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6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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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과리노(Guarinus)
축일 2월 6일
이탈리아의 볼로냐(Bologna) 태생인
성 과리누스(또는 과리노)는 어릴 때부터 스스로
단식하고 기도하였으며 아이들의 놀이를 즐기지도
않았다고 한다. 부친의 뜻과는 달리 그는 사제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몬타리아(Montaria)에서
성 십자가의 아우구스티누스회에 입회하였고
그의 성덕은 더욱 높아졌다. 그 후 그는
파비아(Pavia)의 주교로 선출되었으나 기회가 되면
다른 사람에게 주교좌를 물려주려고 노력하다가
뜻을 이루게 되자 다시 수도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덕과 명성을 익히 알게 된
교황 루키우스 2세(Lucius II)는 그에게
팔레스트리나의 추기경 주교 지위와 함께 많은
선물을 주었는데, 그는 이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 주위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하였다. 그는 천수를 다하고 파비아에서
평안히 선종하였다.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3세
(Alexander 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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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도로테아(Dorothea)
성 테오필로(Theophilus)
축일 2월 6일
성녀 도로테아는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카이사레아에 사람인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우상에게 희생물을 바치라는
명을 거절하자 총독으로부터 고문을 받았다.
그녀는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으로 끌려가던 길에
스승이자 수사학자인 성 테오필루스(Theophilus)를
만났는데, 그는 그녀가 곧 들어가게 된다고 즐겁게
말했던 그 '정원'에서 열매를 따면 자신에게도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였다.
형리 앞에서 무릎을 꿇은 그녀는 오로지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만 하였다고 한다. 이때 한 천사가
세 송이의 장미와 세 개의 사과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발현하여, 성 테오필루스에게 머지않아 정원에서
그녀를 만날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성 테오필루스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고
그 얼마 후에 순교하였다. 성녀 도로테아는 도라(Dora)
또는 도로시(Dorothy)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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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디에고 데 아제베도(Diego de Azevedo)
축일 2월 6일
에스파냐의 오스마 대성당에 부착된
성직자 중의 한 명인 디에고 데 아제베도는
1201년에 오스마의 주교로 승품되었다.
1206년에 그는 카스티야(Castilla)의 알폰소 9세
국왕으로부터 페르디난드(Ferdinand) 왕자의
신부감을 모셔오라는 명을 받고 이탈리아의
마르케(Marche)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가
도착해보니 그 소녀는 이미 죽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로마(Rome)로 가서 자신의 지지자 중의
한 명인 성 도미니코(Dominicus)를 만났는데,
이 방문이 궁극적으로 도미니코회를 창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에 디에고는 프랑스 시토
(Citeaux)에 있는 시토회에 입회하여 랑그도크
(Languedoc)의 알비파(Albigenses)를 대항하는
십자군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1207년 오스마로
귀향하여 그곳에서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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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성 테오필루스(Theophilus)
성녀 레보카타(Revocata)
축일 2월 6일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성 테오필루스(Theophilus)와 성녀 레보카타는
순교 장소나 날짜 등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들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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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렐린다(Relindis)
축일 2월 6일
성녀 렐린다는 프랑스 발랑시엔(Valenciennes)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그녀의 자매인
성녀 헤를린다(Herlindis, 10월 12일)와 함께
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자수와 그림의 전문가가 되었다.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6월 5일)는
성녀 헤를린다가 사망한 후 성녀 렐린다를
벨기에의 뫼즈(Meuse) 강변에 있는 아이크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하여 성녀 헤를린다를 계승토록 하였다.
아이크 수도원은 성녀 렐린다의 부모가 설립한 곳이다.
그녀는 레닐다(Renildis), 레눌라(Renula),
레눌레(Renule)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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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실바누스(Silvanus)
성 루카(Luke)
성 무치오(Mucius)
축일 2월 6일
고대 시리아와 레바논의 해안지대인
페니키아(Phoenicia) 지방 에메사의 주교인
성 실바누스(Silvanus)와 그의 부제인
성 루카(Lucas, 또는 루가) 그리고 독서자인
성 무키우스(Mucius)는 막시미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오랜 감옥생활 뒤에 순교하였다.
로마 순교록은 이 실바누스 주교를 티레(Tyre)의
주교이던 성 티란니오(Tyrannio, 2월 20일)와
함께 순교한 동료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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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멜(Mel)
성 멜추(Melchu)
축일 2월 6일
불확실한 전설이긴 하지만 성 멜과
그의 동생인 성 멜추(Melchu)는
성 파트리키우스(Patricius, 3월 17일)의 여동생인
성녀 다레르카(Darerca, 3월 22일)와
코니스(Conis)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성 파트리키우스를 수행하여 아일랜드로 가서
성인의 선교활동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주교가 되었다.
성 파트리키우스가 성 멜을 아르다그의 주교로,
성 멜추는 아마(Armagh)의 주교로 임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 멜에게서 몇 가지 스캔들이 일어나
교구를 떠나야 할 입장에 놓였을 때,
성 파트리키우스의 기적으로 인해 그의 결백이
밝혀졌다고 한다. 그 후 성인은 성 멜과 성 멜추 형제가
자신을 떠나 순회선교 주교로서 살도록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양한 전승들이 섞여 있어 그들에 대해
확실한 것은 없다. 성 멜이 아마의 주교이거나 또는
성 멜과 성 멜추가 동일인물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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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다스토(Vedast)
축일 2월 6일
성 베다스투스(Vedastus, 또는 베다스토)는 젊어서
고향을 떠나 서부 프랑스 지방으로 갔다.
그는 툴(Toul) 교구에서 세상을 멀리하며 살고
있던 중에 주교의 눈에 띄어 사제직에 올랐다.
그 당시 프랑스 왕 클로비스가 랭스(Reims)로 가서
세례를 받고자 할 때, 그의 여행 중에 자신을
준비시켜 줄 수도자를 찾던 중에 성 베다스투스가
선발되었다.
그들이 길을 가던 중 엔(Aisne) 강을 건널 때
어떤 맹인이 그에게 눈을 낫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성 베다스투스는 하느님께 기도하고 그의 눈 위에
십자가를 그었는데, 그 즉시 시력이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 기적은 왕의 신앙을
더욱 굳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프랑스 사람들의
개종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성 베다스투스는 성 레미기우스(Remigius, 10월 1일)
주교를 돕다가 그로부터 아라스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그는 40년 동안 활동하다가 선종하였으며
바아스트(Vaast)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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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만도(Amand)
축일 2월 6일
프랑스 아키텐(Aquitaine)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아만두스(Amandus, 또는 아만도)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외(Yeu) 섬에 있는 작은
수도원에서 604년경에 수도자가 되었고,
투르(Tours)로 가서 서품을 받은 후 15년간을
부르주(Bourges)에서 은수자로 살았다.
로마(Rome) 순례 길에서 돌아오던 중에 그는
관할교구가 없는 선교사 주교로 임명을 받았다
(628/629년경).
그래서 그는 플랑드르(Flandre), 케른텐(Kernten)
그리고 독일을 두루 다니면서 선교 활동에 일생을
불살랐다. 그는 다고베르트 1세(Dagobert I) 왕을
비난한 죄목으로 추방되었다가 재차 소환되었으며,
여러 가지로 어려움도 많았지만 겐트(Gent) 지방의
복음화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그는
벨기에에 수많은 수도원을 세웠고, 나중에는
마스트리히트의 주교로 승품되었지만 3년 후에
사임하고 계속 선교 활동에 헌신하였다.
만년에는 엘논(Elnone)의 수도원장으로 지내다
그곳에 묻혔다. 그는 벨기에의 사도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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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만도(Amand)
축일 2월 6일
성 아만두스(Amandus, 또는 아만도)는 프랑스의
무아사크에 수도원을 설립한 후 초대원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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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젤로(Angelus)
축일 2월 6일
성 안젤루스(또는 안젤로)는 이탈리아
아브루치(Abruzzi)의 푸르치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오랜 동안 자녀가 없었으므로
하느님께서 사내아이를 주시면 꼭 주님께
봉헌하겠다고 서약하였다. 그런데 이 부부가
성 미카엘(Michael)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를 환시로 본 후 아들을 얻자
어려서부터 아들로 하여금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의
규칙을 따르게 하였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코르나클라노 원장에게서
교육을 받은 결과 기도와 공부에 맛들이기 시작한
안젤루스는 18세 때에 정식으로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 후 잠시 집으로 돌아왔다가 수도성소를 깊이
깨달은 그는 재차 수도원으로 가서 파리(Paris)
유학을 떠났다. 이때 그는 유명한 질 로망 교수의
제자가 되어 철학과 신학을 전공하였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남은 생애를
나폴리(Napoli)의 아우구스티누스 대학의 신학교수로
재직했는데, 주교직을 끝내 사양하여 큰 소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88년에 승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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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톨리아노(Antholian)
축일 2월 6일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1월 17일)는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 황제 때 프랑스 중남부
오베르뉴에서 순교한 순교자들 중 한 명으로
성 안톨리아누스(Antholinanus, 안톨리아노)를
언급하였다. 함께 수난을 겪은 동료들로는
성 카시우스(Cassius, 5월 15일),
성 막시무스(Maximus, 5월 15일),
성 리미니누스(Limininus)와
성 빅토리누스(Victorinus, 5월 15일)가 있다.
성 안톨리아누스는 아나톨리아누스(Anatolianus)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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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제랄도(Gerald)
축일 2월 6일
성 게랄두스(Geraldus, 또는 제랄도)는
클뤼니(Cluny)에서 수도원장을 지내다가 교황
알렉산데르 2세(Alexander II)에 의해
성 베드로 다미아니(Petrus Damiani, 2월 21일)
추기경을 계승하여 이탈리아 오스티아의 주교로
승품되었다. 그는 교황사절로서 프랑스,
에스파냐, 독일을 방문하였다. 그는 직무수행 중에
독일의 황제 하인리히 5세(Heinrich V)에 의해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는 벨레트리(Velletri)의 주요 수호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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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포시오(Photius)
축일 2월 6일
성 포티우스(또는 포시오)는 비잔틴 왕가 출신으로
매우 능력 있고 유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얼마 동안 궁중의 관리로 지냈지만,
교황 요한 8세(Joannes VIII)가 그를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임명한 듯 보인다.
교황 성 니콜라우스 1세(Nicolaus I, 11월 13일)는
그를 일컬어 '뛰어난 덕행과 놀라운 지식을 지닌'
성인이라고 하였다. 그의 저서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미리오비블리온”(Myriobiblion)으로
불리는 일종의 도서목록이다. 이 속에는
279종의 도서 목록과 설명이 들어 있다.
“성령의 신비론”이 제일 유명한 그의 저서이다.
그는 동방 교회에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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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힐데군다(Hildegund)
축일 2월 6일
성녀 힐데군다(Hildegunda)는
리트베르크(Lidberg)의 백작 헤르만(Herman)의
딸인데, 특히 그녀의 모친 헤드비그(Hedwig)는
남편이 죽은 후 세 딸과 함께 독일 쾰른(Koln)
근교의 자신의 성을 떠나 프레몽트레회에 입회하였다.
이런 이유로 성녀 힐데군다는 어머니의
신앙적 열성을 많이 이어받았다.
1178년 로마(Rome) 순례 후부터 그녀는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였다. 물론 그녀의
남편 로테르(Lothair) 백작과는 사별한 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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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 미키(Paul Miki) 와 24분 일본의 순교자들
축일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 三木)는 지금의
오사카 인근 도쿠시마(德島)에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와 함께 세례를 받고,
10여 세 되었을 무렵 아즈치야마(安土山)의
예수회 신학교에 제1회 입학생으로 들어가
22세 때인 1585년 졸업과 동시에 수사가 되었다.
수사가 된 성 바오로 미키는 타고난 성품과
열정으로 전교 활동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며,
후에 주교 마르티네즈(Martinez Pedro)를 따라
오사카(大阪)에서 활동하던 중 예수회 신부인
오르간티노(Organtino Gnecchi-Soldi)의 눈에 띄어
게이한(京阪, 교토와 오사카) 지방에서 함께
활동했다. 이후 그는 불교 승려들과 많은 토론을
벌였고, 자신이 저술한 교리서들을 통해
불교 신자들을 깨우치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 교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87년에 선교사 추방령을 내린 적이 있었지만,
1590년 순찰사 발리냐노(Valignano Alessandro)가
인도 부왕(副王)의 사절 자격으로 히데요시를
방문한 뒤에는 금교의 제약 속에서 조심스럽게
활동을 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1596년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이 금교를 무릅쓰고
교토 일대에 성당과 수도원을 건립하는 등
공공연한 전교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히데요시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그 결과 1597년 초에는
교토와 오사카 일대에서 활동하던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이 박해로 게이한 지방에서 체포된 사람들은
프란치스코회 수사 6명, 예수회 수사 3명과
일본인 신자 15명 등 24명이었다.
성 바오로 미키는 이때 오사카에 있다가
뜻하지 않게 체포되어 1597년 1월 1일 교토의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어 그는 1월 3일 다른
동료들과 함께 오사카를 거쳐 1월 9일에는
나가사키로 출발하였고, 27일 동안 혹한 속을
걸어서 2월 5일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이들 일행은 도중에 일본인 신자 2명이 자진하여
체포됨으로써 모두 26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날 저녁, 성 바오로 미키는
동료들과 함께 나가사키(長崎) 해안 근처에 있던
니시사카(西坂)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순교 직전에 그는 당당한 얼굴로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였으며,
복음이 널리 전파될 것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
(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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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가브리엘(Gabriel)
축일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19세의 나이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가브리엘은 프란치스코회의
일본인 문지기의 아들이었다. 그는 프란치스코회
평수사인 성 군디살부스 가르시아(Gundisalvus Garcia)에
의해 개종하고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
(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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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고스마 다케야(Cosmas Takeya)
축일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코스마 다케야(또는 고스마 다케야)는
칼 제작자로서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통역자로서 또 프란치스코회를 도와 교리교사로서
오사카 지방에서 활동하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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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군디살보 가르시아(Gundisalvus Garcia)
축일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군디살부스 가르시아(또는 군디살보)는
인도의 바셀인(Bassein)에서 포르투갈계 이민자인
아버지와 인도인 개종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예수회의 평신도 교리교사로 활동하던 그는
일본과 마카오에서 큰 성공을 거둔 사업가였다.
1591년 그는 필리핀의 마닐라(Manila)에서
프란치스코회 평수사가 되어 성 베드로 밥티스타
(Petrus Baptista)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와
통역가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
(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그는 곤살로(Gonsalo),
곤살보(Gonsalvo), 곤잘로(Gonzalo) 등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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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디에고 키사이(Diego Kisai)
축일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일본인 평신도인 성 디에고 키사이는 예수회의
보조자로서 오사카에서 교리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64세의 나이로 순교하기 직전에
감옥에서 예수회 입회 허가를 받았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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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레오 카라수마루(Leo Karasumaru)
축일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레오 카라수마루는 한국 태생으로 젊은 시절
불교의 승려가 되었다. 그는 1589년에 일본에서
예수회원들에 의하여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첫 번째 프란치스코회
3회원이 되었고 또 전교 회장이 되었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25명의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그와 함께 순교한 교우 중에는
그의 형인 성 바오로 이바라키(Paulus Ibaraki)와
조카인 성 루도비쿠스 이바라키(Ludovicus Ibaraki)도
있다. 그들은 모두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
(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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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루도비코 이바라키(Louis Ibaraki)
축일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루도비쿠스 이바라키
(Ludovicus Ibaraki, 또는 루도비코)는
성 레오 카라수마루(Leo Karasumaru)와
성 바오로 이바라키(Paulus Ibaraki)의 조카이다.
그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의 복사로서 활동하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
(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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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마르티노 로이나스(Martin Loynaz)
축일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마르티누스 로이나스
(Marinus Loynaz, 또는 마르티노)는 에스파냐의
기푸스코아(Guipuzcoa)에서 태어났다.
그는 1586년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사제가 되었다.
그는 멕시코와 필리핀 선교사를 거쳐 잠시
일본의 오사카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었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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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마티아(Matthias)
축일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미야코(Miyako)의 성 마티아는 일본 태생으로
프란치스코회의 3회원이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군인들이 그리스도인을 체포하러 왔을 때 그들은
그 자리에 없던 다른 마티아를 찾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바로 마티아라고 하여
다른 마티아를 구하고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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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미카엘 코자키(Michael Cozaki)
축일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미카엘 코자키는 함께 순교한 성 토마스 코자키
(Thomas Cozaki)의 아버지이다. 목수였던 그는
프란치스코 선교사들과 함께 교리교사로서 또
그들이 세운 병원의 간호사로서 활동하였고,
교토와 오사카에 수도원과 성당을 짓는 것을 도왔다.
그러다가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아들과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
(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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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 스즈키(Paul Suzuki)
축일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바오로 스즈키(Paulus Suzuki)는 일본 오와리
(Owari) 출신으로 1584년에 예수회원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프란치스코회 3회원이 되었다.
그는 뛰어난 교리교사로서 사제들을 도왔고,
교토에 있는 성 요셉 병원의 운영을 담당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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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 이바라키(Paul Ibaraki)
축일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바오로 이바라키(Paulus Ibaraki)는 함께 순교한
성 레오 카라수마루(Leo Karasumaru)의 형이다.
그는 사무라이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서 작은 사케
양조장을 운영하면서 가족들을 부양하였다.
그러다가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프란치스코회 3회원이 되었다.
그는 교토에서 선교사들과 함께 통역자이자
교리교사로서 활동하였고, 천사들의 모후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근방에서는 평신도 설교가로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
(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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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밥티스타(Peter Baptist)
축일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베드로 밥티스타(Petrus Baptista)는
에스파냐의 아빌라(Avila) 교외에서 태어났다.
그는 1567년에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어 멕시코
선교사로 떠났다가 1583년에는 필리핀으로 갔다.
그리고 그는 일본으로 가서 학교와 병원을 짓고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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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수케지로(Peter Sukejiro)
축일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베드로 수케지로(Petrus Sukejiro)는 프란치스코회
3회원이자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의 성구(聖具)
보관인이었다. 교리교사로도 활동하던 그는 감옥에
갇힌 동료들을 돌보던 중 교토에서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
(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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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벤투라(Ventura)
축일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벤투라는 일본의 교토에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아기일 때 어머니가 사망했기
때문에 그는 양어머니에 의해 불교 사원으로 보내져
자라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결정할 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에 자신의 출신 배경을 밝히고 사원을 나와
교토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가서 교리를 배우고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그는 그곳에서 프란치스코회
3회원이 되어 교리교사로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
(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그는 미야코(Miyako)의
성 보나벤투라(Bonaventura)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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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토니오 데이난(Anthony Deynan)
축일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안토니우스 데이난(Antonius Deynan, 또는
안토니오)은 나가사키에서 중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복사로 활동하던 그는 나가사키의 예수회원와
오사카의 프란치스코 회원들로부터 교육을 받고
프란치스코회 3회원이 되었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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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아킴 사카키바라(Joachim Sakakibara)
축일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요아킴 사카키바라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서
의사가 되어 가난한 이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그는 프란치스코회 3회원이 되어 교리교사로
활동하였고, 때때로 오사카의 프란치스코 회원들을
위해 주방 일을 하기도 했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
(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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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John)
축일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요한(Joannes)은 일본의 고토(Goto) 섬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성장하였는데,
고토 섬에 박해가 닥쳐오자 이를 피해 나가사키로
갔다. 그는 나가사키에서 예수회원들로부터
수학한 후 오사카에서 예수회의 보조자이자
교리교사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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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키사카(John Kisaka)
축일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요한 키사카(Joannes Kisaka)는 비단 짜는
사람으로 그리스도교 개종한 후 프란치스코회
3회원이 되었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
(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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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카이오 프란치스코(Caius Francis)
축일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카이우스 프란치스코(Cajus Franciscus, 또는
카이오)는 일본 군인 출신으로 개종한 후
프란치스코회의 3회원이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군인들이 수사들을 체포하기 위해 왔을 때 그는
자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여 체포되었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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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시코(Thomas Xico)
축일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토마스 시코는 일본 태생으로 난폭한 성격의
약사였다. 그러다가 신앙을 갖게 된 그는
부드러운 마음을 지닌 프란치스코회의 3회원이 되었다.
프란치스코회가 천사들의 모후 수도원을 개원했을 때
그는 자신의 약국을 그 옆으로 옮기고 교리교사와
선교사들의 통역자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그는 토마스 다우키(Thomas Dauki)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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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코자키(Thomas Cozaki)
축일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토마스 코자키는 함께 순교한 성 미카엘 코자키
(Michael Cozaki)의 아들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여 복사로 활동하였고,
목수인 아버지가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건립에
참여했을 때 아버지를 도와 함께 일하였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아버지와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는데,
그가 감옥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고별 편지가
전해지고 있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
(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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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Francis)
축일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일본 나가사키의 미야코(Miyako)에서 태어났다.
커서 의사가 된 그는 프란치스코 선교사들에 의해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는 프란치스코회
3회원이 되어 병든 이들을 무료로 돌보아주었고,
교리교사와 설교가로서도 활동하였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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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 블랑코(Francis Blanco)
축일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프란치스코 블랑코(Franciscus Blanco, 또는
프란체스코)는 에스파냐 갈리시아(Galacia)
지방에서 태어나서 살라망카(Salamanca)에서
수학한 후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멕시토와 필리핀 그리고 일본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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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성 미카엘의)(Francis of St. Michael)
축일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미카엘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에스파냐의 바야돌리드(Valladolid)
근방 라 파릴라(La Parilla)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평수사가 된 후
선교사로서 필리핀과 일본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오사카에서 활동하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성 베드로 밥티스타
(Petrus Baptista)와 함께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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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필립보(Philip)
축일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필리푸스 데 라스 카사스
(Philippus de las Casas, 또는 필립보)는
에스파냐에서 멕시코로 이주한 부모에 의해
멕시코시티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심 깊은
가정에서 성장하였고, 그의 두 형제는
아우구스티누스회에 입회하였고 그 중 한 명은
순교하였다. 그는 10대 초에 멕시코의 푸에블로
(Pueblo)에서 산타 바르바라(Santa Barbara)의
개혁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다.
그러나 1년 후에 수도원을 나와 아버지와 함께
해외무역을 위해 필리핀 마닐라(Manila)로 갔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수도생활에 대한 성소를
느꼈고, 결국 1594년 마닐라의 천사의 모후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다시 들어가서 수사가
된 후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했다.
1596년 그는 가족들의 요구와 주교품을 받기 위해
멕시코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태풍에 항로를
잃은 배는 일본 해안으로 떠밀려가 좌초하였다.
그 지방의 장군은 성 필리푸스와 선원들을 구금하고,
그들이 싣고 온 화물을 빼앗기 위해 그들을
에스파냐 왕의 일본 침공 준비를 위해 파견된
스파이로 몰았다. 결국 그는 감옥에 갇혔다가
다음해 나가사키에서 다른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십자가형을 받았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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