
3) 슈트라스부르그 시기(1313 - 1322)
1313년 여름, 에카르트는 파리 대학을 떠나 토이토니아(Teutonia) 관구에 속해 있는 슈트라스부르거(Straßburg)로 파견되어 설교가로서, 그리고 수녀원 지도 신부로서 일하 게 된다. 왜냐하면 토이토니아 관구를 제외한 도미니꼬회의 나머지 17개 관구에 있는 수녀원을 모두 합해서 76개뿐이지만 토이토니아 관구에는 이 당시 65개의 도미니꼬회 수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이토니아 관구의 여러 수녀원에서는 “가난”(die Armut)과 “고행”(die Askese) 을 실천하며 높은 수준의 영성이 싹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카르트는 슈트라 스부르그로 파견되어 설교가로서 일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에카르트는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자신의 설교 중에서 설교 12-15와 22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을 작성했다.
왜냐하면 이 시기는 직책상으로 보아서도 그가 본격적으로 “설교가”로 활동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는 그의 신비 사상의 완숙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다. 즉, 그는 이 시기의 설교들을 통해 자기 사상의 핵심적인 주제인 “영혼 속에서의 神 의 탄생”과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 (Abgeschiedenheit)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설교 53 “주께서 당신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말씀하셨다....... 보아라! 나는 세계만방을 너의 손에 맡긴다(예레 1,9)”의 서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내가 설교할 때 나는 언제나 첫째로,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Abgeschiedenheit)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과 모든 사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둘째로, 인간은 또다시 단순한 善性, 즉 神 속에서 그와 하나의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셋째로, 인간은 神이 그 영혼 속에 넣어준 위대한 고귀성에 대해서 생각해야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인간은 놀라운 방법으로 神에게 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넷째로, 신적 본성의 순수함과 그 속에 있는 광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4) 쾰른 시기(1323 - 1328)
1323년 60代의 에카르트에게 또 한 번의 소임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쾰른에 있는 수도원 대학의 교수로 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의 인생은 위기를 맞이하게 되고 암흑으로 뒤덮이게 된다.
당시 널리 퍼져있던 종파, 특히 “베가르데(Begarden, 형제들)” 와 “베긴네(Beginen, 자매들)”, 그리고 “자유로운 정신의 형제자매들” 에 대한 소송 문제를 맡고 있던 사람은 쾰른의 대주교인 비르네부르그의 하인리히(Heinrich von Virne- burg)였다.
그는 1326년 에카르트를 상대로 “이단 소송”을 제기한다. 그 이유는 에카르트가 민중들 앞에서 독일어로 설교를 하면서 신앙을 위협하는 가르침을 널리 퍼뜨렸다 는 것이다. 그리하여 에카르트는 1327년 1월 24일 항소문을 작성하여 아비뇽에 있던 교황청에 항소했고, 그 항소문을 자신의 동료인 할베르슈타트의 콘라드(Konrad von Halb erstadt)로 하여금 대주교의 “이단 심문 위원회” 앞에서 읽도록 했다.
그리고 그는 같은 해 2월 13일 쾰른의 도미니꼬회 성당에서 민중 앞에서 행한 자신의 설교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 결국 그는 여기에서 자신의 소송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박한 것이다. 그는 여기서 자기 자신의 신앙의 정통성을 역설했고, 자신의 가르침과 설교 중에서 신앙 진리에 어긋나고 반대되는 것이 있다면 그러한 명제들을 취소한다고 말했다. 그 후 에카르트는 아비뇽으로 갔고, 교황청이 임명한 “조사 위원회” 앞에서 자신을 변호했다.
그래서 조사 위원회는 쾰른의 소송에서 제시된 조사 자료를 다시 한 번 재심하도록 했다. 다행히도 아비뇽에 있던 교황청 위원회에 의해서 작성된 “판정서”는 보존되어 있다. 그리하여 위원회는 쾰른에서 고소되었던 항목들 108개를 28개의 항목(Artikel)으로 축소했다. 그리고 교황청은 1329년 3월 27일 "도미니꼬회의 땅에"(In agro dominico)라 는 교황 요한 22세의 교서를 작성한다. 여기에서 28개 항목 중 17개 항목은 이단으로, 그리고 나머지 11개 항목은 이단이 아닌가 하고 의심스러운 것으로 판결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15일 교황청은 쾰른의 대주교에게 이 교서를 교구장의 범위 안에서 널리 공표하도록 했다. 그러나 에카르트는 자신에 대한 이러한 판결을 살아서 보지 못했다.
결국 이 교서는 이미 죽고 없는 에카르트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에카르트는 죽기 전에 사도좌가 자신의 저서와 설교 속에서 이단, 그리고 오류 또는 신앙을 위협하는 것으로 판결하는 모든 것을 취소하겠다고 했었지만 이미 죽은 자에게 교황청은 교서를 작성하여 발표한 것이다. 에카르트는 1327년과 1329년 사이에 쾰른 (또는 아비뇽?)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곳에 묻혔다.
III. 마이스터 에카르트의 영성
에카르트에게 있어서, 영성생활은 우리의 삶을 하느님과 맺도록 도와주는 어떤 훈련이나 규율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영성생활은 바로 삶 자체였고, 우리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여정이었으며,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최종적인 귀향이었다.
또한 그의 영성은, 하느님을 어떤 정의나 속성에 한정 될 수 없는 분으로서 “~이 아닌 것” 으로 보는 부정 신학의 전통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하느님께 도달하는 가장 적절한 길은 마음에서 개념들과 표상들과 상징들을 지워버리는 “잊음”과 “무지”가 되었다.
그의 사상의 중심이었던 이러한 부정 신학으로 인하여, 그는 그의 청중들이 하느님에 대한 진리를 지성으로 파악하게 하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적절한 역설들을 통하여 그들이 지성의 한계를 넘어 하느님과의 합일을 향해 나아가게 하고자 했다.
우리가 에카르트의 영성이 무엇인지 접근하려 할 때 곤란한 점은 에카르트 자신이나 그의 해석자들이 그의 영성 전체를 개관해 놓은 것이 없다는 점에 있다. 다만, 그의 설교와 논문들이 조직적인 전체를 구성하면서 풍부하고 복합적인 다양한 주제들을 담고 있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주제들을 마치 하나의 교향곡처럼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의 설교 전체를 살펴보는 것은 이 글의 범위가 아니며, 지면의 성격상 가능하지도 않다. 다만, 그의 영성의 핵심이 무엇인지 소개하고, 이 글을 읽는 이로 하여금 에카르트에 비로소 관심을 가지게 되어 오늘의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영성으로서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제부터 다룰 내용들에는 그의 가르침에서 몇몇 중요한 요소들만을 설명하려고 시도해 보겠다.
1.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 ( Abgeschiedenheit)
앞서 “생애와 저서”에서 살펴보았듯이, 엑하르트는 자신이 평생을 두고 가르치고자 한 것은 다음과 같다. 즉, 그것은 첫째로 “인간이 모든 사물로부터 벗어나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것을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 이라고 하고, 여기에 대해서 그의 論考集(Traktate)에서 따로 다루고 있다.
따라서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아는 것은 엑하르트의 설교 전체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그의 著書 전 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이제 엑하르트의 論考集에 나오는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에 대하여” (Von Abgeschie denheit) 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1)최고의 덕행인 “버리고 떠나있다는 것”
엑하르트는 자신이 이교 철학자들과 현자들의 많은 저서 그리고 신·구약 성서를 읽었으며, 무엇이 가장 좋은 덕행인지 그리고 어떤 것이 최고의 덕행인지, 또한 이 덕행으로 인간이 자기 자신을 하느님과 가장 잘 그리고 가장 쉽게 연결시킬 수 있는지, 그리고 인간이 이 덕행을 가지고 은총에 의해서 본성상 하느님인 것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하느님이 피조물들을 창조하기 이전에 像이 하느님 안에 있어 하느님과 像 사이에 차이가 없었는데, 인간이 이 덕행을 통해서 그 像과 가장 잘 일치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열성을 다해서 찾았다.
그리하여 엑하르트는 자신이 찾았던 “최상의 덕행 그리고 최선의 덕행”은 바로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이라고 한다. “내 이성이 할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는 한에서 모든 저서들을 두루 살펴볼 때, 나는 순수하게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이 모든 것을 능가한다는 사실 이외에 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덕행들은 어떤 양식으로든지 피조물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그에 비해서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떠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엑하르트는 예수께서 마르타에게 하신 “필요한 것은 하나다”(루가 10,42)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혼란스럽지 않고 순수해지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 이다” 라고 한다.
2)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의 우월성
엑하르트는 세 가지의 예를 들어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의 우월성에 대해 말한다.
첫째, 엑하르트는 설교가들이 “사랑”을 높이 평가하는 데 반해서 그러한 모든 사랑보다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을 더 높이 평가한다. 엑하르트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 사랑에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은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사랑이 나를 강요 하는 것이나, 반대로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은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도록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엑하르트는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이 하느님을 나에게 강요 하는 것이라는 것을 모든 사물은 자기 본성에 맞는 고유한 장소에 있다는 사실로 증명 한다. 즉, 하느님의 본성에 맞는 고유한 장소는 “단일성”과 “순수성”인데, 그것은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 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하느님은 필연적으로 “버리고 떠나 있는 마음” 에게 자기 자신을 주신다는 것이다.
엑하르트가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을 사랑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다른 이유는 다음 과 같다. 즉, 사랑은 내가 하느님 때문에 모든 것을 참아내도록 강요하지만, 반대로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만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때문이다. 엑하르트는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이 하느님 이외는 다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명한다.
즉, 받아들여지는 것은 언제나 어떤 것 속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데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은 무(無, Nichts)에 아주 가깝기에 하느님 말고는 어떤 것도 그 속에 머물 정도로 그렇게 섬세한 것은 없는 것이다. 하느님만이 단순하고 섬세하시기에 하느님은 버리고 떠나 있는 마음속에 자기를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은 하느님 이외는 다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둘째, 엑하르트는 학자들(Meister)이 다른 많은 덕행들보다 겸손(Demut)을 더 높이 평가하는데 반해서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을 모든 겸손들보다 더 높이 평가한다. 여기에서도 엑하르트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한다.
- 겸손은 “버리고 떠나있다는 것” 없이도 성립하지만, 완전히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은 겸손 없이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완전한 겸손은 “자기 자신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완전히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은 자신과 “무”(Nichts)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무”(Nichts)와 가깝기 때문에 완전히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은 겸손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완전한 겸손은 자기 자신을 모든 피조물 밑으로 가져가는 것이고, 이러한 낮춤 속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와 피조물에게로 향하지만, 반대로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 안에 머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은 어떤 피조물의 밑이나 위에 서겠다는 어떤 원의도 목표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나 저것을 원하지도 않고 모든 사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인 것이다.
셋째, 엑하르트는 모든 “자비”보다도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을 더 높이 평가한다. 왜냐하면, 자비란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자기 동료 인간의 결핍”에로 다가가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경우에는 자기 마음이 흩뜨려 지게 되지만,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은 이로부터 자유롭고 자기 안에 끈질기게 머물 며 어떤 것에 의해서도 마음이 흩뜨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이스터 엑하르트는 다음과 같은 짧은 말로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의 우월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모든 덕행들을 살펴볼 때,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 만큼 그렇게 흠이 없고, 그렇게 하느님과 (잘) 연결시키는 것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3)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의 本質
엑하르트는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올바르게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은, 정신이 (우연히) 얻어 만나는 모든 좋은 것 과 싫은 것, 영예와 치욕, 그리고 모욕에 대해서 끄덕하지 않고 서 있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마치 납으로 된 산이 미풍에 대해서 끄덕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엑하르트에 의하면,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은 인간을 하느님과 가장 동일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피조물이 하느님과 더불어 하나의 동일성(Gleiheit) 을 가질 수 있는 한에서 만일 인간이 하느님과 닮게 되고 싶다면, 그것은 반드시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결국 인간은 이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을 통해서 순수성에 이르게 되고, 이 순수성으로부터 단순성에 이르게 되며, 이 단순성으로부터 불변성에로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동일성이 성립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동일성은 반드시 은총 속에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이 은총이 인간을 모든 시간적 사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모든 변화하는 사물로부터 정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피조물로부터 떠나 있다는 것은 하느님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말하고, 모든 피조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떠나 있다는 의미하는 것이다”.
4)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의 대상(Gegenstand)
마이스터 엑하르트는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의 대상은 무엇인가? 라고 물으면서 이렇게 대답한다. “순수하게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의 대상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엑하르트에 의하면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은 “순수한 무(reines Nichts)”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순수하게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은 높은 경지에 있는 것으로 하느님께서는 그 속에서 당신의 의지를 작용하신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작용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 아무리 전능하시다고 해도 하느님은 준비된 사람을 발견했을 때나 당신 자신이 스스로 준비하실 때에 한에서 작용하시기 때 문이다. 그래서 이것이나 저것을 가지고 있는 마음속에서 하느님은 작용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지존이신 하느님을 위해 준비된 마음이 되려면 최대의 가능성을 가진 “순수한 무”이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최고의 경지에 있는 “버리고 떠나 있는 마음” 은 최대의 수용성을 가진 “무”(Nichts)이어야 하는 것이다. 엑하르트는 이것을 자연 속 의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내가 밀초로 된 판 위에 (무엇을) 쓰려고 한다면, 그 판 위에 쓰여 있는 것이 고귀하지 않아 그것이 나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무엇을) 그 위에 쓸 수 없다. 그래도 내가 쓰려고 한다면, 나는 그 판 위에 쓰인 그 모든 것을 지워 없애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내 마음 속에 至高의 것에 대해 쓰시려고 한다면, ‘이것과 저것’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을 마음으로부터 쫓아내고 ‘버리고 떠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의 대상은 “이것”(dies)도 아니고 “저것” (das)도 아닌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은 다른 모든 덕행을 초월하는 최고의 덕행으로서 하느님과 가장 잘 일치하게 하고 그와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다 시 말해서 인간은 모든 피조물을 버리고 떠나 아무것도 아닌 것, 즉 “무”(Nichts)가 될 때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의 은총(Gnade) 없이는 불가능 한 것이다. 엑하르트는 자신의 論考集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에 대하여”의 제일 마지 막 부분에서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다.
“그러므로 완전하게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에로 오려고 열망하는 사람은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아간다.”
2 하느님 말씀의 탄생 “
“그리스도를 입고”(로마 13,14) 우리의 태도와 생각에서 그리스도를 닮으려는(필립 2,5) 끊임없는 노력은, 성서에 기초한 마이스터 엑하르트의 영성의 핵심이었다. 이것은 매 일 매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의 모범을 따르는 것(마태 11,29)을 의미한다.
그것은, 일상생활의 책임들 가운데에서 그 분에게로 가서 그분에 대해 배우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입으려는 노력을 통해서 그리스도교 신자의 마음과 정신, 생각과 생활은 점차로 정화되며, 자신의 존재 근거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태어나시도록 개방한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하여, 신적 원천과 성령께로 가는 길이 열린다. “누두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입니다.”(요한 14,23)라는 예수의 말씀은 이것 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삼위일체 안에서, 창조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을 목말라하는 사람의 내적 생활 안에서 말씀을 낳는다. 엑하르트에게 있어, 이 세 가지 탄생은 하나의 영원한 낳음이다.
탄생은 신적 본성의 외적인 활동이 아니다. 이 낳음은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명백히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 각자 안에서의 말씀의 탄생은 영원하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버리고 떠나 있게 된 사람”은 이름 없는 신의 근저에 자신 을 침잠시키고 이러한 침잠에서 신의 근저와 하나가 된다. 곧 버리고 떠나 있게 된 인간 은 신의 모상, 신의 아들이 된다.
우리가 우리 존재의 “근거”에서 성자의 신비적 탄생을 체험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하느님의 표상으로부터’까지도 비워져야 한다. 영혼이 비워질 때, 하느님은 반드시 그 영혼을 채워 주신다. “복되어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마태5,3).
그러므로 엑하르트는 우리가 하느님께서 채워 주실 “빈 그릇”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버리고 떠나 있기”위한 목적은 다름 아니라 바로 하느님께서 채워주실 “빈 그릇”이 되기 위함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3. 하느님과의 합일
영으로 가난한 영혼은,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이다. 그 안에서 성자께서 탄생 하시고 천주성이 발견된다. 엑하르트에 따르면, 성자와의 일치와 천주성과의 일치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 중 하나 없이 다른 하나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이다.
VI. 21세기의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영성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현대를 “信仰의 危機時代”라고 정의한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 과 기술 문명의 혜택 속에서 물질적, 감각적 생활을 영위하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위기”는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 세계의 이러한 인간 상태를 단적으로 이렇게 표현한다. “현대 세계는 보다 완전한 현세 생활의 건설을 열심히 추구하지만 정신적인 성장의 노력이 수반되지 못한다.
이러한 “신앙의 위기” 현상은 비 그리스도교인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많은 신자들이 성숙한 신앙을 가지지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 즉, 기복적 신앙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신비적인 현상이 나타나는 곳이면 그 곳으로 몰려가곤 한다.
다시 말해 마치 그리스도교에는 더 이상 “神秘”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느끼고 현대에 유행하고 있는 TM(transcendental meditaion, 초월 명 상), 氣, 요가 등에서 “신비적 요소”를 느껴 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안에는 초대교회 때부터 엄연하게 “신비신학” 내지는 “신비철학”, 그리고 위대한 “신비가”들이 있었다.
이렇게 “신앙의 위기”를 맞은 현대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신비신학 내지는 신비철학에 대해 고찰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중세를 재조명해 보려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중세의 神秘思想家인 마이스터 엑하르트(Meister Eckhart)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그 이름부터가 낯선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이스터 엑하르트의 靈性을 오늘의 필요에 맞게 짚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우리는 지금까지 마이스터 엑하르트의 신비사상의 핵심 주제인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Abgeschiedenheit)에 대해 살펴보았다. 엑하르트의 신비사상을 한 마디로 말 하면, 아무것에도 매여 있지 않고 자유로이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물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 그리고 또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자기가 원하는 것”(願意), “자신의 뜻”, “영원과 하느님께 대한 갈망”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의 “모든 지식” 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아무것도 알지 않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이것은 “모든 사물”과 “모든 행위”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울 뿐 아니라 심지어는 “하느님께서 활동할 수 있는 장소” 조차도 가지지 않은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것에도 매여 있지 않고 자유로워 “무(無)”에 가까운 “버리고 떠나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근거(根據)는 곧 자신의 근거(根據)가 된다. 이러한 근거로부터 “버리고 떠나 있는 사람”은 아무런 이유 없이 자신의 일을 하고 아무런 방법 없이 하느님을 찾게 된다. 하지만 “버리고 떠나 있는 사람”(처녀)이 “부인인 처녀”가 되어 자신의 영혼 속에서 “神의 탄생”을 이루어 낼 때, 비로소 그는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결국 “人間과 神이 하나가 된다는 것”, 그것이 마이스터 엑하르트의 신비사상이다. 이것은 엑하르트에 의하면, 이것은 다만 체험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설교”와 “논고”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이 진리(설교를 통 해서 전해진)에 같아지지 않는 한, 그들은 이 설교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느님의 마음속으로부터 직접 흘러나온 감추어져 있지 않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말했던 것은 진실이다. 그것을 위해서 나는 당신들에게 진리를 증인으로 내세우고, 내 영혼을 담보물로 내세운다.”
결론적으로, 엑하르트의 신비사상은 한마디로 “無를 뛰어넘어 하느님과의 일치에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일체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Abgeschiedenhei
t) “순수한 無”가 됨으로써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엑하르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無를 초월한 有”이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지속적으로 “~을(~으로 부터) 버리고 떠나 있기” (Abgeschiedenheit von ~)를 해야 한다.
V 참고문헌
■ 단행본
1. Ursula Fleming, M. Eckhart: The Man from whom God hid Nothing HarperCollins
2. 레이몬드 B. 블레크니 엮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1,2 이민재 옮김, 다산글 방 (1994) 3.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지음, 서양철학사 上, 강성위 옮김, 이문출판(1988)
4. H. J. 슈퇴릭히 저, 세계철학사 上, 임석진 역, 분도출판사(1987)
5. 노종해, 중세 기독교 신비신학 사상 연구, 도서출판 나단(1991)
6. 빌헬름 봐이쉐델 지음, 철학의 뒷계단, 연효숙 옮김, 분도출판사(1990)
7. 염두섭, 신비주의자들과 그 사상, 도서출판 은성(1993)
8. 아우구스트 프란? 지음, 교회사 최석우 옮김, 분도출판사
■ 잡지류
1. 정달용"마이스터엑하르트의 생애와 저서 중세철학창간호, 한국 중세철학연구소
2. 이부현."마이스터 에크르트의 독일어 설교들에 나타난 주요주제” 중세철학 제5호, 한국중세철학연구소편(1999).
■ 논문류
1. 김영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근본 가르침” 부산가톨릭대학원 석사논문(1999)
2. 박주병 마이스터 엑하르트의 “Abgeschiedenheit에대한 硏究” 대구 가톨릭대학원석사 논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