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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 최인훈, 민음사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삶이여
- 최인훈의 「화두」
나의 자리 매김
짧은 시간 동안 급속한 정치, 경제, 문화적 변혁을 치러야 했던 우리 사회는 이제 새로운 전환기에 놓여 있다. 지난 시대의 '중심의 담론'은 붕괴되었고 다양한 문화 현상들이 분산된 지형도를 그리면서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 세기말과 세기 초입을 관통하면서 탈중심, 다원주의, 일상성, 생태학 같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고 기존의 시각과 삶의 양식을 해체하려는 물결이 등장한 것은 분명 변화하는 우리의 삶에 대한 나름대로 대응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상적인 유행에 민감한 저널리즘과 컴퓨터를 비롯한 영상 산업의 폭발적인 팽창, 그리고 세속적이고 일상화된 욕망의 분화구 사이에서 분방하고 다발적인 논의들은 체계적인 사회, 문화적 맥락으로 조성되지 못하고 파편화되었다.
전망이 불투명한 흐름 속에서 문학은 지루한 소모품으로 전락하거나 감각적인 새로움을 요구하는 대중의 욕망에 편승하여 상업적 생산과 소비의 유통구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기도 하다. 나는 삶의 진정성이 외면당하는 가치 부재의 현실, 경건성이 질식당하는 문학판에서 문학이 책임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문학인이 책임질 수 있는 몫은 무엇인지를 새롭게 자문해 본다.
우리가 문학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뒤돌아다보기'를 통해 거듭나는 비판적 사유의 치열함과 부단한 자기 갱신을 매개로 한 정신적 모험이다. 즉 '나'의 자리 매김일 것이다. 그리하여 존재하는 '나'일 때, '나'는 역사 발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선구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 집단 구성원인 우리 모두의 의무와 권리를 동시에 지닌다.
우리는 여기서 소설이라는 거울을 통해 사회적 자아와 대면하는 한 중견 작가를 찾을 수 있다. 지각 변동과 같은 사회 변화, 흐름 속에서도 '나'를 화두로 삼아 주제를 집요하게 그러나 겸허하게 물고늘어지는 작가. 진행형의 역사인 현재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를 부단히 발견해내려는 창작 정신을 가지고 보다 나은 미래의 가치를 설계해내려는 이가 최인훈이며 「화두」이다.
최인훈의 화두 꺼풀 벗겨내기에서 '나'의 자리 매김은 장편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어떻게 찾아지고 있는지, 역사에 대한 그의 작가로서 의식은 어떠한 궤적을 뚫고자 하는지 등이 본 논고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문제들이다.
경험의 등가물(等價物)을 형상화하는데 소설 문학이 긍정적 기여를 하고 있음을 이번 「화두」를 접하게 됨으로서 새삼 깨닫는다. 그것은 「화두」가 지닌 문학성일 것으로 이 글을 개진하는 동기일 뿐 아니라 문학을 대하는 나의 일관된 관심의 다름 아니다. 역사 의식(혹은 역사적 서건)을 다룬 소설들이 누누이 지적했을 지정학적 특수성을 삶자리로 지정받아, 그 탓에 사고(思考)의 지평을 구속받았다는 역사적 제재를 통한 글쓰기의 상투적 유용(流用)을 「화두」는 어떻게 극복해내고 있는지. 더불어 그가 곱씹는 「화두」의 정점은 무엇인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문학의 위기가 운운되는 이 시점에서 역사의 주체가 '우리(개인)'이어야 한다는 거대한 화두를 제시하기도 한다.
화두를 아우르는, 말-인류 문화적 특성, 책-표현 공동체적 자아의 육화, 글-현실에서의 구체적 역사 의식
ㄴ화9두」의 화자는 세월을 거슬러 오르는 목소리로 '시간의 집적체'인 인간이 '사회적 구성체'로써 겪음직한 고뇌를 '자아'를 찾는 맥락의 '뒤돌아다보기' 구성으로 풀어헤친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삶의 방향이 지금과는 영 다른 방향으로 틀어지더라도 두 손을 놓고 있어야 하는 위기적 존재로서의 인간관이 이 땅의 암울한 현대사를 되돌아보는 중에 또렷이 부각된다. 이때 드러나는 작가의 화두가 구체적 역사의식이다. 앞이 안 보이는 삶의 질을 정하는 게임의 법칙(?)이 예측 불허인 상황에서 부조리한 현실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나'가 살아가야 하는가에 관한 모색이 그것이다.
구체적 역사 의식을 드러내기 위해 화자가 좇는 의식의 궤적은 20세기 중반, 해방 직후 이북의 항구 도시인 'W'시에서부터 들추어진다. 고등학교 때의 <자아 비판회>로부터 20세기 말 소련 해체 후의 러시아를 방문하기까지 반세기에 걸친 작가의 자전적 생애를 억압하고 틀 지운 국내외 사건들에 대한 논리적 분석으로 그 행보가 거듭난다.
최인훈의 「화두」는 토론 문화가 척박한 이 땅에서 공감대 형성의 기회를 마련하기 힘든 예민한 사안들에 관한 '공동체적 이성(理性)'과 '공동체적 감성(感性)'을 소설 장르를 통해 일구려는 시도인 것이다. 이는 공동체적 경험의 부재가 양산하는 부조리한 현실의 심화를 구체적 역사 의식으로 일구어 낫게 하려는 작가의 천착성(穿鑿性)에 바탕 한다. 그의 화두 풀기는 '나'가 외면당한 다른 대상으로부터 해결책을 구하려 함은 즉시 파멸에 이른다는 인식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나'에 내재한 후천적 획득 형질로서 문명이 선을 대고 있는 과거의 심리적 자아 동일성으로서의 대 선배 문인들과 맺었던 인연 하나 하나를 소추한다. 특히, 포석 조명희와 상허 이태준, 최서해, 임화 등에 대한 술회가 진솔하다. 이들처럼 남다르게 지정학적(地政學的) 특수성으로 인하여 삶의 자리를 바꾼 개인의 선택을 당시의 입장에서 재조명하여 역사적 법칙을 밝혀 내려는 작가의 의지가 작품 전체를 관류한다. 따라서 「화두」는 시류를 따라 사는 것이 무난한 삶을 보장받는 것이라 여겨 온, 심하면 알아서 저자세를 취하기도 마지않았던 이 땅의 수동적 풍토를 쟁기질 할 보습날이 될 만한 능동적 인간관을 제안하는 셈이다. '뒤를 돌아다보지 말라'는 무비판적 타인 지향의 획일적 습성에서 '뒤돌아다보기'의 반성적 자기 지향의 태도로 변화하기를 꾀해야 한다는 역설인 것이다.
「화두」는 생물학적 특성과 문화인류학적 특색이라는 인간의 이중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중성이라는 위험한 인간의 속성이 방치될 경우, 생물학의 발생처럼 뿌리 없는 부평초가 되어 세월을 타기 십상이다. 그래서 화자는 <마음이 벗어 놓은 허물들, 머물다간 거푸집인 이미 틀지어진 기성의 개념들을 벗어나서 마음의 생성과 변화를 거슬러 가 보려는 결의>(제2부, p22)로서 지난 삶의 질곡을 좇아 의식의 지평을 재인식하려 한다.
그 인식이란 곧 화두 껍질 깨기일진대, 그 시작이 '말'이다. 의식의 궤적인 '말'은 특히, 반항적 말은 <환경에 대한 반영론을 넘어서 환경에 의해 촉발되는 인간 정신 자체의 적극성>(제 2부, p68)이 되게 한다. 말로써 시대는 달리하나, 표현 공동체적 자아는 공유할 수 있는 통시성적 의식의 맥락 형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화두 껍질 깨기의 과정은 화자에게 표현 공동체적 자아의 육화인 '책'으로 이어진다. 그러한 책을 엮을 수 있게 하는 것은 화자의 구체적 역사의식 곧, '문화인류학적 자아로서 나로 살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체적 역사의식을 지향하는 작가인 화자에게 책읽기, 글쓰기, 治? 읽기는 동궤라 할 만 하다.
그때 국어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그 첫대목을 암송까지 하였던 「낙동강」의 주인공들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들에 대한 추방은 옳았다. 그런데 우리 가족을 추방한 사람들은 정말 <돌아온> 낙동강의 주인공들이었을까? 이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아버지에 대한 문제를 잠깐 제쳐두고, 나는 중학교 교실에서의 밤의 비판회를 늘 떠올리게 된다. 박성운과 로사는 그들이 살아 있다면, 그들이 망명에서 돌아왔다면, 그 소년단 지도원 선생처럼 되었을까? 그런 상상은 소설 속의 그들의 인상과 맞아들지 않았다. 그들은 비록 소설 속의 사람들이지만 읽는 사람의 마음을 그들 편으로 끄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문학이라는 명문의 힘이었을까? 그러나 <명문>은 <명문>이상의 존재이기도 하다.
- 제 1부, p104∼p105 -
화자의 역사의식에 대한 자각은 구체적으로 포석 조명희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포석의 「낙동강」은 일생 동안 화자의 의식에 실존적 맹아(萌芽)로 뿌려져 싹을 틔웠고, '책읽기-글쓰기-현실 읽기'의 맥락을 되새김질하는 화자의 내밀한 체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치어가 바다를 유람한 후 모천으로 회귀하는 연어의 본능같은 화자의 자아와의 대면은 먼저, W시에서 겪은 <자아 비판회>를 통해 말과 자아의 해체를 경험한 데서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등학교 국어 시간의 「낙동강」에 대한 감상문 제출이 빚은 일련의 충격으로, 그 경험은 인식의 확장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화자는 이렇듯, '책읽기와 글쓰기'로 인해 자아 존재감을 인정받고 소명감을 느끼는 실체험적 사유 과정을 거치게 된다.
전자는 경도된 이데올로기 신봉자에 의해 자아가 보전된, 글쓰기의 자유가 사회적으로는 억압받을 수 있음을 알게 한 고통스러운 현실 읽기의 사건이었다. 이후 읽게 된 「낙동강」의 박성운에 대한 호감을 지속시키지 못하게 하는, 결과적으로 박성운을 묘사한 포석의 사회주의에 대해 거리감을 두게 하는, 작가의 글쓰기가 현실 읽기의 직접적 반응은 아닐 수 있다는 대오(大悟)의 교훈을 얻게 한 체험인 것이다. 책의 현실은 현실 사회에 대한 작가의 현미경적 심안이 파헤쳐 드러낸 현실로서 동시대인 모두가 느끼는 현실감이 아닐 수 있다는, 현실 사회의 부재를 절감한 작가가 만들어 낸 현실이기 쉽다는 깨우침이다.
㈎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로사>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 폴란드 출신 유태계 여성. 독일 공산당 창설자의 한 사람. 사회민주당 계열에 의해 암살됨)를 말하는데 박성운이 <당신 성도 로가고 하니, 아주 로사라고 지읍시다. 의. 그리고 참말 로사가 되시오> 하면서 지어 준 이름이다. 러시아령 폴란드 도시 자모시치에서 태어나 독일 시민이 된 한 유태계 여자는 이렇게 조선땅 낙동강 가의 백정 집안에 태어난 한 처녀에게 옮겨 씌인 바 되고 이렇게, 바늘 끝에 여러 천명의 천사가 올라설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이름은 그 위에 여러 천 명의 다른 육체를 싣게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지만 그때 나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어떤 사람인줄 몰랐고 교사가 어떤 설명을 했는지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 역시 무슨 대수로운 일일 수 없어서 <로사>란 소리의 울림은 작품의 흐름 속에서 의당 짚어 볼 수 있는 제 값을 지니고 읽혔을 것만은 틀림없는 일이다. 수사학은 언제나 나중에 오고 슬픔이 먼저 온다. 떠나기 싫은 고향을 떠나는 사람이 있고 작가의 동정을 받아 묘사되고 있는 그들은 무슨 훌륭한 일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을 독자는 알게 된다. 나도 그런 독자의 한 사람이었다.
- 제 1부, p13∼p14 -
㈏ 그런 종류의 어느 집회에선가 나는, 남조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제국주의자들의 만행을 열거하고 국제정세를 분석하고 국내정세를 덧붙여 분석한 끝에 만일 미제국주의자들이 이 연설을 들었다면 일말의 양심(만일 미제에게도 그런 것이 있었다면) 때문에 얼굴을 붉히고, 그보다도 공포에 질려서 허겁지겁 달아날 수밖에 없을 만치 사정없이 우리들의 각오를 표시했기 때문에 흥분을 이기지 못한 군중 속에 한 학생이 불쑥 일어나서 선도하는 소리에 따라 온 군중이 미제는 <물러가라, 물러가라>고 외쳤고 교장선생은 대회의 결론에서 토론은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칭찬한 적까지 있었다.
- 제 1부, p24 -
㈐ 지도원 선생님을 흘깃 쳐다본다. 간부 친구들 뒤쪽에 앉아 있는 그의 얼굴은 위엄이 있고 차고 매섭게 보였다. 젊은 혁명 검찰관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는 선생님이기도 했고 피고가 학생이기도 했기 때문에 피고의 마음 속에서는 혼란이 일어났고, 검찰관의 틀리다고는 할 수 없는 마디마디 말들에 어린 새는 순순히 잡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국어 선생이었다. 이 학생이 공부 잘하는 학생이고 말썽꾸러기도 아니고 성격이 못된 아이도 아니라는 것을 지도원은 선생으로서 알 것이다. 그러니 그는 혁명 검찰관이기도 했다. 학교라는 사상 교육의 마당에서 혁명을 지키는 파수꾼이었다. 그는 어떤 곡절에 의했건 지금 자기 앞에 있는 학생이 바리케이트의 반대편 둥지에서 날아 온 새(비록 작은 새일 망정)라는 것을 알아낸 모양이다.
- 제 1부, p31 -
인용문 ㈎를 보자. 「낙동강」에 대한 독자로서 호감이 얼마만큼 이었는가를 술회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인용부 ㈏는 책읽기에서 경험한 현실을 사회의 실체험 현실 속에서 표출해 드러내는 사실의 부분인데, 화자는 당시 「낙동강」에 적잖이 경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에서 ㈏에로 감화.전이된다. 다시 ㈐에서 느껴지는 차이는, 그래서 진실과는 거리가 먼 논리적 타당성이 배제된 말을 강요한 자아 비판회의 사회주의자 지도원 선생님과 박성운의 사회주의자로서의 전형성(典刑性) 사이의 차이는, 현실 사회와 책의 현실이 서로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대동소이(大同小異)의 차이일 수 있다는 인식에로 이르는 과정이다. 이러한 인식은 화자가 의도적으로 추적한 포석의 망명과 처형, 그리고 구소련 해체의 원인 분석과 러시아 여행 중에 보게 된 포석의 사형 재판 문건을 훑어보는 과정에서 수시로 확인된다.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노예 국가의 풍운아였던 조명희가 당시의 소련을 노예 해방자로 인식한 현실 읽기는 비싼 값을 치른 셈이다.
반면에 후자는, 심리적 동질감을 느낀 화자의 책읽기가 글쓰기로 이어져 체화된 자아의 '말'로 드러나고, 그 '말'이 '나'로 인정받는 책읽기-글쓰기의 맥락이 현실 사회에서 용인되는 긍정적 경험을 안겨 준 계기가 된다.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감명을 주는 표현 공동체적 자아로서의 '나'를 인정받는 체험은 훗날 화자가 구체적 역사의식을 도모하는데 적잖이 작용한다. (「광장」의 '이명훈'과는 이 점에서 다르다.) 화자는 미국에서의 체류 기간 중에 겪은 선진뮌? 지닌 문화 인류학적 특성을 조국의 생물 인류학적 정치 현실과 대조하며 갈등하다가, 생물학적 생존을 도모하기 바라는 아버지의 압력을 물리치고 미국의 선진성이 안겨 준 이민감(異民感)을 극복할 수 있는 자기 자리로서 조국을 선택한다.(「광장」의 이명훈과는 다른 선택) 책 속의 현실은 책을 쓰는 작가가 만든 허구만도 아니고 단순히 책읽기의 자기 참여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닌, 역사성 및 현장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깨달음 때문이다. '나'를 몰지각한 책읽기가 올바른 현실 읽기를 불가능하게 하듯, '나'를 차치(且置)한 현실 읽기 역시 올바른 책 쓰기의 자세는 아닌 것이다. 구체적 역사의식으로 '나'의 위상을 파악해 <삶의 뭇 폐단까지 모두 방지할 놀이 규칙의 연구>(제 1부, p281)를 업으로 삼는 작가인 화자에게 지정학적 탯자리(胎--)는 올바른 현실 읽기를 위해 본래적으로 있어 왔고 필요한 것이었다.
포석의 문화인류학적 자아였을 '말' 즉, 「낙동강」에 감명 받은 소년이 세월을 겪으며 어른이 되어 작가의 작품과 삶이 지향한 나라였던 구소련의 해체를 지켜보고 논리적 분석을 행하기까지, 그리고 구소련 해체 후의 러시아를 여행하면서 의식의 산란을 일깨운 선배 작가의 재판 문건을 읽어버리기까지는 결코 짧지 않은 반세기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화자가 여기서 얻은 깨달음은 지구촌이라는 인간 집단을 개화, 발전시키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대의 갈등을 당대민들이 구체적 역사의식으로 풀어내지 못하면 그 갈등은 대물림의 증식 과정을 거듭하여 후대민들의 삶은 문화 인류학적 삶을 잉태할 아무런 토양도 갖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외세의 압력과 권력자의 야욕이라는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조국의 정치 현실과 약육강식의 국제적 먹이 사슬의 패권 다툼 정황을 암흑으로 여기는 화자에게, 문명 사회인 지구촌의 당면 과제는 문화인류학적 특성인 이성으로 풀어 나가야 할 성격으로 규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성이 가능하도록 하는 힘의 근원은 <뒤돌아보기>방법을 통한 나의 정체성을 역사 진행과정에 확립하는 데 있다. 그 뒤돌아봄이 그의 <신, 아니면 공동체의 규범, 또 좀 내려오면 역사의 법칙, 이성의 방식>(제 2부, p529) 등의 것으로 풀이할 수 있기에 그렇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 토대 위에 서있는 '나'이어야 하고 '우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왼편 그림(그림 생략)처럼 나와 너의 상호 작용이 우리(민족.인류)라는 동질감을 형성하고, 또 다시 우리는 공동의 역사를 경영하기 위한 바른 의식을 축적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중은 보편적이지만 결코 실천하기 쉬운 것이 아닌 능동적 역사 발전의 틀을 찾아내야 한다.
뒤돌아보지 않으면 정확한 자기 위상으로서의 구체적 역사 의식을 갖추기 어렵다. 그렇게 된다면, 이성적 말의 통용이 방해되는 문명 사회에서는 당대인의 구체적인 역사의식이 일구어지지 못하는 까닭에 화자의 다음과 같은 독백은 후대인에게 아련한 메아리로만 남을지 모른다.
나의 사(私)적인, 마음속의 재판과 축복의 의식을 20세기의 지구 규모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의 드라마 미니어처라는 형식으로 작가로서, 의식하는 생활의 영위자로서의, 나 자신의 생애의 상징이라고 파악하게 되는 나를 발견한다.
- 제 2부, p87 -
변증 논리적 구성
「화두」는 화자의 구체적 역사 의식을 일구는데 필요한 과거와 현재의 시공을 달려, 한 사건들이 의식의 맥락을 좇아 들춰지고 분석되는 변증 논리적 구성으로 전개되고 있다.
맥락에 따른 다수의 역사적 사건 또는 경험담에 화자의 논리적 분석과 주장을 풀어내는 노력이 반복 전개되면서, 화자의 구체적 역사의식과 시간의 현재성이 명확.농후해지는 점진적 구성이다. 이러한 구성은 작가로서의 화자가 책읽기-글쓰기-현실 읽기를 동궤에 두기까지의 앞뒤 사정을, 자전적 체험을 틀 짓는 반세기에 걸친 한반도의 현대사와 국제적 사건들로 예증한다는 작가 경험의 복합 구성을 꾀한 의도이기도 하다. 아울러 역사적 현상에 휩쓸리는 개인의 삶자리에 대해 통찰할 기회를 마련함으로써, 독자의 책읽기를 '사회적 구성체'로서의 인간이 지향해야 할 공동체적 이성과 공동체적 감성을 일구는 행위로 이끌려는 작가의 의도와 만나도록 기능한다.
낙동강 칠백 리, 길이길이 흐르는 물은 이곳에 이르러 곁가지 강물을 한 몸에 뭉쳐서 바다로 나간다. 강을 따라 바둑판같은 들이 바다를 향하여 아득하게 열려 있고 그 넓은 들 품안에는 무덤무덤의 마을이 여기저기 안겨 있다. 이 강과 이 들과 거기에 사는 인간―강은 길이길이 흘렀으며 인간도 길이길이 살아왔었다. 이 강과 이 인간, 지금 그는 서로 떨어지지 않으면 아니 될 건가?
―이렇게 시작되는 포석(抱石) 조명희(趙明熙)의 「낙동강」을 아직도 갈 수 없는 곳 북한의 항구도시 W시의 고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창밖의 큰 오동나무 그림자가 어룽지는 국어 교과서의 책장 위에서 배우던 일이 어느덧 40년도 넘는 한 고비 옛일이 되었다.
- 제 1부, p9∼p10 -
국어 시간의 「낙동강」을 회상하는 첫 장면은 화자의 가족이 기반 잡힌 생활을 뒤로하고 고향을 떠나야 했던, 해방 후의 이북 사정을 재조명한다. 이는 현실 읽기와 무관하게 책읽기에 열중했던, 그래서 자각은 못했지만 <책-도서관-우주선-지구 기지-아기집(胎)>(제 1부, p45)이었던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서, 자아 비판회 및 감상문 사건이 화자에게 각인될만한 것이었음을 뒷받침한다.
즉, 세월의 격류가 개인의 생활양식 및 정서를 집단의 한 구성원이 되는 쪽으로만 몰아가던 당시 정황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도모하면서, 의문 없이 '말'의 세계에 빠져 있던 화자가 '말'을 화두 삼아야 했음으로써 겪은 화자의 충격과 환희의 파장을 적나라히 독자에게 옮겨 놓은 것이다. 계속되는 다음의 술회는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는 부분이다.
「낙동강」을 생각할 때마다 부스럭거리는 오동나무 잎새 소리와 책장에 어룽지던 나무 그림자가 꼭 끼어드는 것은, 거기가 W시 이외의 다른 곳도 아니고, W고등학교 1학년 교실 아닌 어떤 다른 장소도 아닌 그 자리에서 읽은 「낙동강」이라는 뜻일 테고 그래서 그때 그 자리의 나와 그리고 거기다 「낙동강」을 합친 어떤 사건이 <나의 낙동강>이다
- 제 1부, p10 -
여기서 「낙동강」이 암시하는 화자의 모순된 세계 경험 즉, 자아 해체와 자아 확인은 화자의 의식에 수시로 나타나 화자 의식의 맥락을 규정지음으로써, 「화두」에 대한 독자의 책읽기 정서와 심미적 거리를 유도하고 좁혀 준다. 가히 최면적(?) 수완이다. 이렇게 「낙동강」을 뒤돌아다보는 구성은 멋모르고 겪은 세월이 개인에게 미치는 파장이 지대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데 자연스럽다. 또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서 의연한 모습으로 세월의 격랑을 헤쳐나가는 연락선의 키를 잡으려는 작가의 의지를 강하게 보여준다. 그러할 때 독자는 작가의 믿음을 의심치 않아 연락선의 부둣가에 줄을 서 울리올 기적소리에 귓바퀴를 모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같은 배를 타고 항해하더라도 두려운바 없을 테다.
큰아우 집에서 아버님을 내려드리고 작은 계수와 조카를 태우고 우리는 작은 아우가 사는 메릴랜드로 향했다. 문을 닫은 길옆 가게들의 크게 낸 유리문 안에 저마다 다른 가게의 물건들이 모두 마네킹처럼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런 거리 풍경들을 10여 년 전에 보았을 때의 느낌들이 아직도 그것들을 보는 나의 감각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 감각이란 H라는 도시의 정거장, 학교, 천주교회 건물, 우편국, 그런 다음에 월남해서 본 부산, M시, 그리고 부서진 서울의 좀더 큰 우편국, 좀더 큰 교회, 좀더 큰 백화점과 미군 깡통과 상자로 지은 집들이 한데 뒤섞인 속에서도 여전히 그것들의 주된 선을 이루고 있는 <서양>이란 것의 순수형태였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크리스마스 카드에 있는 집>들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셀 수 없이 읽어 온 서양 이야기책의 주인공들이 사는 집이고 거리일 텐데 처음 보는 실물들은 그렇게 남스러울 수가 없었다.
- 제 1부, p95 -
미국 체류 중에 맞닥뜨린 사람들, 낮선 거리 풍경들에 대한 인상과 견주어 최근의 국내 정치 상황을 비판한 구성은 지정학적.국지적 조건에 따라 지구촌내 인간의 문화인류학적 특성이 차이날 수 있음을 분석.예증한 것이다. 인류를 하나의 공룡으로, 환경에 따라 양상을 달리하는 각 나라의 문화를 공룡의 몸부위로, 그리고 개인을 하나의 비늘로 비유한 본 텍스트의 서문을 떠올리게 하는 토로이다. <그 사회적 현상이 잘못된 것이 이미 충분히 관찰된 다음에는, 그 잘못의 근본 원인 그 사회의 근본 규범에 대한 논리적 규명 자체를 작품 속에 포함시키는 것이 구체적 제시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고 생각>(제 2부, p473)해 온 작가관의 우러나온 실천인 셈이다. 이러한 현실 비판 태도는 왜곡되거나 통제된 과거 역사를 재평가하기 위한 화자의 문학사 의식으로 이어진다. 험한 세월을 겪은 화자가 <한 많은 식민지 지식인의 지적인 호기심의 계승자라는 것이 현재로서는 내가 그것에다 자기를 일치시키는 데 가장 자연스러움을 느끼는 심리적 자기 동일성>(제 2부, p 206)을 갖게 됨을 보인다. 구체적 역사의식이 부족했던 선배 소설가 상허를 이해하는 면모에까지 다다른다. 아울러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교훈으로 삼는다. 계속해서 화자는 현실 인식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한 개인에게는 자기가 사는 시대라는 환경은 절대적이다. 우리가 과거의 사람들을 판단할 때의 함정은 우리에게는 이미 파악된 지난날의 환경 속에 자기를 놓는 일이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옛사람들보다 현명한 사람들이 된다, 이것은 야바위다. 그들은 캄캄한 밤 속에서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어둠 속을 가고 있는 중이다. 지평선은 보여도 한 치 앞은 보이지 않는 것이 역사다. 그래서 별자리가 제일 잘 보인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 바른 대응 관계를 찾자면, 우리 환경에 대한 우리 태도를 객관화시키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럴 때 대수적(代數的) 거울로서 옛사람-옛시대는 도움이 된다.
- 제 2부, p60 -
이는 인간 정신 자체의 적극성을 지향하는 화자의 문학론이자, 정보의 개방이 자유롭지 못한 사회는 <범죄가 어느덧 인생 애환과 영고성쇠로 둔갑>(제 2부, p73)하는 사회적 인격을 양생한다는 현실의 냉엄한 살 자세로부터 오는 인식인 것이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별을 잊게 하는 그런 종류의 인물인 장개석, 프랑코, 모택동>(제 2부, p145) 등의 세계사적 인물과 독일 통합과 구소련 해체 등의 세계사적 사건에 대한 논리적 재조명. 그리고 한.미 관계 등의 강대국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적 먹이사슬에 대한 통찰 등등. 좁게는 '나'의 위상에서부터 넓게는 세계에 대한 전망에 이르는 작가 의식의 지평을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러시아 여행 중에 입수한 포석의 재판 문건을 검토하고 남다른 생의 궤적을 보여준 조명희의 '나'로 살기의 선택에 동의하는 「화두」의 마지막 장면은, 「화두」의 구체적 역사의식을 담은 메시지이자 작가 정신의 육화(肉化)랄 수 있겠다.
나 자신의 주인일 수 있을 때 써 둬야지. 아니, 주인이 되기 위해 써야 한다. 기억의 밀림 속에 옳은 맥락을 찾아내어 그 맥락이 기억들 사이에 옳은 연대를 만들어 내게 함으로써만 나는 나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겠다. 그 맥락, 그것이 나다. 주인이 된 나다. 그래야 두 분 선생님을 옳게 만날 수 있다. 다음 소집이 오기 전에. 다시는 지워지지 않게. 쓸 수 있을 때.
- 제 2부, p542∼543 -
포석 조명희의 「낙동강」으로 시작해서 조명희의 재판 문건으로 끝나는, 변증법적 점진 구성은 부조리한 세계에 대응하는 작가의 태도를 보여주면서 완결된다.
자성(自省)적 자성(磁性)의 문체
「화두」의 구성이 작가의 주.객관성의 역사의식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화두」의 문체 역시 그러할 것이다. '역사적 사건 또는 경험담-논리적 분석과 주장'의 반복적 엮음 구성은 공동체적 감성을 유발하여 공동체적 이성을 일구려는 방법적 구성의 내연이다. 그에 따른 외연으로 이처럼 무겁고도 가벼운, 가볍고도 알찬 내용을 치켜올리는 지렛대 역할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문체다. 부끄러운 치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보여주듯, 용기와 신념을 가지고 드러낼 수 있는 작가의 세계 전망일수록, 하고픈 말을 하면서도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표현력이 요구된다. 이때 개인적 전망에 불과한 작가의 의도가 독자의 공감을 얻어내는 횡적 확산을 이루게 된다. 이는 문학예술이 갖는 부분의 미학으로 독자의 의미 세계에 호소할 수 있는 형식미가 요구되는 까닭이다. 그것은 『화두』에서 보인 자성(自省)적인 자성(磁性)의 문체다. 문체는 피상적인 수준에서의 형식의 문제가 아니며 소재와 대상에 접근해 가고 그것을 포착하는 방법과 관련된다. 이런 전제 하에 문체적 노력이나 탐구가 없다는 것은 독자적 관점이나 시각이 없다는 것이고 그 귀착점은 상투적이요 타성적인 형식 보고와 동어반복을 일삼는 활자의 재생산에 불과하다. 인쇄술이 자유로워진 우리 주변에서 그의 예를 들기란 아이들이 구멍가게에 들러 군것질하는 만큼이나 쉽다. 그러한 문학은 최소한의 성실한 르포타쥬가 갖는 현실 사회 저변 근접의 진실성마저 오도(誤導)할 우려가 크다.
이 점에서 「화두」는 종결 어미가 생략된 문장으로 맥락의 흐름을 좇는 화자의 독백을 자연스레 독자에게 전이되도록 할 뿐만 아니라 논리의 관념성이나 회고의 정체성을 극복해 내고 있다.
다음과 같은 문학적 상상력이 꿈틀대는 장면 묘사는 좋은 본보기다.
그리고 그 구도 속에는 세탁차가 호스를 드리우고 있던 냇물이 있고, 우리나라의 어느 냇가에나 풍성한 보물처럼 깔려 있는 여러 종류의 새알처럼 탐스러운 그 둥글둥글한 자갈밭이 그러다가는 여름 햇빛의 열기 때문에 그 속에서 무엇인가가 부화되어 나오지 않을까 싶게 따뜻하게 깔려 있다.
- 제 2부, p234∼p235 -
에르미따즈 미술관으로 가는 버스에서 내다보는 비에 젖은 쌍끄뜨 뻬쩨르부르끄는 모스끄바보다 우리의 눈에는 더 고전적으로 보였다. 비에 젖은 때문인지 도시는 깨끗해 보였다. 아마 사실 그렇기도 하려니와 모스끄바에서처럼 공장지대를 지나는 데도 원인이 있을 것 같다. 온 시내가 서울 덕수궁의 석조전 같은 건물로 되어 있는 거리르 지나서 폰딴까라는 운하르 건너 도착한 에르미따즈 미술관은 네바 강변에 있는 초록색 벽에 아치 모양의 백색 창틀의 창문이 아름다운 3층 건물이었다.
- 제 2부, p419 -
작가 스스로 견지하고 있듯, 문체는 <이 현실에 대해서 사실주의적으로 그려낸다는 것은 사실감으로의 도피이기 쉽고 밤을 흰 물감으로 묘사하려는 태도처럼>(제 2부, p340) 면벽 수양의 지난함을 독자에게 부담으로 주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주의를 거부하는 것이 예술가로서는 이 세계에 대한 육체적 저항에 맞먹는 본질적 저항>(제 2부, p340)을 느끼는 작가답게 주관의 색채를 가미하여 또한 경박한 보고의 태도를 탈피하고 있다.
무심코 보아 넘겨버릴 여름 냇가 풍경이 미세한 관찰자의 감식안(鑑識眼)을 거쳐 나와 꿈틀대듯 재현상됨으로써 작가의 것만이 아닌, 화자의 오감(五感)에 따른 행간의 율동으로 독자의 가슴에 울림 좋은 메타포로 자리잡기에 충분하다. 다반사라 여겨 일상으로 제쳐 둔 삶의 풍경에 새삼 눈 돌리게 하는 자성(磁性)의 문체가 [화두]의 또 다른 완성미로 곁들어 있어 독자를 붙들어맨다. 이러한 문체적 특성은 화자의 경험을 개인의 경험에서 독자의 공감을 획득한 공동체적 경험으로 탈바꿈시킨다. 그래서 현실 세계에 관한 화자의 논리적 분석과 주장은 주관적 궤변이나 독단으로 몰리지 않는다. 또 흔히 빠지기 쉬운 자성(自省)의 우려인 감상 일변도로 치달리지 않고 독자⇔작가의 상호 교환.공유 가능한 의미 세계에 관여할 수 있는 주.객관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논리적 사고가 결핍된 채 획일의 돗수에 초점 맞춘 안경을 끼고 일상(日常)을 사는 우리에게, 「화두」는 공동체적 감성을 자극하여 돋구는 잔잔한, 때로는 우람한 사유의 망을 애두르는 화자의 목젖으로 공동체적 이성을 지향하는 논지를 제시한다. 얼마간 낯설면서도 다시 얼마간 살갗스런 느낌은 여기에 있을 테다.
따라서 보편적이지만 결코 쉬 잊혀지지 않는 자성적 자성의 문체에 잘 녹아들어 있는, 역사 앞에 '나'로 살기 위한 「화두」의 '뒤돌아다보기' 구성은 독자의 의미 세계에 파고들어 선진성의 문화 인류적 삶을 엮을 수 있는 이성의 방식을 증진한다.
인류 공동적 삶을 지향하는 '나'로 살기
개인의 존엄성과 개인의 삶이 집단을 앞세운 논리에 의해 무시되거나 파괴되는 사회란, 인간적인 사회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화두」는 자전적 소설이요, 고뇌하는 지식인의 성찰 기록이다. 자전적 소설이라 함은 '(역사 앞에)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작가의 뼈를 깎는 듯한 '사유의 깊이'가 작가의 전생애에서 느껴진다는 점 때문이다. 또 지식인의 기록이라 함은 화자의 흔들림 없는 진술이 작가의 글쓰기에 가까운 '사유 전위(前衛)'를 독자로부터 요구한다는 맥락에서이다. 「화두」가 화자의 삶자리 모델을 작가 스스로의 전력(煎歷)에서 빌어온, 그것은 작품의 소재나 작가의 상상력이 빈곤해서가 아님을 말할 필요는 없겠다.
문학자의 경우에 이 고유한 역사 의식이란 것은 문학사 의식이다. 우리나라 문학이라는 표현물의 흐름을 연속된 사물로 의식하고, 자기 자신을 그 표현 공동체의 살아있는 인격화로 생각하는 자기파악의 위상이, 작가의 구체적 역사 의식으로서의 문학사 의식이다. 그래서 선행하는 문학작품이라는 표현물과 그 작품의 표현격인 문학자는 후속하는 작가에게는 자기를 들여다보는 거울이 된다.
- 제 2부, p48 -
위 인용문의 <거울>은 평면적인 것이라기 보다 입체적인 것으로 보인다. <작가에게 자기를 들여다 보는 거울이란> '나'의 또 다른 존재인 '나'를 창조하여 되비춰오는 실상(實像)을 제대로 관찰, 파악하여 보다 나은 '나'로 살게 하려는 작가 정신의 다름 아니기에 그렇다. 이렇듯, 「화두」서문부터 대단원의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일관되게 연락선의 뱃머리에 쏟아지는 밝은 빛살 아래 번뜩이는 것은 '외압의 파장에서 자유롭지 않은 현실 세계의 삶자리를 더 이상 인견(忍見)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의지 표명이었음이 틀림없을 테다.
현대 사회 및 현대인의 희로애락을 관장하는 것처럼 자본이 추앙(推仰)되고, 그것의 삿된 몸놀림에 놀아나 행.불행이라 서슴없이 말하고 사는 요즈음의 우리에게 「화두」에 담긴 내용은 그대로 일갈(一喝)이다.
「화두」의 '뒤돌아보기'식 변증적 구성과 인류 공동적 삶을 지향하는 '나'로 살기의 주장은 세기말의 불운한 징후가 곳곳에 도사리는 작금에 가장 적절한, 끊이지 않고 면벽의 정점에서 푸른 불꽃으로 타오르는 화두임에 틀림없으리라. 결코 젊지 않은 나이에, 문학사에 업을 쌓아 온 작가답게, 근본적인 현실 문제와 더불어 문제 해결 방안까지 밀도 있게 보여준 작가 겸 화자였던 최인훈. 그리고 그의 「화두」. 이는 아주 오래되었지만 은은한 선조의 얼과 늠름한 내일의 우리와 솔직한 나의 자태를 총체적으로 되비춰오는 거울, 수세기를 살아낸 인류의 박물관에서 빛 잃지 않는 거울이라 해도 좋겠다.
[원고분량=200×88]
※본 원고는 석사 논문집에 수록된 문학평론 가운데 하나임